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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석가의 두 가지 실수

작성자선녀인블루|작성시간11.06.09|조회수669 목록 댓글 3
석가의 두 가지 실수-1부

글쓴이 : 청산 날짜 : 2011-06-02 (목) 15:42 조회 : 295
첫번째 실수:
석가(B.C. 563? ~483?)는 인간이 태어나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겪게 되는 온갖 고통과 번민을 일체 면하고, 오직 지극한 즐거움과 행복만을 영원히 향유하며 살 수 있는 방법(길, 道, way)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방법을 찾아 세상에서 고생하는 일체(모든) 중생들을 구원해 주어야 겠다는 뜻을 품고 부모와 처와 자식을 버리고 29세에 가출을 하였다. 이것이 석가의 첫 번째 실수이다.
 
길흉화복(吉凶禍福), 생노병사, 행복-불행, 성공-실패는 인생 그 자체이다. 석가는 근심과 고통으로 가득찬 이 세상의 삶은 본연의 삶이 아니고, 본래의 삶은 "일체의 고통이나 번민이 없이 오직 기쁨과 행복만을 영원히 향유하며 사는 것" 으로 파악하고 그러한 삶에 이르는 길을 찾고자 하였으므로 석가의 철학은 이미 출발점에서부터 인생과 우주의 실상을 오해하고 오도(誤導)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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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실수:
석가는 6년간의 온갖 고행을 한 후에 마침내 그가 찾던 방법을 찾았는데(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일체의 세상적 욕망(특히 성욕)을 버리고,
결혼도 하지 말고,
자식도 낳지 말고,
부모도 섬기지 말고(가출하고),
생업(生業)도 갖지 말고(직업을 가지면  속세에 관련된 욕심과 죄에서 헤어날 수 없으므로),
일체의 살생이나 육식을 하지 않고,
모든 자만과 교만을 버리고,
겸손히 어리석은 중생(衆生)에게 구걸(탁발, 托鉢: 중이 바리때를 들고 마을로 다니면서 동냥하는 일)하여 먹으며,
중생들에게 극락에 가는 법을 가르치면서 살다가 죽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모든 죄에서 해방되어 윤회(輪廻)의 고리를 탈출해서 영원무궁하고 지극한 행복(닐바나, nirvana)만이 있는 천국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석가는 몸소 자신이 깨달은 법을 실천하며 많은 제자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석가의 두 번째 실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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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는 B.C. 500년대에 바나문교(Brahminism, 힌두교)를 믿는 인도의 소왕국(오늘의 부탄 지역)의 태자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는 29세 되는 해에 차례로 4가지 환상—노인, 병자, 시체, 방랑하는 성자(승려)—을 보았고 그 일로 인해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인간이 겪게 되는 온갖 고통과 근심을 면하는 비법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는 6년간의 고행 끝에 마침내 그 "비법"을 깨달았는데 그가 비법을 터득해 낸 사유과정을 다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인생이 겪는 모든 고뇌와 고통을 면하는 길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大前提).
2. 모든 고통과 고뇌의 원인은 죄(罪)에 있다.
3. 죄의 근원은 욕심이다.
4. 일체의 욕심을 버리면 모든 죄에서 떠날 수 있다.
5. 모든 죄에서 떠나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사슬을 탈출해서 고통과 고뇌가 일체 없는 완전한 세상(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된다.
 
석가의 사유 방식과 그가 도달한 결론이 참인가 아닌가를 판정하려면 다음의 6가지 물음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1. 인생이 겪는 모든 고통과 고뇌를 일체 면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2. 인생의 모든 고통과 고뇌는 과연 죄(특히 전생의 죄) 때문에 오는가?
3. 인간이 가지는 욕심(욕망)은 모두 죄가 되는가?
4. 살아있는 인간이 과연 일체의 욕심을 버릴 수 있는가?
5. 윤회의 이론은 참인가? (예: 죄를 지으면 내세에서 짐승, 곤충, 벌레 등으로 태어나는가?)
6. 천국(극락)은 실재하는가?
 
석가가 찾아낸 결론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위의 6가지 물음에 대한 답이 모두 "그렇다(Yes)"가 되어야 한다. 만약 어느 한가지 물음만이라고 그 답이 "아니다(No)"가 되면 석가의 깨달음과 불교의 모든 이론은 허위가 된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필자는 위의 여섯 가지 물음에 대해서 모두 "아니오" 의 답을 선택하였다. 그것은 필자가 삶, 죽음, 인간, 우주에 대해서 석가와는 판이한 사유를 했기 때문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과, 불교를 믿지는 않으나 불교를 하나의 고등 종교로서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필자의 논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박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것을 문자대로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그 분의 말씀을 시대와 장소와 각 사람이 처한 입장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올시다. (뭘 좀 아시겠소이까?)”
 
석가의 가르침을 시대와 장소와 입장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관점은 대단히 현명한 생각이다. 이런 주장에 의하면, 석가의 가르침 중의 일부 또는 전부를 각자의 입장과 견해에 따라 융통성 있게 취사선택하고 변형시키거나 위반해도 상관이 없게 된다는 말이 된다.
 
불교인들 중에는 평소에 전혀 부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위반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많이 있는데 이들은 여전히 자신을 불자이고 석가는 위대한 분이라고 믿고 있다. 이 세상에는 석가가 누군지, 석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면서도 대체로 선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다.
 
석가는 융통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석가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가르침에 널리 융통성을 적용하여 대충대충 살아갈 것을 가르친 사람이 아니다. 석가는 인간들이 적당히 죄짓고,적당히 세상 재미를 보고, 할 짓, 못할 짓 다해보고 나서 죽은 다음에 다시 이 죄많은 세상에 축생(畜生: 소, 돼지, 등 온갖 짐승)이나 버러지로 태어나도 괜찮다고 가르친 사람이 아니다.
 
석가의 말을 비유와 상징으로 해석하여 융통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석가보다 훨씬 더 현명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들이 여전히 석가를 인류 최대의 현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거나, 석가를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로 숭배하며 그에게 빌기만 하면 세상 욕심을 다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딱히 더 할 말이 없다.
 
불교인들은 석가가 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석가는 신이 돼버린지 오래다. 그는 죽자 마자 그들의 추종자들에 의해 신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의 하느님보다 더 전지전능하고, 예수보다 더 자비하고,  빌기만 하면 모든 소원을 다 성취시켜주고, 억조창생을 다 구원해 내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도 신은 아니다?  모든 인간도 도를 닦으면 석가처럼 부처가 된다?
 
불교인들에 설명를 자세히 들으면 석가는 그냥 신이 아니고 “더 신(신보다 더한 존재)”이다.  석가가 신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예수가 인간인가 신인가 하는 것과 같은 류의 혼돈이다.
 
종교인들은 무엇이든 전지전능한 신으로 만들 수 있고 또 그래야 막대한 수입과 권세가 보장된다.  수 천년동안 전문종교인들이 연구해 온 것은 어떻게 하면 어리석을 중생들을 효과적으로 속여서 중생들 위에 영원히 군림할 수 있는가 이다.  독재 사회에서 그들의 독재자를 신격화하는 것도 동일한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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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의 욕구를 버리면 일체의 근심을 없앨 수 있다.
일체 장을 담그지 않으면 일체 구더기가 생기지 않는다....
 
이런 말은 맞는것 같지만 이것은 바로 죽음의 철학이다. 일체의 욕구도 근심도 고통도 애증(愛憎)도 없는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생명의 가장 솔직한 속성은 끊임없이 더 좋은 것을 원하고 바라고 추구하는 것이며 또한 자손을 낳아 대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성공과 기쁨도 맛을 보게 되고 또 필연적으로 번뇌와 고통과 실패도 따르게 되며 죽음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와 고통과 죽음은 엄연히 생명의 한 과정이고 따라서 삶의 본질이다. 인생에서 고통과 번뇌를 일체 면하게 해 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사기꾼이거나, 살인자(남의 목숨을 강제로 끊는 자) 둘 중의 하나이다.
 
모든 인생이 고달픈 삶에서  먹고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수고와 고뇌는 숭고하고 엄숙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인들이 일체의 고통과 번뇌을 피하기 위해 삶의 본질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행위는 공연한 내숭이고 위선이다. 불교승들이 제아무리 세상사에  초연한 척 하며 의미심장한 표정과 근엄한 자세로 설법을 하고 선(禪)을 행해도 그것은 오해와 거짓의 소꿉장난이고 코메디일 뿐이다.
 
그런 고급 기만적 코메디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혼이 나가서 간을 빼주고 쓸개를 빼준다. 아무개 홀 과부가 평생 시장에서 음식점  장사를 해서 번 수백억 재산을 아무개 절에 시주하다... 이런 뉴스는 사실은 슬픈 뉴스이다. 이런 슬픈 현상은 모든 종교에게서 항상 있어온 것이다.  
 
엄연히 살아 있는 목숨을 가지고서도 속세의 모든 욕망과 즐거움과 고통을 부인하고자 발버둥치는 불교인들의 행위는 겉보기에는 대단히 거룩하고 위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생명의 본질과 우주의 순리를 거역하는 범죄이고 어리석음이며 또 그 차체가 가장 큰 고통과 번뇌를 벌어들이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헛된 고통과 소득없는 번뇌는 불제자들이 전문으로 하고 있다.
 
불교인들이 좀더 완벽한 불제자가 되는 길은 되도록 일찍 죽는 것이다. 인생이 태어나자마자 죽든지, 아니면 어머니 배속에서 죽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죽으면 욕심과 죄와 번뇌에서 완벽하게 해탈(해방)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목표로 하는 종교인다. 
 
불교인들에게 일찍 죽으라고 충고하는 것은 조금도 실례가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죽음이란 또 다른 삶으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 조금도 슬픈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불(成佛)하십시요(부처님이 되십시요)!" 라는 불교인들의 인사는 "어서 죽으십시요!"라는 뜻이다. 
 
석가가 상정한 궁극의 목표는 전(全) 인류가 일체 죄를 짓지 않아서 윤회의 고리를 끊고 천국에 가서 다시는 이 죄많고 고통으로 가득찬 사바세계(娑坡世界: 이 세상, 지구)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석가가 의도한 일이 완성되는 것이므로 불교인들은 좋다고 볼지 모르지만 그것은 이성적으로 말하면 전 인류가 지구상에서 멸절한다는 뜻이다. 즉 불교의 궁극의 이상은 인류의 멸종인 것이다.
 
전 인류가 성(性)을 포기하고, 결혼을 하지 않고, 자식 새끼를 낳아 기르지 않고, 노부모를 봉양하지 않고, 생업을 갖지 않는다면 이들이 일체의 욕심과 죄에서 떠난 것이 되어 이들이 모두 극락에 가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지구에서 인류가 소멸하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2부에 계속)







석가의 두가지 실수-2부

글쓴이 : 청산 날짜 : 2011-06-03 (금) 18:47 조회 : 389
삶은 찰나이므로 살아 생전의 모든 즐거움은 덧없는 것이라고 불교인들은 말한다. 꽃은 금시 시들고 부귀 영화도 순간이라고 한다. 따라서 속세의 모든 욕망과 즐거움을 홀연히 버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한다. 그러한 관점은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인생의 즐거움 (특히 성적 즐거움)을 버리라고 가르치는 면이 있는데 이는 불교에서 두드러진다. 불교인들이 지켜야 하는 열가지 계명을 살펴보면 불교는 즐거음과 행복을 적극적으로 금하는 종교임을 알 수 있다. 불교인들의 열가지 계명(戒命; 삼가하고 금해야 할 조항)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제 1 계명: 살생하지 말 것.
제 2 계명: 도둑질하지 말 것.
제 3 계명: 음행하지 말 것.
제 4 계명: 거짓말하지 말 것.
제 5 계명: 술마시지 말 것.
 
(이상의 다섯 계명은 모든 불자들에게 주어진 계명이고 아래의 다섯 계명은 특별히 전문 불교인<수도승>에게 주어진 계명이다.)
 
제 6 계명: 꽃과 향수를 사용하지 말 것.
제 7 계명: 노래, 춤, 풍류를 즐기거나 보지 말 것.
제 8 계명: 높고 넒은 평상(상석?)에 앉지 말것.
제 9 계명: 공양(식사)때 외에는 음식을 먹지 말 것.
제 10 계명: 금,은 보화 등을 갖지 말 것.
(위의 내용과 약간 다른 십계명도 있으나 대동소이하다.)
 
꽃은 쉬 지므로 될 수 있는대로 아름답고 향기롭게 피는 것이 뜻이 있다. 그러므로써 효과적으로 벌레를 끌어들여 씨앗을 맺고 대를 이은 다음에 안심하고 죽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인생도 이와 같다. 
 
따라서 우리도 살아서 기력이 있을 동안 되도록 아름답고 행복하고 보람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노력을 거부하거나 외면하는 개인이나 사회나 민족은 지구상에서의 생존권을 다른 현명한 사람들에게 양도하는 길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데 이것이 바로 석가의 가르침의 요체이다.
 
사탕은 잠깐 단 맛을 준다. 우리는 사탕을 먹어도 죽고 먹지 않아도 죽는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이왕이면 사탕을 먹어보고 죽는 것이 먹어보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 낫다. 죽은 후 극락에서 맛볼 수 있는 일만개의 사탕을 위해서 찰나인 현세의 사탕을 모조리 버려야 한다는 것이 석가와 불교인들의 손익 계산법인데, 이런 계산은 전혀 존재할 가능성이 없는 천국을 있다고 믿는데서 범하는 어리석음이다. 그 영원한 손해를 어찌 만회할 수 있으리요. 
 
불교인들은 인생을 찰나라고 하며 이 세상의 삶을 띠끌과 같이 가볍게 여기는 것이 현명한 태도인양 자랑하지만, 그러나 인생은 찰나가 아니다. 삶은 충분히 길고 지루하다. 인간의 삶이 아침에 시작해서 저녁에 끝이 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불교인들의 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생은 별다른 사고가 없는한 60~ 80년 이상 사는 것이 보통이고, 그 긴 인생 여정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사람구실 을 하기 위해서 온갖 수고와 영욕(榮辱)을 몸으로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긴 시간은 우리가 깨달은 척 하면서 "찰나"라고 일축해 버릴만큼 짧은 것이 아니다. 
 
싫건 좋건 우리는 단 한번 주어진 삶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모든 희로애락, 길흉화복의 사건들을 성실히 견디고 경험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국인들이 지어낸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이야기는 인생 고비고비에서 예고없이 닥쳐오는 모든  행운과 불운에 일일히 일희일비 하며 호들갑을 떨고 하나님과 부처님을 찾는 종교인들의 태도에 비하면 훨씬 현명하고 성숙한 삶의 태도이다. 
 
불행하거나 다행한 사건들은 선한 사람에게도 찾아오고 악한 사람에게도 찾아온다.  이 말은 우리가 선하게 살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인생의 과정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고 선과 악의 행위가 모두 그 댓가나 결과를 받는 것은  아닐지라도 인간은 되도록 선한 삶을 살고자 노력함으로써 불행이나 실패의 정도를 어느 정도 줄이고 행운과 성공의 기회를 어느정도 높일 수 있을 뿐이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그런 사람은 혹 실패를 해도 이웃이나 지인(知人)들의  도움을 받아서 실패를 만회하고 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고 악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즉 인간의 선행과 악행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보답을 받는 것이지 전생의 업보나, 신의 개입에 의해 상과 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삶은 때로 너무 고통스럽고 지루하다. 인생이 너무 고통스럽고 지루하므로 거기에 약간의 사탕--사랑, 애정, 오락, 예술, 흥취 등--을 가미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사탕이 잠깐만 달다는 이유로 그것을 모두 내버린다면 인생이 너무 쓰고 가엽지 아니한가?
 
석가가 가르친 말을 곧이듣고 인생의 단 맛을 전부 포기하고 오직 쓰고 위선적인 인생을 살다간 인생이 기하(幾何, how many)인가?  많은 젊은 남,녀 불자들이 석가의 가르침 때문에 생으로 고자 석녀가 되어서 위선과 자학과  죄의식으로 단 한번 사는 세상을 지옥처럼 살다 간다.
 
자연의 이치로 뜨겁게 흘러넘치는 성욕을 죄악이라고 말해주어 멀쩡한 남,녀를 생으로 고자 석녀로 만들고 일생을 고독과 위선과 죄의식 속에서 살게하는 것은 살인죄 못지 않은 큰 죄라고 본다. 석가는 그를 믿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세주인가  몸쓸 죄를 지은 사람인가?  석가는 그들에게 꿇어 업드려 자신이 지은 죄를 억겁을 빌고 사과해도 모자랄 죄인이다. (대개의 종교 창시자들이 이와 같이 인류에게 큰 죄를 지은 죄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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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힌두교의 "윤회(輪廻; Transmigration)" 와 업(業, 갈마: 전생에서 지은 선악의 소행으로 말미아마 현세에서 받는 응보, Karma<범어>)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석가는 불교를 창시하기 전에 힌두교를 믿었었다.
 
기원전 1500년대에 힌두교를 창시한 인도의 아리안인(Aryans: 인도.유럽 어족계의 백인)들은 윤회 사상을 이집트인으로부터 전해받은 것으로 보인다 (필자 견해).   고대 이집트인들은 기원 3000년 이전부터 윤회를 믿었다. 헤로도투스의  역사(1972, Penguin Books) 제 2권에 나타난 이집트인들의 종교 풍습 중 인도의 종교와 유사한 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새로 태어나는 다른 동물의 몸으로 들어가는 데 이렇게 육지에 사는 동물, 물속에 사는 동물, 공중을 나는 동물 등 모든 동물의 몸을 일 순회한 다음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며 이렇게 일 순회를 거치는 데 3000년이 걸린다고 믿는다(p. 178).
이집트인들은 많은 동물들을 신과 동일시하여 숭배하고(pp.154-158), 소 (특히 암소)를 가장 숭배한다 (p.145). 
이집트인들은 종교적 이유로 여러 동물들의 살생을 엄격히 금하고 그 고기를 먹지 않는다. 사제들은 머리를 삭발하고(p, 143). 베옷(아마 섬유로 만든 베옷)을 입고(p. 143),사제들의 음식과 일체의 생활 비용은 일반인(중생)들로부터 제공된다 (pp. 143-144).
이집트인들은 연꽃을 신성시 하고 그 씨를 식용으로 즐긴다 (pp. 162-163).

이집트 벽화나 파피루스 문서에 나오는 그림에는 연꽃이 자주 등장한다.
연꽃은 인도와 중국에서도 신성시해왔다 (美 World Book Encyclopedia, 1979 ed. “lotus”). 
 
이집트인들은 황소는 이시스 여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남은 고기는 연회를 하여 먹었으나 너무 성스러운 암소는 식용하지 않았다. 이집트인들은 금하는 고기가 많았으나 거위, 물고기, 등 풍부하게 생산되는 육류를 즐기기도 했다. 
 
이집트인들은 윤회, 부활 등의 교리를 믿고 종교적으로는 대단히 독실한 사람들이었으나 한편 인생은 한번 사는 것이므로 즐겨야 한다는 실질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헤로도투스의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집트인들은 연회를 베풀고 회식이 끝나면 한 사내가 약 45cm ~90cm <cm 단위는 필자가 환산한 것임>크기의 나무로 만든 시신을 관에 넣어 이것을 연회에 참여한 여러 손님들을 두루 돌면서 차례로 보여주며 '이것을 보시고 삶을 즐기시오,  당신도 죽으면 이렇게 되리이다' 라고 말한다 (pp. 158-159)."
 
사실 천국과 극락을 믿는 기독교인들이나 불교인들도  삶과 죽음에 대한 실제 관념은 고대 이집트인들과 다르치 않다. 천국과 극락이 그렇게 좋다고 하면서도 병이 나서 좀 아플라치면 다들 약먹고 병원 찾고 기도와 염불로 무병장수를 구하지 않는가?
 
인도의 힌두교 승려들도 윤회를 믿었고 소(특히 암소)를 대단히 신성시하고 그 밖의 많은 동물들을 신과 동일시 하고 그 고기를 먹지 않으며 머리를 삭발하고 베옷을 입는다. 이렇듯 인도의 힌두교 및 불교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와 많이 닮아 있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고대 여러 민족간의 문화적 교류 및 민족의 이동과 관련이 있다.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출현한 아리안인들이 인도에 침입하여 인도 원주민 드라비다인을 정복하고 힌두교를 만들어 낸 것은 B.C. 1500년대이지만, 이들이 인도에 침입하기 훨씬 이전에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중앙아시아--페르샤 간의 문화적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 중에는 혹시 이집트인들이 인도인들의 종교 풍습을 배워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할 가능성은 없는데 그 근거는 헤로도투스의 책에 잘 나타나 있다. 헤로도투스는 역사 제 2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첨가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전통 관습만을 고수하고 외국의 풍습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p. 159).”
“이집트인들은 그리스 풍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 뿐 아니라 모든 외국의 풍습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p.162).”
“그리스의 모든 신들의 이름은 이집트로부터 왔다. 나는 그리스의 신들의 이름이 외국 (특히 이집트)에서 들어온 것임을 조사해서 알았다(p. 149).”

헤로도투스는 기원전 484(?)에 나서 기원전 425(?)에 죽은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이다.  (석가보다 약 80년 늦게 태어났다.) 그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풍물, 전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기록 중에는 오류가 없지 않은데 그런 오류 중에는 그가 범한 오류도 있느나 대부분은 그가  현지인들로 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나 전설을 기록한데서 온 것이다. 그는 기록 중에 “나는 이것을 들은 대로 기록하지만 나 자신은 믿지 않는다”라는 말을 도처에 삽입하였다.
 
이집트는 기원전 4000년 이전부터 역사의 기록을 남긴 민족이고 고대 중동 지역의 국가중에서 가장 풍요하고 (나일강 덕분에), 문명과 과학과 기술이 앞선 문화 선진국이고 군사적으로도 강대국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외국의 문물을 야만으로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인들은 대단히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적 기질이 강했는데 이것은 후대에 오히려 이방인들의 발전된 신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뒤져 민족이 망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나친 보수적 기질이 가져온 결과이다. 현대 이집트인은 고대 이집트인과 다른 종족이다. 고대의 이집트인들은 함인(Hamites)이었느나 오늘날 이집트는 셈인(Semites) 들이고 종교도 언어도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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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윤회(輪廻)와 업(業)의 이론은 어떠한가?

전세(前世=전생), 현세(現世), 내세(來世)가 존재해서 그것들이 수레바퀴(輪)처럼 계속 반복 회전하면서 전생에서 지은 선행과 악행이 현세의 운세(운명)를 좌우하고 현세에서 지은 선행과 악행이 내세의 운세를 결정하는 것이 사실일까?
 
필자는 전생에서 살아본 기억이 없고 전생에서 어떤 선,악의 행위를 하였는지 알지 못하므로 윤회와 업이 과연 불교와 힌두교의 이론대로 운행되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판단은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간접적인 고찰을 통해서 윤회와 업의 이론을 강하게 회의하는 바이다.
 
예를 들어 유괴, 납치, 폭행, 강간, 살인, 각종 사고, 지진, 해일 .....등의 불행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불행을 당해야 할 만큼 큰 죄악을 전생에서 범했기 때문에 현세에서 그런 끔찍한 재앙을 당하는 것일까? 윤회와 업의 이론에 의하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또한 살인, 납치, 폭행, 유괴, 살인, 등의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전생에서 그와 같거나 유사한 범행을 타인으로부터 당했기 때문에 현세에서 그와 같은 범행을 보복의 차원에서 저지르는 것일까? 윤회와 업의 이론에 의하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만약 윤회와 업의 이론이 참이라고 하면 우리는 온갖 흉악한 범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나 그런 범행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비난도 동정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전생에서 맺은 "끊을 수 없는 악연(惡緣; 나쁜 인연)"으로 인해 현세에서 그러한 악행을 저지르고 당하지 않으면 안될 운명을 타고 난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을 제 삼자가 나서서 처벌하거나 동정하는 일이 무슨 필요가 있고 무슨 정당성(합법성)이 있겠는가?
 
윤회와 업의 이론이 참이라고 믿는 한 문명사회에서 사회를 개선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견지하는 법, 윤리, 경찰, 군대 등은 아무런 존재 가치나 존속 이유를 갖지 못하게 된다.
 
윤회와 업의 이론을 믿는 사람들은 만약 그들의 아내나 자녀들이 납치, 폭행, 강간, 살인 등의 일을 당하는 경우에는, "아하, 그것은 저들이 전생에서 못된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그 응보로써 받는 댓가로구나! 부처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자업자득이니 공평해진 셈이지 뭐!" 라고 말하고 범법자를 체포하거나 처벌하는 노력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현세에서 가난한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불구자, 병자의 팔자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런 사람들을 해방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Marxist-Buddhists, 소위 민중불교인들)은 만약 그들이 부처님을 계속 믿을 생각이라면 정부나 국가나 기업주를 타도하기 위해 각목을 휘두르거나 화염병을 던져서는 안된다 (1980, 90년대의 상황). 왜냐하면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전생에서 무슨 나쁜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현세에서 그와 같은 불운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가르친 대자대비(大慈大悲)와 윤회와 업의 진리를 믿는 불교인들은 세상 만사에 대해서 남에게 분통을 터뜨리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 그런 일은 불법(佛法)에 의하면 불법(不法)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세상 만사가 모두 업과 윤회의 법칙에 따라 한치의 어김도 없이 운행되고 있는데 분통을 터뜨릴 일이 무엇이 있고 분통을 터뜨린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불자들이 분통을 터뜨리다가 도리어 죄를 짓게 되면 내세에 앙화를 당하는 일밖에 더 생기겠는가?
 
어떤 일, 어떤 처지를 당해서든 불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 "그저 부처님만 믿겠습니다" 의 뜻)을 외우는 것 밖에는 없다.
 
또 한가지, 윤회와 업의 이론이 참이라고하면 부모-자식, 조상-후손의 위계질서와 천륜(天倫: 부자 형제 지간의 마땅한 도리)의 가치는 소멸되고 만다. 왜냐하면 윤회의 이론에 의하면 생명은 새로 생겨나거나 죽음이 없이 계속해서 순환되는 것이므로 누가 누구의 부모이고 누가 누구의 조상이라는 개념은 성립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윤회의 이론에 의하면 현세에서의 부모와 자식은 전생에서는 원수지간 이었을 가능성도 있고, 또는 현세에서 자기 할머니는 내세에서 자기의 딸이 되거나 첩이 될 수도 있다. 윤회와 업의 이론에 의하면 이보다 더 괴상망칙한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를 들면 현세에서 바퀴벌레나 구더기(파리 애벌레)로 태어난 생명이 전생에서는 죄를 많이 지은 5대조 할아버지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불제자들이 파리나 모기를 죽여야 옳으냐 살려야 옳으냐의 문제로 번뇌를 하는 이유는 이런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윤회와 업의 이론은 가문, 혈통, 족보, 등의 개념은 물론 인륜, 도덕, 가정, 사회, 상식, 이성, 법, 삶, 생업, 문화, 예술, 전통 등 인간의 삶 일체를 "쓸데 없는 것"으로 만들고 만다. 물론 모든 것이 쓸데 없다는 것이 불교의 요지이기는 하지만.

(3부<마지막편>에 계속)







석가의 2가지 실수 -3부

글쓴이 : 청산 날짜 : 2011-06-06 (월) 13:52 조회 : 230
석가가 윤회(輪廻)와 업(嶪: Karma, 인과응보)의 사상을 힌두교로부터 배웠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인데 힌두교에서는 윤회와 업의 이론을 무슨 용도에 활용하였는가?
 
힌두교를 만든 사람은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출현한 호전적(好戰的)인 아리안 백인들의 일파로서 이들은 인도에 침입하여 (B.C. 1500년대)  빛나는 인도 고대문명을 건설했던 원주민 드라비다인(Dravidians:  검은 피부의 인도 원주민)을 정복하고 그들을 지배하였다.  아리안인들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며 인종적으로는 코카시안계의 백인이지만 피부는 검으며 오늘날 이란, 인도인들의 주종족을 이루고 있다.
 
아리안 백인들은 드라비다 토착민을 지배하고 그들과의 교류를 막기 위해서 카스트(caste)라는 엄격한 세습 계급제도를 만들어 이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윤회와 업의 이론을 활용하였다. 즉, 피지배계급인들은 전생(前生)에서 지은 죄때문에  현세에서 낮은 신분(평민, 노예)으로 천하게 살 수 밖에 없으나 그들이 현세에서 자기 신분에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지배계급을 잘 섬기면 내세에서 높은 신분으로 태어나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것이다.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 윤회사상, 및 카르마에 대해서 美 월드백과사전 (World Book Encyclopedia 1979 ed. "Hinduism")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카스트(caste)는 인도의 엄격한 사회 계급제도이다. 이 제도는 기원전 1500년대에 중앙아시아에서 살던 아리안 족이 인도를 침입할 때에 만들어졌다. 아리안인들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인도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아리안 족과 토족 드라비다인과의 교류를 제한하기 위해서 카스트 제도를 만들어 내었다. 후에 이 제도는 힌두교의 한 교리로 정착했다.
---(중략)
힌두교는 인간의 혼은 죽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사람의 몸이 죽으면  혼은 새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다. 이러한 연속적 과정을 윤회(trans-migration)라고 한다. 죽은 사람의 혼은 동물로  태어나기도 하고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믿는데 힌두교의 교리는 이점에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카르마(업)는 윤회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카르마의 이론은 사람의 모든 행위—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그 사람의 혼이 다시 태어날 때에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는가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사람이 착한 삶을 살면 그 사람의 혼은 다음 세상에서는  높은 신분—예를 들면 부라만 계급 (=카스트제도의 최 상위 계급)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현세에서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다음 세상에서는 낮은 신분, 예를 들면 벌레로 태어날 수도 있다. 힌두교는 한 사람의 윤회는 그 사람이 영적 완성을 이룰때 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영적 완성에 도달한 사람은 목크샤(moksha)라는 상태로 되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윤회의 고리를 반복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하략)
(Charles S. J. White 기고)
 
카스트 제도는 윤회와 업이라는 교리와 결합되어 수천년을 내려오는 동안 인도 인들의 확고한 신앙이 되었으므로 오늘날 인도의 선각자들 중에는 이 제도의 폐단을 깨닫고 이를 폐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인습에 박힌 이 제도의 근절은 쉽지 않다. 
 
카스트제도의 폐지는 지배계급의 사람들만이 아니고 하위 계급의 사람들도 반대한다.  하위계급의 사람들은 왜 카스트제도의 폐지를 반대하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현세에서 전생의 죄를 다 씻고 내세에서 귀한 신분(지배 계급)으로 태어나 호강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카스트 제도는 브라만(Brahmans; 승려계급), 쿠샤트리아(Kshatriyas: 왕, 무사 계급),  바이샤(Vaisias: 평민계급), 수드라(Sudras: 노예 계급) 의  4계급으로 되어 있다. 상위 두 계급(브라만, 쿠샤트리아)는 지배계급이고 그 아래(바이샤, 수드라)는 피 지배계급이다.
 
각 가스트 계급 중에는 또 다양한 종류의 하위계급(subclass) 이 있다.  예를 들면 평민계급 중에도 여러 단계의 하계급이 있어서 이들 각 계급들은 종사하는 직업이 신분에 따라 다르게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나무를 하는 일, 물을 긷는 일,  빵을 굽는 일, 옷감을 짜는 일 등은 각각 특정 하위계급 신분에게 속한 일이어서 평민이라고 이런 일을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복잡한 계급 신분이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큰 비능률과 불편함을 가져올까는 상상 이상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4가지 계급 외에 불촉천민(不觸 賤民: untouchables)이라고 불리는 제 5계급이 있는데 이들은 사회에서 가장 천한 일을 하고 가장 천한 대우를 받는다.  결혼은 같은 계급의 신분 사이에서만 가능하고 신분이 다른 경우에는 중대한 사회문제가 되며 이에 따른 제재와 불이익이 따른다.  
  
카스트 제도를 만들어 가르친 인도의 지배계급의 사람들은 윤회와 업의 이론을 가르친 덕분에 오래도록 호강스런 지배자의 위치를 편안하게 누려 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철저한 계급제도는 오늘날 인도의 민주화와 근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 제도는 결과적으로 지배계급의 사람들에게도 득보다는 손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인도 사회에 만연해 있는 가난과 무기력과 비능률은 그 책임이 카스트라는 계급 제도와 윤회와 업을 믿는 신앙에 있다.  윤회와 업의 이론을 가르치고 믿어온 업보를 인도인들은 확실하게 감내하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인도의 도시는 선진화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미국 등 선진국으로 진출하여 컴퓨터 등 첨단 과학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인도  대부분의 지방은 편만한 가난, 비능률, 고루한 세습 풍속  등이 많은 사람들의 사고와 삶을 지배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윤회와 업의 이론은 전능한 석가모니의 창작 이론도 아니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이론도 아니다. 윤회와 업이라는 이론은 원래 지배계급의 사람들이 피지배계급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예속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온 죄많은 이론이다. 그런 윤회와 업에 무슨 진리가 있을 것이라고 미련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불교는 기존  힌두교의 카스트 계급제도에 도전하며 출발한 이단 힌두교인데 윤회와 업의 교리는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윤회와 업의 이론을 어떤 용도로 활용하고 있는가?  불교에서는 "현세에서 착한 일을 하고 옳바르게 살아야 전생의 죄를 씻고 내세에서 복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외견상으로는 중생들을 선하게 계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부처님 (사실은  전문 불자들)에게 보시를 많이 하고 공덕을 쌓으면 내세에서는 물론 현세에도 들인 공덕의 수배 이상 되는 복을 본인 뿐만 아니라 남편과 자식도 받아 잘 살게 된다"고 가르치는 것을 중점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즉 불교의 윤회와 업은 내세보다도 주로 현세의 복을 빌기 위한 기복신앙의 주요 교리가 되었다. 
 
불교인들이 부처님 앞에 돈과 재물을 바치는 행위는 바치는 재물의 가치보다 훨씬 더 큰 이득(복)을 얻을 수 있다는 손익계산에 근거한 이기적인 행위이다. 종교인들이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열심히 봉사 하는 것은 사실은 더 큰 이익(천국행, 내세에서 받을 보상 등)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불교를 옹호하는 사람들 중에는  불교가 원래는 기복신앙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종교의 속성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다 기복신앙이다.  불교는 석가가 죽은 직후부터 기복신앙화 됐고 절은 기복신앙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불교의 융성과 존속은 기복신앙에 기인한 것이다. 이점은 다른 종교의 경우에도 같다.
 
부귀와 영화는 모든 인생이 추구하는 것이므로 종교인들이라고 이를  추구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나, 석가와 예수는 이 세상에서의 부귀 영화는 추구하지 말라고 가르친 사람임을 주목해야 한다.  불교는 개념 설명에서 기도교와는 서로 달라 보이나 결국 “영생, 부활, 천국, 지옥”을 믿는 점에서 다르지 않고 내세의 행복을 위해서 현세의 행복을 적극적으로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점에서도 같다. 
 
예수와 석가는 죽은 후에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위해서 현세에서의 행복을 모두 버리도록 가르친 사람이다.  그러나 대다수—실질적으로는 100%—의  기독교인과  불자들은 죽은 후의 천당보다 살아 생전의 부귀영화를 더 추구하고 있다.  
 
종교인들이 더 큰 보상을 기대하며 행하는  헌금, 보시,  희생, 순교 등은 일종의 투자이다. 그러나 이런 투자는 현명한 투자가 아니다. 신자들이 만사형통을 기대하며 바치는 보시나 헌금은 결국 전문 종교인들의 일방적인 수익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직설(直說)적인 표현을 한다면 윤회와 업의 이론은 전문 불제자들로하여금 중생 들을 속이고 착취해서 호의호식하고 명예와 존경을 누리게끔 해 주는 "황금알을 낳는 것위"이다.  전문 불자들은 계속해서 윤회와 업의 이론을 강조함으로써 이를 일반 불자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박아 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튼튼한 수입원이 영구적으로 보장이 되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의 사제들이 11조법을 신자들 뇌리에 뿌리박히도록 세뇌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독자들은 필자를 과격한 독설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필자는 불교의 실상을 가장 정직하고 공정하게 설명하고자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과격한 독설을 논하려면 전문 종교인들이 일반인들에게 사람들에게 퍼붓는 협박과  공갈과 저주의 말을 들어야 옳다. 
 
석가의 후계자들은 어리석은 중생들에 의존해서 생계를 해결하고 무한정 남는 시간과 세월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권세와 치부를 확고히 다지기 위한 수단으로 석가를 더욱 더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로 승격시키고 온갖 알쏭달쏭하고 오리무중과 같은 이론과 공상을 무한대(無限大)로 전개하였다. 그것이 오늘날 존재하는 수많은 불교 경전이다. 
 
불경들에 나오는 말들은 다 석가의 가르침이 아니고 후대의 사람들이 석가를 신격화하기 위해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말, 그럴듯한 말을 모두 모아 놓은 것이다.  그 형식은 대개  “여시아문 (如是我聞: 나는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노라)”라고 되어 있어서 마치 석가가 가르침을 전하는 것처럼 되어있다.  이것은 기독교 구약 모세5경의 내용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는 화자(話者)가 자신의 의견을 마치 부처나 하나님이 한 말처럼 만들어 절대 권위를 불어넣고자 하는 전략의 일환이고 간단히 말하면 "구라"를 치는 것이다.  여러 후계자들이 각자 이렇게 자기 생각을 덧붙여 경전을 엮었으므로 경전의 전체적 내용은 서로 모순되고 반대되는 것들로 가득차 있게 마련이다.    

불경에 나오는 가르침 중에는 부분적으로 사실에 부합하는 것도 많이 있고 듣기 좋은 말들도 얼마든지 있다.  석가는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에 대해서 말했다. 생노병사-- 생노병사는 진실이고 이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석가의 가르침의 요체는 생로병사의 현상을 시인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생로병사를 여하히 극복하고 영원하고 지극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이다. 이미 앞에서 논한 바 대로 석가가 가르친 생로병사의 원인 분석과 그 해결 방법은 전혀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오류이다. 
 
불교의 그 많은 경전들과 그 많은 교파들의  가르침은 복잡 다단하지마는 이들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부처님 앞에 공덕을 많이 쌓고(=절에 돈과 재물을 많이 헌납하고) 열심히 부처님께 기도를 하면 속세의 온갖 욕심을 다 성취할 수 있다" 이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석가가 “모든 속세의 욕망과 행복을 버리고 얻어 먹다가 죽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과는 정면으로 위배되는 내용이다.
 
불교가 계속 번창해 왔고 불교승들이 무위 도식을 하며 신선 놀음을 해올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부처님의 은덕을 베푼 공로 때문이 아니고 그들이 불쌍한 중생들에게 거짓말과 사행심--"절에  돈만  내고 2천 5백년전에 죽은 이단 힌두교인에게 빌기만 하면 세상의 어떤 욕망도 다 성취할 수 있다"는—을 가르친 공덕 때문이다.
  
물론 불교에서는 바른 생각, 바른 판단, 바른 행동... 등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문은 모든 철학, 모든 종교가 다  의례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므로 불교만의 특징은 아니다.   모든 종교는 바른 생각, 바른 행동이 꼭 자기들의 종교를 믿어야만 가능한 것 처럼 일반인들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애초에 석가의 가르침은 바른 생각도 아니고 바른 판단도 아니고 바른 행동도 아니었다.  삶에서 생겨나는 모든 불행과 번뇌를 없앨 수 있다는 석가의 기본 가정은 절대 오류이다. 그런 오류에서 출발한 불교가  세상 사람들에게 바른 생각, 바른 판단, 바른 행동을 하라고 설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불교를 포함한 대다수의 종교가 절대 사랑, 절대 용서, 절대 희생, 절대 양보... 등을 진리인양 가르치고 있으나 이런 것들도 커다란 오해이다.   절대 선, 절대 사랑, 절대 용서 등은 사실은 생명의 법칙이 아니고 죽음의 법칙이다.  이런 석가의 가르침이 죽음의 법칙인지 구원의 법칙인지 아직도 판단이 안되는 사람은 실제로 석가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겨보기 바란다. 극단과 망상은 세상을 구원하는 법이 아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석가의 가르침은 "죽음의 법"이다.  석가의 가르침을 따르면 개인과 가정과 인류는 소멸된다.  인류가 여전히 생존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인류의 대다수가 석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불자들도 그들이 이 속세에서 생존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석가의 법을 따르기 때문이 아니고 석가의 법을 될 수 있는대고 위반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생존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기 때문이 아니고 될 수 있는 대로 예수의 가르침을 위반하고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석가나 예수의 가르침 때문에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희로해락을 몸으로 때우며 속세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중생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풀베고 밭갈아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식 먹여 살리며 자손을 이어가는 촌부(村夫), 복작거리는 시장에서 콩나물 값을 흥정하며 살아가는 아낙네들도 사실은 석가나 그의 제자들보다 보다 훨씬 현명하고 겸손하고 정직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어리석고 불쌍한 존재요 깨달음과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진실로 지혜와 동정과 구제가 필요한 쪽은 석가와 그의 추종자들이다.
 
중생들은 석가나 석가의 제자들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석가와 석가의 제자들은 중생들이 없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  따라서 자비는 부처가 중생들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고 중생이 부처와 부처의 제자들에게 베풀고 있는 것이다.
 
속 세를 떠난 불제자들은 세상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에서 직접 죄업을 쌓는 기회를 회피할 수는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중생들이 불제자들에게 바치는 공양은 불교식으로 해석을 한다면 중생들이 속세에서 고생을 하고 온갖 죄(?)를 지어서 만들어낸 죄의 열매이다. 
죄는 중생들이 대신 짓게 하고 그 죄의 열매를 앉아서 속여서 빼앗는 행위는  죄가 아니란 말인가?  전문 불자들이 거짓말로 중생들의 양식을 빼앗는 행위는 오히려 더 무거운 죄가 아닌가?
(4부에 계속)
(내용 추가로 양이 늘어나 제 4부로 나누었습니다.)




석가의 두가지 실수- 4부(결미부)

글쓴이 : 청산 날짜 : 2011-06-08 (수) 14:22 조회 : 119
한국의 모든 불교인들이 존경하는 성철스님(李性徹,  1912~1993.11.4)은 임종에 앞서서   "한평생 여러 남녀들에게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속인 죄가  너무 커서 지옥에 떨어진다”라는 고백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생평기광 남녀군(生平欺狂男女群) - 한평생 여러 남녀들을 속여 미치게 했으니
미천죄업 과수미(彌天罪業過須彌) -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구나!
활염아비 한만단(活陷阿鼻恨萬端)-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되는 구나!
일륜토홍 괘벽산(一輪吐紅掛碧山)- 한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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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은 또한 임종 직전에 “석가는 큰 도적이다”라는 내용의 시를 말했다고 한다.
 
석가는 원래 큰 도적이요
달마는 작은 도적이다
西天(서천)에 속이고 東土(동토)에 기만하였네
도적이여 도적이여 !
저 한없이 어리석은 남여를 속이고
눈을 뜨고 당당하게 지옥으로 들어가네
 
한마디 말이 끊어지니 일천성의 소리가 사라지고
한 칼을 휘두르니 만리에 송장이 즐비하다
알든지 모르든지 상신실명(傷身失明)을 면치 못하리니
말해보라 이 무슨 도리인가
작약꽃에 보살의 얼굴이 열리고
종녀잎에  야차(夜叉, 불교의 마귀)의 머리가 나타난다
목위의 무쇠간은 무게가 일곱근이요
발밑의 지옥은 괴로움이 끝없도다
석가와 미타는 뜨거운 구리 쇳물을 마시고
가섬과 아난은 무쇠를 먹는다
 
몸을 날려 백옥 난간을 쳐부수고
손을 휘둘러 황금 줄을 끊어버린다
산이 우뚝우뚝 솟음이여 물은 느릿느릿 흐르며
잣나무 빽빽함이여 바람이 씽씽분다
사나운 용이 힘차게 나니 푸른 바다가 넓고
사자가 고함지르니 조각 달이 높이 솟았네
알겠느냐 1 2 3 4 5 6 7 이여
두견새 우는곳에 꽃이 어지럽게 흩어졌네
억!---
( 출처: http://dhykim.egloos.com/10455840 )
 
성철스님의 마지막 고백의 뜻은 대강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한평생 여러 신사 숙녀들 앞에서 큰 스님이란 경칭을 들어 가며 석가의 도를 설법했으나 죽음을 임박해서 뒤돌아 보니 모두 다 거짓말이라.  이 모든 거짓말의 출처는 석가이니 석가는 큰 도적이 아니겠는가.  그런 석가가 무수한 인간들을 속이고 당당히 지옥으로 들어간다...”
 
성철스님은 1987년 4월 초파일(양력4월 23일) 에 발행한 법어에서  “나는 사단(사탄, Satan) 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라고 말해서 세간에 많은 이야기를 낳았다.  그 내용을 재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사단이여 !
어서 오십시요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부처인줄 알 때에 착한 생각 악한 생각 미운 마음 고운 마음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악마와 성인을 다같이 부처로 스승으로 부처로 부모로 섬기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모든 대립과 갈등은 다 없어지고
이 세계는 본래로 가장 안락하고 행복한 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일체의 불행과 불안은 본래 없으니 오로지 우리의 생각에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가장 근본적인 길은
거룩한 부처인 당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에 온 세계는 본래 부처로 충만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러운 뻘 밭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가득하게 피어 있으니
참으로 장관입니다.
아 ! 이 얼마나 거룩한 진리입니까 .
이 진리를 두고 어디에서 따로 진리를 구하겠습니까. 이 밖에서
진리를 찾으면 물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할 때 거기에서 지옥이 불타게 됩니다.
선악의 대립이 사라지고 선악이 융화 상통할 때에
시방세계(十方世界, 온 세계) 에 가득히 피어있는 연꽃을 바라보게 됩니다.
연꽃 마다 부처요 극락세계 아님이 없으니
이는 사탄의 거룩한 본 모습을 바로 볼 때입니다.
출처: http://blog.daum.net/budda7/7062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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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어란 원래 횟갈리게하는 것이고 또 이름을 날리는 스님들은 종종 기존 개념을 생판 뒤집어 엎는 식으로 말함으로써 사람들의 혼을 빼는 “혼란 전법”을 자주 쓴다.  예를 들면 “석가를 만나면 그를 죽여라” 라든지,  “원수나 마귀를 성인(聖人) 섬기듯 섬겨라” 따위가 그것이다.
 
절의 큰 스님들은 세상사의 어려움을 모른다. 성철스님도 중학교를 마치고 곧 출가해서 불가에 입문한 인물로 세상의 어려움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다.   알아서 높이 받들어 모시는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만 듣고 한 평생 세상과는 담을 쌓고 불경만 읽은 고승(高僧)들은 속세의 중생들이 겪는 수고와 고뇌를 뼈저리게 알 수 도 없고 마귀, 석가, 하느님의 존재가 뭐 어떻게 나쁜건지 좋은 건지 실감이 안난다.  
 
“원수나 마귀를 만나면 그를 성인이나 부님을 모시듯 극진히 섬겨라. 그러면 속세의 모든 대립과 갈등이 깨끗이 해결될 것이 아니겠는냐 , 이렇게 간단한 일을 가지고 왜 그렇게 어리석게 야단법썩들을 떨고 있느냐, 깨닫거라 이 무지한 중생들아 !” 라는 꾸짖음이다.  이는 마치 가난에 대해 전혀 개념이 없는 사람이 배곺은 사람들에게  “밥이 없다구?  그러면 라면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해 주는 것과 같은 류의 무개념이다. 
 
성철 스님의 입장에서는 부처와 마귀의 존재는 숭배하거나 무서워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대상이다.  사실 부처와 마귀는 이름 뿐이지 그들이 인간 세상을 도웁고 있는지 해치고 있는지 아무런 증거도 없지 않은가?  따라서 고승들의 입장에서는 마귀와 석가를 희롱하는 언어의 유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성철스님이 부처나  마귀나 다 한가지라고 인식한 점은 진일보한 인식이다. 그가 하느님과 사탄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일심동체 (一心同體)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느님과 마귀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일심동체라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과  사탄은 둘 다 모든 종교에서 꼭 필요로 하는 우상이고 이 중 어느 하나도 빠져서는 종교가 성립이 안되는 존재들 이다.  하느님과 마귀는 서로 원수지간인듯이 꾸미고 있지만 이 두 우상은 서로 긴밀히 협조하면서 인간을 가지고 노는 일심동체의 귀신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 일심동체의 두 가지 우상을 유효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신자들을 복종시키고 착취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마귀도 동행하고, 기독교인이 가는 곳에는 항상 사탄도 동행한다. 하느님은 절대로 마귀의 자유를 속박하지 않고 무한대의 자유를 허용한다. 하나님이 언제 마귀 사탄의 행동을 제어한 적이 있는가?  달리 말하면 하느님과 마귀는 몸은 하나요 머리는 두 개인 우상, 즉 양두귀신 (兩頭鬼神)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사탄을 대단히 미워하며 난리 법썩을 떨고 증오의 푸닥꺼리를 하고 있으나 사실은 이 흉악하게 생긴 마귀는 기독교인들에게 겁을 주어 교회에 철썩같이 매달리도록 해서 교회를 번창케 해주기 때문에 기독교의 수호신이다.

신도들을 겁주고 복종시키기 위해서 마귀는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존재이다. 
만약 하나님이 마귀를 잡아 가두거나 죽여버리면 그 순간에 기독교는 와해된다. 마귀가 기독교를 튼튼하게 지켜주고 성장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면에서 그 중요성은 오히려 하느님보다 더 크다.  따라서 유일신론은 실은 이신론(二神論) 또는 양신론 (兩神論)이다. 필자는 이런 사실을 “양신론(양신론)” 이란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양신론 글은 후에 올리겠습니다.)
 
성철스님의 고백은 주로 기독교인들이 불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즐겨 인용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뭐 나은 구석이 있는가? 

예수는 유태인들에게 “너희들은 마귀(devil)의 자식이다. 너희의 아비는 처음부터 살인자 (murderer)이고, 짓말장이(liar)이고 거짓말의 아비(Father of lies)니라”고 했다 (요한 8: 44).
 
(요한 8: 44) 너희(=유태인들)은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You are of your father the devil, and your will is to do your father’s desires. He was a murderer from the beginning, and has nothing to do with the truth, because there is no truth in him. When he lies, he speaks according to his own nature, for he is a liar and the father of lies.)
 
예수는 유태인의 하느님(=여호와)을 마귀라고 했는데 이 말은 사실이다. 구약에는 여호와가 무수한 사람을 죽인 신이고 거짓말장이이고 거짓말의 아비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들로 가득하다.
 
유태인들에다 대고 “너희의 하느님은 마귀다”라고 했으므로 유태인들은 격분했고 결국 예수는 유태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예수는 기독교인들의 하느님이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유태인들을 가리켜 자기들의 하나님을 죽인 원수라고 미워해왔다.
 
예수는 유태인들의 하느님을 마귀라고 욕했으나 자기 자신도 거짓말의 왕, 즉 마귀라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예수 자신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하느님이 되었고  많은 사람을 죽였고 거짓말장이이고 거짓말의 왕이 되어있다.  예수는 직접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았으나 그의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앞세워 많은 사람들을 육적으로 영적으로 죽였다. 
 
기독교인들에 의하면 예수는 인류의 대다수(수십억 인구!)를 자기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옥불에 떨어뜨려서 영원한 불고문을 받게 한다고 한다. 필자는 예수를 김정일보다 더 악한 마귀라고 본다. 김정일은 수백만의 사람을 죽였다고 하는데 사람을 한번 죽이면 그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예수는 수십억의 사람들을 죽인 후에도 그들을 죽음보다 더 고통스런 지옥에 떨어트리고 불고문을 영원무궁토록 준다고 하지 않는가?   예수는 하느님이고 또한 마귀이다. 
 
예수는 불신자들에게만 마귀가 되는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에게도 마귀이다. 기독교인들을 가장 많이 속이고 착취하고 어리섞게 만들고 거짓말장이로 만들고 휴일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들볶고 세상 사람들로 부터 욕을 먹게 만드는 존재는 누구인가?  그것은 예수이다.  나는 사탄이 예수만큼 기독교인들을 많이 속이고 들볶고 착취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착취를 당하면 당할수록 행복해하고  그로 인해 받는 고통이 크면 클 기뻐하고 찬송한다. 이런 사람들을 심리학에서는 마소키스트 (masochists)라고 부른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인류 대다수를 죽이고 불구덩이에 집어넣는다는 이야기를 무슨 자랑처럼 신이나서 말한다. 남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을 사디스트(sadists)라고 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새디스트-마소키스트(sadist-masochists)들이다.
 
통칭해서 말하면  종교이들이 섬기는 신은 하느님이기도 하고 동시에 마귀이기도 하다.  여호와, 알라, 예수, 석가, 맑스 (맑스교의 하느님) 등은 그들을 섬기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이요 구세주로 경배를 받고 있으나  이들은 모두 거짓말의 왕이고 많은 인간을 죽이고 불행하게 한 자들이고 그들의 추종자들을 미치광이 광대로 만들어 세상에  어리석음과 불행과 악이 가득차게 하는 자들이다. 즉 하느님=마귀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성철 스님이 석가를 거듭 거듭 마귀라고 지칭한 것은 평소 그의 잠재 의식 속에 석가야 말로 거짓말의 왕초이고 큰 도적(=마귀)이라는 것을 한평생 느껴왔기 때문에 그런 혼란스런 법어 중에 진실의 일말을 토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양심이 있는 사람은 죽을 때에 잘못을 뉘우치고 진실을 말한다고 한다.  성철스님은 수 많은 불자 중에서 그래도 양심이 있었고 석가의 실체를 상당한 정도로 깨우친 사람이었다.  어찌됐건 성철 스님의 고백은 죄의 고백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불교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성철스님의 죄의 고백에 또 무슨 신비로운 진리가 들어있는가 해서 두리번거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풀먹여 날선 고급 장삼을 떨쳐입고  배에 살이 많이 찌고 얼굴에 윤기가 흐르는 대다수의 스님들은 성철스님과 같은 고백을 할  용기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그 고급 옷과 살과 기름은 거짓말의 왕 석가를 팔아 중생들의 혼과 돈과 양식을 속여 빼앗은 죄를 지어서 축적한 죄의 덩어리인데 죄를 고백하면 무엇이 남겠는가,  거짓말도 죄도 웬만큼 지어야 고백을 하지 우주의 크기보다 더 큰 죄를 지으면 자신이 거짓말의 왕(마귀)인지 구세주인지 분간을 못하고 수치심도 죄의식도 없다.   
 
대다수의 불자들은 석가와 그의 제자들이 엮어낸 오리무중의 진리(=거짓말)의 늪에 빠져서 "부처님의 법은 너무나 깊고 어려워서 그것을 다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부처님 외에는 없다"며 절망적인 감탄을 하고 있다.  불경은 억만년을 연구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애시당초 이해될 수도 없고 실천될 수도 없는 억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불교인들처럼 “깨닫는다” 혹은 “깨달았다”라는 말을 많이, 자주 말하는사람들도 없다. 그 많은 깨달음이 도대체 다 무엇인가?   불교인들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것은 없다.  어떻게 해서 밥이 생기고 어떻게 해서 옷이 생기는지,  경찰과 군대가 어째서 필요한지, 어떻게 해서 공장이 돌아가고 수출이 되고, 어떻게 해서 5천만 대 식구가 지지고 볶으면서도 그런대로 밥을 먹고 사는지 석가의 제자들은 알지 못한다. 
종교는 원래 세상의 이치를 오해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종교가 세상사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무자격자의 월권이다. 
 
전문 불자들은 석가의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을 속이기만 하면 부귀 영화와 넘치는 존경과 권세가 저절로 알아서 굴러들어온다. 이것이 불제자들이 세상을 사는 방법이다. 이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삶이 이니고 자신과 남과 우주를 기만하고 속이는 삶이다. 
인간이 밥을 버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종교는 순수한 거짓말을 팔아 밥과 권세와 존경을 버는 사기술이다.
 
남을 속이는 사기꾼과 그 사기술에 속아서 사기꾼을 구세주로 섬기는 사람들은 피차 찰떡궁합의 관계이다. 이 거대한 죄와 어리석음의 끝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석가의 본체를 아는 노력이 필요하다. 
 
석가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석가의 이론에만 빠져서 그것만을 숭상하는 태도로 서는 불가하고 석가의 철학을 낳게 한 힌두교와, 힌두교를 생겨나게 한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상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독을 알기 위해서는 독 속에 들어가서 뚜껑을 닫고 캄캄한 독 안을 헤매기만 해서는 안되고 독에서 탈출해 나와 독의 겉 모양도 살펴보고, 독이 만들어져 나온 내력도 알아보고, 이 세상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별의 별 모양의 독(종교, 사상, 철학)을 만들어 내었다는 사실도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시대가 진보할 수록 더 튼튼하고 아름답고 실용적인 지식과 진리들이 자꾸 자꾸 생겨나고 있으므로 오직 수천년 전 이단 힌두교인이 만든 협소한 독속에 들어가 그 독이 유일 최고의 진리라고 고집해서는 안된다. 
 
질그릇, 부싯돌, 움집, 고인돌 따위는 고대인들의 삶과 사고를 이해하는 자료로서는 보존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온 인류, 자손 만대가 특정 원시인이 만든 독 속에 들어가서 억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틀린 생각이다. 
 
불 교는 오해의 철학이고 생명과 우주의 순리에 거역하는 범죄의 사상이다.  왜 성(性) 을 죄로 보고 결혼을 기피하는가?  性은 세상 온갖 생명이 이 세상에 온 관문(關門)이고  각 생물 종들이 그 문을 통해서 영생(종족의 영생)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왜 자기 자식은 낳지 않고 남의 자식을 꼬여내서 또 하나의 거짓말 장이로 훈련시키는가?
왜 땀흘려 생업에 종사해서 자신과 남의 생존을 도우려고 하지 않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양식을 속여 빼앗는 일에만 종사하는가?
왜 올바른 학문을 하지 않고 밑도 끝도 없는 공론(空論)과 말도 안되는 수수께끼로 자신과 남을 속이는 일로 한번 밖에 없는 귀한 인생을 낭비하는가?  
 
삶 의 의미는 열심히 일하고 사랑하고 자식을 키우고 사회의 책임을 함께 져 나가는 바쁜 삶 속에서 이따금씩 시간을 내서 조용히 음미해 보아야 할 일이다. 1년 365일, 한 평생 동안 벽과 허공만을 상대로 해서 진리를 깨닫겠다고 하는 태도는 자신과 인류에 대한 범죄이다. 그런 방식의 삶 속에서는 더욱 자기 혼란과 생의 무의미에 봉착하게 되고 횡설수설과  죄의 독백만이 생겨날 뿐이다.
 
인 도에는 불교인들의 형님격인 힌두교인들이 뙤약볕 길 거리에서 꼰 다리를 또 꼬고 (=좌선, 요가의 형태) 10시간 20시간 내리 앉아 진리(?)와 인생의 의미를 추구 하면서 이따금씩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동냥으로 연명해 가고 있다. 인도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성자(聖者, holy men)라고 부른다.
 
도대체 무슨 일들인가?  천벌을 받고 싶으면 무슨 짓을 못할까?  인도가 성자들의 나라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인도는 종교로 병든 환자의 나라이다.
종교로 병든 나라는 인도만이 아니다.  소련, 중국,  월남, 큐바 등도 치명적인 종교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고( 1991년 당시 상황), 중동 제 국가들도 종교병으로 와병중이며, 남한과 북한도 가지각색 종교병에 걸린 중증 환자들이 광대 푸닥거리에 전심하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 일본, 독일, 및 그 밖의 모든 나라에도 종교병에 걸린 사람들이 수다히 있다.
 
그 러나 종교병에 걸린 환자들은 다른 환자와 달라서 병이 깊어 마지막 숨을 몰아 쉬면서까지도 자신만이 건강하고 자신만이 행복하며 자기 이외의 모든 다른 사람들은 치료와 구원이 필요한 환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특징이다. 환자가 자기는 환자가 아니라고 믿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다.
 
한국의 불교승들 중에는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 중질해먹는 것이 가장 해볼만한 일이다"라는 말을 자랑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다.  종교인들의 말대로 자신이 불행하며, 자신이 죄인이며, 자신이 거짓말장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다.
 
필자는 불교를 너무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불교를 너무 무시하지는 않는다. 단지 불교인들이 기독교를 무시하는 정도만큼한 무시한다.  필자는 기독교도 기독교인들이 불교를 무시하는 정도만큼만 무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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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종교(맑스교 포함)는 자신과 인류와 우주에 대한 기만이고 범죄이다. 종교는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고 명백히 인간의 삶과 상식에 저촉되는 중대한 범죄이다. 종교인들은 스스로 종교에서 나와야 한다. 만약 이를 끝끝내 거부하고 회개치 않는다면 이는  법정에서 그 기만과 죄의 여부를 판결하고 마땅한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 
 
우리 인류가 종교만큼 큰 범죄를 법정에 세우지 않는다면 정의와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작은 죄인은 잡아 족치고 큰 범죄는 존경하고 세금도 면제해주는 법은 더이상 용납될 수 없다. 
 
유태교, 기독교, 회교, 맑스교, 불교... 이들 종교는 세상을 온통 우롱하고 무지와 편견과  분쟁과 살인이 횡행하게 한다. 종교의 본질을 아예 모른다면 모르되 알고서도 이들을 용납하는 것은 세상을 죽이고 역사를 죽이는 범죄에 동참하는 것 밖에 안된다.  종교를 고발해서 인류 문명을 살리는냐 아니면 종교가 인류문명을 망치도록 방관만 하고 있느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불교가 다른 종교보다 유순하고 상대적으로 폐해가 적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종교를 대신할 만한 가치나 진리를 가진 것은 아니다.
 
종교인 중에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수다히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은 한사코 자기들이 믿는 우상(마귀)의 영광과 영생을 위해 희생 봉사하고 있다.
맑스나 김정일 집단을 숭배하는 이들 중에도 세상 돌아가는 맥을 모르는 순진한 양심가들이 많다. 그들의 순진한 양심은 마귀를 섬기는 양심이니 결국 자기도 죽이고 대한민국도 죽이고 이 세상도 죽이는 마귀의 양심이 될 뿐이다.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종교의 종말이 임박했다. 종교인들은 회개하고 종교에서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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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자는 또 하나의 교주가 되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교주는 남 위에 군림하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은 수 많은 사람들을 감시 감독하고 세상의 평가에 일일히 신경을 써야 하므로 노예가 되는 것과 같고 자신의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 필자는 자유를 팔고 세상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중할 대상은 하느님도 아니고 교주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성실하고 가치 있는 인간으로 세우는 일이 가장 즐겁고 현명한 삶의 태도이다.  물론 남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의 평가나 칭찬 따위에 연연하는 것은 스스로 남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다 떳떳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도 행복해지고 세상을 살리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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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심을 가지고 긴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11년 6월 7일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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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선녀인블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6.09 제가 가끔 읽기만 하는 사이트에 올려진 글입니다.
    많이 잘못된 것 같고 기독교인이 쓴 것 같기도 한데....
    저 수준에 맞추려면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까요?


  • 작성자투덜이77 | 작성시간 11.06.09 ^^ 바르지 못한 견해입니다. 너무 잘못된것이 많아 조금읽다 말았습니다.
    기독교에서 불교 폄하하기 위한 내용도 있고 한마디로 하면 읽고 분석할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여기 토론방 글들을 읽는것이 좋을듯 합니다.
  • 작성자산냐척파 | 작성시간 11.06.10 이 글은 개독입장에서 쓴글일뿐 아무런 가치도 없다
    글짜 짜집기 한것 밖에 는 볼수 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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