미륵사지석탑에서 무왕과 선화공주의 전설을 뒤엎는 명문이 담긴 사리기가 발견된 지 1년 반이 흘렀다. 최근에는 사리함 가운데 함께 봉안됐던 청동합 속에서 4000여개의 유리구슬과 진주 등의 보석류가 쏟아지면서 미륵사지석탑은 또 한 번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지난 1년여간 고대사학계, 고고학계는 거의 ‘미륵사의 시대’라 할 정도로 수많은 백제불교 관련 논문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백제 불교문화의 종합선물세트라고 칭할 만큼 다양하고 화려한 사료들이 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왔으니, 그동안 사료의 부족으로 허덕여왔던 백제사 연구자들에게는 긴 가뭄의 단비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미륵사지 석탑에서 사리기가 발견된 후 활발하게 진행돼온 미륵사지 관련 연구성과를 검토하고 미륵사지 보수정비계획을 검토하는 학술심포지엄을 5월 27일부터 28일까지 이틀간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개최했다.
‘백제 불교문화의 보고 미륵사’라는 타이틀로 진행된 이번 심포지엄에는 50여명의 국내외 학자들이 참가해 미륵사지 석탑의 학술적 의미를 논의했다. 이 심포지엄에서는 미륵사지석탑뿐만 아니라 7세기 백제에서 미륵사가 조성된 배경, 미륵사지 석탑을 통해본 백제의 불교미술, 향후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정비계획, 미륵사를 통해 본 동아시아 건축 등 미륵사를 둘러싼 7세기 동아시아 문화 전반을 조명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끌었던 주제는 심포지엄이 열리기 바로 전날 언론에 공개된 미륵사지석탑에서 나온 청동합의 내용물에 관한 발표였다.
|
|
|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청동합의 유리구슬과 보석류. |
“미륵사는 백제 불교미술의 최고 정점”
미륵사서석탑 사리차림의 공양 청동합 살핌을 발표한 강순형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은 청동합에 담긴 유물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번에 공개된 청동합은 총 6점으로, 각 합에는 달솔과 같은 백제의 관직명들이 적혀있었다.
또한 백제 8대 귀족 성씨의 하나인 목씨의 이름도 보여 왕실 측근인 사씨와 더불어 미륵사 서탑을 세우는 시주자로 목씨도 참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강 실장은 설명했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합인 놋원합에는 11종 4600여점의 구슬이 담겨져 있었다. 여기에는 천연진주만도 638알, 금구슬도 무려 355알이 포함돼 있었다. 또 다른 합에는 마노와 호박구슬이 담겨있었고, 금꽃구슬, 금고리와 같은 장신구들이 담긴 합도 있었다.
강순형 실장은 “진주뿐만 아니라 금과 유리구슬들은 모두 뚫린 구멍이 많이 닳아 있었는데, 이는 귀족 여인들이 목걸이나 팔찌로 오랫동안 지녔던 것을 너도나도 기쁜 마음으로 아낌없이 보시하였음을 의미한다”며 “이는 (백제여인들의) 최고의 공덕이 되는 자비희사의 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강 실장은 또 “사비시대에 이르면 불교문화는 무르익어 이때가 되면 미술도 무덤용을 넘어서 왕실 공방에서 불상․불구와 사리기와 같은 사찰용 성보작품이 제작되었다”며 “무왕 때에 미륵사에 이르러 그 최고의 정점이자 끝점으로 자리매김했음을 (청동합을 비롯한 유물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백제 위용-전륜성왕의 기념비, 미륵사탑”
‘무왕과 미륵사-익산의 역사지리적 환경과 관련하여’를 발표한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미륵사는 찬란히 솟은 백제의 위용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윤 교수는 “백제사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백제가 수십년뒤 멸망했다는 이유로) 무왕을 미약한 존재로 묘사하려는 의식이 깊이 깔려있고, 더욱이 무왕 초기뿐만 아니라 웅진 천도 이래 멸망 때까지 백제 왕권 전체에 드리워져 있는 슬픈 그림자로 인식하는데, 이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윤 교수는 “국가존립에 대한 위기의식은 오히려 당시의 백제보다 신라에 팽배해 있었다. 무왕 대에는 군사력에서 신라를 앞도했고, 의자왕은 신라 도성인 대양성을 함락해 경주 코앞에까지 진출했다”며 “또한 신라인들이 기념비로 표상하고 있는 황룡사 9층탑 이전에 이미 백제 미륵사에 9층탑이 존재했고, 더욱이 황룡사탑은 백제 장인 아비지의 기술적 후원하에 완공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윤 교수는 “교통로상에서 볼 때 신라나 왜의 사절은 익산지역을 통과하여 사비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미륵사 9층탑을 중심으로 하는 익산의 통해 찬란히 솟은 백제의 위용을 새삼 느꼈을 것이고, 더욱이 사비로 개선하던 백제의 병사들에게도 백제의 화려한 재기를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주는 장치였다”며 “이러한 익산경영을 토대로 무왕대의 진주 남강지역 진출에 이은 의자왕의 대야성 함락이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윤 교수는 또 “무왕이 3탑 3원의 미륵사로 완공한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윤 교수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미륵사 3탑 3원은 미륵의 삼회설법을 형상화한 것으로, 이는 익산을 미륵이 도래할 곳으로 준비하였음을 말해준다”며 “미륵의 도래는 말법의 혼란을 극복하는 전륜성왕의 찬란한 치세가 전제돼야 가능하기 때문에, 무왕에 의한 미륵사의 건립은 자기 당대를 전륜성왕의 치세로 자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7세기경 삼론학과 미륵신앙 결합”
‘백제 후기 불교교학의 변천과 미륵사상의 성격’을 발표한 최연식 목포대 교수는 백제의 미륵신앙을 중국에서 수입한 지론학, 섭론학, 삼론학과 결부시켜 설명한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최 교수는 “백제의 미륵신앙은 불교 수용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특히 570년경에 강렬한 미륵신앙을 가지고 있던 혜사의 미륵신앙이 수용되면서 더욱 활발해졌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후 7세기 삼론학이 수용되면서 미륵신앙을 삼론학의 입장에서 철학적으로 이해하려는 흐름이 나타났고 이러한 흐름은 삼론학과 미륵신앙의 결합이라는 백제의 독특한 미륵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또 “백제의 미륵사상은 무왕대에 이르러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백제불교를 대표하는 흐름으로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모습이 혜사의 금자반야경을 모델로 한 금속제 금강반야경의 제작과 미륵사의 창건”이라고 설명했다.
“6층으로 복원하되, 부분일지 대칭일지 선택해야”
미륵사지석탑 해체조사경과 및 보수정비계획을 발표한 김현용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원은 지난 2002년부터 진행돼온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조사가 지난 8년간 어떻게 진행돼 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보수해갈 것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동안 미륵사지석탑의 보수정비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해왔다. 사리기가 발견되기 전까지 상당수의 학자들은 부분적으로만 복원하고 보존하자는 안을 주장했고, 해체전 형태로 복원하자는 이들도 있었다. 일부 학자들만이 과거 백제시대의 모습 그대로 9층 완전복원을 주장했다.
상당수 학자들이 부분적으로만 복원하자고 주장했던 이유는 미륵사지 석탑 내부가 거의 붕괴에 가까울 정도로 무너져 내려앉았기 때문에 자칫 복원이 미흡할 경우 석탑의 원형을 영원히 잃어버릴 수 있고, 석자재들도 상당히 유실되었으므로, 차라리 후대에 보다 발달된 기술로 복원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날 김현용 연구원은 6층 부분복원안과 6층 대칭복원안 등 두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6층 부분복원안은 우리에게 각인돼있는 미륵사지석탑의 모습 즉 일부는 석탑의 형태로 남아있고, 한쪽은 허물어진 형태의 석탑으로 다시 복원하자는 안이다. 이에 비해 6층 대칭복원안은 예전에 콩크리트로 발려졌던 부분을 새로운 자재를 써서 복원해 안정된 모습으로 재구성하자는 안이다.
김 연구원은 “현재 서탑에서는 6층 이상 층위의 부재로 볼 수 있는 부재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9층까지 복원하는 것은 대부분 추론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며 “만약 이 상태에서 9층복원을 한다면 여러 구조적인 문제점을 야기함과 동시에 문화재 보수복원 원칙에도 반하는 것이므로 당위성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원은 “어느 정도 원형이 가능한 2층까지는 대칭으로 복원하고 멸실된 부분은 석축부재를 활용하여 과거 콘크리트로 발라져있던 경사면과 안전을 고려해 6층까지만 부분적으로 복원하는 방안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김 연구원은 “이같은 6층 부분복원안으로 진행하게 되면 신재료의 사용이 최소화될 것으로 예상되며 석축부재를 재활용함으로써 석추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또한 기존 이미지를 반영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에 대한 거부감을 상쇄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불균형한 형태이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안정감이 떨어지고 상층부의 방수처리가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원은 이같은 단점을 보완한 6층 대칭복원안을 함께 제안했다. 6층 대칭복원안은 원래 남아있던 6층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전체를 대칭으로 복원하는 방안이다. 김 연구원은 “기존 부재와 입면을 근거로 신재를 제작하여 보충하되 3층 이상의 부재는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해 복원돼야 한다”며 “이 안은 부분복원안에 비해 구조적, 시각적으로 안정성이 높으며 보다 완성된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새로운 부재의 비율이 50% 이상이 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재료적 이질감이 강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미륵사지는 여전히 학계의 뜨거운 감자이며, 지금도 우리에게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또한 향후 수년간 전문가, 학계, 시민단체들이 깊이 고민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백제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상징하는 미륵사지석탑이 어떤 모습으로 재구성될 것인지, 그 고민의 깊이가 깊을수록 더욱 아름다운 결실이 맺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미디어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