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진호의 도미 자료 발굴
성원 스님
버지니아 연화정사 주지
코스탈 캘로라이나 대학 교수
일본대학 예술과를 1925년 봄 졸업한 쌍계사의 도진호 (b. 1889) 는[1] 1930년 7월 7일 서울을 출발하여 7월 9일 요코하마 항에 도착하였고, 7월 11일 일본의 요코하마 항을 출발하여 7월 18일 하와이의 호놀루루 항에 도착하였다. 스님은 정토진종 서본원사파[2] 하와이 별원 불교청년회가 주최한 범태평양 불교청년대회 (7월21일-26일) 에 한국대표로 참여하였고, 그 인연으로 조선문고 설립과[3] 한국불교 포교를 위해서 1931년 8월 21일 하와이를 향해 서울을 출발하였다.[4] 하와이에 도착한 이후 하와이에 고려선사를 창건하였다고 스님 자신이 주장하였지만,[5] 필자는 그 주장의 진위를 입증할 구체적이고 객관적 자료와 확실한 증인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도진호는 순천에서 1889년 출생하였고, 그 당시 42세의 나이로 미국 이민을 목적으로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하와이로 왔다. 1931년 7월 6일 서울에서 N.Q.1 미국 비자를[6] 발급받은 후, 그는 8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였고, 8월 25일 호놀루루행 배 (타이요 마루) 의 2등칸을 타고 고베 항을 출발하여 호놀루루를 향했고, 9월 5일 호놀루루 항에 도착한 것 같다.[7] 그는 미국 이민 자료에 영어와 일본어를 읽을 수 있다고 되어 있고 승려로 기재되어 있다. 그는 그 자료에 기혼자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필자는 본인이 먼저 하와이에 이민을 와서 하와이에 정착한 이후 본인의 가족들을 하와이로 초청하였다고 추정한다.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운동 이후, 한국의 주요 본사들은 각 본사 소속의 스님들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의 선진 불교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일본의 대처불교를 받아들여, 상당수의 일본 유학승들은 유학 기간 중 또는 유학 이후 결혼을 하였다. 1925년 무렵에는 그들은 대처승들도 주지를 할 수 있도록 법제화를 본격적으로 시도하였고, 기존의 원로승들은 그들을 매우 비판하였다. 그렇지만, 각 본사들은 1926년부터 총독부의 격려와 승인 아래 대처승 제도를 법제화하기 시작하였다.[8] 필자는 도진호도 대다수의 일본 유학승들과 같이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아들여 대처를 했다고 보고 있다.
도진호가 호놀루루에 도착하기 이전인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면서, 개화파로 활약하였던 봉은사의 월봉 스님이 일본을 거쳐 하와이에 들어왔다고 전해지고 있다.[9] 그리고 일본 유학 출신으로 월북작가 홍명희 (1880-1968) 의 집안인 마곡사 스님이 하와이를 거쳐 1942 년부터 1943년까지 하버드 대학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하다가 2년후 병으로 요절하였다고 전해진다.[10] 하지만 도진호 스님의 경우를 제외하고, 자료의 부족으로, 필자는 월봉 스님과 홍명희 집안의 마곡사 스님의 구체적인 활동 내역을 찾아볼 수 없었다. 6.25 전쟁이 종료된 이후, 이종욱 스님 (1884-1969), 등은 1953년 9월 하와이에서 열렸던 제3회 세계불교도대회에 참가하였다.[11]
도진호 스님은1931년 하와이에 온 이후, 언젠가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1940년대에 기독교 신자로서 하와이를 중심으로 사회활동과 독립운동을 열심히 하였다. 비록 도진호 스님이 하와이에 도착한 직후 한인 교민들을 대상으로 가정 법회를 보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스님이 고려선사를 창건하여 교민을 대상으로 불교를 포교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현재 없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볼 때, 미주 한국불교는 1964년 미국에 입국하여 구체적으로 포교 활동을 전개한 경보 스님 (1914-1996) 으로부터 사실상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미주 한국불교는 올해 (2016년) 에는 한국불교가 미국에 전래된 지 52년을 맞이한다.
도진호는 조선불교청년회의 대표로 정토진종 본원사파 하와이교구 불교청년회의 주도로 1930년 7월 21일에서 26일까지 하와이 호놀루루에서 개최된 제1회 범태평양 불교청년대회에 참석하였다.[12] 그의 대회 참석은 한국불교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범태평양 불교청년대회를 다녀온 이후, 도진호는 그 대회의 일정과 내용, 그리고 그 대회에서의 본인의 활약상을 월간 『불교』에 네차례에 걸쳐 상세히 보고하였다.[13] 비록 그의 활동이 미주 한국불교의 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가 한국불교의 대표로 미국에서 개최된 국제대회에 참석한 최초의 한국승려였다는 점에서 그의 범태평양 불교청년대회 참석은 미주 한국불교의 역사에 매우 의미가 있다.
[1] 『불교』 제 10호 (1925년 4월 1일) 의 「불교소식」 (p.47) 참조. 출생년도는 미국 이민 자료에 근거하였다.
[2] 친란이 창종한 정토진종에는 현재 조그마한 파들이 있지만, 그 종단은 동본원사파와 서본원사파로 양분된다. 동본원사파는 대곡파로 불리워지고,동본원사파의 본사는 동본원사이다. 서본원사파는 본원사파로 불리워지고, 본파로 약칭된다. 본원사파의 본사는 서본원사이다.
[3] 필자는 도진호가 조선문고를 하와이에서 설립했다는 어떠한 기록과 증언도 확보하지 못했다.
[4] 「우리 뉴-쓰」, 『금강저』 제19호 (1931년 11월 1일): p. 77; 김광식, 「최남선의 『조선불교』와 범태평양불교청년회의」, 『새불교운동의 전개: 성찰로 본 20세기 우리 불교』 (서울: 도피안사, 2002), pp. 232-261; 「업경대」, 『금강저』 제20호 (1932년 12월 8일): pp. 64-65; 그리고 불학연구소 편, 『한국근현대 불교사연표』 (서울: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 2000), p. 394.
[5] 「업경대」, 『금강저』 제20호 (1932년 12월 8일): pp. 64-65; 그리고 불학연구소 편, 『한국근현대 불교사연표』 (서울: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 2000), p. 394.
[6] 필자는 N.Q.1 비자가 무슨 비자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7] "Hawaii, Honolulu Passenger Lists, 1900-1953," NARA microfilm publication A3422 (Washington D.C.: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d.).
[8] Chanju Mun, Purification Buddhist Movement, 1954-1970: The Struggle to Restore Celibacy in the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Honolulu: Blue Pine, 2011), pp.187-189.
[9] 김도안, 「미주 한인사회의 불교활동」, 한미동포재단 편, 『한미동포재단 미주 한인이민 100년사』 (로스엔젤레스: 미주 한인이민 100주년 남가주기념사업회, 2002), p. 185.
[10] 전게논문, p. 186.
[11] 불학연구소 편, p. 70. 필자는 자료의 부족으로 세계불교도대회의 특성을 그리고 이종욱 스님 이외에 누가 그 대회에 참석하였는 지를 고찰할 수 없었다.
[12] 하와이의 메이저 지역 신문인 Honolulu Star-Bulletin은 1930년 7월 31일 기사에서 하와이 한인들이 도진호 환영 만찬을 성대하게 개최할 예정이라고 보도하였다.“Koreans Plan Big Banquet in honor of Chin‑Ho Tough,” in Honolulu Star-Bulletin (07/31/1930).
[13] 도진호, 「범태평양회기」, 『불교』 제75호 (1930년 9월 1일): pp. 6-8; 도진호, 「범태평양회기 (속)」, 『불교』 제76호 (1930년 10월 1일): pp. 6-12; 도진호, 「범태평양회기 (속)」, 『불교』 제77호 (1930년 11월 1일): pp. 31-39; 그리고 도진호, 「태평양대회기여」, 『불교』 제80호(1931년 1월 1일): pp. 2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