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획연재 - 미국의 여성 불교 >
사막의 도시 라스베가스에 한국불교를 심는 학림사 오등선원 라스베가스 성진포교원 이 대덕화 포교사 |
글 / 김형근(본지 편집인)
전통적인 한국 불교계의 대보살님들은 굳건한 신심으로 정기법회에 참석할 뿐만 아니라 수시로 사찰에 나가면서 불사에 적극 참여하며 스님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호법신장들이다. 미국에서도 대부분의 한국사찰에는 이런 분들이 있다. 이런 보살님들이 한국불교계의 기둥이고, 지금도 주류 세력이다.
미국 주류사회 불교계에서도 여성불교인들이 많다. 재정후원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한국불교계에서 볼 수 없는 역할이 있다. 미국의 여성불교인들은 학력이 높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이들이 선원이나 신행단체에서 하는 역할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통 불교국가 여성 신도들과는 다른 면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법을 전하는 법사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운영하는 예를 들어 샌프란시스코 선원, 샴발라센터를 비롯하여 많은 선원이나 명상센터에 가면 이런 여성 지도자들이 많이 볼 수 있고 취재를 가보면 여성 지도자들이 나오곤 하였다.
미주한국불교계에도 많지는 않지만 전통적인 대보살님들과는 다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 새로운 형태의 보살님들을 이 시대의 대보살님들이라 생각한다. 이들은 모임을 이끌면서 부처님 법을 전하는 일을 오랫동안 꾸준하게 하고 있는데 한결같이 수행을 하며 불교 교리도 잘 알고 있다. 라스베가스 이 대덕화 포교사, 로스 엔젤레스 김소연 약사, 뉴욕 최숙희 보살, 시카고 김경숙(정법심) 보살님 등 몇 사람이 눈에 띈다. 이들은 명상수행뿐만 아니라, 경전읽기, 사경 등 각자에 맞는 수행을 한다. 그리고 불교의 저변확대와 불교의 가치를 높이는 일을 오랜기간에 결쳐서 꾸준하게 하면서 좋은 호응을 받고 있다.
한국불교계에서는 불교 박사, 교수, 포교사 등이라도 출가하지 않은 머리를 기른 사람들이 사찰을 운영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출가를 했다가 환속을 한 사람들, 불교를 전공한 사람들, 신심있고 재정 능력있는 많은 사람들이 로스 엔젤레스, 메릴랜드, 텍사스, 콜로라도 등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의욕적으로 사찰을 열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들은 대부분 사찰을 시작한 것을 나중에 후회하고 지금은 아예 불교계에서 사라진 사람들도 있다. 재가자에게 사찰이나 포교당 운영은 그 만큼 어려운 일이다. 지금 미주한국불교계에서 재가자 신분으로 사찰을 운영하는 사람은 켈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법보선원을 이끄는 정정달 법사와 라스베가스 학림사 오등선원 성진포교원 이 대덕화 포교사 두 사람 뿐이다.
라스베가스에서 활동하는 이 대덕화포교사는 분명 미주한국불교계에서 매우 독특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포교사를 만나본 모든 사람들은 이 포교사가 불교포교를 매우 헌신적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한다. 미주한국불교계는 지금도 스님이 부족하고, 앞으로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 포교사의 활동이 미주한국불교계 활동가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대덕화 포교사의 활동을 소개한다.
이귀남(불명 대덕화)는 1956년 생으로 부산 기장이 고향으로 집안 대대로 불교 집안이고 여동생이 스님이기도 하다. 현재 슬하에 1남 2녀에 손자 손녀가 5명이다. 이 포교사의 미국생활은 40년 전인 1982년 8월에 남편 Stephen De Schutter와 아들 John(한국이름 이광식 현재 라스베가스에서 16년째 경찰 간부로 근무 중)을 업고 시댁인 있는 아리조나 튜산에 도착하면서 시작했다. 그 후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켈리포니아 북쪽 새크라멘트 근교 노다이(Lodi)에서 1986년부터 1994년까지 8년간 살았다. 이 곳에 살 때 여동생 희덕스님은 당시에 서울 삼각산 승가사에서 수행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희덕스님이 언니 대덕화 보살을 위해 거해스님의 위빠사나 수행 설법 테이프를 보내주었다. 당시 이 포교사는 불교 수행을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몰랐다. 도를 깨닫기 위해서는 일어나는 생각, 잡념을 가라앉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생각을 가지고 살던 중에 거해스님의 설법 테이프를 듣고 위빠사나 수행을 몇 달을 한 후에 내가 나를 제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한번 해보자고 결심을 했다. 이 테이프를 듣고 이 대덕화 포교사가 발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021년 2월에 미국에서 입적한 거해스님은 부산 범어사 출신으로 1970년대 초에 미얀마와 태국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한 스님으로 한국불교계에 남방불교를 가장 먼저 소개한 스님이다. 1980년대 미국에 건너 온 거해스님은 텍사스와 L.A. 관음사 등에서 수행과 포교를 하였다. 이 대덕화 포교사가 거해스님 테이트를 듣고 위빠사나 수행을 할 당시 거해스님은 샌프란시스코 보림사(당시 주지 선우스님)은 잠시 머물고 있었다. 그 당시 이 포교사는 영화스님이 창건하여 주지로 있던 새크라멘토 영화사에 다니고 있었다. 이 포교사는 영화스님과 상의하여 거해스님을 초청하여 1993년 12월에 여동생 대원심 보살과 함께 거해스님으로부터 남방식 오계를 받았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금강경 독송이 좋다고 하여 금강경을 독송도하였다. 그렇게 지내던 1994년 어느 날 한글 금강경을 독송하던중 “상에 집착하지말고 본래마음 그대로 흔들리지 말지니라”라는 대목에서 본래마음? 이 대목에서 의심이 생기는순간 고개를 들어 창문 밖으로 보이는 뒷뜰 정원 모습을 보는 순간 상을 뛰어넘는 한 차원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사념처에 마음집중하는 위빠사나 수행법에서 화두선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곧바로 한글로 된 계송한 귀절을 지어한국에 선방에 안거중인 동생 희덕스님께 보내게된다. 희덕스님은 이 계송을 여러 제방 선사님들께 보내게되고 그래서 점검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희덕스님은 수덕사 견성암 출신으로 오직 참선 수행의 길을 걷는 스님인데 언니 대덕화 포교사 게송을 받은 후 선지식들에게 점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 게송을 복사해서 여러 큰스님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 중의 한 스님이 청화스님이다. 그런데 청화스님께서 미국에 오셨다. 스님께서 켈리포니아 팜스프링 금강선원에서 묵언수행을 들어가기 전에 대덕화 포교사와 연결이 되어 1995년 3월과 4월 세 차례에 걸쳐 편지로 친절하게 점검해 주셨다. 이 포교사는 “아주 아주 자상하게 수행자가 정확하게 내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셨다. 그 후에 청화스님께서는 묵언수행을 하면서 편지로 3년에 걸쳐 나의 수행을 지도해 주셨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 수행을 하면서 이 포교사는 아이 세 명을 학교에 보내고 탁발수행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라스베가스 맥크린 국제공항에서 비행기 청소와 사우스 웨스트 항공사 사무실 전체를 청소하는 삼년의 힘들고도 보람 있는 수행을 마치고 금강선원 청화스님을 친견하려고 연락하였지만 스님은 이미 한국으로 떠나신 후였다. 결국 청화스님을 친견하지 못했다. 이 포교사로서는 매우 아쉬운 순간이었다. 이 포교사는 삼년 탁발수행을 끝내고 실버톤 호텔 방청소 및 카지노 청소부로 수행의 자리를 옮겼다.
언니의 수행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던 희덕스님이 대덕화 포교사가 한국으로 와서 선지식들에게 점검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이 포교사는 1998년 14살인 큰딸 엔지와 함께 한국에 갔다. 당시 희덕스님은 논산 법계사에 있었는데 먼저 진제스님을 친견하자고 하였지만 당시에 진제스님께서 대구 동화사에 계셨기 때문에 거리와 시간이 맞지 않아 대덕화 포교사는 희덕스님과 오빠, 올케와 함께 논산에서 가까운 공주시 학림사 오등선원으로 향했다. 학림사에서 희덕스님이 이 포교사를 소개하자 대원스님은 좌복에서 몸이 위로 올라갈 정도로 크게 놀랐다고 한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람을 만나서 놀랐워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 포교사는 라스베가스 집으로 돌아온 후 7개월 후에 대원스님을 스승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하고 스님께 전화를 드렸다. 이로부터 이 포교사는 대원스님과의 운명적인 인연이 시작된다. 대원스님께서 금강경 사구게를 놓고 철저히 점검해 주었다. 일 년 후인 2000년 4월에 이 포교사 가족은 대원스님을 초청하여 라스베가스의 ‘모하비 데즐트 젠 센터-현재이름은 Zen Center of Las Vegas(대명사)의 지도법사인 탐 페스톨(Thom Pastor) 법사와 함께 대원스님 초청법회를 열었다. 이후 2년 후인 2002년 9월에 북가주 헤이워드(Hayward)에 있는 보현사(주지 현묵스님) 창립 10주년 기념 및 천일지장 기도 회향 및 보살계 법회에서 대원스님으로부터 대덕화란 법명으로 보살계를 받았다.
대원스님과 뗄 수 없는 법연을 맺은 이 포교사는 2001년 6월 아들 쟌과 딸 앤지와 보리수를 데리고 한국 학림사 시민선방에서 하안거를 하기 위해 떠났다. 남편을 제외하고 온 식구가 다 한국으로 간 것이다. 하안거를 한 후에 하안거수료증을 받은 후에 해운정사에서 진제스님도 친견했다. 이 시기에 실버톤 호텔방과 카지노에서 청소하는 수행을 하고 있었다. 5년의 청소 수행을 마치고 2004년 11월 블라지오 호텔 청소부로 탁발수행의 자리를 옮겼다. 그때는 종업원이 2만 명이나 되는 대형호텔이었다. 여기에서 3년을 마지막으로 2008년까지 장장 10년의 탁발수행을 끝으로 집 거실에서 참선 수행에 들어갔다.
이러는 중에 대원스님은 미국과 인연이 동부로 이어졌다. 2003년 10월에 동부 메릴랜드 주에서 대덕사를 창건한 청암거사와 명진행 보살님으로부터 대덕사를 헌납을 받아 ‘미주 학림사 오등선원’으로 개명을 하였다. 대원스님은 이 포교사에게는 처음에는 그냥 공부만 하라고 했는데 2003년 11월에 대원스님으로 ‘오등선원 라스베가스 포교당’ 개원을 허락받고 ‘모하비 데즐트 젠 센터’에서 탐 법사와 이 선원의 회원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마다 3년간 기도를 하기로 하였다. 당시 젠 센터는 상가 건물이었는데 오등선원 포교당에서 법회를 마치고 한국사찰 하는 것과 같이 참석자들에게 점심공양을 제공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한국신도들이 한 달간 법회를 하는 것을 본 대명선원 미국인 신도들이 무료로 점심을 제공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안된다고 나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곳에서 세 달간 모임을 한 후에 독자적으로 세를 얻을 재정 형편이 안되어 이 포교사는 남편의 허락을 받고 2004년 초에 이 포교사 집 일층으로 포교당을 옮겼다. 부처님 법을 알리는 일을 공개적으로 시작하자마자 중단을 할 수는 없었다. 예상치 않은 일로 이 포교사 집 거실에서 매주 화요일 법회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대원스님은 2002년 미국 방문 후 2006년에 다시 미국에서 초청받아 방문하여 메릴랜드 학림사 오등선원과 북가주 산호세 팔로아토 DE Anza College 그리고 로스 엔젤레스 전등사 등에서 설법을 하였다. 또 2010년 대원스님은 이 포교사에게 학림사 오등선원 미주포교사 제1호로 임명장을 주었다. 후속조치로 대원스님은 이 대덕화 포교사가 이끌고 있는 라스베가스 소재 오등선원 포교당에 성파스님을 한 달간 파견하여 봉축법회를 준비하여 2013년 5월에 부처님 오신 날 봉축행사를 하게 되었다. 대원스님은 2015년 텍사스 달라스 보현사, L.A.달마사, 테하차피 태고사, 라스베가스 학림사 오등선원에서 순회법회를 한게 마지막이다. 지금은 코로나 시절이라 언제 다시 미국 방문길에 오르실지는 모른다.
라스베가스는 관광지가 많고, 카지노와 호텔이 많아서 직장이 많아서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 이민자들이 꾸준하게 유입되는 지역이다. 이런 지역이기 때문에 1980년대 달마사를 비롯하여 그 후에도 LA 관음사(주지:도안스님) 라스베가스 포교당 관음사, 운주사, 삼미정사 등으로 여러 한국사찰이 전법의 등불을 이어져 왔지만 2004년에는 한국 사찰이 없던 시기였다. 엉겹결에 이 포교사가 중심이 되어 가정집에 간판을 단 학림사 오등선원 포교당이 이 전법의 등불을 다시 높이 든 것이다.
밖에 풍경이 하나 달린 가정집안으로 들어가면 벽에 백용성스님, 고암스님, 대원스님 등 학림사 오등선원과 인연 깊은 스님들의 사진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보통 가정에서 거실로 사용하는 공간을 삼존불을 모신 불단과 후불탱화를 모신 신중단을 만들었다. 또 뒤쪽에는 법회용 책과 전단들이 책상위에 놓여져 있다. 한인들이 맨 처음 이민 와 가정집을 세를 얻어 시작한 1970년대 사찰 분위기와 꼭 같다. 이곳이 라스베가스 한국불교인들 신앙생활의 중요한 거점인 것이다. 식구들이 사는 가정집에 이렇게 포교당을 꾸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하려면 먼저 집 식구들이 모두 동의해야 한다. 이 포교사는 남편의 동의하에 시작하였지만 남편 외에도 세대차이도 있고 한국과는 종교 환경이 완전히 다른 곳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한 자식들도 있다. 자식들도 성장을 하면서 중학교 정도 진학하게 되면 부모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지 않는다. 미국에서 교육은 받은 2세들은 민주, 평등, 자유 이런 생각에 몸에 배어있어 무조건 부모를 따르라고 하면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스님이 아닌 포교사인 재가 신자가 포교당을 운영하려면 시작하기 전에 먼저 가족들에게 설명을 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일에 솔선수범해야 한다. 법회를 하는 날에는 라스베가스 이 곳 저 곳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픽업하고, 끝나면 또 모셔다 드렸다. 법회 준비도 해야 하고, 음식도 준비해야 한다. 또 부처님 오신 날, 백중, 추석, 동지 이런 날에는 스님들을 초청해서 행사를 해야 한다. 스님 섭외도 해야 하고, 오시는 스님들의 여비와 보시금도 준비해야 한다. 신도들의 협력을 얻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일들을 오래 하려면 무엇보다도 인내를 필요로 한다.이 포교사는 포교당 운영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 보았다. 이런 힘든 일을 헌신적으로 하는 것을 지켜보는 식구들은 이 포교사를 다는 이해를 못하만 실천으로 보여주니까 이 포교사를 신뢰하고 협조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 포교사는 “부처님 공부를 해서 마음이 편하고 평화로운 기운이 가정에 퍼지니 남편이 신뢰하고 많은 도움을 준다”고 남편의 협조를 전한다. 이런 분위기를 보면서 자라고 있는 손자, 손녀들은 분위기가 되면 목탁도 치고, 석가모니불도 한다. 불교 일을 헌신적으로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자식들을 법회에 참석시키려고 노력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포교사의 아들과 딸들은 어머니의 뜻에 잘 따르고 있고 아직은 어린 손자. 손녀들은 불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있다.
가정집에서 법회를 하니 부처님 오신 날을 비롯해서 백중, 추석, 동지 등 중요 불교계 중요 행사를 할 때마다 장소가 협소해서 항상 문제가 되었다. 어렵게 집에서 17년간 법회를 하다가 학림사 오등선원 성진포교당은 2021년 5월 4일부터 대명선원 탐 법사의 소개로 차야 수도원에서 처음 법회를 하였고, 매주 화요일 이곳에서 법회를 하고 있다.
이 포교사는 1995년부터 라스베가스에 2022년 현재 27년을 살고 있다. 한 세대를 살고 있는 것이고, 아리조나, 캘리포니아를 거쳐 살고 있는 라스베가스가 제 2의고향이 되었다. 이곳에 사는 자손들도 많다. 이런 이유로 이 포교사는 라스베가스에 한국불교가 뿌리를 깊게 내리기를 서원을 세웠다. 그의 서원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