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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호] 김택영, 이경숙 부부의 삶과 신앙 / 김형근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2.02.27|조회수264 목록 댓글 1

< 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

 

 

 


인생을 음악에 싣고 불교를 노로 삼아 나아간 삶
시카고 불타사 김택영, 이경숙 부부
삶과 신앙

 

 

금혼식 기념


글/김형근(본지 편집인)

 

 

 

김택영, 이경숙 부부는 1968년 결혼을 하고 1970년 3월 이민으로 시카고에 왔다. 김 택영 박사는 1966년 연세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1969년 제대를 하자마자 이민 길에 오른 것이다.  이 보살님은 원래부터 맨하탄 음악대학교에 유학을 오려고 준비를 하였는데 결혼을 하고, 유학 겸 이민을 왔다.  김택영 박사의 의대 동기생 61명중 40명이 미국에 왔다고 한다. 2/3가 미국으로 온 것이다. 지금은 한국에서 미국 이민을 많이 오지 않지만 당시에는 한국에서 의사, 약사, 간호사  등 전문직종의 극히 제한적인 사람들이 먼저 미국에 오면서 본격적으로 미국 이민 바람이 시작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 이민가는 사람들은 주변으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던 시기이다. 필라델피아 화엄사 신도인 정환순 박사가 김박사와 연세대 동기이다. 의대 졸업생들이 미국에 이민을 오려면 미국 의사시험에 합격해야 미국에서 렌지던트를 할 자격이 주어진다.  시험에 합격하고 레지던트 할 몇 개의 병원 중에서 김 박사는 시카고 병원을 선택하여  시카고로 오게 되었다. 시카고에 도착하자마자 4년간 산부인과 레지던트로 일했고, 1974년 개업을 하였다. 정법심 이경숙 보살은 미국 도착 전부터 계획을 세웠던 학업을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1970년부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로스 엔젤레스, 뉴욕, 시카고 등지에 한인사회가 형성되기도 전이었다. 1970년에는 미국에 한국 스님이 단 한 명 뿐 이었고, 시카코 불타사는 1974년에 신도들이 개원하였다.  인터넷으로 온갖 정보를 알 수 있는 요즈음과 달리 당시 이민자들에게는 미국에 대한 정보도 부족하여 꿈에 그리던 미국에 도착하여도 정착에 큰 어려움을 겪던 시기이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교회, 사찰, 성당 등 종교 기관으로 우선적으로 달려가던 시기이다. 미국이민 과정에서 적응에 가장 큰 문제는 언어장벽과 미국의 법과 제도,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이해부족과 문화적 차이 등인데 김 박사는 미국인들로 이루어진 병원에서 근무하였고, 정법심 보살은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직장과 학교에서 이런 문제를 점차적으로 해결한 것으로 보인다. 

 


김 박사 부부는 1978년부터  불타사와 인연을 맺었다

 청주가 고향인 김 박사는 어머니가 절에서 기도로 얻은 아들이었지만 어머니는 김 박사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김 박사 여섯 살 때 별세하였다. 그러므로 어머니로부터 불교 영향을 전혀 받지 못하고 인천 제물포고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중. 고등 시절에는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큰 키의 김 박사는 연세대학교 2학년 때 까지 농구선수도 했다고 한다. 공부도 잘했지만 노래에도 소질이 많아서 고등학교 선생님은 김 박사에게 음대로 진학을 권유했다고 한다. 
정법심 보살의 아버지는 교사였다. 해방 이후 한 동안 한국에서는 중고등학교 교사는 대학교가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고, 교수진도 강사 위주여서 안정된 직장으로 한국사회에서 최고의 직장이었다. 아버지가 경기중학교 교감으로 있다가 개성 상고의 교장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였기 때문에 정법심 보살이 국민학교 1학년 생으로 개성에서 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이런 개성에서 어린 시절 추억도 있고 해서 정법심 보살은 2005년 미주현대불교 첫 번째 북한 사찰 순례에 동참하여 개성을 다시 방문하기도 했다. 살던 집은 현재 개성 한옥보존지역에 있는 한옥에서 살았다고 한다.  시카고에서 불교로 들어서기 전까지 한국에서 정법심 보살은  어린 시절 성당을 다니면서 오르간을 치고 영세도 받았으며, 기독교 재단에서 세운 이화여중고와 대학교를 다니면서 학교 수업시간에 기독교 교리를 열심히 공부를 하였으나  항상 질문이 많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청소년기에 두 사람은 대체적으로 교회와 성당에서 보냈다. 그 당시 한국사회 분위기는 불교는 청소년들이 활동한 공간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정법심 보살님의 어머님은 불교적이기는 하였지만 열성적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법심 보살이 대학교 졸업 후에 아버지가 암 투병을 하면서부터 어머니는 불교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학교의 학부모 회장 어머니로부터 정법심 보살 어머니는 후에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고암스님을 소개 받았다. 고암스님과 만남은 어머님이 본격적으로 불교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고암스님과의 인연은 이후 딸인 정법심 보살님에게도 이어졌고, 고암스님의 제자인 효경스님과도 이어졌다. 암 투병을 하던 아버지는 1970년 정법심 보살이 미국에 온 후에 별세하였다. 이에 고암스님이 아버지 장례를 위해 효경스님을 보냈고, 정법심 보살은 귀국해서 아버지 장례식에서 기도와 독경을 하던  효경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후  목동 법안정사를 창건한 효경스님은 시카고 사는 정법심 보살에게 불광 잡지를 7년 동안 보내주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법심 보살님과 어머니는 고암스님, 효경스님과 인연이 되었고, 정법심이란  불명과 남편의 학산이란 불명도 고암스님께 받았다. 하와이 대원사 대원스님이 고암스님의 제자였기 때문에 대원사 불사를 할 때에 하와이에 장기간 체류하셨고, 미국 본토에도 여러 차례 방문하였던 고암스님은 시카고도 방문하였고, 효경스님도 79년 시카고를 방문하였으며, 김 박사님 부부의 장남이 스님의 유발 상좌여서 98년 장남 결혼식 때도 시카고에  왔다. 

 


불타사와 인연

 


어머니는 아버지 별세 후 불교신앙에 열심이었지만 어머니는 한국에서 살았고, 정법심 보살은 미국에 살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정법심 보살의 신앙에 별 영향은 미치지 않았고, 효경스님이  7년간 보내준 불광잡지가 정법심 보살님의 무의식에 잠재된 것이 더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1978년 여동생 남편의 조카 딸이 시카고에서 사망하였는데 이 일로 정법심 보살이 장례식장을 오가다가 우연하게  불타사 간판을 보고 들어갔다. 거기에서 인환스님과 홍선스님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래서 장례식을 홍선스님을 초청하여 하였는데 스님이 여법하게 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조카의 49재도 불타사에서 하게 되었고 이런 인연으로 불타사에서 나가게 된 것이다. 당시 정법심 보살은 ‘American Conservatory of Music'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이 학교에서 공부하던 학생의 할머니가 불타사를 다니던 신도였다. 이 신도를 통해 홍선스님은 정법심 보살이 피아니스트인 것을 알고 홍선스님이 목에 두르고 있던 염주를 보살님께 걸어주면서 두 달 전에 사놓은 피아노 반주를 부탁하였다. 그래서 정법심 보살은 법회에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면서 불타사와 인연은 두터워지게 되었다. 보살님의 능력과 경력을  높이 산 홍선스님의 권유로 홍선스님 주지 시절인 1986년 6월 시카고 불타사 합창단을 창단하였다. 부인 정법심 보살이 이렇게 불교의 길로 들어가니까 남편 김 박사도 자연히 부인과 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 미국에 살면 부모 임종을 못 보는 경우가 많은데 김 박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한국에 가서 아버지 임종을 보았다. 아버지 장례식은 한국에서 했지만 시카고에서 살기 때문에 시카고에서 아버지 추모식과 장모님 추모식을 스님을 초청하여 불교식으로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부부가 불교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것이 계기가 되어 1978년부터 불타사가 웨스턴에 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불교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 시기는 미국의 한인사회는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찰, 교회, 성당 등이 전 미주에 들어서게 되는 시기였는데 특히 교회의 성장은 괄목 할만 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류 사회는 이와는 반대로 전 미주에서 불교 열풍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시기였다. 1950년대의 비트문화와 1960년대의 히피문화가 미국에 크게 유행하던 시기를 마감할 무렵인 1969년 미국에는 두 개의 역사적인 일이 있었다. 하나는 7월에 아폴로 11호가 사람을 태우고 달나라에 도착한 것이고, 또 하나는 8월 15일부터 4일동인 뉴욕에서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대규모로 열린 것이다. 역사적인 이런 큰 사건은 그냥 우주여행을 했거나, 모여서 잔치만 크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달나라  도착 후 새로운 우주시대가 열린 것이고, 2차 세계 이후에 미국의 물질문화 숭배에 반대하는 의미로 긴 머리와 이상한 옷 차림, 마약복용을 하던 젊은이들이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마치고 히피문화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난 것이다. 기존의 미국문화를 떠나 새로운 문화와 사상을 찾아 히피들이 대거 불교계로 들어오고 또 아시아로 순례를 떠나기도 했다. 이들은 아시아에서 스님이 왔다고 하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1972년 숭산스님이 미국에 왔을 때 젊은이들이 몰려 온 것은 이런 현상의 반영이었다. 1970년에는 스즈키 순륜의 ‘선심초심Zen Mind, Beginner's Mind’와 수륜스님이 만든 미국 최초의 산중선원인  타사하라 선원에서 만들어 삼발라 출판사에서 출판한 미국 사찰 음식 책인  ‘타사하라 빵만들기(The Tassajara Bread)'와 ’타사하라 요리법(Tassajara Cooking)이 엄청나게 많이 팔렸다. 이 책들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하게 팔리고 있다. 1970년에 미국불교사에 중요한 또 한 사람이 미국에 왔다.  티베트 출신 쵸감 트룽팡 린포체인데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불교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한인사회는 미국의 이런 흐름을 전혀 모르고 동굴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미국 주류사회의 영성의 방향에 대해서는 깜깜한 상태였다. 같은 시기, 같은 공간의 미국에서 미국의 주류 사회와 한인사회의 종교 방향은 정 반대로 가고 있었다. 
정법심 보살은 불타사에서 본격적으로 불교인으로서의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기독교 교리와 충돌하는 불교교리 때문에 한동안 어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기독교는 하나님 탓도 하지만 불교는 모든 것이 내 책임이므로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가르침에 점차로 자긍심을 느끼고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다.  기독교에 비해 이런 점이 좋아서 이후에 불교에 매진하게 되었다. 학창시절 기독교 교리에서 궁금했던 문제가 불교신앙생활을 하면서 의문이 풀렸다고 한다. 

 


찬불가 작곡을 시작하다

현성스님이 불타사 주지를 하면서 정법심 보살은 작곡가의 길로도 들어선다. 현성스님으로부터 천수경 작곡을 할 수 있겠느냐는 부탁을 받아 삼 주 만에 작곡을 마쳤다. 그 후에 반야심경도 작곡을 하였고, 요즘에는 조계종 사찰에서는 거의 부르지 않는 찬불가 곡도 다시 한국인 정서에 맞게 편곡을 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찬불가 작곡이 57곡이다.  노랫말은 현성스님 작사가 많고, 기존의 찬불가 노랫말, 관음예경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모았다. 한국불교계에서 이처럼 많은 작곡을 한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작곡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많이 듣는 유행가도 가수와 더불어 작사, 작곡이라고 하여 꼭 작곡가를 말한다. 음악 전문가들에 의하면 작곡을 하려면 타고난 재능도 있어야 하고 공부를 많이 하여야 한다고 한다. 
“제가 찬불가를 가르치면서 노랫말을 통해서 불법을 많이 배웠습니다. 저희는 노래를 하면서 화음이나 고운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찬불가 노랫말과 하나 되는 연습을 많이 합니다”라고 보살님은 말했다. 정법심 보살에게 찬불가는 단지 노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수행의 지침서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현성스님 주지 시절에는 독경 대신에 정법심 보살이 작곡한 찬불가로 천수경, 반야심경 등을 노래로 하면서 법회를 하였는데 독경을 원하는 신도들의 요청도 있고 해서 성향스님이 주지로 취임한 2014년부터 다시 독경으로 돌아갔다.

 

벽에 걸린 연주회 사진과 박사 학위 증명서



음악의 길

정법심 보살님은 어린 시절 6살 때 부터 피아노를 쳤고, 대학에서도 피아노를 전공하고, 미국에 와서도 ‘American Conservatory of Music'에서 Doctor of Musical Arts 라는 피아노 박사를 받았다. 이 학교에 한국인 졸업생이 많은데 현재 학교는 재정난으로 폐교한 상태라고 한다. 미국에 오기 전부터 유학을 꿈꾸던 정법심 보살님은 미국에 도착한 직후부터 학교에 등록하여 1970년부터 학교에서 피아노 공부를 하여 1979년 석사, 1991년 박사를 받았다. 또 이 학교에서 5년간 교수로 재직을 하였다. 그리고 1979년에는 9월 15일에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귀국 독주회를 했는데  이 연주회는 KBS에서 TV로 중계를 하였다.  1991년 박사를 받은 후에는 호암 아트홀에서 독주회 공연을 하여 음악 평론가들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동안 미국 한국사찰에서 찬불가를 이끌던 사람들이 여러 사람이 있었지만 정법심 보살의 학력이 가장 좋다. 또 현재 미주한국불교계의 합창단은 정법심 보살님이 이끄는 불타사 합창단이 유일하다. 

노래에 소질이 있던 김 박사는 미국에 와 개업한 이후인 1977년부터 테너 도널드 도익, 월터 키르체프교수, 1981년부터는 루즈벨트 음대에서 로버트 롱 교수에게 지도를 받는 등 20년간 매주 토요일 한 시간씩 지도를 받았다.  “언제부터인가 내 잠재의식 속에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또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참으로 행복함을 느낍니다.” 노래하는 동안에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또 직업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었다고 한다. 의사라는 전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왜 시간을 들여 전문적인 성악을 공부했을까 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는 설명이었다. 
이런 음악적 배경을 가진 부부는 1980년대에 많은 발표회를 했는데 80년대에 시카고에서 한 발표회를 대략 정리해 보면 1984년에는 시카고 공립도서관 문화센터에서 ‘불타사 건립기금 모금 리사이틀’을 부부가 함께 해서  수익금 7천 달러를 모았다. 김 박사는 1986년 6월 7일에는 힌스데일 오디토리움에서 정법심 보살의 반주로 솔로 독창회를 하였다. 이 독창회에는 아리아 12곡을 열창하였고 공연회에 700명 가량의 청중이 왔다고 시카고 중앙일보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 1986년 10월에 정법심 보살은 ‘알바니팍 교향악단’의 제 2회 정기연주회에 그리그의 피아노 콘체르토를 협연하였고, 1988년에는 성남시의 ‘자광양로원’돕기 위한 두 부부의 자선 음악회를 ‘North park College의  오디토리움 넥쳐 홀’에서 가졌다. 

 

불타사 합창단. 위 왼쪽 첫번째. 이경숙 단장, 아래 오른쪽부터 2번째 김택영 박사



신앙생활의 자세 

전문 직업을 가져 생활도 안정된 가정이고, 사찰에서 봉사도 열심히 하는 이들 부부에게 홍선스님과 신도들은 큰 신뢰를 보냈고 불타사에서 중요 직책이 맡겨졌다. 김 박사는 홍선스님 시절에 오랜 기간  이사장직을 맡게 되었다. 현성스님이 주지 취임 후에는 이사회를 없애고 법등회를 만들어 현성스님이 법등회 회장을 하면서 이사회가 해체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사장직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현재는 감사로 있다. 정법심 보살은 신도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합창단 단장으로 합창단을 이끌고 있으며 법사로도 활동을 한다. 
1978년부터 불타사에 다니고 있으니 2021년 기준으로 43년을 다닌 것이 된다. 그 동안 홍선스님부터 화랑스님, 현성스님, 성향스님, 선정스님 등 많은 스님들이 불타사에 거쳐 갔지만 불타사에 깊이 관계가 되어 있고 중요한 신도인 두 부부는 어떤 스님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평이 있어서 그 비결이 좀 궁금했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호.불호가 있기 마련인데...... 
정법심 보살님에게 합창단을 어떻게 이끌고 있는 원칙을 듣고 그 의문이 해소되었다.  보살님은 합창단 단원들에게 절대 단원 모집에 있어서 강요하지 않는다고 한다. 함께 해보자고, 할 수 있다고 가벼운 권유를 하지만 오랫동안 헌신한 단장이라는 권위도 내세우지 않고, 당신이 꼭 해야 한다는 압박도 없다. 그 사람의 의사에 전적으로 맡긴다. 스님들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주지 스님이 와서 전임 스님과 다른 방향으로 해도 그 스님의 의사를 존중한다. 공동체에서 자기 의견과 다르다고 시끄럽게 하는 것은 이 두 부부는 원치 않았다. 남이 하는 이것이 쉽게 보이지만 애정이 있는 단체에서 막상 내가 이렇게 처신하려면 쉽지가 않다. 내 의사를 반영시키려고 하고, 내 뜻대로 하기를 바라면서 갈등이 싹튼다. 두 부부의 삶의 태도는 불교적으로 한 마디로 표현하면 화엄경에서 추구하는 ‘조화’이다. 어느 스님은 법성게 설법을 하면서 “젊은 사람들이 개혁을 부르짖지만 개혁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조화이다. 개혁과 조화가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이 조화가 실제로는 매우 어렵다.”  

 


기도, 수행, 가피

 

정법심 보살이 한 금강경 사경


한국의 불교테레비젼방송국인 BTN에서 가피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불교신앙생활을 하면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기가 어려운 일을 체험한 사람들의 경험담이다. 주변에서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법화경 사경을 해서 이런 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정법심 보살님도 이런 경험을 두 번 정도 체험을 하였다. 1986년 불타사가 현재의 장소로 이전을 하고 불상점안식을 하면서 복장에 신도들 사경을 넣었다. 정법심 보살님도 이때 처음으로 사경을 해서 복장에 사경을 넣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사경을 하게 되었다. 피아노는 손으로 치는 것이기 때문에 손이 감각이 뛰어나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정법심 보살님은 사경에 많은 소질이 있는 것 같다. 미주현대불교는 2020년 사경으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인간문화재가 된 김경호 선생을 미국에 초청해서 사경 전시와 강의를 많이 하였고, 나는 한국에서도 김경호 선생과 회원들의 사경 전시회에 여러 번 참석하면서 뛰어난 사경가들의 작품을 볼 기회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수행의 한 방법으로 사경을 하는 많은 분들의 작품을 보았다. 그중에서 어떤 분들의 사경한 작품을 보면 아주 뛰어난  소질이 있는 분들이 있었다. 정법심 보살님도 그런 분 중의 한 분으로 보이는데 사경을 할 때 볼펜이나 붓펜도 아닌 먹물에 붓으로 한다고 한다. 세필로 쓴 금강경 작품은 글자 크기와 자간도 균등하고 많이 연습한 사람이 쓴 것으로 보였다.  
옥부륵Oak Brook에 있는 김택영, 이경숙  보살님의 저택은 겉보기 보다는 훨씬 크다. 안에는  실내 수영장도 있고 작은 연주 홀도 있다. 이 연주 홀에서 피아노 연습과 노래도 하고, 찬불가 팀들도 초청하여 파티도 가끔 한다. 그런데 이 연주 홀에는  균형이 잘 잡히고, 상호가 아주 뛰어난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고, 보살님의 금강경 사경 작품도 한쪽에 걸려 있었다. 관세음보살상은 한국에서 직접 이상백 불상조각가에게 주문한 작품이다. 또  좋은 작품 몇 점도 소장하고 있는데 이 방자 여사의 ‘화(和)’라는 서예 작품이 벽에 걸려있었고, 불교신자였던 어머니가 경봉스님에게 받았다는 경봉스님의 달마도도 있었다. 또한 보살님이 뉴욕 원각사에서 활동했던 법안스님에게 직접 받은 청송완학(聽松玩鶴)이 전각으로 걸려있다. 이것은 음악을 하는 정법심 보살에게 법안스님이 준 글씨로 ‘마음이 고요하여 소나무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정법심 보살은 찬불가 지도도 열심히 하지만 금강경을 비롯한 사경을 열심히 하였다.  그런 때문인지 내 보기에는 ‘가피’가 있었다. 1991년 박사 필기시험을 시작하는 날  2층에서 효경스님이 준 조그만 불상을 모시고 기도를 하였는데 촛불을 켜는 순간 ‘방하착’이란 소리가 들렸다. 방하착이라는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아라, 또는 마음을 편히 가지라 라는 뜻이다. 당시 정법심 보살에게 이 말은  박사 시험이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뜻으로 필자는 해석한다. 시험은 3일간으로 피아노 실기 시험이 아니라 필기시험이었다. 시험이 시작되어 두 문제 논문을 쓰는데 글이 저절로 술술 써졌다. 한 두 문장이 아니라 몇 시간에 걸쳐 논문이 자연스럽게 마치 외운 문장을 쓰는 것처럼 쓰여 졌던 것이다. 본인도 신기하게 생각되는 시험이었다. 본인의 실력이 마음껏 발휘되었고, 그 이상이 저절로 나왔다.  원래 시험시간이 지나도록 많은 분량의 글을 썼다고 한다.  또 음악을 듣고 분석하는 글을 쓰는 시험이었는데 처음 듣는 곡이 나왔는데 아주 깨끗하고 뚜렷하게 들렸기 때문에 잘 분석해서 글을 잘 쓸 수 있었고 무사히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온 사람들은 특히 영작에서 어려움을 많이 느낀다. 정법심 보살님이 긴장하지 않고, 방하착하여 가지고 있는 실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부처님의 가피가 있던 순간으로 판단된다.  미주현대불교 주최 사찰 순례 행사에 세 번이나 참가하였고 시카고를 갈 때 마다 보살님을 만났지만 한 번도 본인이 박사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는 최근에야 음악 박사라는 것을 알았다. 

 

       집에 있는 작은 연주홀                                                        작은 연주홀에 있는 관음보살                      


또 한 번의 신기한 체험 불타사 수다원 참선 시험

시카고 불타사에 2002년 주지로 부임한 현성스님은 2017년 입적할 때 까지 오랜 기간 활동한 스님이다. 이 스님 주지로 재임기간에 공간을 늘리고, 한글학교를 만들어 많은 학생들이 오게 하였고, 불타예술제를 개최하여 문화적 포교를 시도한 점 등 많은 업적이 있다. 이 현성스님이 시도한 것 중에 하나가  신도들 중에서 자질 있는 사람을 선별하여 교육을 시켜 법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 법사들은 스님 유고시에 스님을 대신하여 법회를 담당하게 하는 것이었다. 현성스님의 이런 예상은 탁견이었는지 불타사에는 5년간 주지를 하던  스님이 한국으로 떠나고 새로운 주지 스님이 아직 부임하지 못해서 법회를 할 스님이 없었다. 그래서 지난 9월 12일에는 스님을 대신하여 정법심 보살님이 법회를 이끌게 되었다. 
 
정법심 보살은 현성스님에 의해  원인식 거사와 더불어 선발되어 교육과 훈련을 받고 ‘수다원’이 되는 시험을 치루는 과정을 거쳤다. 수다원은 금강경 제 9분에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는 말이 차례로 나온다. 수다원은 깨달음의 경지에 막 들어선 사람, 수다함은 한번만 더 욕계에 환생하면 열반을 얻을 사람, 아나함은 욕계의 번뇌를 이미 끊어서 다시는 욕계에 돌아오지 않고, 색계나 무색계의 번뇌를 끊고 열반을 얻을 사람,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끊어서 바른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 보살행을 강조하는 대승불교와 달리 남방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에서도 이 ‘수다원’에 대한 것이 있다.  수다원이 되는 조건은 네 가지이다.  1)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하고, 2)훌륭한 법문을 들어야 하고, 3)정확한 수행방법을 실천 수행해야 하고, 4)여래가 설한 수행법 그대로여야 한다. 
현성스님은 아마도 금강경에서 ‘수다원’을 가져온 것 같다. 정법심 보살은 불교신앙생활을 하면서 불타사 스님들의 지도도 받고, 또 한국의 마음수련회 등 수행단체의 수행에도 참여하면서 수행에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2005년 11월 불타사 무설전에서 현성스님으로부터 수다원 참선시험을 보았다. 현성스님과 무설전에서 둘이 마주 앉아 스님이 죽비를 치고 같이 30분간 참선에 들었다, 

 

스님을 대신해서 불타사 법회를 집례하는 이경숙 정법심보살


아래는 정법심 보살이 그날의 참선 시험을 직접 정리한 글이다. 참선을 시작하여 끝날 때 까지의 약 30분간의 체험담이다. 참선의 주제는 ‘미간으로 단전을 보라’였다. 
참선 후 스님께 경험을 얘기하고 다시 아래 글을 적어서 보냈다. 
1. 몸을 없앤 후 미간으로 단전을 내려다보니. 내 머리 미간 위로 관세음보살의 화려한 금관이 씌어져있고, 그 밑으로는 훤하게 뚫려 허공이다. 
2. 나를 절벽 위에 앉혀놓고 다시 없애고 나니, 절벽은 없어지고, 허공에 내가 과히 크지 않은 스님 모습으로 가부좌를 하고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데, 반대편에서 밝은 빛 줄기들이 뻗쳐오며 온 천지가 광명으로 싸여있다. 앉아있는 스님 뒷모습도 하얀 광명이다.  
3. 다시 없애고 나니 이번에는 온 우주를 꽉 찬, 큰 모습의 찬란한 큰 금관을 쓴 금불상인 관세음보살로서 하나 되어있다. 자꾸 깨어버려도 부수는 순간에는 조각조각 파편으로 부서져 흩어지며 허공이 되었다가 다시 제 모양을 갖춘다. 
4. 이번에는 지난 번 중국에서 사온 관세음보살 상 같은, 머리에 부드러운 스카프를 내려뜨린 모습으로 온통 맑고 짙은 푸른 보랏빛(indigo color)의 관세음보살로서 아주 화려한 법주사의 팔상전 같은 웅장한 사원 앞에 거의 사원을 가릴 정도의 큰 모습으로 앉아 있다. 
5. 이번에는 아주 경치가 좋은 위에 산이 있는 절벽 밑으로 길이 나 있고, 그 길을 이어서 멀리 오른쪽으로 구름 돌다리가 길게 있고 그 끝 쪽 숲 속에 찬란한 단청을 한 전각 윗 부분이 보인다. 
6. 입에 모인 침을 삼키고 나니 꿈에서 깨어나듯이, 위 층에서 연습하는 사물놀이의 꽹가리 소리에, 내가 하나 되고 북소리에 하나 되어 내 빈 가슴을 울린다. 
7. 갑자기 불타사 무설전 몬트로스(montros)쪽 벽이 휙  빨려나가듯이 환히 뚫리며 북경 자금성에서 본 것 같은 돌로 깔아진 넓은 대로가 끝없이 펼쳐져있다. 확실치는 않은데 그 밑으로 다리인지 내(川) 도 흐르는 것 같고,  30분을 알리는 괘종 소리에 참선에서 나온다. 

불교는 선교일치를 추구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교리를 잘 아는 것 못지않게 몸으로 하는 수행이 중요하다. 그런데 대부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만 죽비 소리에 맞추어 참선을 하게 되면 온갖 잡념이 떠오르고 때로는 잠이 오기도 하여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래서 집중하지 못하고 잡념과 싸우고 잠과 싸우다보면  시간이 다 지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정법심 보살은 참선시험에서 매우 빠르게 마음집중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전생부터 불교신자였던 것이고, 여기에 수행을 열심히 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정법심 보살님은 원거사님과 함께 사다함, 아나함과를 받았고, 신 심광거사는 사다함과를 받았고 여섯 명이 수다원과를 받았다. 

김 박사님은 병원에서 일하느라 미주현대불교에서 주최한 성지순례 여행에 동참한 적은 없지만 정법심 보살님은 2000년대 초 인도성지 순례, 2005년 제 1회 북한 사찰순례, 2011년 실크로드 순례 등에 동참하였다.  여러 번 미주현대불교 행사에 참가한 정법심 보살님은 지금 생각해 보면 불교교리와 수행, 역사적인 불교 성지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이런 순례 여행이 보살님의 불교신앙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 미주한국불교계는 신도확보에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불타사는 다행이 한글학교, 합창단, 한국과 교류 프로그램 등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시카고 불타사는 미주한국불교계에서 동부와 서부를 이어주는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있다. 학산 김택영, 정법심 이경숙 보살 부부의 삶은 불타사의 중요 직책을 맡아 봉사도 하면서 사경 가피도 체험하고 , 57곡의 찬불가 작곡도 하는 등 불교계에 공헌도 많이 하였다. 압축해서 표현하면 인생에 음악을 싣고 불교를 노로 삼아서 50여년을 성공적으로 살아온 삶이다. 이제 두 부부는 림대지 거사, 홍인한 불타사 신도회장 등과 더불어 시카고 불교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고, 주변의 존경을 받고 있는 두 분은 앞으로도 시카고 불타사가 미주 한국불교를 선도할 수 있도록 젊은이들에게 계속적인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기를 기원한다. 


장소와 날짜: 2021년 9월 12일 시카고 김택영.이경숙 자택

 

                                  2005년 북한 사찰 순례시 기념촬영. 맨 오른쪽 정법심보살  /  2011년 비단길 순례때 법문사 탑에서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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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밤과꿈 | 작성시간 22.05.01 부럽고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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