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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불교사

[2022년 1월호]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 / 이치란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2.02.27|조회수287 목록 댓글 0

< 기행문 >

 

 

몽골불교탐방기 (4)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
티베트 파스파 고승 초빙
문자 만들고 불교 수용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원나라 왕실에서 근무

 

 

글 | 이치란 박사 (원 응 보검)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지 1천년도 훨씬 지나서, 중국 중원(中原)에는 대격변의 시대가 도래(到來)하고 있었다. 북방민족인 몽골족이 중국천하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중국에 역사가 시작되면서 한족은 항상 이 북방민족 때문에 시달려왔다. 진(秦)나라 때부터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한 한족은 한나라 때 흉노족에게 크게 당하는 형국이었다. 한나라 왕실에서는 공주를 흉노의 두목에게 시집보내서 화친(和親)을 맺어야 했고, 가기 싫어한 환관 중항열(中行 說)을 보내서, 한(漢) 왕실은 큰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 한나라 이후에는 위진 남북조의 5호16국 시대에는 북방민족 나라가 들어서는 등, 그야말로 중원은 한족과 북방민족의 투쟁의 장(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나라 시대에도 안록산 같은 이민족의 장수 출신의 난(亂) 등, 비(非) 한족들에게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에 이어 송나라가 들어서고 요나라 금나라가 중원 땅을 나눠먹는 형국에서, 칭기즈칸이라는 몽골족의 영웅이 출현하여 여러 지역의 몽골족을 통일하고 중원을 차지하게 된다.

 

▲ 칭기즈칸의 손자로 몽골제국 제 5대 대칸에 올라 중국 땅에 원 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


이 무렵 중원의 종교계를 일별하면 이미 다양한 종교가 중원에 전파되어 있었고, 불교로 말하면 한전불교(漢傳佛敎)인 역경불교(譯經佛敎) 시대를 지나서 한족 위주의 중국불교가 정착되었고, 티베트의 장전불교(藏傳佛敎) 또한 중원을 향해서 부단하게 침투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형 몽케 대칸이 죽자, 그의 후계를 놓고 동생 아리크 부케와의 대칸(大汗) 경쟁에서 승리하고, 대원(大元) 제국을 세웠다. 칭기즈칸도 종교에 관심을 가졌듯이 원 세조(世祖)인 쿠빌라이도 종교에 관심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력으로 중원을 장악했다고 할지라도 그 땅의 백성들은 한족(漢族)을 비롯해서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의 장(場)이었다. 다른 분야는 제쳐두고 우선 종교 면에서, 그는 어느 종교를 국교(國敎) 내지는 주류 종교로 삼을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원 땅에는 이미 한전불교(漢傳佛敎)가 주류(主流)였다. 이 무렵 티베트는 이미 칭기즈칸 시대에 몽골의 침입을 받아서, 몽골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칭기즈칸 시대에 티베트는 몽골에 조공을 바쳤으나, 칭기즈칸이 죽자, 조공을 하지 않았다. 이에 1240년 제2대 대칸인 오고타이의 아들이고 칭기즈칸의 손자인 왕자 고단 칸(Godan 1206〜1251)이 티베트를 침략해서 티베트를 장악했다. 고단 왕자는 쿠빌라이가 중국 지역을 장악하기 전에는 티베트를 관리하고 있었다. 고단은 군대를 보내서 티베트를 침범하고 500명의 라마를 학살하고 사원들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그러면서 고승을 색출하라고 했다. 이 때 티베트에서는 사캬 판디타(Sa'gya Paṇḍita)가 가장 도력이 높은 고승이었다. 고단 칸은 사캬 판디타(스승이란 의미)에게 초청장을 보냈고, 사캬 판디타는 당시 10세였던 파스파(팍파)를  데리고 갔다. 사캬 판디타는 누구인가 잠시 살펴보자.

 

▲ 몽골 대제국의 판도, 원 나라와 다른 네 개의 몽골 칸 국


사캬 판디타는 티베트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티베트 불교의 조실(祖室)격인 지도자였으며 대학승(大學僧)이었다. 그는 산스크리트에 해박했고,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의 화신(化身)으로 추앙받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티베트, 몽골, 중국 동남해안과 인도불교에 정통했고, 불교철학, 의학, 문법, 중론(中論)과 산스크리트 문학을 위시해서 수사학 시(詩) 무용 음악 심지어 점성학에 까지 능통한 석학이었다. 그는 사캬파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사캬파의 조사(祖師)였다. 이런 분이였기에 고단은 그를 중국으로 불러들였다. 사캬 판디타는 그의 조카이기도 했던 파스파를 데리고 1244년에 출발해서 티베트 고원을 넘어서 1247년 지금의 감숙성 난주에 있었던 고단의 병영에 도착해서 설법을 했고, 고단 칸을 비롯해서 왕족들은 감화를 받았다. 게다가 지병을 갖고 있던 고단 칸의 병을 치유해줬다. 당시 티베트 사회는 가모장제(家母長制)였는데, 고단 칸은 그를 중앙티베트 13가모장제를 관장하는 당대 통치자로 임명했다. 샤카 판디타는 지금의 감숙성에서 1251년에 입적하였고 그는 결혼하지 않은 독신 라마였기에 그의 조카인 파스파에게 법통(法統)의 상징인 의발(衣鉢)을 전수했다. 그는《薩迦格言》,《正理藏论》、《三律仪论》등의 저서와 역서(譯書)를 남겼다. 사캬 판디타 소개는 여기서 이 정도로 하고 그의 후계자로서, 원 나라에서 파스파 문자를 만들어서 몽골 제국권(帝國圈)에 큰 영향을 미쳤고, 쿠빌라이 대칸의 스승으로 활동했던 파스파를 소개해 보자.
 사캬 판디타 고승이 입적하고 난 다음, 팍파는 고단 왕자의 병영에 남아서 몽골어를 익혔다. 5년 후 쿠빌라이 칸은 고단에게 팍파 라마를 자기에게 넘길 것을 요청했다. 당대 몽골칸(왕)이나 대칸인 황제 가운데 문자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어(漢語)도 여러 민족이 사용하는 변칙 한어가 공용어가 될 정도였다. 몽골 칸들은 티베트의 고승이라고 할지라도 전리품으로 생각할 정도로 문화가 없는 기마무사(騎馬武士)들이었다. 한족 대신(大臣)들의 부단한 건의와 노력으로 북방 기마무사 출신 칸들은 문명화되어 가고 있었다. 팍파도 이런 맥락에서 속국 출신이었지만, 정신적 스승으로서 대접을 받은 경우이다. 팍파의 나이가 그때 23세였다. 팍파는 쿠빌라이 칸을 불교로 개종시켰을 정도로 법력(法力)이 있었다. 이후 쿠빌라이 칸은 대칸 후계 경쟁에서 승리하고 대칸에 오른 다음, 쿠빌라이 칸은 팍파를 제사(帝師)에 임명했다. 그리고 1260년 모든 사람들에게 공표했다. 대원(大元)을 건국한 이후에도 그를 황제의 왕사로 계속 시무하게 하고 신 문자 창안 임무까지 부여했다.

 

▲ 티베트 불교의 대학승으로 몽골 원 나라에 불교를 전파한 샤카 판디 타
▲ 원 나라의 제사(帝師)로 몽골 신자(新字)를 창안한 샤카 판디타의 제자 파스파


몽골사(蒙古史)에 따르면, 팍파는 처음으로 제국의 왕사(국사)로 임명되었고, 이것은 티베트-몽골의 관계사에 있어서 정치적 이념 정책의 하나로서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로부터 승려(라마)-후원자 관계의 구상이 더욱 발전되었다고 말한다. 쿠빌라이 칸은 파스파(팍파) 라마에게 원나라의 여러 언어를 하나로 표기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 체계를 고안해 달라고 했다. 그는 티베트 문자를 수정해서 이른바 팍파(파스파) 문자를 1268년에 완성했다. 쿠빌라이 칸은 팍파가 만든 신(新) 문자를 제국의 공공문서를 작성하는 공용문자로 사용할 것을 결정하여 공표했다. 쿠빌라이 칸은 1271년 원나라의 황제로 등극하자, 원 나라에서도 한자나 위구르 문자 대신 팍파의 신 문자를 공용문자로 사용할 것을 결정했다. 그렇지만, 쿠빌라이 칸이 이 문자를 사용하러하자 저항과 어려움에 봉착하였고, 처음 의도했던 목적을 관철시키려 추진했지만 어려웠다. 이 문자는 다만 일부 문서에만 적용되었고, 대부분의 공문서는 한자와 위구르 문자로 기록되었다. 이 팍파 문자는 100년 후, 원나라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이 팍파 문자는 100년간 부분적으로 사용되었고, 더욱이 한글창제에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가 있어서 한글학자들에게는 학문적으로 관련성에 대해서 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중국은 왕조(王朝)가 바뀌면 공용어가 항상 문제되었다. 전(全) 중국사를 통해서 항상 한어(漢語)가 정통 공용어로 통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한어만 하더라도 주나라(東周) 낙양의 표준 중국어였던 선진(先秦) 시대의 아언(雅言)이, 수당(隋唐) 이후에는 장안의 통어(通語)라고 해서 한어(중국어)의 표준어가 원나라에서는 통하지 않게 되자, 한아언어(漢兒言語)란 것이 생겨서 원나라 공용어가 되었다. 몽골족이 정권을 잡고 보니, 명령을 내리는 자가 몽골의 칸이었다. 이때 생겨난 것이 몽문직역체(蒙文直譯体)나 한문이독체(漢文吏讀体)인 한아언어(漢兒言語)란 것이 자연스럽게 생겨나서 이 언어가 표준 중국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쿠빌라이 칸은 팍파에게 신 문자 창안을 의뢰했었고, 실용화하려고 했지만,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명나라의 주원장은 몽골족을 극도로 싫어해서, 팍파(파스파)문자를 즉각 없애버렸다. 하지만 역사란 돌고 돌아 청나라 시대가 도래 했다. 청나라는 건주여진 족이 세운 나라이다. 지금의 중국어인 만다린은 만주족들이 북경에서 사용하던 북경 만다린이었다. 북경관화(北京官話)가 지금은 중국 표준어가 되었다. 주나라 낙양의 표준어로서 선진 시대에 사용된 아언이나 수당 시대의 통어가 아니다. 중국정부는 만주족(여진족)이나 문자를 없애버렸지만, 만주족이 북경에서 사용하던 북경관화인 북경만다린이 지금 중국 표준어가 되어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 티베트 사캬파 41대 샤카 트리진(종정), 현재 인도에 망명중이다


이로써 사캬 법왕(사캬 트리진)이었던 팍파 법왕이후 제14대 사캬 법왕 시기인 14세기 중반까지 사캬파는 중앙티베트에서 막강한 종교적 세속적 권력을 누렸다. 현재 사캬파의 법통은 인도로 넘어왔는데, 41대 사캬 트리진(사캬 法王)은 1945년 티베트 본토 시가체 근방에서 태어나, 5세 때부터 종교교육을 받았으며, 1952년 제14세 달라이 라마로부터 사캬 법왕으로 지정되어, 법왕 후보로서의 현교(顯敎)와 밀교(密敎)수업을 받았다. 그가 열네 살이 된 해인 1959년 그는 사캬파 종단의 사캬 법왕으로 제14세 달라이 라마의 임석(臨席) 하에 등극의식을 거행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정치적 이유로 그해 달라이 라마와 함께 중국 정부 침공을 피해서, 인도 북부로 가족과 많은 사캬파 소속 라마들과 망명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인도에서 사캬파의 법통을 이어가고 있다. 사캬법왕은 결혼해서 아들을 두 명을 두었는데 아들들은 후계 수업을 받고 있다. 사캬파 소속의 많은 라마들이 독신인 반면, 법왕은 결혼한 라마이고 이런 전통이 수용되는 사캬파의 독특한 종풍(宗風)을 이해하기 위해선, 원나라 때 티베트 사캬파와 원 나라 쿠빌라이 칸과의 관계에 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이런 역사는 전통이 되어 버렸다.

 

▲ 쿠빌라이 칸이 마르코 폴로에게 하사품을 내리는 장면


팍파의 일기장에 따르면 그는 쿠빌라이의 궁정에서 마르코 폴로와도 친하게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1254〜1324)는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동방견문록 東方見聞錄》을 지은 작가이다. 마르코 폴로는 무역 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서 중국에 갔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미 아시아를 갔다 온 경험이 있었고, 두 번째 갈 때, 마르코 폴로를 데리고 갔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17세였다고 한다. 
 그는 중국에서 세조(쿠빌라이 칸)의 신임을 얻어 정치, 외교 등의 요직을 맡게 되었고, 마르코 폴로는 관리로써 원나라를 위해서 일하면서 17년 동안 중국의 여러 도시와 지방을 비롯하여 몽고·버마·베트남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24년 후 1292년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제노바와의 해전에 가리 함대에 속하여 출전하였으나 전쟁에 패하여 포로가 되어, 1년간 감옥 생활을 하면서 아시아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들려주었는데, 이때 작가 루스티켈로가 자신의 여행담을 기록한 것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라고 한다. 지금도 내몽골 지역에 가면 마르코 폴로의 초상화를 칭기즈칸 사당(祠堂) 등에 걸어 놓고 크게 대우하고 있다.

 

▲ 쿠빌라이 칸의 사신들이 대도(북경)에서 로마 까지 간 여정 지도


《동방견문록》은 마르코가 여행한 지역의 방위와 거리, 주민의 언어, 종교, 산물, 동물과 식물 등을 하나씩 기록한 탐사 보고서의 성격을 갖고 있는데, 1권은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2권은 쿠빌라이 칸 치하의 원나라, 3권은 일본·동남아시아·남아시아·아프리카에 대한 내용 등이다. 하지만, 내용의 진정성에 대한 비판도 있는데, 중국의 한자(漢字), 차(茶)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또한 칼리프가 바그다드의 그리스도인을 학살하려고 했다면서 이슬람이 마치 다른 종교를 탄압한 종교인 양 헐뜯고 있는데, 실제 역사 속의 이슬람은 인두세만 낸다면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으며, 기독교는 유대교와 더불어 성지인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존중받았다. 동방견문록은 서구인들에게 동방에 대하여 자세하게 언급한 긍정적인 역할은 했지만, 편견과 허구도 있다는 점에서 비평을 받고 있다.
 티베트의 장전불교가 원 나라에 수용되기 전에, 티베트 불교는 서하(西夏)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 칭기즈 칸은 서하를 점령하면서 장전불교와도 만나게 된다. 먼저 서하를 좀 소개해 보자. 서하(西夏1038〜1227)는 중국 북서부의 간쑤 성(甘肅省), 칭하이 성, 산시 성(陝西省),신장 동남부 내몽골 외몽골 일부지역에 위치했던 티베트계 탕구트족의 왕조이다. 전성기에는 북으로는 고비 사막, 남으로는 난주, 동으로는 황허, 서로는 옥문(玉門)에 이르는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 칭기즈칸에게 점령당하기 전의 서하 영토 지도


탕구트인들은 티베트 부족에 속했으며 국교는 불교였고 중국의 영향으로 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었으며 한자에서 파생된 문자인 서하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서하는 백고대하국(白高大夏國)이라고도 불렀다. 중국문헌에서는 이들을 당항(党項)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실상의 건국 왕인 이원호(李元昊 1003〜1048)는 불교 보호 왕으로서 둔황 막고굴 사원에도 많은 시주를 했다고 한다. 2백년간의 왕업(王業)은 칭기즈칸을 만나서 무너지게 되었는데, 칭기즈칸 군대는 중원을 공략하는 첫 대상으로 이곳 서하를 선택했다. 칭기즈칸은 무려 네 차례에 걸쳐서 서하를 공략하고, 칭기즈칸은 끝내 1227년 서하 땅에서 죽고, 서하 또한 칭기즈칸의 아들들에게 의해서 멸망당했다.

 

▲ 탕구트(黨項) 족의 관리들과 복장


서하의 주류 종교는 불교였다. 불교는 탕구트족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 한전(漢
傳) 대장경을 번역할 정도로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서하의 불교는 티베트의 장전불교와 중국의 한전불교나 선종불교(禪宗佛敎)가 섞인 통(通) 불교적 성격이 강했다. 탕구트 사회의 불교는 요나라인 거란족이 신봉했던 불교와 비슷했다고 한다. 많은 불서(佛書)가 거란어에서 번역됐다고 한다. 서하 사회는 중원이나 티베트 문화보다는 중국의 북방계 민족에 더 가까웠다고 하는데 티베트 불교는 서하의 초기에는 탐험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후에 티베트의 사캬파보다는 까르마나 까규파의 전통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티베트불교에는 4개의 종파가 있는데, 닝마파(Nyingmapa), 까규파(Kagyupa), 사캬파(Sakyapa)와 겔룩파(Gelugpa)가 그것이다. 여기에 조낭파와 티베트 고유 종교인 본교를 포함해서 지금은 대개 6개 종파라고 한다. 닝마파는 가장 오래된 종파로서 인도에서 온 파드마삼바바(Padmasambhāva)와 산타락치타(Śāntarakṣita)라는 대학승이 창종한 종파이다. 파드마삼바바는 연화생상사(蓮華生上師)라는 칭호를 갖고 있으며 부탄과 티베트에 딴뜨라 불교를 전했고,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파의 라마들은 홍모(紅帽)를 착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이 파의 경전을 구역(舊譯)이라고 부른다.
 까규파는 명상위주의 종파로서 가장 유명한 스승은 티베트 출신인 밀라레파(Jetsun Milarepa(1052〜1135)이고, 이 파의 라마들도 홍모를 착용하지만, 나중에 흑모파도 생겨난 바 있다. 이 파의 경전번역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른다. 까르마 까규파는 두썸 켄파(1110〜1193)로부터 유래하는데 그는 까르마파의 제1세 조사이다. 이 파는 까규파의 지파인데, 흑모(黑帽)를 착용하기도 한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1360〜1424)는 제5세 까르마파에게 흑모를 하사한바 있다. 까르마 까규파의 법통은 지금 제17세에  이르고 있다. 사캬파는 1073년에 창종되었고, 홍모를 착용하고 경전은 신역이라고 부르는데, 이 파를 발전시킨 분은 사캬 판디타(Sakya Pandita 1182〜1251)이다. 이 파는 불교학문을 중시 여긴다. 
 다음은 겔룩파이다. 달라이 라마는 바로 이 겔룩파 소속이다. 겔룩파는 개혁성향의 종파이며, 불교논리학과 토론을 강조한다. 겔룩파는 쫑가파(Tsongkhapa 1357〜1419)에 의해서 창종되었다. 쫑가파는 학행일치(學行一致)를 강조했다. 이 겔룩파의 정신적 수장을 간덴 트리파(Ganden Tripa)라고 불렀고, 쫑가파로부터 연유하는 자체의 정신적 수장인 간덴 트리파의 법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 102대까지 이르렀다. 임기는 7년이다. 이 간덴 트리파는 달라이 라마와는 다른 개념이다.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서 몽골 제국의 칸이 부여한 전세활불(轉世活佛:세상을 바꾸어서 환생하는 부처)의 의미가 있다. 겔룩파는 황모(黃帽)를 착용하며 신역(新譯)에 속한다. 계승된 달라이 라마는 신정(神政)의 지위로써 17세기 중반부터 1959년 까지 티베트를 통치했다. 현재 제14세 달라이 라마는 1950년에 신정의 최고 수장에 올라서 1959년 인도로 망명하여 현재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밖에 사캬파에서 갈라진 조낭파(Jonangpa)가 있었으나 1658년 겔룩파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19세기 이 조낭파는 닝마파 까규파 사캬파와 더불어 겔룩파의 독주에 반발하고 티베트 동부 지역인 지금의 중국 청해성 사천성 감숙성 더 나아가서 몽골지역까지 일종의 초 종파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리메(Rime)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최근 14세 달라이 라마는 조낭파의 수장인 제 9대 젭춘담바 후툭투의 취임식에서 조낭파의 성장을 격려했다. 젭춘담바 후툭투(Jebtsundamba Khutughtu,1932〜2012)는 제8대 젭춘담바 후툭투였던 몽골의 신정 왕 복드 칸의 환생이다. 티베트 불교전통에서 정신적 지도자로서 서열 3위에 해당한다.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그리고 젭춘담마 후툭투이다. 젭춘담바는 겔룩파의 법맥에 의한 몽골 불교의 수장이다. 1936년 몽골의 신정 왕으로서 카간이었던 복드 칸의 환생이 확인되었지만, 1990년 까지 비밀에 붙여졌다가 달라이 라마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불교 종파는 아니지만, 티베트 고유의 민속 종교인 ‘본’교가 있다. 불교의 다른 종파와 더불어 불교의 한 종파로 인정되었다.

 

▲ 필자 보검스님이 몽골불교행사장에 입장하고 있다

 

이치란 박사 (원 응 보검)
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아시아불교평화회의(ABCP 본부 몽골) 한국회장
국제불교연맹 이사(IBC 본부 인도)
동방불교대학 전 총장
한국불교신문 전 주필
현: 해동불교대학장
강원불교대학장
WFB 세계불교대학 집행이사
일붕신문 상임논설위원
다나TV 영어금강경 강의
(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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