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견론에 대하여
1. 들어가며
붓다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짧게 정리하여 말한다면 [상견과 단견의 양극단을 벗어난 중도의 법]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해지는 상견과 단견이란 과연 무엇이며 이러한 상견론, 단견론, 온갖 주의 주장들과 부처님의 가르침[경]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부처님의 정법을 기본전제로 바탕에 두고 논해보고자 한다.
2.붓다의 가르침
붓다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갖추어야할 전제조건은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내용들을 바르게 문.사.수[聞思修]함이다.
<잡아함경 중에서>
"나의 가르침은 희론이 아니며
맹목적으로 와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요하는 것이아니며
지금여기서 볼수 있는 법이며
누구라도 와서 보라는 가르침이고
그 결실은 현실에서 사실로 경험할수 있는 것이며
향상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지자들이나 현자들이 알아야하는 것이며
누구에게도 비난 받지 않는 법이다."
잡아함경의 이 말씀은 붓다의 법을 논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어 주는 가르침이다.
상견론, 단견론, 연기론. 무아론, 중도론, 아비담마론, 유식론, 중론, .....
그 어떤 論을 산더미처럼 설파한다고 하더라도 위의 잡아함경의 가르침대로 論의 결실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법[경과 율]이 될 수 없는, 그냥 말뿐인 論에 불과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대반열반경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아난다여, 그런데 아마 그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봐서는 안된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것이다.”
<대반열반경 중 여래의 마지막 유훈>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유훈에서 나의 법과 율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論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디에도 없음을 확실하게 알고 붓다의 법을 공부하러 들어가야 언어개념의 가시밭길에서 길을 잃는 어리석음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법[경]과 율을 기본바탕으로 충분히 문사수한 상태에서 論을 부분적인 참고자료로 활용하여 사유하는 것이 불법공부의 正道가 되어야 함은 부처의 마지막유훈에 비춰보아 명백한 사실이다.
이것만이 주객전도의 오류와 혼란-결실은 없고 말뿐인 견해, 주의 주장의 확대재생산-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올바른 길임을 [상단견론]에 대한 고찰에 앞서 먼저 분명하게 밝혀둔다.
3. [경율론]의 의미와 [주의] [ 주장]의 의미에 대하여
[경]은 석가가 그 제자와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설법한 교법(敎法)을 모은 경전이며,
[율]은 석가의 제자가 지켜야 할 계율을 모은 율장이고,
[논]은 경과 율이 석가 자신이 설법한 것에 대하여 이를 연구하여 조직적으로 논석(論釋)한 것
을 모은 것이다.
[출처] 경율론 [經律論 ] | 네이버 백과사전
[주의 주장]: 주의 주장을 검색해보았더니 민주주의, 보수주의, 신자유주의,공산주의, 전체주의.
이러한 온갖 이념들이 검색되었다.
따라서 주의 주장이란 단어의 의미는 [생각,습성 , 배경, 문화 모든 것이 천차만별인 인간들이 각자의 견해들을 체계화하여 나타내고 드러내 보이는 것을 말한다.]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위에서 정리된 경율론의 의미를 다시 세분화하여 생각해보면
첫번째, 경은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신 가르침들을 제자들이 기억력에 의지하여 암송한 것을 글로 옮겨 정리한 것이며 붓다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의 수행에 직접적이고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가르침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두번째, 율이란 부처님당시 제자들의 수행생활에서 지키라고 부처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계율이 기본모토가 되어 승가안에서 계속 확장되며 덧붙여져서 내려온 것들이라 이해할 수 있겠다.
세번째, 論이란 부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이 아니고 부처님 사후 그 가르침을 후대의 사람들이 연구하고 조직적으로 분석하여 설명해 놓은 것으로 이것을 분석하고 쪼개어 정리한 이들이 부처님이 아니라는 것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 될 것이다.
즉, 앞에서도 말했듯이 수행에 있어서 근본이 되어야 하는 것은 경과 율이지 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앞으로 논하고자 하는 주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4. 상견과 단견이란 무엇인가?
상견과 단견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부처님께서는 상견과 단견을 모두 벗어난 중도의 법을 설하셨다고 하는 것일까? 이것을 또렷하게 밝혀보기 위해서는 먼저 상견과 단견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부터 확실하게 하고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상견과 단견의 의미를 검색해보면
<한자사전>常見 [상견]
세계(世界)나 모든 존재(存在)는 영겁(永劫) 불변(不變)의 실재(實在)이며,
사람은 죽으나 자아(自我)는 없어지지 않으며, 5온(蘊)은 과거(過去)나
미래(未來)에 상주(常住) 불변(不變)하여 영구(永久)히 존재(存在)한다는
망신(妄信).
<한자사전>斷見 [단견]
세상(世上) 만사의 단멸(斷滅)을 주장(主張)하여 인과(因果) 응보(應報)를
인정(認定)하지 아니하는 견해(見解). 사람이 한번죽으면 영원(永遠)히
없어진다고 보는생각. 우주(宇宙)의 진리(眞理)를 볼 수 없다하여
그것이 아주 없다고 생각하는 견해(見解)
<출처:네이버>
이렇게 정리되어있다. 이것은 매우 단편적인 정리이며 올바르게 정리된 것도 아니다.
이글의 내용만 가지고 단순하게 상견 단견을 이해해보면
상견은 항상하여 없어지지 않고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고 매달리는 것이고
단견은 이 몸뚱이하나 죽어 없어지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을 말한다는 것이다.
상견과 단견이라는 것은 이렇게 한자사전에 간단히 정리되어 놓은 것처럼 간단한 의미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디가니까야 범망경에서 상견과 단견[62가지 사견]에 대하여 정리해 주시면서 그것을 벗어나는 길을 밝혀 주셨다.
상견을 벗어난다는 의미는 그냥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는 없어] 이렇게 생각한다고 상견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상견에 묶여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 자신을 벗어나지 못한채 자아가 만들어낸 견해를 주장하고 있는것이니까...
부처님께서 62가지사견[상견과 단견]에 대하여 설해주신 범망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 범망경 중에서 62가지 사견론자들>
1.과거로 모색하는 자들
(1).영속론자들
(2).일부영속 일부비영속론자들
(3).유한과 무한을 설하는자들
(4).애매모호한 자들
(5).우연발생론자들
2.미래로 모색하는 자들 - 44가지
(1).사후에 자아는 인식을 가지고 존재한다
(2).사후에 자아는 인식 없이 존재한다
(3).인식을 가지는 것도,가지지 않는 것도 아닌 것으로 존재
(4).사후단멸론자들
3. 지금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자들
<범망경 중에서>
위의 범망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62가지 사견으로 설명해주신 사견들이 드러내는 가장 큰 특징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실재한다고 생각하여 거기서 이것저것을 모색하고 온갖 견해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가 실재한다는 취착에서 영속, 비영속, 일부영속 일부비영속, 우연발생, 유한,무한, 애매모호론 이런것들이 만들어져 나온다.
미래가 실재할 것이라고 믿고 거머쥐는데에서 사후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견해가 만들어지며 사후에 자아가 단멸하여 사라질 것이라는 견해가 만들어진다.
지금여기라는 시간이 실재한다고 믿고 취착하는데에서 자아를 거머쥐고 지금여기에서 열반을 내가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만들어진다.
이런 모든 사견들은 62가지로 구분해 놓았지만 인간들의 의식속에서 만들어지는 온갖 견해, 온갖 주의 주장들을 표현해 놓은 것일뿐이다.
[ 나는 과거모색론중 1번에만 해당된다] 이렇게 딱 부러지게 나누어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온갖 것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사견이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이 좀더 강하게 어떤 특징을 보일때 그렇다고 표현할 수 있을 뿐 사실 상견론자, 단견론자라는 의미속에는 저위에서 설명하고 있는 62가지의 사견이 모두 뒤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62가지 사견을 만들어내는 뿌리가 바로 자아라는 것을 거머쥐는 취착심이니까 말이다.
모두 한뿌리에서 나온 것이란 말이다.
나라는 것을 해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상견론자가 아니다.' '나는 단견론자가 아니다.'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 자체가 법답지 못한 일이다.
'나는 중도론자이다.' 이런 주장도 법답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나는 무아론자이다.' 이런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만 있을 뿐 저위의 첫번째 전제조건이 되는 잡아함경의 가르침에서 말하고 있는 법의 결실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못하기에 '나는 중도론자이다.'라는 말조차 말뿐인 허망한 주의 주장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 >중에서
과거 · 미래 · 현재라는 삼세를 고정불변하는 시간으로 상정해서는 절대로 상견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이는 삼세라는 시간에 대하여 후대 논사들이 고정불변하는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상정함으로 인해 부처님의 중도연기법에 어긋나는 삿된 견해상견-업 · 윤회 · 전생 · 영혼 · 신 · 천상 등이 실재한다는 견해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삼세라는 시간은 실재(實在)로 존재하는 시간이 아니고, 현재의 '자아'라는 인식을 통하여 지나간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미래라는 시간을 추론한 것에 불과하다. 인간에게 자아 취착의 인식이 없고 기억이 없다면 누구도 삼세를 상정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삼세과거 · 미래 · 현재는 자아 취착에서 생겨난 인간의 기억에 의지하여 발생한 개념일 뿐, 실재하는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범부들은 이러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주의 근원을 궁리하고 존재의 원인을 찾으려 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삿된 견해들이 생겨난 것이다.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 , 중 인용함>
[나는 신,윤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상견론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큰 착각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나는 죽으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단견론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큰 착각속에 빠져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상견이 무엇이고 단견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조차 없으면서 그것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이미 착각속에 빠져있다는 증거이다.
범망경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여 사고하면 상견이 무엇이고 단견이 무엇인가가 이해되어지고 상견과 단견을 벗어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정리되어질 것이다.
상견과 단견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과거,현재.미래가 실재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자신부터
똑바로 보아야 사고의 실마리가 조금은 잡힐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상견과 단견을 설해주신 가장 큰 이유이다.
5. 상견과 단견의 논리모순
부처님께서 상견과 단견에 대하여 경전에서 언급하신 가르침은 잡아함경의 [깟짜야나경]에 확실하게 나온다.
<잡아함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깟짜야나여, 사람들은 보통 有의 입장에서 매달리거나 無라는 입장에 매달리고 있다.
만약 이런 두가지 견해에 집착하지 않고 자아에 대하여 헤아리지 않으면 고통이 생길 때는 생기더라도 없어질 때는 없어질 것이니라.
이 점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미혹하지 않고 남의 견해에 매달리지 않으면서 스스로 그런 점을 깊이 관찰하는 것을 바른 견해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올바른 통찰력을 가지고 세계가 일어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집착하지 않을 것이요, 올바른 통찰력을 가지고 세계가 변해가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세계가 영원히 존재한다고 집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주의 주장에 집착하고 종교적 교의에 갇혀 있다.
그렇지만 주의,주장이나 종교적 관점에 매달리지 않거나 그것을 곧이곧대로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경직된 관점을 가지고 논쟁하지 않는다.
일체는 '有다' 라는 주장은 하나의 극단이다.
일체는 '無다'라는 주장은 또다른 극단이다.
나는 이런 두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말한다.
중도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라.
<잡아함경 중에서>
너무나 유명한 이경의 말씀중에서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와 직결된 구절을 말해보자면
바로 저위의 [올바른 통찰력을 가지고 세계가 일어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집착하지 않을 것이요, 올바른 통찰력을 가지고 세계가 변해가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세계가 영원히 존재한다고 집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이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풀어보면 [ 생겨나는 것을 보고 없다하지 말고/ 없어지고 변화하는 것을 보고 있다하지 말라.]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 단어는 달라졌지만 결국 뜻은 마찬가지이다.
이 내용을 하나하나 뜯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1)생겨나는 것을 보고 없다하지 말고/ (2)없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하지 말라.]
이렇게 둘로 나누어서 고찰해 보면
먼저 (1)번의 [생겨나는 것을 보고 없다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단견[단멸견]을 타파하신 가르침이다.
(2)번의 [없어지는-변화되는- 것을 보고 있다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상견을 타파하신 가르침이다.
앞 (1)번의 구절에서 부처님께서는 [세상모든것은 나 하나 죽으면 모두 끝이다]라고 주장하는 단멸론자들의 견해를 논파해내셨다.
이 가르침에서 [생겨나는 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우주,세상, 삼라만상, 물질..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사물, 물질, 동물, 인간..이런 모든 것들은 그런 것들을 분별짓는 인식주체-인간-이 있기에 만들어진 어법일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자연의 변화, 쉼없이 돌아가고 돌아오는 계절의 변화 이런것들을 보라고 저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자연의 변화, 계절의 변화, 삼라만상의 변화 모두는 그러한 변화를 인식하는 인식주체인 인간이 존재하기에 생겨난 인습적언어들일 뿐인데 부처님께서 그런것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을 보고 세상은 나하나 죽으면 끝이다. 이런 단멸의 견해를 갖지말라고 하셨겠는가?
부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인습적언어를 빌려 표현할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인습적 언어의 표현에 걸려버리면 부처님께서 타파하시고자 한 것이 진정 무엇인가에 대한 핵심을 놓쳐버리고 만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45억년이라고 밝혀내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고작 4,5백만년 전이라고 밝혀졌다.
인식주체인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 무엇이 있었다., 없었다를 논하는 것들은 실로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니 우주의 기원이 어떻고 세상의 창조가 어떻고 떠들어대는 것은 부처님의 법에 비춰보면 모두가 허망하고 무의미한 일일 뿐이다.
미래의 세상에서 인간이 완전히 멸종된 상태가 온다고 가정한다면 그런 상태에서 세상과 사물, 물질의 유무를 논해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생겨나는 모든 것들을 보고 없다하지 말라면서 단견을 치셨는데 사람들은 생겨나는 모든 것들(새로 태어나는 아기들, 대대손손 이어지는 인간들, ..인구가 줄지않음.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새로 나오는 새싹, ..)을 보고 끝없이 이어지는 무엇이 존재한다며 상견으로 가버린다.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가는 것이다.
생겨나는 모든 것들을 보고 없다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거봐 부처님도 있다고 했잖아.’ 이러면서 상견으로 들고 가버리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보라는 [생겨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똑바로 모르기에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결론으로 가지 못하고 부처님께서 논파해버리신 결론-외도의 사견[상주론]-으로 빠져버리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보라는 세상은 [한길 몸뚱이안의 나의 세상-오온]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면 앞에서 말한 인습적인 세상언어개념에 완전히 묶여서 한발자욱도 나오지 못하고 거기에 갇혀버리게 된다.
3.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나는 ...로히땃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이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도반이여, 그러나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도반이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천명하노라.“
<앙굿다라니까야 로히땃사경>
두번째 (2)의 [없어지는-변해가는-것들을 보고 있다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항상하게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상견의 견해를 논파한 가르침인데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거봐 부처님도 없다고 하셨잖아’ 이러면서 단멸의 견해를 주장하는 쪽으로 들고 가버린다.
참으로 웃기는 일 아닌가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단멸을 논파하고자 하신 말씀인데 그걸 가지고 상견으로 가버리고
부처님께서 상견을 논파하고자 하신 말씀인데 그걸 가지고 단견으로 가버린다.
상단견에 걸려있는 인간들이 부처님의 법을 듣고 걸려버리는 것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범망경에서 어리석은 자들은 누구나 할 것없이 견해의 그물[범망]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상견론자[윤회론자, 우연발생론자, 숙명론자, 신의 창조론자...]들의 논리를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런것들이다.
[지금 여기서 사람이 죽었다. 그러면 죽은후 끝이라면 그사람이 있던 곳은 텅 비어져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새롭게 태어나서 다시 그자리는 채워진다.
여기서 누가 죽으면 저기서 누가 태어난다. 우리나라에서 죽었는데 아프리카에서 누가 동시에 태어난다. 동시에 죽고 동시에 태어난다. 세상은 한치의 줄어듦도 없이 그대로의 상태로 이어져가는 것이다. 이것을 법계연기라고 말들을 한다.
여기서 내가 죽었는데 저기서 누군가가 태어났다면 내가 죽어서 넘어간 것이 아니더라도 업력이 넘어간 것이다. 저기서 태어난 누군가는 내가 아니더라도 업력으로 이어진 것이다.
앞의 먼저 죽은 사람과, 뒤의 태어난 누군가에게 동일성이나 연속성이 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런데 뒤의 태어난 사람은 태어나서 '나'라고 주장하면서 내가 뿌려놓은 업력의 영향력,ㅡ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다.
앞의 누군가와 뒤의 누군가 사이에는 연속성은 없다. 동일성도 없다.
하지만 업력은 앞과 뒤를 이어준다. 이게 업의 연속성이다.
이걸 논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게 바로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자들의 논리모순이다.
그들은 거기에 모순은 없다고 한다. 맹목적으로 믿으니까 모순은 사라진다고 느끼는 것이다.
신앙의 영향력하에 들어가 버릴때 거기엔 이미 합리적인 논리라고는 존재할 수 없는 맹신의 영역에 갇혀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다음 단멸론자들이 빠져드는 논리모순에 대하여 살펴보자.
부처님께서는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다하지 말라고 상견의 견해를 논파하셨다.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진짜 맞는 견해라면 단멸론을 주장하는 나조차도 없어져야 한다.
그런데 계속 태어나고 계속 생겨난다. 단멸론을 주장하는 이라도 현실을 바라보면 이건 부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단멸론자들이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후단멸론 밖에는 없다.
지금 살아있으면서 자신이 단멸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여기 살아있는데 나는 없다] 이런 주장을 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이나 정신분열증으로 생각할 것이다.
희귀한 경우지만 몸뚱이가 온전하게 생활하면서 자신의 몸뚱이가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거울을 보아도 자신의 몸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는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현재 살아서 [나는 없다]를 주장하는 것은 이렇게 정신병증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단멸론자들은 사후단멸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현재에서는 단멸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부처님의 법은 철저히 지금현재에서 '나'의 단멸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앞에서 예를 든 정신질환과 같은 것인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단멸론자들이 사후의 단멸을 주장하는 것과 비교하여 부처님법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여기에
촛점이 있다.
지금여기에서 단멸한다는 것이다.
부처님법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멸론으로 오해하게 되는데는 이 차이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데 원인이 있는 것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사후에 단멸하여 사라지는지 남는것이 있는지는 무아윤회론자들의 주장과 같이 확인불가능의 영역이다. 아무도 죽었다 살아돌아온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상견이건 단견이건 둘다 똑같이 확인할 수 없기는 똑같다.
즉 추론일 뿐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추론의 영역에 천착하여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철저히 금하시고
육근으로 경험지어 확인할 수 있는 일체법의 영역에서 또렷이 사유할 것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사후단멸론자들의 주장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른 명백한 이유다.
[육체의 죽음이 끝이다]에 천착하여 지금현재를 살피는것을 놓치고 허무주의나 쾌락주의로 빠져버리는 것-이것이 사후단멸론자들이다.
[육체의 죽음이 끝이 아니다]에 천착하여 지금현재를 살피는 것을 놓치고 전생이나 내생으로 미뤄버리는 것-이것이 상견론자들이다.
부처님께서 [생겨나는 것을 보고 없다하지 말고/ 변해가는 것들을 보고 있다 하지 말라]
라고 가르치신 것은 철저히 [이 한길 몸뚱이안의 나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보라는 가르침이다.
지금여기서 생활하는 몸뚱이로 경험하는 것들이 명백히 있는데 아무것도 없다고 회피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즉 현실을 똑바로 보라는 말씀이다. 사고팔고의 일어남, 육내외입처의 일어남을 똑바로 보라는 가르침이다.
[변해가는 것들을 보고 있다 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순간순간 바뀌어가는 몸뚱이를 바탕으로 하여 쌓여진 인식의 무더기로 감각접촉하여 일어나는 모든 것들중에 영원불변하고 항상된 것은 이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것을 똑바로 보라는 것이다.
즉, 영원불변하며 항상되이 존재하는 실체는 그 어디에도 없으니 그런 것들이 있다고 매달리지 말아라. 이런 가르침인 것이다.
다시 정리해보면
1) [생겨나는 것을 보고 없다하지 말라]-몸뚱이로 경험지어지는 영역안에서 확인되어지는 것들
[사고팔고]를 없다하지 말라.
2) [없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 하지 말라. ]-근.경.식 삼사화합하여 일어나는 인식들 모두는 그
실체가 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인식의 세상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것들은 항상함이 없으니 그
것에 묶이고 매달리지 말라. 즉, 어리석음을 똑바로 보라..이런 가르침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뜻으로 가르친 것인데 사람들은 1)번을 들고 상견으로 달려가고
2)번을 들고 단견을 주장한다.
그러니 자승자박의 논리모순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일 수밖에 없다.
6. 경과 논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경이라 함은 부처님의 직설을 말하는 것으로 그 가르침대로 수행한 결실을 현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경이라 이름지어 부르는 것이다.
율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현실에서 수행하여 괴로움의 소멸을 보는데 도움이 되라고 설해주신 것들이니까 현실과 무관한 것들은 부처의 율이 아니라고 쳐내야 할 것들이다.
한 예를 들어보면 [자신도 모르게 음식에 섞여있는 고기를 먹었으면 참회의 벌을 받아야 한다.]
이런 종류의 율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그런것들은 모두 자이나교의 계율이 불교라고
가면을 쓰고 끼어든 것일 뿐이고 현재에서 탐진치를 소멸시키는데 도움이 안되는 것들이니까 말이다.
오온.십이처.십팔계.십이연기.사성제도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을 현실에서 자신의 것으로 체득하여 괴로움의 소멸과 연결짓지 못하면 그것은 경이 아니고 논이 될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미담마론, 중론. 유식론.. 기신론.....論이라고 하는 것들 모두가 똑같다.
현실에서 부처님이 가르치신 괴로움의 소멸로 연결되어질 수 없다면 그것은 그냥 論이고 주의이고 주장일 뿐이다.
이것이 경과 논의 명백한 차이점이다.
이러한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고 경전을 읽어들어간다면 개념의 가시덤불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것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경을 분석하고 조직적으로 풀어놓은 것이 論일 뿐이다.
그런데 조직적으로 세밀하게 풀어놓는다고 현실에서 괴로움의 소멸이 일어나는가?
하나의 예로 아비담마론의 경우를 들어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중에서>
이 세가지 역할을 하는 마음은 모두 19가지가 있다. 해로운 과보인 조사하는 마음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의 악처로 태어나는 중생들에게서 이런 세가지 역할을 한다. 유익한 과보인 평온과 함께 하는 조사하는 마음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멀고 귀먹고 말못하는 등의 인간 혹은 어떤 종류의 낮은 천신들이나 정령들로 태어나는 중생들에게서 이런 역할을 한다. 불구가 되는 것은 해로운 업 때문이지만 인간에 태어나는 것은 그 정도가 약하기는 하지만 유익한 업의 결과이다. 여기서 조사하는 마음이 나왔다 하여 재생을 하는 순간이나 바왕가가 일어날때도 조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한가지 역할만을 하기 때문에 이런 때는 조사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여덟가지 큰 과보의 마음들, 즉 두가지나 세가지 원인을 가진 아름다운 욕계 과보의 마음들은 천신들이나 불구가 아닌 인간의 복받은 욕계세상에 태어난 자들에게서 이들 세가지 역할을 한다.
이런 열가지 마음들은 욕계에 재생하는 경우에 속한다.
다섯가지 색계 과보의 마음들은 색계세상에 태어나는 자들의 재생연결식과 잠재의식과 죽음의 마음이 되며 네가지 무색계 과보의 마음들은 무색계세상에 태어나는 자들의 위와 같은 세가지 역할을 하는 마음이 된다.
아비담마 길라잡이<304-305쪽>인용
이런것이 현실법인가?
육근으로 경험지어 확인할 수 있는가?
비유로 써놓았건 실제로 있는 것을 써놓았다고 우기건 현실에서 경험지어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것들은 그냥 말만 있을 뿐 결실은 없는 것이다.
즉 , 論이요. 주의요 주장일 뿐이다.
부처님의 경은 현실에서 경험지어 열매를 확인할 수 있는 현실법이다.
여기에 촛점을 맞추어 경전을 본다면 쓸모없는 상단견논쟁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삼척동자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7. 부처님법이 법인 이유
"나의 가르침은 희론이 아니며
맹목적으로 와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요하는 것이아니며
지금여기서 볼수 있는 법이며
누구라도 와서 보라는 가르침이고
그 결실은 현실에서 사실로 경험할수 있는 것이며
향상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지자들이나 현자들이 알아야하는 것이며
누구에게도 비난 받지 않는 법이다."
<잡아함경 중에서>
이것이 부처님법이 법이되는 명백한 이유이고 이것을 확실하게 이해할때 세간법과 출세간법의 차이점도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다.
8. 마무리
지금까지 상단견론에 대하여 고찰하면서 부처님의 법[경]과 논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에 촛점을 맞춰 이야기해 보았다.
오온.십이처.십팔계.,십이연기.사성제를 논하든 무아론, 연기론. 중도론. 중론. 유식론,아비담마론..그 어떤 것을 논하든 불법을 논하는 이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논하는 법의 결실[자아없음을 확인하여 현재에서 자아취착하지 않고 탐진치를 벗어나 머무름]이 내자신안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
이렇게 되풀이하여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확인이나 살핌없이 논하는 論은 말뿐일뿐 현실에서 아무런 결실도 없다.
불법을 논하는자가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첫째도 둘째도 자기세상[올바른 통찰력을 가지고 세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살피는 일이다.
이것이 상단견론을 벗어나는 유일의 길-사념처의 길-이다.
스승이신 붓다께서 열어주시고 걸어가신 유일의 길이다.
붓다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자라면 가슴깊이 새겨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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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논두렁밭두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0.12.25 저 윗글은 [범망경]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상견과 단견의 내용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요.
글의 내용을 그쪽에서 살펴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파초 작성시간 10.12.25 윗글 본문을 다시 보니 상견 단견의 모순점이란 소제목이 있고 거기에 가전연경을 올려놓고 그 경이 상단견을 가르친다고 설명하시는데 논두렁님은 범망경에서 상견 단견의 내용을 말한 것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니 좀 의아스럽습니다. 본인이 본문을 잘 읽으시긴 하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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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논두렁밭두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0.12.26 가전연경에서 말하는 것들이 곧 범망경에서 말하는 것들과 같은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잘 읽어보시길... -
답댓글 작성자파초 작성시간 10.12.26 가전연경에서 말하는 것과 범망경에서 말하는 것들과 같은 내용이라는 말이라는 것이
가전연경과 범망경은 모두 유무견이라는 말인가요, 상단견이라는 말인가요.
논두렁님의 말씀을 들으면 두 가지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시고 있는 것 같아요.
가전연경은 유무견이고 상단견이 아니라고 지적하니
윗글은 범망경의 상단견을 말한다고 하고
윗글에 가전연경을 놓고 상단견이라 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물으니
이제는 두 가지가 같은 내용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앞뒤 말이 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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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논두렁밭두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1.26 가전연경, 범망경 모두 결론은 사념처의 통찰수행으로 상단견의 양극단을 벗어나라는 가르침이라는 말씀을 드린겁니다. 유무 상단 모두 감각접촉에 의하여 일어나는 느낌에 갈애와 취착이 동요해 묶여나간것이다...라는 범망경의 구절이 핵심이지요. 사념처법이 괴로움을 벗어나는 유일의 법이다.. 라고 써있는것은 누구도 부정못합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윗글을 읽으시면 헷갈림이 덜하고 언어에 걸림이 덜할 것입니다. 사유에 도움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