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불교 소개 >
인도불교사 산책 (5)
불교 발상지 인도가 요즘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미국의 일방주의와 G-7 등 서구 세력에 대항하여 앞으로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브릭스BRICS’ 국가가 영향력이 커지고, 경제력이 향상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고. 골드만삭스의 경제학자 짐 오닐(Jim O'Neil)은 이들 네 나라가 2050년에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될 잠재력이 있는다 설을 발표했다.
미국 실리콘 벨리의 구글 등 IT 업계의 사장에 특히 인도 공과대학 출신들이 많다는 보도가 많다 . 또 인도의 실리콘 벨리인 ‘벵갈루루’에는 새로운 물결이 일고 있고,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 오히려 인재들이 벵갈루루로 몰려든다는 흥미로운 기사도 자주 보인다. 인구가 많고, 땅이 넓지만 도로를 비롯한 산업 인프라가 발달하지 못해 어려웠던 인도가 소프트웨어 강국으로 부상 것한이다. 인도에 대한 이런 기사와 전망은 앞으로 인도가 세계의 중요한 국가로 부상할 것으로 추측된다.
불교 발생국이지만 불교인이 매우 적은 인도의 불교 부흥을 위해 한국, 태국, 일본, 티베트 등 모든 전통불교국가 불교 세력이 인도에 사찰을 세우면서 함께 노력하고 있다.
불교가 다시 꿈틀거리는 인도 불교의 역사와 현황을 2006년부터보드가야에 땅을 사고, ‘싸띠 국제수행학교’를 설립하면서 인도불교복원을 위해 노력하는 붓다팔라 스님의 통해 보도한다. - 편집자 주 -
글/ Bhikkhu Buddhapāla
The First SATI MASTER
buddhapala@hotmail.com
대승부 불교, 불교의 힌두교화 문을 열다
Buddha는 지혜와 땀의 크기가 자유와 진보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본다. 부파부는 논리의 크기가 행복의 크기를 결정하다고 주장하고, 대승부는 돈과 보시의 크기가 행복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본다. 그리고 밀교부에 이르면 믿음의 크기가 행복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BCE 486년 음력 4월 보름 날 저녁 꾸씨나라 싸라수 아래, 보름달이 휘영청 뜬 한밤중 그 끝을 알 수 없는 지혜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자비심으로 한평생 온 정렬을 받쳐 활동한 Buddha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요히 입멸한다.
Buddha 입멸 후 우리가 늘 경험하듯 여러 가지 문제가 등장한다. 그 가운데서 하나는 무엇이 Buddha 가르침이고 정법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때 등장한 것이 흔히 聲聞으로 불리는 Buddha로부터 직접 수행을 지도받은 직계제자이다. 불교교단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들은 Buddha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전해 받았다는 것으로 인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직계제자가 인도대륙에서 모두 입멸하고 사라지자 교단의 분열이 불교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Buddha로부터 직접 수행지도를 받은 직계제자가 모두 입멸하고 난 후, Buddha 가르침을 증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Buddha 가르침에 일치하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Buddha 가르침을 담고 있는 오리지널 텍스트인 근본경전뿐이었다. 문제는 해석과 논리 그리고 주장만 남아서 불교교단을 휘몰아쳤다. 얼마나 높은 수준까지 수행을 체험하느냐보다 얼마나 논리적으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Buddha는 수행을 체험하고 도과를 성취한 아라한을 최상으로 삼았는데 부파부에 접어들면 수행의 이론과 기술을 담고 있는 경전의 내용을 암송하는 삼장법사가 불교교단의 중심으로 등장한다. 부파부는 분열하면서 불교교단은 발전하지만 점점 더 수행과는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며 불교와 수행을 창안한 Buddha를 불교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BCE 187년 인도대륙에 힌두교 사회가 등장한다. 변화된 사회에 생존하기 위한 방편으로 불교의 힌두교화가 진행된다. 그 핵심이 대승부 불교의 등장이다. 일반적으로 한국불교도는 대승부 안에서 대승부에서 주장하는 관점으로 교육받은 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승부는 등장하면서 대승과 소승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짠다. 기존의 불교는 자기 자신의 관심사만 주목하고 활동하기 때문에 Hīnayāna(小乘)이라고 비하하고, 자신은 대중의 관심사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기 때문에 Mahāyāna(大乘)이라고 주장한다.
불교역사에서 그 누구도 Buddha가 창안한 오리지널 불교를 소승이라고 한 적은 없다. 단지 자칭 대승부가 등장하면서 자신은 대승이고 기존의 불교를 소승이라고 비하한 역사만 존재한다. 내 일기장에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적어두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듯, 대승부의 입장에서 주장된 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따르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400년대 전후로 인도로 순례한 법현(法顯, 337 ~ 422)의 佛國記나 630년대 인도를 순례한 현장(玄奘, 602 ~ 664)의 大唐西域記를 보더라도 당시 인도불교 사찰의 현실은 상좌부(Theravāda) 사찰이 70%, 대승부 사찰이 15%, 상좌부와 대승부가 함께 공존하는 사찰이 15% 정도라고 기술한다. 대승부가 등장하면 기존의 불교가 소멸하고 새로운 대승부로 대체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인도불교의 현실이 우리가 교육받고 짐작하는 것과는 많이 다를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
소승은 작은 수레라는 의미를 가지지만 비열한, 속이 좁은 뜻도 있다. 대승이란 큰 수레란 의미도 있지만 호탕한, 마음이 넓은 등의 뜻도 있다. 이 말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승이라고 비하한 집단은 원칙주의자, 깐깐한 사람이란 의미이고, 대승이란 포용주의자, 화합주의자란 뜻이다. 결국 소승과 대승은 당시 그들이 등장하던 BCE 100년 전후로 인도의 정치경제적 현실 속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도움 된다.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이다. 능력제에 기반 해 인재를 선발하고 최후의 승자가 되고나면 그들이 성취한 기득권을 그들만이 독점하고 자기가족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능력제를 폐기하고 신분제에 기반한 세습제를 도입한다.
이것은 정의의 기준이 능력제에서 세습제로 변한 것이다. 기준의 변화, 그것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꾼다. 정치질서뿐만 아니라 이념토대와 사유양식까지 그리고 종교지형의 변화는 필수적이다. 전쟁을 동반한 거대한 기득권의 변화가 밀려온다.
중국에서는 동중서(董仲舒, BCE 176? ~ BCE 104)가 漢의 무제(武帝, BCE 156 ~ BCE 87)와 손잡고 BCE 140년 현량대책(賢良對策, 공자사상 이외는 모두 배척하는 것)을 저술하며 국가유교주의가 등장하고 유교식 신분사회가 자리 잡는다. 지중해에서는 Constantinus(272 ~ 337)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며 로마 가톨릭교회가 국교로 등장하고 신분제 사회의 이념을 제공한다.
인도에서는 최초의 통일왕조였던 마우리아 왕조의 육군참모총장이었던 Puṣhyamitra Shuṅga(BCE 185 ~ BCE 149)가 쿠데타로 불교왕조였던 마우리아 왕조를 무너뜨리고 힌두교 왕조를 세우고 세습제에 기반한 사회제도를 만든다.
슝가왕조는 세습이론을 제공하는 힌두교를 도입한다. 그들은 기존의 브라만교를 정비하여 힌두교를 만든다. 종교형태는 브라만교에서 힌두교로의 발전이지만 그 내용은 능력제를 강조한 불교에서 신과 윤회를 강조하고 신분제에 기초한 세습제를 주장하는 힌두교로의 지배이념의 전환이다. 사회적으로는 불교왕국인 마우리아 왕조를 무너뜨리고 힌두교 왕조를 재등장시킨 것이다.
새로운 질서,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 불교도의 선택은 그리 많지 않다. 불교정신을 강조하며 저항하거나, 세속의 일이라고 무시하거나, 방편이란 논리로 적당히 핑계를 대면서 변화된 환경과 논리에 순응하고 편입되는 것이다.
출가 수행하는 스님은 원칙을 강조하면서 벋댈 수 있지만 사회 속에서 생활하며 살아야 하는 재가불교도는 불교원칙만을 강조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변화된 현실과 적당한 타협이 필요하다. 그 논리가 방편이란 개념이다. 방편은 핑계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이유로 대승부의 등장은 재가불교도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지점이다. 대승부 운동이 재가불교 운동과 밀접하게 결합해 전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대승부가 등장한 지역은 인도대륙 동남부 나가르주나콘다 지역인데 대중성을 획득한 곳은 서북부 간다라 지역이다. 향기로운 땅으로 알려진 Gandha(香) 지역, 북인도 지역은 동서교통의 중심지이자 실크로드의 한 축으로 지정학적 특성으로 인해 예로부터 전쟁이 끊어지지 않는 지역이다. 인도스님이 중국으로 갈 때 육로의 한 축이었고, 중국 순례승이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날 때도 반드시 거치는 곳이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지역은 인도의 대륙세력이 팽창할 때는 대륙의 영향을 받다가 외세가 인도대륙으로 침입할 때는 그 침입의 통로 역활을 하는 곳이다. 이런 지정학적 특성을 띤 지역에서는 원칙주의를 고수하다가는 희생당하기 쉽다. 따라서 원칙주위보다는 상황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방편의 논리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대승부 철학이 생존에 유리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철학이라야 한다. 이런 철학에 가장 적합한 것 가운데 하나가 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나타나는 대승부 철학이다. 色과 空이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色을 강조하는 세력이 나타나면 色을 강조하고 空을 주장하는 집단이 등장하면 空을 내세운다. 왜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느냐고 지적하면 色과 空은 같은 의미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유난히 방편을 강조한다. 그래야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승부 운동이 시작된 것은 이런 단순한 논리만은 아닐 것이다. BCE 187년 무렵 슝가왕조가 등장하고 가혹한 탄압으로 불교교단이 무너지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기존교단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목격한 불교도는 교단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새로운 불교운동의 등장을 간절히 원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현실을 적절히 반영한 것 가운데 하나가 부처님 전생 이야기를 다시 주목한 것이다. 과거에 Buddha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오랜 세월 자신을 희생하고 그 결과 금생에 깨달음을 증득한다. 오늘날 스님들은 대중에 대한 어떤 희생도 없이 대중으로부터 존경만 받은 결과 외부충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은 불교도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와 상실감을 안겨준다.
이시기를 전후해 대승보살이 등장한다. 근본경전에서는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의 Buddha를 “보살(Bodhisatta, 菩提薩埵)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이라는 의미로 간간히 등장한다. 그러나 이 시기가 되면 외부충격에 힘없이 무너지는 교단현실을 반영해 불법과 교단을 수호해줄 힘있는 존재의 필요성이 대승보살로 등장한다. 뉴델리국립박물관을 가보면 초기에 제작된 미륵보살상이 당시 정치지도자의 모습으로 조각돼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불교도들은 기존교단의 무기력함과 번쇄함이 Buddha의 기본생각과 너무 멀리 떨어졌다고 보고 불교와 수행이 처음 창시된 오리지널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근본불교 운동이 일으킨다. 이런 현실을 반영해 불교도가 생각을 정리하고 논리를 갖추어 힌두교에 대응하고 타협하는 양상 가운데 하나가 대승부 운동이다.
대승이란 논리로 불교의 힌두교화는 불교교리와 신앙형태에 힌두철학을 인정하고 도입해야 하지만 힌두교 모습 그대로 도입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교도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는 존재감도 상실하기 때문이다. 인도외부에서는 힌두교와 불교를 구분하기 쉽지 않지만 인도인은 누가 오리지널이고 아류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내용은 분명 힌두교이지만 형식이나 이름은 불교로 포장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대승부의 상징조작이 시작된다.
힌두교는 다신을 주장한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에게 다양한 필요성가 있고, 그 필요성을 충족시켜주는 다양한 신이 존재한다. 그런 신들에게 제물을 올리고 기도하면 신이 은총을 베풀어준다고 믿는다.
대승부는 힌두교의 이런 논리를 불보살의 이름으로 각색해서 받아들인다. 힌두교에서 지혜를 다루는 신을 문수보살로, 실천을 강조하는 신을 보현보살로, 현실세계의 어려움을 관장하는 신을 관세음보살로, 사후세계를 담당하는 신을 아미타불로 상징 조작한다. 그리고 모든 불보살의 근본 신으로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상정한다. 청정법신이란 바로 힌두교 창조신 브라만신을 대승부에서 각색한 이름이다.
신을 도입하는 것은 자력의 수행공동체인 불교가 타력의 종교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신에게 기도하면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는 신은 절대자이고 모든 것을 결정하는 존재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신에게 자신의 행복과 더 나은 삶을 기도라는 이름으로 의탁하는 나약한 존재로 설정한다. 이것은 나의 삶을 내가 주관하지 못하고 타자인 신이 결정하는 구조이다.
덧셈이 뺄셈과 같은 의미이듯 오는 것은 가는 것과 같은 말이다. 자본주의에서 이익이란 공산주의에서는 착취의 다른 표현이다. 관점의 차이다. 어는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현상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기도와 가피가 고상한 표현이지만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다르게 보인다. 내 앞에 줄서면 나의 편이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타도의 대상이고 배척해야 할 대상이다. 이것은 마피아가 패밀리 관리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신과 불보살의 위치에 왕의 이름을 치환하면 영락없는 봉건왕조 체제의 논리를 떠받드는 지배논리이다.
불교철학이 윤회설을 담론의 주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교의 힌두교화의 문을 연 신호탄이다. 윤회설을 불교에 받아들인 것은 상좌부가 먼저이다. Asoka의 지원으로 BCE 250년 오늘날 파트나에서 이루어진 제3결집을 전후로 윤회설이 불교교리에 자리 잡는다.
Buddha는 힌두교의 윤회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많은 불교지도자가 윤회설을 Buddha 가르침이라고 주장하지만 윤회설은 Buddha 가르침이 아니라 힌두철학이다. 윤회설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불교철학이냐 힌두철학이냐가 본질이다. 윤회설을 믿고 따르면 힌두교도이고 믿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불교도이다.
윤회설을 존재론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윤회설은 존재의 문제라기보다 신뢰의 문제이다. 전생이 존재했는지 내생이 존재할지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다. 금생을 사는 우리는 전생과 내생을 아무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확정적으로 결정하고 주장하며 믿고 따르는 것은 결정론적 세계관이다. 이것은 변화론과 연기론에 기초한 비결정세계관을 주장하는 Buddha 가르침을 명백히 위반한다. 동시에 Buddha는 증명 가능한 범위에서 인과법을 주장한다. 증명할 수 없는 전생행위가 금생에 구현된다는 논리를 Buddha 가르침으로 믿고 따르라는 것은 곤란하다.
주장하는 사람은 많지만 아무도 그 주장에 대해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자신의 주장을 믿으라고 강요한다. 전형적인 종교주의자의 논리이다. 경험하지 않고 증거도 없다면 현재 이 순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답이다. 모른다고 하면 간단할 것을 이런저런 논리로 궁색하게 주장하는 것은 보기에도 딱하다.
인도에서의 윤회설은 직업세습을 의미하며 신분제와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이다. 전생의 행위가 금생으로 이전되며 전생의 행위에 따라서 금생의 사회적 신분이 결정되며 그 신분의 내용은 직업세습이다. 직업세습의 논리가 윤회설의 핵심이고 인도 신분제를 유지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이다.
신을 믿는 힌두교는 신과 윤회를 주장하고 신과 윤회를 믿지 않는 불교는 연기와 업을 강조한다. 그러나 불교의 힌두교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개념들이 뒤섞인다. 언제부터인가 업과 윤회가 Buddha 가르침처럼 통용된다. 대부분의 불교교리에서 신과 윤회설만 제거하면 잇는 그대로의 실체가 드러나고 Buddha 정법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대승부는 신과 윤회에 기초한 세습의 논리를 불교철학 안으로 도입해야 하지만 Buddha가 설한 오리지널 경전에서는 이런 내용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여러 곳에서 윤회설을 설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도인의 언어습관과 문화형태일 뿐이고 바로 그 다음 문장에서 수행을 하고 아라한이 되어 지혜가 밝아지면 윤회로부터 벗어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고민이 있다. 물론 근본경전에서는 신과 기도에 대해서 그것은 사법이고 오염된 법이라고 규정한다.
Buddha는 윤회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설하는데 후세 불교도는 윤회자체를 설명하면서 도리어 윤회설에 구속된다. Buddha가 가장 경계한 일을 제자들이 스승의 이름으로 버젓이 행해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윤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윤회논리를 철저히 따르면서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윤회설을 믿지 않고 버림으로써 윤회구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Buddha는 후자를 선택하고 윤회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아무리 새로운 불교운동을 하지만 기존의 오리지널 텍스트에 없는 내용을 Buddha 가르침이라고 주장하기가 쉽지 않다. 기존교단으로부터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대승부 운동을 하는 사람은 그들의 논리를 뒷받침해줄 새로운 이론서를 수백 년에 걸쳐 저술한다. 그것이 대승부 경전이다.
새로운 이론서를 저술해도 기존의 오리지널 경전에 등장하는 좋은 구절이나 교훈적인 내용을 토대로 적당히 각색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서 이론서를 만든다. 그 이론서에 힌두교신이 불보살의 이름으로 등장하고 기도와 가피의 형식으로 스며든다.
대승부 경전은 사전적 의미에서 Buddha가 직접 설한 경전이 아니라 Buddha 입멸 후 4~500년 뒤 Buddha를 주인공으로 그 당시 시대를 배경으로 쓰인 불교역사 소성이다. 물론 시중에서 구해볼 수 있는 거의 대부분 불교사전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6세기에 접어들면 불교의 힌두교화의 문을 연 대승부 시대를 지나고 이름만 불교이지 내용은 90% 넘어 힌두철학을 반영한 밀교부가 등장한다. 그리고 1200년 정후로 이슬람의 침입이라는 외부충격이 가해지자 힌두교화된 불교는 힌두교에 자연스럽게 흡수되고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유물로만 흔적을 남기고 인도대륙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불교도는 천민의 지위로 전락하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잠속으로 빠져든다. 오늘날 인도에서 불교교단이 처한 현실이다. Buddha 가르침에 힌두철학을 섞은 대가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비싼 값을 치루고 있는 중이다. --계 속-
필자: 붓다팔라 스님은 1975년 통도사로 출가하였고, 1985년 동국대학교 선학과에 입학하였고,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1996년 불이상을 수상하였고, 이 해말 인도 보드가야를 방문하고 이어서 미얀마 마하시 선원과 김해 싸띠 아라마를 오가면서 수행하였다. 2002년부터 인도불교 복원불사 원력을 세운 후 보드가야에 ‘싸띠 국제출가수행학교International Sati School’를 설립하여 사미승을 양성하고 있다. 인도 델리대학교와 MOU를 체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