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미주불교현황

[2021년 7,8월호] 미국 내 반 아시아 인종주의 현상의 극복에 대한 고찰 / 원영상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1.07.25|조회수181 목록 댓글 0

< 특별 소개 >

 

 

 

 

미국 내 반 아시아 인종주의 현상의 극복에 대한 고찰

 

 

 

글 | 송광섭 (조계종 국제 포교사)

 

 

3월 25일 조오지아에서 한인을 주축으로 범아시안 혐오범죄 중단을 요구하는 촛불 집회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애틀랜타 전등사 마야스님과 수인스님이 참석했다

 

 

개    요

2020년 초 전 세계에 중증급성 호흡기 증후군 코로나바이러스 SARS-CoV-2로 인한 COVID-19가 발생하면서 지난 몇 년간 트럼프 행정부에서 이미 문제가 된 미국에서의 반 아시아 인종주의가 악화되고 있다.  COVID-19로 인한 사망 확산을 늦추는 데 유용한 생활 습관인 사회적 거리 두기는 사람들의 사회활동과 사회적 교류를 근원적으로 차단하여 지배적인 인종 집단과 그렇지 않은 비주류 인종 집단 간의 오해를 심화시켜 왔다. 집에 머물기(Stay-at-Home) 명령에 따라 더 많은 사람이 사회화(Socialization)를 하고 숨통을 틔우기(Venting) 위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개인과 연결돼 있으려고 소셜 미디어(SNS)에 접속하는 시간을 비약적을 확대시켜 가졌다.  소셜 미디어(SNS)에서의 사소한 부정과 혐오 발언은 실제 생활에서는 악의적으로 증폭되어 마침내 폭력 행위도 발생하게 되었다.
 2020년 3월 20일부터 10월 28일까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서 만 245건의 증오범죄가 미국 내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COVID-19 관련 증오사건의 주요 집계 기관인 아시아 태평양 계획 및 정책위원회(Asian Pacific Planning and Policy Council)에 보고되었다.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사건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한 이래 지난 1년간 급격히 증가했다.  증오 사건을 추적하는 단체인 Stop AAPI Hate에 따르면, 2019년도에는 약 100건에 불과하였으나, 코로나19가 시작한 2020년 3월 이후 전국에서 약 3,800건의 아시아계 증오 사건이 발생했다. 올해 2021년에는 첫 두 달 동안에만 987건의 아시아계 증오범죄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전역에서 아시아 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 행위가 자행되었으며, 2021년 2월에는 아틀란타 몰에서 극단주의자의 총격으로 아시아계 여성이 피해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우리들 인간 사회는 생존과 자손 번성과 재화를 얻고 사회 발전을 위한 갈등과 투쟁이 이루어 지는 역사를 경험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탐욕과 파괴적 욕망과 행동을 조절하여 평화롭고 안전한 사회생활을 위하여 법치와 공권력을 엄격하게 확립하여 제도적인 사회 생활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생사의 위험, 공포의 상황이나 극단적인 증오심의 발현으로 예기치 않는 폭력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작금의 비정상적인 사회적 폭력 현상에 대한 배경, 원인과 미국 사회의 역사적 사실을 고찰하여서, 현 상황에 대한 인식의 시야를 넓히고 폭넓은 이해를 통하여 현 상황에 대한 개선 방향을 알아본다. COVID-19 질병은 사람을 차별 하지 않지만 인종 차별은 사회 전체적으로 과도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COVID-19 팬데믹 이후 열변이나 혹평을 내놓기보다는 반 아시아 인종차별주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인종차별주의 역사를 보다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우리들 자신이 현 상황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대역폭을 확장시키는 것이 요구된다. 

 

 


미국에서의 인종차별 역사

현재 나타나는 인종차별주의에 의한 사악한 감정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의 인종 차별에 대한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19세기 중국인 이민자들과 철도 노동자들이 처음 미국에 도착한 이래 반 아시아 인종 차별주의가 오랜 법과 제도적 역사 속에 존재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형태의 황화 개념으로 위협성 표현의 형식을 띠게 되었으며, 이후 상당수가 미국 내 동아시아 후손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났다. 아시안계의 미국 이민역사는 1800년대 초 부터 서부에 철도가 놓이고, 골드 러쉬가 유행하면서, 다수의 중국인들이 서부로 이민을 가면서 시작이 된다.  중국 본토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너무 어려워진 탓에 중국인의 미국 내 유입은 급격히 늘어나게 된다. 심지어 미국 캘리포니아 노동력의 20%를 차지하면서 아시안들에 대한 경계가 심해졌다. 일자리를 뺏긴다는 이유로 아시안들의 시내 경계선 안 거주 금지, 백인들과 결혼금지 등 급기야 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 1882)을 제정해,  60년간 시민권 발급을 금하고 이민을 제한하였다.  당시는 백인이 미국에서 지배적인 인종 규범이었던 때이고, 그 시기는 미국의 앵글로-색슨 기반이 다른 동화 가능한 유럽 이민자 민족들과 합쳐진(Anglo-Saxon foundation coalesced with other ‘assimilable’ European immigrant ethnicities)시기이기도 하다. 
미국 역사 속엔 오랜 세월 동안 반아시아적 인종차별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 1871년 연방법원은 중국계 미국 인들과 중국계 이주민들이 백인 시민들을 상대로 불리한 증언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고, 샌프란시스코에 천연두가 발병했을 때 아시아인들은 부당한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1900년 하와이에서 페스트가 발병했을 때 호놀룰루 보건국은 차이나타운에 여러 차례의 방화를 하였으며, 1942년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120,000명 이상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정당한 절차 없이 강제 수용소에 주거 제한을 당하였다. LA 차이나타운에서는 최소 17명의 중국 이주민들이 대규모의 백인들의 폭력으로 숨졌다.  1933년 캘리포니아 주법은 필리핀인과 백인 사이의 결혼을 금지 시켰으며, 1979년 Ku Klux Klan은 텍사스주 시드리프트시에 있는 베트남 난민 어촌에 불을 질렀다. 1982년 중국계 미국인 빈센트 친 씨는 크라이슬러 공장에서 해고 된 두 명의 백인에게 몽둥이로 1992 맞아 숨졌다. 1991년 8월 아리조나 피닉스 Wat Promkunaram에서 9명이 피살됨(6명의 스님, 1명 비구니, 행자 1명, 청년 한 명.) 아리조나에서 지난 25년 간 최악의 범죄사건으로 기록됐던 메트로 피닉스 불교사찰 살인사건의 범인이 지난 주 금요일 249년형을 선고 받았다.  L.A. 폭동 때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바람에 한인타운 곳곳에 방화 및 약탈로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2020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를 쿵푸 독감 및 중국 바이러스 라고 명명한 바 있다. 
미국내의 본격적인 대규모 아시안 이민의 역사는 1960년대부터 라고 보면 된다. 약 60년이란 짧은 시간이다. 60년대 이후 아시안들은 주로 히스패닉처럼 저렴한 육체 노동자란 일반화 과정을 걷는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정의가 아니라 이념 문제로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종종 정의가 피부색을 구분하는 것이다. 전염병이 유행할 때마다 인종 혐오가 나타나는 건 대표적인 경우다.  중국계 이민자들은 미국의 서비스에서 다루기 쉽고, 바람직한 타인이면서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높은 위협의 주체 집단이었다. 미국 사회의 반 아시안 정서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 서로 다른 분야에서 나타났다. 먼저 경제적인 문제로, 특히 아시아인들이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우려 때문에 생겨났다. 다른 하나는 건강, 위생에 관한 것으로, 아시아인들이 질병을 옮긴다는 우려가 편견으로 굳어진 사례이다.  1882년에 미국 의회가 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을 제정한 데도, 1930년대에 백인 노동자들이 필리핀 출신으로 농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을 집단으로 습격한 배경에도 아시아인들 때문에 미국인의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과거부터 중국계 미국인들은 해충을 먹는다고 비난을 받았고 질병, 비위생적인 습관과 연관 지어졌다.  1850년대 유행한 콜레라의 책임은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에게 돌아갔고 1890년대 결핵은 유대인의 병으로 불렸다. 서부 개척시대에 이주한 중국인들은 유행병의 희생양이 되어 강제격리까지 당했다. 20세기 들어서 아이티 출신들은 에이즈를 유행시킨 주범으로 혐오되었다. 21세기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인 사스 즉, 코로나19가 아시안 혐오를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종 문제에 관한 미국의 뿌리 깊은 반(反)아시안 정서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 아시아계 미국인은 영원한 이방인으로 간주된다. 본질적으로 미국의 가치와 어울리지 않고, 그래서 미국 사회에 녹아들 수도 없는 존재로 취급 받는다. 미국의 뿌리 깊은 반 아시안 정서의 시작을 살펴보려면, 미국에 중국인, 필리핀인이 처음으로 이주한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국인 제외법 제정은 미국이 최초로 특정 인종집단의 미국 이민을 금지시킨 사례로 기록 되었다.  
 하지만 그 만큼 아시아인들이 인종차별에 맞서 싸워온 사례들도 많이 발견 된다. 1869 Yick Wo 대 Hopkins는 중국인 세탁 업소들의 영업 허가를 거부하는 샌프란시스코 조항은 헌법에 위반 된다는 판결을 내렸고, 1903 옥스날드 스트라이크 옥스날드시 사탕무 공장의 일본인, 멕시코인 노동자들은 함께 파업함으로써 더 높은 임금과 더 나은 근로 조건을 얻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센트럴 퍼시픽 스트라이크 에서 약 2,000명의 중국인 철도 노동자들이 더 나은 근무 조건들 및 백인 노동자들과 동일한 임금을 요구하며 일주일간 파업을 하였다. 1898년과 1920년 오아후 슈가 스트라이크 필리핀계 미국인들과 일본계 미국인들은 임금 인상을 위해 성공적으로 함께 파업을 하였다. 1974년 아시아계/동양계 미국인들의 평등 고용을 지지하는 시위가 뉴욕 맨하탄 공자 광장에서 처음 열였고, 현존하는 차별적 노동 관행들을 규탄함으로써 끝내 정당한 요구사항들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2014년 흑인인 에릭 가너를 살해한 백인 경찰 다니엘 판탤리오가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을 때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시에서 인권 운동이 시작되었다.

 


인종차별(人種差別, Racial Discrimination or Racism)의 본질

차별에 대한 정의를 규정하면,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하는 것이며, 차별이라는 용어 자체는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다. 미성년자에게 선거권이나 운전, 음주를 허락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장애인을 위해 특별 주차시설을 마련하는 것은 긍정적인 차별행위의 사례이다. 그러나 차별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소수자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처럼 부정적으로 먼저 다가온다. 인권용어 해설집에서는 차별을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 지역,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복, 가족 상황, 인종,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견해,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 지향, 병력 등을 이유로 고용, 교육 시설 및 직업 훈련 기관 이용 시 특정인을 우대, 배제, 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라 정의한다. 차별 행위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차별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차별은 사람을 구별하는 행위가 누군가에 대해 비하(卑下, Belittled)를 야기하면 발생한다. 비하하는 행위는 상대를 깎아 내리는 행위이다. 비하한다는 것은 타인에 비해 많은 권력을 가지고, 타인이 관심과 존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적은 존재라는 표시를 하는 것이다. 비하는 표시행위(表示行爲)와 권력이 결합한 것이다. 그렇다면 비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특정한 구별이 비하를 의미하는지는 그 상황이 전체적인 맥락이나 우리 문화 속에서 갖는 현재 의미에 의해 결정되게 된다. 이는 개인이나 한 공동체 속에서 존재하는 다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 즉 편견(偏見, Prejudice)을 말한다.  편견이 있으면 자신의 선입견과 반대되는 사실들을 왜곡하거나 심지어 무시하기까지 한다. 편견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가족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갖게 된 잘못된 가치관에서 비롯될 수 있다. 또한 다른 인종이나 문화에 대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견해를 부추기는 사람들로 인해 생길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국가주의, 거짓 교리 그리고 지나치게 강한 자부심도 편견을 조장할 수 있다. 편견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이다. 차별은 편견으로 다른 개인 또는 집단을 비하함으로 적대하여 취해진 행동,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근본적인 차별의 원인은 편견이다.
인종차별은 다인종/다문화 속에서 사는 자들의 소통 부재로 인한 결과라고 정의된다. 인종과 인종 간의 대화가 없어 서로를 알지 못해 편견이 생겨 차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차별이 극에 달아 생명을 위협하게 된 것이라고, 많은 지식인이 혐오의 감정과 혐오주의를 파헤쳤다. 그 중에 주목되는 이가 저널리스트 출신의 독일 작가 카롤린 엠케다. 그는 혐오 사회라는 책을 통해 혐오 감정이 출발하는 근원을 해부했다.  그에 따르면, 멸시와 증오는 타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 표준에 벗어난 비정상으로 여기게 되면 개개인이 가진 문화적, 사회적 정체성은 쉽게 무시된다. 상대를 위험하고 괴상한 존재로 단정 지을 공산이 크다. 거기서 멸시와 증오가 싹튼다. 고정된 이미지가 형성되고 결국 상대를 부정하고 혐오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미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반 아시안 정서의 원인으로서, 경기가 좋지 않을 경우 비 이민자인  아시아 인들이 미국인들의 일거리를 빼앗아 간다는 인식이 반 아시안 정서의 가장 큰 원인이다. 또한, 아시안계 미국인은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인종 집단으로 인식돼 있어, 비 아시안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야기하기도 한다. 또 미디어를 통한 잘못된 인식도 문제가 되고 있다. 아시안은 영어도 못하고 정부 보조나 받는 인종, 비양심적인 장사꾼, 잔인한 폭도 등으로 묘사되곤 한다. 이러한 모든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반 아시안 정서를 형성하고 있다.   타 인종에 대한 증오 발언은 종교·인종·성별·개인정체성·신체조건 등을 이유로 한 편견이나 적개심을 언어나 그 밖의 다른 형태로 표현 것이다. 이민자·아시안·동성애자·무슬림·유태인 등을 대상으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공공장소를 비롯해 사적인 장소에서의 욕, 인종적 모멸감 표현, 혐오성 발언, 인종차별이 담긴 메세지를 배포하는 등의 행위가 증오 발언에 해당된다. 

 


미국과 아시안 관련 간략한 일지


1853년 샌프란시스코에 미국에서 첫 번째 사찰이 Sze Yap Company조합에 중국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당시 중국 스님들이 있었다. 주로 관혼상제와 사찰 관리 일을 했다.

1875년 샌프란시스코에 8개의 중국 사찰이 있었다.

1882년 5월 조미수호조약 체결.

1882년 5월 6일 중국인 배척법(中國人排斥法)은 1882년 5월 6일에 체스터 A. 아서 미국 대통령이 서명한 법률이다.
중국인 노동자의 이주를 금지시킨 미국 역사상 자유 이민에 대한 가장 무거운 제한의 하나였다.

1882년 10월 뉴욕에서 선교사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s)가 ‘한국, 그 은둔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발행.
미국 개신교 선교부의 선교전략 수립에 큰 참고서 역할.
그리피스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조선인들을 위한 행위라고 한 친일인사.

1884년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 조선 입국. 선교사로 첫 번째 조선 입국.

1885년 4월 장로교 목사 호러스 언더우드, 감리교 목사 헨리 아편젤러,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
이들은 1884년 12월 미국을 출발하였다.

1885년 9월 페놀로사와 비글로우(하바드 의대 의사 역임)는 일본에서 천태불교의 계를 받았다.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회의.

1902년 중국인 배척법 영구적인 조치로 실시되었다. 1943년 12월 17일, ‘매그너슨 법’에 의해 폐지..

1924년 미국 정부 아시아인 이민 금지 법안을 통과 시킴.

1965년 10월4일 오후 뉴욕 항 남쪽 자유의 여신상이 서있는 리버티 아일랜드에서 린든 존슨 대통령의 역사적인 개정 이민법 서명식이 거행됐다. 이 법은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발의되었다.


미국내 아시안들은 한국, 필리핀, 베트남을 비롯해 중국과 인도 출신 이민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한 해에 미국으로 오는 아시안 이민자 수는 2017년 기점으로 히스패닉을 추월한 상태다. 하지만 아시안 이민이 여타 인종과 가장 큰 차이점은 나름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라는 아주 획기적이고 놀라운 사실이다. 최근 기하학적인 아시안 인구 증가 추세와 더불어 중국과 인도 중심으로 행해지는 이민의 형태는 과거 단순 노무직 형태가 아닌 STEM(Science과학, Technology기술, Engineering공학, Math수학)에 집중된 고급인력들이다. 하드웨어는 같게 보이지만 소프트 웨어가 차원이 다른 이민자 그룹인 것이다. 문화적, 언어적, 생김새까지 전혀 다른 아시안 인종 그룹은 놀랍게도 육체노동자라는 일반화 개념이 자리잡기 전에 '비즈니스 맨'들로 변신을 해 타고난 근면 성실함으로 지역 상권을 장악해 나아갔고, 자식교육에도 열과 성을 다해 백인 지위를 위협하는 유일한 인종이 된다. 하지만 인구대비 6%정도 밖에 안돼 ‘똑똑하며 돈은 있지만 힘 없는 인종’으로 일반화 된다.   아시안 고급 인력들은 백인들의 기득권에 도전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을 배출하는 중국, 한국, 인도 등 아시안 국가들의 가파른 경제 성장은 상대적으로 성장이 더딘 유럽 선진국 뿐만 아니라 미국 입장에서도 긴장과 경계의 날을 세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을 필두로한 아시아 국가와 아시안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이 현재 이뤄지는 아시안 상대 범죄의 원인인 것이다. 최근 중국이 경제적으로 부상하는 가운데 중국에서 시작된 팬데믹이 전 세계를 덮치자, 중국인 혹은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한 두려움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시안에 대한 인종차별은 미국의 건국 초기 시대부터 끊이지 않고 자행돼 왔다. 지난 1870년 아프리카 계 흑인들의 시민권 취득을 허용하는 귀화 허용법(Naturalization Act of 1870)에서부터 시작해 중국인 이민과 귀화 금지(1875년), 아시안 직업 제한(1902년), 아시안 토지소유 금지(1913년) 등의 법을 통해 행해져 왔다.   이러한 아시안 차별은 1965년 이민개정법 이후 차츰 수위를 낮추는 듯 했지만 2001년 9·11테러 참사 이후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해 2002년에는 유학생의 정부 등록 의무화와 국경검색 강화하고 2005년엔 운전면허증 발급을 제한하는 리얼아이디 법안이 통과되는 등 전체 이민자 커뮤니티를 향한 차별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 

 



아시안계 혐오에 대한 대응 논리 전개

미국은 백인 중심의 사회이며 이민을 받아 국민을 이룬 다인종/다문화 국가이기에 인종 문제는 미국 사회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 특히, 링컨 시대 때 남부 흑인의 투표권을 확보하기 위해 북부 백인 정치가들이 시작한 소위 흑인 노예해방 운동을 흑인 노동력을 잃지 않기 위해 남부 농장주들이 조직적으로 반박함으로 사회문제 표면으로 인종차별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흑인들은 여전히 백인들의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 진정한 인격체로서 존중되지는 않았다. 미국 반 인종차별의 분수령은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의 제정이라 할 수 있다. 민권법은 모든 사람이 그들의 인종, 피부색, 출신 국가, 성별, 종교, 성에 의해 차별을 받지 않도록 법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오랫동안 백인들의 인종차별로 억압당했던 흑인들은 민권법 제정으로 선거권을 획득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비슷한 시기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이민자들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는 오랫동안 미국 인종 문제의 지배적 인식 틀이었던 백인-흑인의 구도가 백인-유색인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미국 내에서의 소수 인종 인구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으며, 이들의 수적 영향력이 2008년과 2012년 최초의 유색인종 대통령인 오바마 당선의 주요 역할을 했다. 민권법 시행 이후 법이나 제도적으로는 반인종주의의 틀이 표면적으로 마련된 것은 사실이지만, 제도적 인종차별(institutional racism)은 계속 사회 전반에서 실행되고 있으며 백인 우월주의(white supremacy)라는 구호로 현존하는 인종차별에 불화살을 당겼다. 이로 인해 백인 미국인들의 이민자에 대한 반감과 피해의식이 우려할 만한 수준을 넘어서 반 다문화 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탈 에스닉(post-ethnic) 또는 탈 다문화주의(post-multiculturalism)라는 이론의 실행 문턱에 이르게 된다.
우리 사회는 다문화 사회로 인하여 인종, 민족의 다양성으로 인해 가치관의 혼란 및 사회 일체감의 약화와 사회 불평, 차별 등이 가시화되고 있다. 차별은 우리 개인이 인식하든 그렇지 아니하든 우리 일상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어떤 철학이나 신념이나 강연도 우리 삶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존재하는 다름에 대한 모든 차별, 특히 인종과 성에 대한 차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모든 인간사 불화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죄, 교만, 욕심, 절망, 열등감, 탐욕, 증오, 두려움, 냉담함 등 온갖 결함으로 인하여 우리들 인간들이 갖게 되는 편견이다 차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유일한 희망은 사람과 사람 그리고 인종과 인종간, 종교적 배경을 달리 하는 집단간의 소통과 이해, 그리고 상호존중과 협동을 통한 상생의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다. 즉 세상의 이익을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함, 성숙하지 못한 인간적 편견과 선입견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통을 통한 상호 이해와 존중을 체득해야 한다. 나와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고 잘못된 것이 아니다, 세상 어디에 나와 똑 같은 모양과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다름을 틀리다 하지 않고 소통해야 한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만나야 한다, 가족이, 이웃이, 그리고 다양한 세대와 인종이 소통하기 위해 만나야 한다.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며 만나 소통해야 한다.
증오 범죄는 종교·인종·성별·개인정체성·신체조건 등을 이유로 폭행·위협·불법침입·불법적 집단 행동을 하는 범죄 행위를 말한다. 가해자는 연방·주 정부의 형법에 근거해 처벌된다. 증오범죄에 대한 대처 방법은 우선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신체적 피해가 있는 경우엔 즉시 병원에 연락해야 하고 물적 증거는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가급적 휴대전화 등의 기기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둔다. 간혹 경찰에 신고할 때, 경찰 측에서 증오범죄로 접수하는 것을 꺼릴 때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증오범죄로 수사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신고접수증 사본을 발부 받은 후에는 연방수사국(FBI)나 주 검찰청에도 신고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증오발언의 피해를 입었을 경우에는 ▶목소리를 높여 강력히 항의하고 ▶차분하게 대응해야 하며 ▶문제가 되는 말과 행동을 지적할 것 ▶상대방이 술이나 마약에 취해 있는 상황에서는 무시하고 자리를 피하는 등의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일은 신문이나 TV 등 대중매체에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증오범죄는 대중매체의 조명을 많이 받는 범죄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대변인을 지정해 기자회견 등을 갖고, 커뮤니티와 공동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인종차별에 관한 사건들에서, 괴롭힘과 같은 가볍고 고의가 아닌 행동이나 발언은 증오발언이나 증오범죄 범주엔 포함되지 않는다. 넓은 의미의 인종차별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 같은 행위의 경우 다른 사람에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본인에게 상처가 되거나 거슬릴 수 있다. 피해자들로 하여금 기분 탓이나 스스로 너무 과민한 탓으로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즉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럴 때 가해자를 무조건 인종차별 주의자로 지적하는 것은 상대방을 더욱 방어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어떠한 행동이 또는 어떤 단어가 문제가 있는 지 정확히 짚어준다. 예를 들면 당신은 불쾌한 사람이네요 라고 말하는 대신 그 문장은 한국 사람들이나 아시아 사람들에게 굉장히 불쾌하게 들립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해자에게 집중하는 것 보다 그의 언행에 집중해야 한다.  특정 그룹 안에서 한 일원이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을 때는 그 사람을 따로 불러내기 보다는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앞으로 불러내서 전체 그룹이 해당 발언이 본인에게 준 불쾌감에 대해 인지할 수 있도록 하고, 그런 발언을 하지 말아달라고 해야 한다.  또 직장이나 공공 시설에서 인종차별 피해를 입었다면 그러한 피해에 대응할 법적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소송을 제기해야 할 수준의 피해를 입었는데 변호사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면 인권 변호 기관의 도움을 요청한다. 빈곤법률센터(Poverty Law Center)나 ‘명예 훼손 반대리그(Anti-Defamation League)등이 대표적인 인권 변호 기관이다. 

그렇다면 혐오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혐오공격에 대하여, 똑같이 증오와 부정으로 맞서는 건 위험하다. 그들에게 합법적인 경쟁자 지위를 부여할 뿐이다. 증오와 광신주의에 맞서는 가장 좋은 무기는 다양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종차별주의는 감염병 상황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인식의 폭을 좁힐 수 있다. 예를 들면, 집에 불이 났을 때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인지의 폭이 좁아지면 사람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달리곤 한다. 스트레스가 높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분석적 추론보다는 직관에 더욱 의존한다. 그러나 우리의 직관은 쟁점에 대한 깊이 있는 사고를 방해하는 암묵적 편견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나아가, 역사를 통해 인식의 폭을 넓히는 것 역외에도 정치적 연합 및 입법 등의 정책 개입을 통해 인종차별적 정서를 감소시킬 수 있다. 중국독감(Chinese flu)과 같은 용어는 니그로(negro)와 같은 단어와 함께 불법화돼야 한다.  2020년 9월 미국 하원은 243-164 투표에서COVID-19와 관련한 모든 형태의 반 아시아 정서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팬데믹과 관련한 반아시아적 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미국 하원의 첫 번째 조치다.
연방상원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아시안 증오범죄에 강력 대처하기 위해 마련된 법안을 압도적인 지지 속에 통과시켰다. 연방상원은 4월 22일 COVID-19 증오범죄 방지 법안(COVID-19 Hate Crimes Act)을 표결에 부쳐 찬성 94, 반대 1로 처리했다. 연방하원은 아^태 문화유산의 달인 5월 중에 관련 법안을 통과시킨다는 계획이다. 공화당에서는 테드 크루즈 의원 등 일부 의원들이 이 법안에 반대하면서 힘겨운 입법 다툼이 예상되기도 했지만, 그 외 다수의 공화당 의원들이 일찍이 법안 내용에 합의하면서 이날 압도적 지지 속에 통과될 수 있었다. 민주당 소속인 메이지 히로노 연방상원의원과 그레이스 맹 연방하원의원이 각각 상·하원에 발의한 이 법안에는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범죄를 막는 조치가 담겨있다.  법안에는 증오범죄를 당하거나 목격한 사람이 손쉽게 피해 사실을 신고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언어로 온라인 신고를 제공하고, 연방법무부에 증오범죄를 전담하는 요원을 지정해 사법당국이 신속하게 증오범죄를 처리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또 법안 세부 사항으로,  증오범죄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공개하는 방안도 담겼다.특히 이날 통과된 법안에는 ▶지방 및 주정부의 법집행 기관에 증오범죄에 대한 교육을 더 많이 제공토록 하는 것을 비롯 ▶증오범죄 핫라인 설치 ▶증오범죄 가해자를 위한 재활교육 프로그램 실시 ▶연방기관이 커뮤니티 기반 조직과 협력해 증오범죄 방지 캠페인을 전개토록 하는 등의 새로운 내용이 추가됐다. 또 이날 통과된 법안에는 지난달 애틀랜타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으로 사망한 한인 4명 등 아시안 8명의 이름을 추가해 법안의 의미를 더했다. 법안을 발의한 히로노 의원은 이날 본회의에서 팬데믹 이후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반 아시안 폭력에 대해 연방상원이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아태 커뮤니티에 전달한 것이라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해당 법안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의회에서 조속히 통과시킬 것을 촉구한 바 있다.
 사회의 폭력적 사건이 발생 할수록,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지역 보호단체(LA폭동시 해병전우회 등)를 중심으로 상호 연락망과 비상시 대비태세를 논의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지역사회 전반에 걸쳐, 봉사나 자원봉사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계층간의 소통과 이해를 확대 시키는 사회적 리더로서 활동을 하는 것이 요구 된다.  무었보다, 개인의 안전을 위하여 체력단련과 개인 보호를 위한 장비를 준비하는 것이 즉시 효과 있는 최선의 방책이 될 수 있다.  보다 장기적이고 제도적인 장치로서 주류 사회의 연방 공무원 직이나 주정부나 시 정부의 선출 직에 출마하여 해당 정책이나 법안을 제정하는 활동이 필요하다.

국회에서 통과한 관련법안

 

 

 

송광섭 / 대한불교 조계종 국제포교사

본지 편집위원으로 1952년 생이다. 1975년 해군사관학교
1978년 서울공대 전기과, 1981년 서울공대 대학원, 1989년
미시간대학원, 2001년 웨인주립대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78년부터 해군사관학교 교수부에서 전기공학 교수로 근무
하였으며, 해군사관학교 법우회 지도교수를 담당하면서 불교
포교를 하였다. 2003년 해군을 전역하였으며 현재 해군사관
학교 명예교수겸 미해군대 방문교수롤 있다.

 

 

 

 

 


미국 대륙횡단철도 건설의 흑역사



탐욕스런 자본이 결합하면서 미국 동과 서의 사업자들은 본격적으로 철로공사에 들어갔다. 초기에 혼선은 있었지만, 서부 센트럴은 스탠포드가 사실상 경영권을 쥐고 공사를 밀어 부쳤고, 동부 유니언은 남북전쟁의 영웅 그렌빌 닷지(Grenville M. Dodge) 장군을 총감독으로 임명해 전투를 치르듯 공사를 민첩하게 움직여 나갔다.
 동부 유니언의 공사는 인디언들의 영토를 지나갔다. 수족, 샤이엔족, 아라파호족은 오랫동안 백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많은 피를 흘렸다. 경찰력이 공사장에 투입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인부들은 총을 옆에 두고 작업을 했다. 공사를 지휘하는 닷지 장군은 악명 높은 케이스먼트 형제를 고용해 인부 감독과 인디언으로부터 공격을 맡겼다. 동부의 공사는 처음에는 하루 800m 밖에 진도가 나가지 못했지만, 1년이 지나면서 하루에 4.8km씩 앞으로 나아갔다.
동부 유니언이 인디언 수족을 처음 부딛친 것은 1866년 여름이었다. 악명 높은 추장 점박이꼬리(Spotted Tail)가 이끄는 무리가 다가와 철마와 달리기 경쟁을 하겠다고 했다. 당연히 인디언 기마병이 철마를 이기지 못했다. 화가 난 추장은 식량을 달라고 했다. 거절하자 그들은 위협적인 언사를 뱉어내고 사라졌다.
그후 인디언들의 공격은 끊이지 않았다. 원주민들의 공격에 열차가 탈선하고 선로가 뜯겨 나가고 인부들이 공포스럽게 살해되었다. 수족은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승객도 공격했다. 어떤 인부는 머리가죽이 벗겨졌고, 어떤 이는 화살이 19개나 꽃힌채 죽었다. 공사장에 앞서 나가는 측량사는 인디언 공격에 가장 취약했다.
공사장 인근 도시에는 환락가가 만들어졌다. 인부들은 공사판에서 번 돈을 가지고 술을 마시고 여자를 구하고 도박을 했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무법지대 장면이 공사장 곳곳에서 나타났다. 공사장을 상대로 하는 장사꾼들은 유니언퍼시픽이 불하받은 구역내에 들어와 사업을 했다. 분노했다. 그들은 불법으로 토지를 점거해 술집을 만들고 도박장을 차렸다. 닷지 장군은 분노해 케이스먼트 형제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케이스먼트 형제는 인부 200명을 중무장시키고 유흥가로 달려가 “마음껏 쏘라”고 명령했다. 이 전투에서 30명의 인부가 죽고,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다.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순직으로 처리되었다.
동부의 공사는 구인난에 시달렸다. 인부를 채용하면 달아났다. 공사구간이 험난하기도 했지만, 인근에 철도공사판보다 더 많은 봉급을 주고 처우가 좋은 광산이 많았다. 힘들게 2,000명의 인부를 구해 공사장에 투입하면, 곧 1,900명이 달아났다.
드디어 동부의 센트럴은 중국인 인부를 인부로 쓰기로 했다. 1948~49년 골드러시 때 건너온 중국인 인부들이 캘리포니아엔 5만명 정도 살고 있었다. 처음엔 경영진 내부에서 반대가 많았다. 백인들은 중국인을 비속한 인종으로 취급하고 있었고, 작업을 게을리 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도 워낙에 인력난이 심하다보니 중국인 50명만 써보기로 했다. 웬걸, 그들은 일을 너무나 잘했다. 아무런 군소리도 없이 힘들고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센트럴 경영진들은 중국인들을 더 많이 고용하기로 했다.
힘들고 어려운 작업은 중국인에게 맡겼다. 캘리포니아에서 네바다로 넘어가는 산맥에는 깎아진 절벽에 다리공사도 많았고, 숱하게 터널을 뚫어야 했다. 중국인 인부들은 중국식 바구니를 타고 절벽에 붙어 돌을 깨고 구멍을 냈다. 이젠 위험이 노출된 공사는 중국인에게 맡겨졌다. 숱한 중국인이 절벽에서 목숨을 잃었다.
알프레드 노벨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그 무렵 도입되었다. 니트로글리세린이란 폭약은 다루기가 위험했는데, 그 일을 중국인에게 맡겼다. 너희들은 죽어도 좋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터널작업을 하던중에 사고가 났다. 아무리 순종적인 중국인이라 하더라도 폭약에 손을 대지 않았다.
혹한이 다가왔다. 시레라네바다 산맥의 겨울은 매서웠다. 따듯한 푸젠(福建)성 출신이 대대수였던 중국인들은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했다. 그들이 얼마나 얼어 죽었는지 자료도 없다. 소모품이었으니까. 10톤의 중국인 유해가 배에 실려 중국에 보내졌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쿠리(coolie)라는 비속어로 불리웠다.
(나중에 센트럴퍼시픽의 스탠포드는 공사가 끝난후 중국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샌프란시스코에 거주지로 차이나타운을 기부하고, 스탠포드대학을 설립해 일정비율의 중국인의 입학을 허용했다.)

출처 :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