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
1956년 미국에 온
변복순 보살님과 그의 소원
글/김형근(본지 편집인)
보스톤 근교 숲속같은 분위기가 나는 동네에 벽돌로 만든 길다란 집에 들어서자 한국의 흘러간 유행가 경음악이 나온다. 변복순 보살님은 열 명이 살아도 될 이 큰 집에서 50년간 살고 있는데 남편은 1999년 별세하였고, 6남 1녀의 자녀들도 결혼하여 다 떠나고 이제는 보살님 혼자 살고 있다.
불법이 없는 지역에 불교의 시작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다. 스님의 도래, 사찰의 건립, 경전의 소개 등이다. 필자는 미주한국불교시작은 서경보 스님의 도미 연도인 1964년도부터 라고 주장하고 미주한국불교의 역사를 기록하는 연혁을 시대별로 기록 정리하고 있다. 이 연혁에 미주한국불교사에 등장하는 많은 스님들과 주요 재가신자들의 도미 년도와 활동 기록이 있다. 시작은 1964년 8월부터이다. 1964년 전에 미국에 온 뉴욕의 최명심행 보살 등의 불교신자들도 있었지만 그 신자들의 도미 년도를 미주한국불교사 기원으로 삼지 않는다. 그래서 기록을 하지 않았고, 그 분들은 오래전에 별세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초에 유학으로 온 분들은 몇 분이 있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갔다가 나중에 다시 미국에 이민을 왔기 때문에 미국불교사 연혁에 기록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가주 삼보사 신도회장을 역임한 관음성 정숙경 보살님은 미주현대불교 2013년 3월에 보도되었는데 1954년 유학을 와 산호세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결혼을 하고 미국에 쭉 살았다. 이 보살님이 불교신자가 된 것은 1964년에 미국에 온 불교신자인 어머니 강정자 보살님을 절에 모셔다 드리다가 불교신자가 되었다. 정숙경 보살님은 미국에 유학 올 때는 불교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현재 보스톤 문수사 신도인 변복순 보살님이 1956년도에 이민을 온 사실을 알았다. 한국불교신자로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미국에 처음 이민 온 분이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할머니를 따라 절에 간 사실과 당시의 절 풍경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변 보살님의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와 함께 월남하였고, 한국전쟁을 겪었으며 10대 후반에 결혼하고, 1956년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또 1989년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고향 회령을 방문하여 동생과 고모를 만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2013년에는 미주현대불교 제 2차 ‘북부조국 사찰순례“에 참가하여 다시 북한을 방문하였다. 한국 현대사를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 80살이 지난 나이에도 매우 건강하게 살면서 다시 한 번 북한에 가서 조카들과 상봉을 꿈꾸는 변 보살님의 인생 역정을 소개한다.
변복순 보살님은 일제시대에 함경북도 회령에서 딸부자 집의 큰 딸로 태어났다. 다섯 자매 중 네 명은 회령에서 태어났고 한 명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일제가 물러난 직후로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라 사회가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현재 이북의 조선은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조선이 수립되기 직전 변 보살님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48년 8월에 어머니와 두 동생들과 함께 1947년에 먼저 서울로 간 아버지를 찾아 3.8선을 넘어 왔다. 동생 중 한 명은 고향에 할머니와 함께 남았다. 변 보살님에 의하면 고향 집안은 큰 부잣집은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남인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고향에서 부모를 모시면서 농사짓고 장사도 하면서 큰 고생을 하여 동경대학교로 유학을 간 동생을 뒷바라지를 하였는데 해방 이후에 변 보살 가족은 회령에 남고 혼자 서울로 갔다. 서울에는 아버지 외에도 또 동아일보 기자였던 작은아버지와 고모가족도 살고 있었다. 당시 변 보살님은 3.8선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어머니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체 어머니를 따라 회령에서 기차로 철원까지 왔고, 거기에서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 임진강 거쳐 다시 기차로 동두천까지 온 후에 동두천 천막 수용소에서 4일간 지냈다. 그곳에서 밀밥만 먹었는데 먹기가 매우 힘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동두천에서 다시 무작정 종착지인 서울 역까지 오게 되었다. 어린 동생을 업은 어머니를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뒤따라 나왔다. 그런데 서울 역에서 나오다 기적처럼 우연하게 고모의 시누를 만나게 되었다. 고모는 1946년에 와서 동대문운동장 뒤 을지로 6가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복권 당첨같은 기적이 또 한 번 일어났다. 고모 집에 가던 도중에 길가에서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당시 고모와 아버지는 같은 서울에서 살고 있었지만 서로 어디에서 사는지를 몰랐다고 한다. 연락처와 주소도 모르고 아버지를 찾아온 변 보살님 가족은 기적적으로 아버지를 만나 장충단 밑의 서울 중구 묵정동에서 세를 얻어 살면서 변보살님은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서울 생활이 어려워 짐을 싸서 1950년 6월 25일 전주로 이사를 가려고 하였다. 전주에 아버지 직장을 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한국전쟁이 일어나 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 기간 중에 경기도 동두천 부근으로 피난 가서 살다가 1951년 1.4 후퇴 때 아버지는 서울에 남고, 변 보살님은 어머니, 여동생들과 함께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여기에서 변보살님은 텐트치고 가르치던 피난민 학교에 계속 다녔다. 그러면서 대전방송국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 방송국은 미군들이 관리하던 방송국이었다. 변 보살님은 여기에서 미군에게 영어를 배웠다. 미국과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휴전으로 들어갔다. 대전에서 미군에게 영어를 배운 변 보살은 정전협정 직후인 8월부터 용산의 미 8군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의 미 8군 사령관은 맥스웰 데번포트 테일러(Maxwell Davenport Taylor)였다. 그리고 나중에 결혼하게 되는 남편 ‘헨리 조리Henry Joly’씨가 특무상사 직책으로 8월에 미8군에 부임하여 왔다. 두 사람은 같은 직장에서 같은 시기에 일을 하게 되었다. 헨리 조리씨는 변 보살의 보스였다. 운명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직장에서 만나 변 보살과 특무상사 헨리 조리씨는 서로 호감을 느껴 1년 6개월 후인 1955년 2월에 친지와 남편 군인 친구들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영등포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사진을 보니 서양 사람인 남편과 변 보살님은 얼굴이 형제처럼 닮은 면이 있다. 결혼 후에 한국에서 주변 사람들이 남편과 변 보살은 키도 비슷하여 차이가 많지 않고, 남편 머리와 눈도 검정색이고 피부도 까무잡잡하여 마치 형제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12월에 아들을 출산 한 후에 남편과 함께 6개월 지난 어린 아들을 안고 1956년 7월 9일 날 김포에서 군용기로 일본 하네다 공항으로 간 후에, 거기에서 비행기로 갈아타고 7월 9일 날 뉴욕주 롱아일랜드 맥아더공항에 도착하였다. 당시에 한국에서 미국에 오른 사람들은 대부분 배를 타고 오던 시기였다. 그리고 남편의 고향인 커네티컷 주로 가서 한 달간 살다가 남편이 텍사스 주에 있는 큰 군사도시인 킬린으로 발령이 남에 따라 남편 뒤를 따라 킬린으로, 1961년 다시 독일로, 그리고 다시 1963년 말에 워싱턴 주 타코마로 그리고 다시 1971년 7월에 메세츠세츠의 포데븐으로 부대로 왔다. 처음에는 부대에서 살다가 현재 살고 있는 집을 11월에 사서 보금자리를 만들고 50년 동안 살고 있다. 집은 남편이 출장간 사이에 보살님이 단독 결정하여 사게 되었다. 보살님의 삶을 들여다보면 순발력과 결단력이 뛰어난 분으로 생각되는데 이 집의 구매도 그런 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남편은 24년간의 군인생활을 마치고 1972년 제대를 하였다. 그 사이 6남 1녀를 출산하였다. 독일에서 출산한 아들도 있고, 막내로 태어난 딸은 현재도 보살님 집 부근에서 살고 있다. 제대를 한 후에 솜씨가 좋은 남편은 부대 안의 식당 매니저로 일을 하였다.
1989년도 보스톤 한인노인회에서 수여하는 효녀상을 받을 정도로 부모와 형제들을 잘 챙겼던 변 보살님은 이민을 온지 20년 후에 1976년에 아버지 변영승, 어머니 이귀인과 동생 가족 등 8명을 초청하였다. 변 보살님 형제는 딸만 다섯 명이었지만 이북에 한 명이 살았고, 한국에 네 명이 살았지만 한국전쟁 당시에 두 명이 사망했기 때문에 한국에는 동생이 한 명만 남았었다. 부모님과 동생 가족이 미국에 도착하기 전에 부모님 거주할 집을 구입하여 미리 준비하였고, 동생 남편의 직장도 미리 준비해둘 정도로 그들의 정착을 철저하게 준비하였다. 일제 시대인 1930년대 말에 태어난 변 보살님은 부모님과 형제들을 운명공동체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아버지의 병환과 고향방문
변 보살님의 초청으로 미국에서 와 노년을 보내던 아버지는 미국생활 10년 만에 1986년 풍이 와 오른쪽에 마비가 생겨서 혼자서는 걸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변보살님은 부모님이 아프지 않고 항상 건강하게 살 것으로 생각하며 살다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자기의 뿌리인 변씨 조상 내력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고향방문을 생각하고 중국의 연변을 먼저 방문하여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을 통하여 고향에 동생을 포함하여 친척들이 살고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다행히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북한의 ‘해외동포원호위원회’에 고향방문을 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허가를 받고 고향 함경북도 회령으로 향했다. 보스톤에서 뉴욕, 뉴욕에서 홍콩, 북경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이 여정은 현재 미국에서 북한을 방문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여정이었다. 지금은 미국에서 인천 거쳐 북경이나 인천 거쳐 심양을 통해 평양으로 들어간다. 변보살님이 북경에서 평양 가는 비행기를 타고 갈 때는 고려항공 측에서 출가외인이 몸이 불편한 부모님 모시고 온다고 일등석에 자리 배정을 해 주었다. 돌아갈 때는 기차 여행을 하고 싶어서 평양역에서 북경 역까지 기차로 갔다고 한다. 평양에 도착하니 고향방문을 담당할 사람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평양에서 하루 밤을 자고, 기차타고 하루가 걸려 청진에 도착한 후에 청진에서 택시로 한 시간에 걸쳐 고향 회령을 방문하였다.
회령에 도착해서는 40년 전에 헤어진 셋째 동생과 눈물의 상봉을 했다. 당시 5살 이던 동생이었지만 혈육은 숨길 수 없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서로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동생을 만난 후에 3주 동안 방문 내내 흐르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에서의 환대
변 보살님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회령시에서 주선하여 여러 명의 옛 학교 친구들도 반갑게 해후를 하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반가웠다. “경험하기 전에는 이런 기쁨을 알 수가 없다”고 변 보살님은 당시의 상황을 말했다. 변 보살님의 친척들은 회령, 청진 원산시 등에 여러 곳에서 살았다. 회령에서 5일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청진으로 향했다. 회령과 청진에 사는 변 보살님 가족이 많기 때문에 청진시에서 변 보살님 가족의 편의를 위해 버스를 한 대 내주어 경성온천(주을 온천) 가족들이 함께 방문하였다. 동생을 비롯하여 친척들과는 청진에서 헤어진 후에 평양으로 와서 평양의 대동강을 비롯하여 주체탑, 박물관 등 여러 곳을 방문하였는데 사찰도 방문하였다. 또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등 명산을 관광하였는데 미국에서 온 두 사람과 함께 주로 밴을 이용하여 다녔다. 묘향산 보현사에 방문할 때는 변보살님은 법당에서 108배를 하였다. 북한 정부에 대해 지금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평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무료로 치료해 주어 많은 효과를 보았다.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보스톤에서 1996년에 어머니는 2009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별세하였다.
변 보살은 한 번 만나고 온 동생을 다시 보고 싶어서 2013년에 ‘미주현대불교’ 주최 사찰순례에 참가하였다. 이 순례 여행기간 중에 동생을 만나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시기에는 해외동포의 이산가족 상봉 제도가 새롭게 변경되어 있었다. 미주에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 중에서 상봉을 원하는 사람들은 ‘재미동포전국연합회’를 통해서 신청을 해야 상봉을 할 수 있으며, 고향방문은 되지 않고, 상봉은 평양의 해동식당에서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아쉽게도 동생과 조카들을 만날 수가 없었고, 변 보살님 동생은 2013년 12월에 사망했다고 한다. 변 보살님은 생각할수록 1989년 고향방문을 하는 기간 동안에 해외동포위원회와 고향 사람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고향 회령에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은데 현재는 미국무성에서 북한 여행을 금지시키고 있고, 북한도 코로나로 국경을 봉쇄한 상태이기 때문에 방문자체가 불가능하다.
불교와 인연
변 보살님은 회령에서 5-6 살 무렵에 할머니 손잡고 절에 다닌 것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절에 갈 때는 할머니가 쌀을 가지고 갔으며, 스님들은 절에서 농사를 짓던 시절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아쉽게도 절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한다. 어머니는 일하고, 빨래하느라 함께 간적이 없다고 한다. 변 보살님은 지금도 이 할머니 사진을 집 방에 만든 사당에 모셔 두었다. 변 보살님은 월남한 후에는 남한에서 절을 다니지 못했다. 변 보살님의 형제는 한국전쟁 중에 두 명이 사망하였는데 어머니는 전쟁 후에 절에 열심히 다녔다. 항상 사찰에 다니고 싶은 마음을 안고 살았던 변 보살님은 독일에 살던 1963년에 암스테르담, 코라지, 마닐라, 동경을 거쳐 큰 아들과 다섯째 아들을 데리고 남한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방문기간 중에 어머니와 함께 의정부에 있던 어머니가 다니던 절을 갔다.
미국에서는 숭산스님이 설립한 캠브리지 젠 센터를 다녔다. 1975년쯤으로 기억한다. 보스톤 지역의 한국인 신도들은 김창식씨가 1976년도에 설립한 심검도를 빌려서 약 1년 정도 법회를 하였는데 변 보살님도 이곳에 가끔씩 나가게 되었다. 이 한국인 신도들이 돈을 모아서 벌링톤 지역의 가정집을 사서 범어사 간판을 달고 법회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에 업톤으로 이전을 하였다. 보스톤 지역에서 범어사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한국인들은 이미 가정집을 구입하여 교회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 사찰에서 변보살님은 화공스님, 효성스님, 지광스님 그리고 도범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또 변 보살님은 1976년도에 동생과 함께 뉴욕 원각사를 가기도 했다. 당시에 법안스님과 무착스님이 원각사에 계셨다. 보살님과 동생은 법당에서 잔 기억도 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원각사를 방문하였다. 지금은 보스톤 문수사 신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축복받은 인생이라 생각한다
일제하에 함경도 회령에서 살다가 할머니와 동생 한 명을 두고 월남하였고, 1956년도에 미국이민을 왔다. 그리고 병든 부모님을 모시고 40년 만에 고향방문을 해서 동생가족을 만났다. 가족과 수십 년 이별은 비극이다. 변 보살님은 한국 현대사를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 미국에서 살고 왔다. 보살님의 낳은 6남 1녀 포함 손자들까지 하면 대략 40명 정도 되는데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모두 성공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결혼생활은 남편이 사망한 1999년까지 45년 동안 애틋한 사랑 속에 계속되었다. 결혼 기간이 25년이 지나면 천생연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결혼 50년이 금혼식에서 약 5년이 부족한 것은 옥에 티다. 매월 남편과 사교춤을 추면서 살았으며 지금도 남편과의 아름다운 사랑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있다. 남편 ‘헨리 조리Henry Joly’씨는 임종직전에 가족들에게 “내 마지막 소원은 네 어머니와 춤을 한번 더 추고 싶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타민족과 결혼하여 이민생활을 하는 한국인들은 문화차이와 식생활 그리고 언어로 큰 문제를 겪게 되는데 변 보살님은 이런 모든 것이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변 보살님은 본인 인생에 대해서 주부로서 또 7남매의 어머니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 살았던 보람 있고 축복받은 인생이었다고 자평한다. 자녀들과 소통도 잘 되었고, 자녀들도 어머니 뜻을 잘 따랐으며 지금도 모든 자녀들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자녀들 뿐 만 아니라 손자, 손녀들도 할머니를 매우 사랑하며 존경하고 있다. 필자가 보살님 댁에서 보살님을 만나는 날에도 근교에 사는 20대 외손자가 찾아왔는데 방울토마토를 보고 할머니에게 드리려고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런 손자. 손녀들이 30명 넘게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변 보살님은 가족들에게 사랑을 듬뿍 심어주면서 살은 즐거운 인생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새로운 환경에 대한 이해와 적응력이 뛰어나고 주변 환경을 장악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또한 보살님은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여서 살아온 인생에 대한 기억이 막힘이 없었다,
변 보살님은 본인의 인생을 “내 인생은 모든 일이 축복 속에 진행되었다. 넘치게 감사하다.” 필자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변 보살님 살았던 시기는 우리민족에게는 격동의 시기였고, 분단과 전쟁 등 한민족 전체에 매우 힘든 시기였지만 그런 모든 단계를 변 보살님은 남들에 비해서 부처님의 도움으로 잘 넘긴 것 같다.
변 보살님의 소원
변 보살님과 함께 사찰 순례를 하던 시절 보살님은 이미 70세가 넘은 나이였다. 하지만 요가도 하고, 운동을 하면서 몸 관리를 잘 한 보살님은 마치 50대처럼 등산도 문제가 없었다. 보살님 말씀에 의하면 타고난 건강한 몸이다. 군살도 없고, 별로 아픈 적도 없으며, 해산 후에도 미역국을 먹지도 않았지만 몸에 별 문제가 없었다. 금강산을 가면 대개 구룡폭포를 오르게 되는데 건강한 40-50대가 오르는데 3시간 조금 넘게 걸리게 된다. 변 보살님은 산악회 회원들이 많았던 참가자들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았다. 지금도 매우 건강하여서 큰 집에 정원도 가꾸고, 뒷마당에는 텃밭도 가꾸고, 집 관리도 손수하고 있다. 변 보살님은 두 명의 아들과 함께 다시 고향방문을 하고 싶어 한다. 평양을 방문하여 아들과 조카들을 서로 만나게 하여 교류하게 하고, 아들들에게 북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이 일을 꿈꾸면서 항상
“내 몸을 건강하게 잘 관리해야 한다”
“내 아들, 딸이 내 말을 잘 들었으니 이제는 내가 자녀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