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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불교사

[2021년 7,8월호] 초원의 나라, 푸른 하늘과 맑은 바람 속에서 ‘옴 마니 파드메 훔’독송 / 이치란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1.07.25|조회수61 목록 댓글 0

< 기행문 >

 

 

몽골불교탐방기 (1)


초원의 나라, 푸른 하늘과 맑은 바람 속에서
     ‘옴 마니 파드메 훔’독송     

 

글 | 이치란 박사 (원 응 보검)

 

 

 

글을 시작하며

몽골은 역사적으로 우리 한민족과 밀접한 관련 속에 존재하는 형제 나라이다. 우선 인종적으로 몽골로이드(Mongoloid)라는 인종적 관계이다. 몽골인과 한국인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언어적으로도 우랄알타이어족이라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 먼 옛날 같은 조상을 가졌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몽골과 한국은 이런 인종적 언어적 인류학적 관련을 천착하기도 하지만 지금 당장은 경제적인 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국에 약 4만 명의 몽골 출신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에서 3D 업종의 노동에 종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아주 극소수는 유학생들이며 울란바토르와 서울을 오가면서 보따리 무역을 하는 사람들이다. 몽골인구의 반 이상이 한국을 다녀갔을 정도로 한국과 친숙하다.

미륵대불 점안낙성법회에 참석한 필자 보검스님 두 번째 줄 우측


몽골의 국명은 몽골국(Монгол Улс, 몽골 울스)이며 공용어는 몽골어, 화폐 단위는 투그릭이고 인구는 330만 명에 이르고 있다. 현재 몽골에는 약 3천 명 정도의 교민이 살고 있는데, 이 중 대부분이 기독교 선교사들인데 신분을 감추고 애매모호하게 활동하고 있다. 몽골국을 선교화해서 기독교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고, 울란바토르 대학도 기독교 선교사들이 재단을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다. 국립대학 한국어과도 선교사들이 깊이 관여되어 있으며 사실상 이들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다. 여기에 온 선교사들은 몽골은 한국 다음으로 선교되어야할 아시아 국가 가운데 하나라고, 강한 의욕을 보이면서 한국에서의 선교 노하우를 실천하고 하고 있다. 선교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

 

몽골 최대 호수인 흡스굴의 샤먼들이 굿을 하기 전에 준비하고 있는 모습. 몽골에는 전통적으로 백(白)무당, 흑무당, 황무당이 존재한다. 황 (黃)무당은 티베트-몽골 불교 겔룩빠의 의식과 관련이 있다


 2020년 몽골 인구 조사에 따르면 불교는 몽골 인구의 70%가 신봉하는 주류 종교이다. 몽골 불교는 티베트 겔룩빠와 까규빠의 법맥을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겔룩빠가 다수를 점하고 있다. 몽골 불교는 원나라(1271-1368) 황제가 티베트 불교로 개종하면서 시작되었다. 몽골 인들은 몽골 제국의 붕괴 이후 무속 전통으로 돌아 왔지만 불교는 16세기와 17세기에 다시 등장했다.
몽골은 종교적으로 자연숭배 사상이 널리 퍼진 나라로서, 샤머니즘이 뿌리 내린 나라였다. 그리고 고대부터 텡그리(Tengri:고대 튀르크 어) 사상이 있어 왔다. 텡그리란 용어의 개념은 터키와 몽골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신’이란 뜻이다. 중앙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텡그리 신앙은 신화적인 데에 기초하고 있다. 하늘의 신은 청명한 창공으로 가득한 하늘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령한 존재로서의 하느님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해발 7,010미터의 ‘한 텡그리봉’은 톈산 산맥의 산으로, 중국, 카자흐스 탄, 키르기스스탄의 국경에 위치한다. 지질학적 높이는 6,995m이나, 봉우리의 얼음을 포함한 높이는 7,010m이다


몽골족은 한 때 유라시아 영토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하여 몽골 제국을 세웠다. 14세기 중국에 세웠던 원(元)제국은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다. 몽골제국이 무너지자 몽골족들은 다시 자기들의 고대 신앙체계인 샤머니즘으로 돌아갔다. 그 후 1578년 군사지도자인 알탄 칸(Altan Khan 1507-1582)은 칭기즈칸의 후계를 자처하며 신 몽골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갖고, 흩어진 몽골제후국들의 연합운동을 주도했다. 동시에 티베트 불교의 겔룩빠(황모파)의 수장을 초청하여 스스로 불교의 보호와 후원자인 의식을 치루고 티베트 불교를 국교로 공식화 했다.
 몽골의 황제 알탄 칸은 달라이 라마(Dalai Lama)라는 칭호를 티베트 불교 최고 지도자에게 수여했다. 오늘날 까지 이 달라이 라마의 전통은 그대로 이어져서 현재는 제14세 달라이 라마가 되어 있는데, 달라이 라마라는 의미는 ‘대양의 지혜’라는 뜻이다. 티베트 불교에는 닝마빠(Nyingma 9세기 이전 성립),까규빠(Kagyupa 11세기 이전 성립), 사꺄빠(Sakyapa, Sakya Pandita 1182-1251가 창립), 겔룩빠(Gelugpa, Je Tsongkhapa 1357-1419가 창립) 등 4개 종파가 있지만, 몽골에는 황모파(yellow hat 노란색 모자)인 겔룩빠가 석권하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도 겔룩빠에 속한다. 
 이런 불교역사를 갖고 있는 몽골 불교는 1920년대 공산화되어 소련의 위성국가로 70여 년 동안 종교 활동의 암흑기를 겪었다. 그리고 1930년대는 많은 라마들을 환속시키거나 처형하고 사원을 황폐화시켰다. 1990년대 소련이 무너지면서 몽골은 민주국가 시장경제체제로 독립국가가 되면서 불교활동 또한 자유를 얻게 되었다. 필자는 1990년대 초부터 몽골불교와의 교류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다음 편부터 본격적으로 몽골과 몽골불교의 현황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원나라가 망한 다음, 북원(北 元)을 일으킨 튀메드의 알탄 칸 (Altan Khan 1507년~1582년). 오 르도스 지방의 다얀 칸의 손자 알 탄 칸은 16세기 중기부터 빈번하 게 중국에 침입, 1550년에는 북경(北京)을 포위하 는 경술의 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몽골고원의 역사는 흉노로부터 시작한다. 중국의 입장에서 본 몽골족은 오랑캐였다. 초원의 유목민족인 몽골족은 한족의 입장에서 보면 문명화되지 않은 비 세련된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몽골족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야말로 자연과 함께 목축을 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민족이라고 자긍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사마천이 그의 불후의 명저인 역사서인《사기(史記)》권 110에서 <흉노열전(匈奴列傳)>을 소개함으로써, 흉노(오랑캐)라는 관념이 고정화되었다. 
 사실, 한민족은 언어학적으로나 종족의 관점에서 보면 몽골족과 먼 조상이 같고, 우랄알타이어족에서 몽골어와 퉁구스어로 갈라진 같은 어족이면서도 중국 한. 당. 송. 명 시대의 문화나 성리학을 존숭하는 사대주의에 깊이 경도되어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요나라는 내몽고와 만주를 배경으로 한 거란족이 세웠고, 금나라는 퉁구스계인 만주족인 여진족이 세웠고, 원나라는 몽골족이 세운 나라들인데도, 우리는 당송이나 명나라를 중국의 정통으로 보는 선입견이 작용하고 있다. 사실 요.금.원(遼金元)이나 청(淸)은 한민족인 퉁구스계와는 사촌지간들인 것이다. 퉁구스계는 바이칼 호에서 동 몽골을 경유하여 만주를 거쳐서 한반도로 이주해왔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음을 볼 때, 흉노는 우리와 먼 친척이 아니겠는가. 
 중국불교나 동아시아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 거의가 한.당.송.명 불교를, 특히 송 대의 선불교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고, 비중국계 민족의 불교는 도외시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만나 본 몽골 인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흉노이며 선비족임을 당연시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식자들은 한국은 먼 친척의 나라임을 당연하게 여겼다. 칭기즈칸의 경우에는 퉁구스계의 동호에서 갈라진 분파라는 가설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몽골 인들은 흉노 선비 동호 등이 전부 몽골인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몽골고원은 흉노 선비족 등이 지배하다가 이후 몽골 고원과 중국의 북방을 장악한 나라들은 5호(胡) 16국이라고 해서 중국민족이 아닌 비 중국민족인 흉노(匈奴)·갈(羯:흉노의 별종)·선비(鮮卑)·저(氐:티베트계)·강(羌:티베트계)의 이른바 5호가 잇달아 정권을 수립하여 1백 수 십년간 북위(北魏)가 일어날 때 까지 서로 흥망을 되풀이하였다. 이후 선비족의 탁발부가 중국 화북지역에 세운 북조(北朝) 최초의 왕조인 북위(386∼534)를 세운다. 

 

서진 시기, 북방에 있던 각 민족 분포도


원위(元魏)·후위(後魏)라고도 하는데, 3세기 중엽 탁발부는 내몽골의 바옌타라 지방에서 세력을 넓혔으나, 4세기 초 이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북변의 보위를 도모하려는 서진(西晉)으로부터 산시성(山西省) 북부의 땅을 얻음으로써, 그곳에서 세력을 신장하였다. 315년 군장(君長)인 탁발의로(拓跋掎盧)는 서진의 관작을 받고 대왕(代王)으로 봉해졌다.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 때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의 싸움에 패하여 정권이 와해되었지만, 부견이 비수전투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탁발규(拓跋珪:후의 道武帝)는 나라를 재건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하였다(386). 이어 내몽골 여러 부족을 평정하고 후연(後燕)을 격파, 화베이(華北) 평야에 진출하여 국도를 평성(平城), 즉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에 정하였다(398).
 위진 남북조를 거치고 수나라 당나라를 지나서 송나라에 이르러서 북방민족은 10~12세기에 중국 북방에서 거란(契丹)이 세운 정복 왕조(916~1125)인 요(遼)나라를 세운다. 요는 비중국민족인 거란(契丹)이 중국 북방의 네이멍구(內蒙古) 지역을 중심으로 세운 왕조로서, 916년 건국 당시의 명칭은 거란국(契丹国)이었지만, 938년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한 뒤 나라 명칭을 요(遼)라 하였다. 1125년 여진(女眞)이 세운 금(金, 1115-1234)에 멸망되었지만, 야율대석(耶律大石)이 중앙아시아에 서요(西遼, 1132-1218)를 건국하여 1218년 칭기즈칸(成吉思汗, 1155~1227)의 몽골에 병합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금나라는 퉁구스족 계통의 여진족이 건립한 왕조(1115-1234)이다. 창건자는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이다. 여진족은 본래 10세기 초 이후 거란족이 세운 요(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12세기 초 북만주 하얼빈 남동쪽의 안추후수이 부근(지금의 松江省) 아청(阿城)에 있던 완안부의 세력이 커지자, 그 추장인 아구다가 요를 배반하고 자립하여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가 곧 금나라 태조(재위 1115-1123)이다. 금나라는 그들의 근거지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이곳은 후에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라 하였다. 금이라는 국호는 근거지인 안추후수이에서 금이 많이 산출된 점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태조는 요군(遼軍)을 격파하여 그 영토를 넓혀나갔으며, 1120년에는 송(宋)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를 협격하여 만주지역으로부터 요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태조는 산시성(山西省)의 다퉁(大同), 허베이성(河北省)의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으로 진출하였으며, 25년 제2대 태종(太宗:재위 1123∼1135) 때에는 요를 멸망시키고 서하(西夏)와 고려(高麗)를 복속시켰다. 이후 금은 새롭게 등장한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에 손을 들고 만다. 

 

중국 산시성 다퉁에 있는 운강석굴. 40개의 굴이 있는 석굴사원. 중국의 3대 석굴은 운강석굴, 돈황 막고굴, 낙양 용문 석굴이며 전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운강석굴은 원래는 영암사라고 하였고, 현재는 석불사 등으로 불린다. 북위의 담요가 문성제에 요청해서 460년(평화 원년) 경에 상건하 지류 무주천의 절벽에 시작한 소위 〈담요5굴〉(제16굴, 제17굴, 제18굴, 제19굴, 제20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1차 삼무일종의 법난에서 태무제의 폐불 이후 불교 부흥사업의 상징적 존재가 이 5굴의 거대한 석불이었다


몽골이라고 하면 칭기즈칸을 떠나서는 상상할 수가 없다. 몽골은 원(元) 제국이 명나라에 망하고 현재의 내몽골과 외몽골 지역으로 후퇴해서 북원(北元)을 세워서 견디다가 청에 복속되었다. 청의 지배를 받다가 1911년 독립을 쟁취하나, 1920년 외몽골은 소련에 내몽골은 중국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외몽골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있다가 1990년 소연방이 해체되면서 자유국가인 몽골국가가 되어 우리나라와도 1990년 3월 26일 수교를 하였으며, 내몽골은 중국의 내몽고 자치구가 되어 있다. 12세기 칭기즈칸이 몽골의 제 부족을 연합하여 몽골제국을 세우면서 사실상 몽골의 역사는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1990년 한국과의 수교이후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와 접한 이르쿠츠크와 브리얏트 공화국 수도인 울란우데를 경유하여 울란바토르에 들어간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칭기즈칸은 부각되지 않고 있었다. 오랜 소련 공산 위성국가에서 잠을 덜 깬 듯했으나,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거리에는 자동차가 넘쳐나고 드디어 한국이라는 존재를 실감하는 듯했다. 동시에 칭기즈칸의 존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존재를 한참 동안 망각이나 하고 있는 듯했고, 오히려 우리 같은 방문자들이 칭기즈칸을 들먹이면서 반복해서 칭기즈칸을 노래하듯 화제에 올렸다. 레닌 동상은 심지어 울란바토르 호텔 앞에 서있었고, 브리얏트 공화국의 울란우데 시내 한 복판에도 서 있었다. 

 

몽골수도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 정부 / 청사에 세워진 칭기즈칸 동상


 내가 만난 분들은 거의가 지식인들이었고, 대통령 특별보좌관들과 국립대학과 과학원의 학자들이었다. 서서히 칭기즈칸의 존재를 인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울란바토르 시내 한 복판인 수하바르트 광장의 정부청사에 칭기즈칸 동상을 세우고 그 밖의 지역에도 동상을 세우기 시작했다. 외몽골 보다 내몽골은 1940년대인 국민당 정부 시절에 이미 칭기즈칸 사당과 능을 세운 것을 보면 칭기즈칸의 존재에 대해서 일찍이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외몽골은 몽골의 고문자를 버리고 키릴문자로 전환했지만, 내몽골은 지금도 몽골의 고문자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몽골은 한동안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했었으나, 1990년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종교의 자유를 되찾아서 현재는 종교 활동이 자유롭다. 유일하게 공산국가 시절에 단 하나의 사찰만 허용해서 불교의 명맥은 단절되지 않았고, 소수의 불교학자들에게 불교연구의 기회를 제공해서, 승가와 불교학맥이 단절되지 않다가 1990년 이후, 다시 옛 몽골불교의 영화를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

 

 

필자 원 응 보검 이치란 박사가 울란바토르 근교 칭기즈칸 동상이 보이는 초원에서

 

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아시아불교평화회의(ABCP 본부 몽골) 한국회장
국제불교연맹 이사(IBC 본부 인도)
동방불교대학 전 총장
한국불교신문 전 주필
현: 해동불교대학장
강원불교대학장
WFB 세계불교대학 집행이사
일붕신문 상임논설위원
다나TV 영어금강경 강의
(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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