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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현대불교 2023. 9,10월호] 전명국·전신자, 전 패미리 장학재단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3.12.12|조회수100 목록 댓글 2

 

 

 

전명국·전신자 부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뉴욕의 전 패미리 장학재단

 

글 덕광德光 김형근 (본지 발행인)

 

전신자 보살과 두 아들
젊은 시절의 전명국 회장

 

 

전명국 전 패미리 장학재단 이사장은 일제시기인 1938년 12월 25일 평북 정주군 임포면
54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한국인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한국현대사 흐름을
따라 인생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 출생과 어린 시절 해방을 맞이하였
지만 그의 곁에는 부모가 없었다. 다행이 누나와 형들이 있었고, 함께 월남하여 지내던 중
에 어린 시절에 6.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고생하며 민족의 비극을 목격하였다. 그러다 현
대사에 있어 한국과 뗄 수 없는 미국에 오게 되었고, 미국에서 만난 기회를 본인의 노력으
로 성공시켰다. 그는 이에 머물지 않고, 본인의 성공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하여, 그리고 사
회단체들과 뉴욕. 뉴저지 지역 사찰들을 후원하면서 불교의 보살 사상을 실천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부인 전신자 보살은 전명국 회장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명국, 전신자 보살 부부

 

그는 어린 나이에 고향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그 다음해인 1946년 해주로 가족을 따라 이사를 하였다.
당시 만주에서 살았던 어머님은 콜레라로 봉천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친척들에게 전해 들었다. 어린 전명국은 친척들과 함께 두 누나와 형과 함께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 이는 77년 전으로 당시는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난 어수선한 해방 정국이었다.
형제들과 함께 서울로 온 전 회장은 사직동 매동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이사를 다니면서 북아현동에 있는 북성국민학교도 다녔다. 어린 시절이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였던 이강석씨의 친동생 이강원과 학교에서 만나 우정을 쌓기도 했다. 이러던 중에 6.25 한국 전쟁이 발생했다. 서울에서 인민군도 보았고, 1.4 후퇴 시기에는 대구로 피난을 가서 살았다. 이 시기에 대구 국제시장에서 작은 누나가 3년간 잡화점을 하였는데 어린 전 회장은 누나의 장사를 옆에서 보고, 함께 다니면서 돕기도 했다. 이 경험은 나중에 미국 이민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전쟁 중이고, 고생이 많았지만 어린 시절에 대구 지역 내장동에 큰 연못, 그리고 거기에서 놀던 시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그 곳에서 본 메밀꽃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당시를 회상하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울에서 명문 선린상고와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전신자 보살님과 결혼하였다. 결혼은 어렵게 살던 청년 전명국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 같다. 전 명국 회장은 결혼 전에 여러 번의 맞선을 보았는데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맞선을 보는 것에 대해 기대를 접고 있었는데 형의 권유로 하기 싫은 선을 9번째로 보게 되
었다. 그런데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나갔지만 김신자 처녀를 보자마자 첫눈에 마음이 끌렸다. 첫 인상이 너무 깨끗하고, 살결이 너무 고왔다“고 당시를 첫 만남을 회상한다. 이어서 ”나는 결혼하기 전에는 전철차비가 없어서 학교도 걸어 다니면서 졸업했다. 하지만 결혼 후에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결혼 후에는 사업이든 무엇이든지 하는 일이 척척 잘 되고 실패한 적이 없다. 어떤 경우는 전명국은 마누라 덕에 산다는 말도 들었다“고 유쾌하게 회상한다. 결혼은 인생을 함께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전명국. 전신자 부부는 가정의 화합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대화를 하면서 서로를 존경하고, 서로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면서 57년간을 살고 있다. 결혼생활은 이렇게 해야 하지만 사실 이런 삶을 사는 부부는 가뭄에 콩 나오듯이 드문 것이 현실이다.

 

결혼 후에 서울 인사동에서 골동품 가게인 대원당을 친구와 동업으로 1년 반 정도 운영하였다. 주로 목기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로 목기로 정평이 난 상회였다. 당시에 경찰 월급이 3만원 하던 시기였는데 사업이 잘되어 월 100만원을 벌어 동업자와 둘이서 50만원씩 가질 수 있었다. 3만원 월급쟁이가 50만원을 받으려면 대략 17개월이 걸린다. 1년 6개월
이 18개월이다. 한 달 수입이 월급 생활자의 17개월 수입은 매우 큰 수입이다. 18개월 사업을 하였다고 하는데 계산해보면 3만원 월급 생활자의 약 30년 월급에 해당하는 것이다. 큰 성공을 한 셈이다. 전 회장은 경상도 지역에서는 통영에서, 전라도 지역에서는 군산에서 목기를 수집하여 가져오는 중개상이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술회한다.
전신자 보살님의 고모할아버지는 청와대 부근에 살았는데 당시에 큰 부자로 동부탄광, 동부연탄 그리고 광산사업을 하였다고 한다. 이 처 고모할아버지가 손녀와 손자사위를 위해 사업적으로 도와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젊은 전명국은 처 고모할아버지 사업에 의견도 내고, 옆에서 보면서 2년 정도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처 고모할아버지의 뜻은 이루어 지지 않게 되었다.

 

1970년대 초
뉴욕으로 도미한 전 명국 회장

 

운동도 잘하고 정의감이 있었던 전 회장은 학창 시절과 젊은 시절에 주변에 많은 친구들을 있었다. 전회장이 1970년대 골동품 사업을 정리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무렵에 친구 삼촌이 공군 대령이 있었는데, 미국에 여러 번 출장을 다녀오곤 했다. 그 분이 돌아오면서 미국에서 유행하는 허리운동에 사용하는 ‘훌라 후푸’, 어린이 용품 등 당시 미국에서는
유행하고 있지만, 한국에는 없는 것들을 전 회장과 전 회장 친구에게 보여주면서 이런 제품 제조 사업을 하면 잘될 것이라고 사업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그래서 전 회장은 미국 사회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다. 미국 여행을 한번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과 달리 미국 여행은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시절이었다. 미국에 오려면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그게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오성 가발’이라는 큰 가발회사 사장을 아버지로 둔 아들이 전 회장 친구였다. 이 친구가 도와주어 미국 출장 형식 으로 여의도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성가발 회사의 출장 비자를 가지고 1974년 5월 30일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당시에는 미국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고, 공항에서 인터뷰를 하다가 입국 거절당하는 사람들이 많던 시절이었다. 전 회장은 무사히 입국 수속을 마친 후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왔다.
뉴욕에는 한국에서 태권도와 유도 운동을 하던 전 회장의 선후배 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 한국체육관에서 함께 운동하던 이영준씨, 조시학씨가 있었다. 조 시학 씨는 1961년 맨하탄 57가에 ‘헨리 조인스티튜트’란 이름의 미국 최초의 태권도장을 개관한 이후 50년 이상미국에 태권도를 보급하는 데 이바지해 온 인물이다. 그는 1972~1974년 제11대 뉴
욕한인회장을 역임하였다. 어느 날, 이영준씨와 함께 차를 타고 맨하탄 할렘가를 비롯하여 여러 곳을 구경하면서 보니, 맨하탄에 많은 건물들이 한 건물 건너 ‘For Sale’이라는 간판이 수 없이 많이 붙어 있었다. 한국에서 사업 경험이 있는 그는 그 간판들이 돈으로 보였다. “앗 이거다! 지금이 여기에서 돈 벌 수 있는 기회와 찬스다”라고 생각이 들었다. 당시 한
국사회에는 미국 이민의 열풍이 불던 시기였지만 전 회장은 한국에 부인인 전신자 보살님과 아들 둘이 있었기 때문에 이민은 생각하지 않고 미국을 방문하였지만 처음 생각과는 달리 미국이 기회의 땅으로 보인 것이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미국 체류의 중요한 영주권은 태권도 도장을 통해 합법적으로 받았다. 그런데 영주권을 받은
태권도 도장이 운영이 어려워 문을 닫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전명국 회장은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맨하탄에서 한국인이 하는 야채가게에 취직을 하였다. 여기에서 경험을 쌓은 후에 브르크린에서 야채가게를 하는 사람이 있어 그곳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던 중 1980년대에 한인사회에 이름이 알려진 어수일 경제학 박사의 조카 어윤성씨를 만났다. 그는 대위 출신으로 영어도 좀 할 줄 알았는데 함께 룸메이트를 하면서 의기투합하여 미국이민생활에서 성공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둘이는 함께 야채가게 운영을 하기 시작하였다. 전 회장은 어윤성씨에게 “나는 12, 13살 무렵부터 작은 누나 따라 다니면서 장사를 배웠다. 그래서 나는 가게 운영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다. 장사의 귀신이다. 나는 장사를 잘 할 수 있다.”라고 설득을 시켰고 어윤성씨는 전명국씨의 말을 믿었다. 이곳이 브르크린 병원 앞으로 Church Ave에 있었다. 이 가게가 어윤성씨와 공동으로 운영하던 전명국 회장의 1호 가게였다. 이때가 미국에 온 지 1년 6개월 정도가 지난 1976년이다. 이 곳의 손님들은 주로 흑인들이었는데 전 회장은 어린 시절 피난시절에 누나가 대구 국제시장에서 메밀국수 장사를 하던 것을 도우면서 어깨너머로 배웠던 잠재된 실력이 사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하였다.
한때 뉴욕 시 곳곳에 있던 한인들이 운영하던 야채가게가 많이 있었다. 이 야채를 지금은 대부분 대형 슈퍼마켓에서 취급을 한다. 하지만 이런 대형 슈퍼마켓들이 나오기 전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뉴욕시에는 야채를 주로 취급하던 가게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의 모임인 청과상조회는 뉴욕한인사회 큰 단체였다. 이 가게들은 야채를 많이 취급하기
때문에 신선도를 유지하는 것은 야채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여름에는 야채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분의 증발 막기 위해 야채에 물을 뿌려야 했다.

 

마이클 전(큰아들)전명국, 전선경, 전선미, 전재균, 전신자 보살. 손녀 딸 대학교 졸업식 기념사진

 

 

수시로 물을 야채 위에 골고루 잘 뿌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일에 당시에 누구도 사용하지 않던 수돗물을 이용해 스프링 쿨러를 사용해서 획기적으로 방법을 개선한 사람이 전 회장이다. 전회장의 하는 것을 본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나서 빠르게 널리 퍼져나갔
다. 뿐만 아니라 당시 야채가게에서 파는 물건은 과일과 채소와 스모그 헤론, 카피시 라는 말린 대구생선뿐이었다. 전 회장은 이것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를 많이 연구하였다. 그는 미국에 와서 영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유창한 영어를 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주변의 스페니스 도매상인들을 만나 흑인 손님들 대상으로 어떤 물건을 팔아야 하는지 자문을 구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권하는 고등어 등 생선과 웨스트 인디언들이 좋아하는 식품을 갖다 놓고 팔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생선도 취급하게 되니 가게에 생선 냄새도 많이 나게 되었다. 이것을 본 야채가게를 하던 한국인 동료들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야채가게에서 파는 물건이 아니라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우려와는 반대로 이것은 흑인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직장이 끝나고 4시 무렵에 흑인들이 전명국, 어윤성 둘이 운영하는 가게에 들어와서 쏟아져 들어와 그 물건들을 마구 봉투에 넣어 사가게 되었다. 야채가게에서 파는 단순했던 물건 종류를 전 회장이 흑인들의 취향에 맞추어 다변화시켰고 흑인들이 줄지어 서서 사가는 모습이 연출되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래서 또 이것도 흑인들 대상으로 야채가게 하는 한국인들이 따라했다. 이외에도 전에는 야
채가게에서 팔지 않던 흑인들이 많이 먹는 고야식품 제품인 콩을 가게에서 팔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한인 동료들은 야채가게에서 곡식도 파느냐고 의아해 했지만 이것도 역시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다. 이 야채가게를 8년간 3개를 운영하면서 전 회장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야채가게를 브르크린에 건물도 몇 채를 사게 되었다. 처음에 태권도 사범, 야채가게 종업으로 고생하던 남편 전명국씨를 한국에 사는 부인 김신자 보살은 매일 전화를 해서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하다가 야채 가게가 성공적으로 운영하던 전 회장에게 오히려 설득당하여 1979년에 가족과 함께 미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명국 회장은 사업에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여 야채가게를 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야채가게 운영은 물건을 사와야 하고, 매일 아침에 가게 문을 열고, 물건을 진열하고, 저녁에는 다시 거두어들이는 일을 해야 한다. 이런 힘든 일을 몇 년을 하다보면 몸이 피곤하게 된다. 그래서 전 회장은 야채가게를 정리하고 ‘뷰티 서플라이 Beautiful supply’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은 주문하면 물건을 배달해주고, 또 반품도 할 수가 있어서 장사를 하기가 야채가게에 비해 매우 수월하였다. 그래서 이 ‘뷰티 서플라이’ 시작하여 지금도 이 가게를 3개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장학사업을 시작하다.

 

전 회장은 어려서부터 학비가 없어서 고생하면서 매우 어렵게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항상 장학회를 생각하고 살았다. 서울 남산의 대한 적십자사 옆에 고아원이 있었다고 한다. 전 회장은 고등학교 시절 이곳에서 2년을 차비가 없어서 선린상고까지 걸어 다녔다. 그는 부모의 보살핌을 별로 받지 못하고 자랐으며, 학창시절을 어렵게 보냈기
때문에 가난한 환경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돕겠다는 마음이 어린 시절부터 소망으로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 꿈이 있지만 그 꿈을 실천하려면 주변에 조건이 형성되어야 한다. 미국 와서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전되면서 내가 장학회를 하겠다는 생각이 40살이 되기 전에 더 선명하게 되었다. 그래서 장사하면서 틈틈이
$100짜리 지폐가 들어오면, 그것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런데 수 년 간 모은 돈을 사기를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40대부터 계획을 하였던 장학금 사업이 예상보다 10년 정도 늦어졌다고 한다.

 

장학금 수여식 기념사진

 

미국에서 한인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지급한 것은 오래 전부터 여러 사람들이 하였다. 예를 들어 ‘한미장학재단’은 워싱턴 DC에서 ‘재미 한국학생 장학회’라는 이름으로 1960년대 말부터 있었다. 소규모로 시작하였지만 그 규모가 커져서 이제는 ‘한미 장학재단’이라는 큰 단체가 되었다. 한인사회에는 은행에서 운영하는 장학회,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하
는 장학회, 서울대 장학회, 경기여고 장학회 등 다양한 장학회가 있다. 미주한국불교계에서도 장학회 없이 장학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정확한 기록은 없다. 현재는 로스 엔젤레스 김소연 약사, 시카고 림대지 거사를 비롯하여 몇 사람이 있다. 미주현대 불교에서는 개인적으로 장학사업을 하는 사람들 전체는 다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다. 미주불교계이 널리 알려진 단체는 2003년 8월에 뉴욕 원각사 신도 최무직 거사가 시작한 ‘재미한국불교장학회’이다. 전미주를 대상으로 10명에게 1천 달러 주는 장학사업을 하였다. 그리고 2007년부터 전명국, 전신자 부부는 ‘프랭크 하나 재단 장학금’이란 이름으로 뉴욕.뉴
저지 지역 거주 학생10명에게 2천 달러씩 지급하면서 시작하였다. 프랭크 하나 재단이란 이름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전 회장 부부의 둘째 아들을 기념하기 위해 아들 이름을 붙인 이름이었다. 올해가 17년째이다.
현재 장학금을 19명에게는 한 사람당 3천 달러, 그리고 따로 불교인 학생들 10명에게 $1,500씩 주고있다. 그리고 장학재단 운영비로 매년 1만 달러가 들
어간다. 이 비용만 해도 $82,000를 지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외에도 더 들어가는 비용이 들어간다. 대략 10만 달러 정도가 들어가는 것이다.
장학사업 한다고 홍보하면서 모금하지 않고, 20년 가까이 개인이 이 정도 액수의 장학금을 주는 장학재단을 운영하는 것은 미주사회에서 별로 없다. 올해도 장학금과 사회단체에 지원하는 하는 액수가 10만 달러에 달한다. 전 회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는 규모와 액수를 좀 늘릴 계획이다. 인원을 20명으로 액수는 4천 달러로 하려고 한다. 불교인
학생들에게는 2천 달러로 주려고 한다, 불교인 학생을 따로 주는 것은 불교계에 힘을 보태고 싶고, 재가불교신도들에게 힘을 더 실어주고 싶은 것이 불교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바람이다. 불교인을 따로 선발하는 것은 이 장학금을 주는 것이 미주한국불교계 활성화되는데 이바지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전 회장은 이 장학회가 100년이 넘게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기를 바라고, 그 방법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원래 장학회를 40대에 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중에 사기를 당하는 일이 있어서 10년이 늦어지게 되었다.

 

 

불교와 인연

 

전명국, 전신자 부부는 불교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필자는 전신자 보살님을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는데 처음 전신자 보살님을 본 것은 30년 전에 플러싱에서 열린 부처님 오신 날 한국사찰들의 합동봉축행사 준비 모임 때로 기억한다. 전 보살님은 백림사를 대표로 어느 신도와 함께 참석하였다. 그 이후에 백림사에서도 여러 번 만나고, 미주현대불교행사에도 많이 참석하였다. 법명은 ‘관음행’인데 백림사 혜성스님에게 받았다. 전 보살님은 불명처럼 항상 주변사람들을 자비스런 얼굴과 마음으로 친절하게 대했다. 또 물질적으로도 주변사람들에게 후하게 베플면서 살고 있다. 이런 전보살님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르고 있다. 전 보살님은 불교계 뿐만 아니라 뉴욕한인사회 문화. 예술계에도 오랫동안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전명국 회장이 뉴욕불교계에 처음 모습을 나타난 것은 필자가 기억하기에는 아마도 1999년에 출범한 봉사단체 ‘자비원’ 때문인 것으로 기억한다.
자비원은 필자가 미주현대불교 후원자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비영리 단체에 전문 지식이 있는 김광석 한인봉사센터 사무총장에게 많은 자문을 받은 후에 출범이 된 단체였다. 그래서 출범하여 처음 2년 동안 미주현대불교 사무실 지하에서 시작하여 2년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오랜 기간 전명국 회장은 자비원 이사로 큰 역할을 하였다.
전명국 회장은 원래 육군 사관학교를 희망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몸이 아파서 수개월간 공부도 못하고 오랜 기간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 시절 절에서 스님들과 약사여래와 나반존자 기도를 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몸이 나은 후에 중앙대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이후에 또 한 번 건강에 문제가 생겼는데 미국에 살던 시기에 49살이던 1987년 암에 걸려 브크클린 병원에서 수술을 하였다. 그는 수술 전에 마음속으로 운명에게 “나를 데려가려면 데려 가시오, 하지만 살려주시면 좋은 일 하겠습니다.”라고 결심하고 아주 편안하게 수술에 임하게 되었다. 수술 후에 그
는 병상에 누어서 회복될 때 까지 지내게 되었다. 이때 창문을 통해 본 담벼락에 큰 산이 있고, 옆은 작은 산골짜기에서 물이 흐르고 물소리가 들리고, 큰 돌다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산에 사찰이 있었고, 세 분 스님들이 독경을 하는데 그 장면이 너무 거룩하고 장엄하게 보였다. 물론 이것은 실제 모습은 아니고 전회장에게만 보인 환상이다. 그런데 마취를 하고 큰 수술을 한 사람들에게는 가끔 본인의 내면에 잠재돼있던 생각이 환상처럼 보이는 수가 있다고 한다. 나중에 환상이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에 눈만 뜨면 그 장면
이 4-5일간 지속되었다. 구래서 전회장에게는 그 장면이 오늘날까지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다. 그의 불교예찬은 깊은 신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울림이 있다. “불교라는 것이 가만 들어보면 헛된 이야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 자연현상을 가만히 보면 불교의 주장과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다 인연법입니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 따라 생과 사가 나타납니다. 선연을 맺어서 좋은 일이 일어나고, 좋은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불교를 위해 내 욕심을 버리고, 불교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부처의 뜻을 잘 따르는 길이 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대원칙은 자기를 버리고 대중에게 봉사하고, 대중에게 회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불교발전을 위해 좋은 일 하고 싶지만 안되면 그것도 인연 법칙이니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전 회장의 말은 ‘서산대사의 해탈시’가 생각난다.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 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 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 본무실
生死去來亦如然 생사거래 역여연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이 스러져 가는 것이다
뜬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태어나고 죽어가는 생사거래도 역시 이와 같도다.

 

 

전명국 회장의
인생회향

 

전명국 회장은 초기 뉴욕한인 이민 와서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전 회장 친구들 그룹은 이민 와서 사업에 성공하고, 뉴욕 한인사회 발전에 앞장선 사람들이 많다. 서양 그로서리 가게를 공동으로 운영하며 큰 사업을 하던 곽도섭, 정광채씨도 있었고, 야채가게 하던 김익중씨 등이 전 회장과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는 사업적으로 성공하면서 사업체가 있었던 브르크린을 중심으로 한인들이 단결과 발전을 위한 일에도 관심이 기울였다. 그래서 그가 구상하여서 김익중, 오복식품 주인 등과 협력하여 결실을 맺은 것이 브르크린 식품협회이다. 이 단체의 출범에 산파역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전 회장은 앞에 나서서 회장이나 대표 이런 것은 절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대신 뒤에서 회장을 비롯하여 임원을 뒤에서 조용하게 돕는 역할을 하며 살아왔다. 이처럼 뒤에서 조용하게 활동하였지만 한때 뉴욕한인사회 기둥 역할을 하였던 전 회장 그룹 친구들 중에 현재 활동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은 ‘전패미리 장학재단’을 통해 뉴욕. 뉴저지 지역에서 수 십 명의 학생들에게 많은 장학금을 주면서 전명국 회장이 유일하
게 뉴욕한인사회에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전명국 전신자 보살 부부는 아름다운 부부애로 평생을 살고 있다. 또 전 회장이 하는 일 대체적으로 순조로웠다고 평가 할 수 있으며 그 결과로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다, 하지만 경제적 여유를 본인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중요한 사상인 보살도를 실천하면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딱 하나 전명국. 전신자 부부의 가슴에 지금도 멍
이 있는데 그것은 둘째 아들이 20대에 사고로 사망한 것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슬픔을 참척(慘慽)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자식 잃은 슬픔과 고통을 일컫는 말이다. 부모 주검은 산에 묻고 자식 주검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이 두 부부에게는 아직도 둘째 아들에 대한 슬픔이 가슴에 남아있는 것 같다.
이런 슬픔을 가슴에 앉고 살면서도 전명국. 전신자보살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전패미리 장학회가 100년 넘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준비를 다해 놓았다고 한다. 인생의 아름다운 회향을 실행하고 있는 이 두 부부가 건강하게 살면서 앞으로는 손자손녀들이 중심이 되어 ‘전패미리 장학회’가 잘 운영되고, 또한 많은 애정을 가지고 후원하는 불교계
가 활성화 되는 모습을 보기를 기원한다.

 

2023년 4월 13일
전명국 회장 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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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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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금바위 | 작성시간 24.01.29 불교재단 장학금
    소식에
    축하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복많이받으세요
    성불축원드립니다
  • 작성자challenze | 작성시간 24.05.23 읽기좋게 글자도 크고 잘 썼네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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