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행문 >
동남아시아 사찰 순례기- 라오스 편
첫번째 라오스사찰 방문기 (6)
라오스 수도 비엔티엔과
불교 유적지 (1)
미국에는 모든 아시아 전통불교 국가에서 건너 온 스님들이 신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또 미국에는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하는 기관도 많고, 수행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국에서도 위빠사나 관련 책도 많이 나오고 미얀마로 수행을 하러 갔는 사람도 많다.
필자는 2017년 말 부터 동남아시아 태국을 여러차례 방문하면서 태국 지역의 유명사찰을 많이 소개하였다. 태국에서 치앙라이 지역과 태국 남부의 붓다다사 스님이 거주했던 ‘수안 모크(Suan Mokkh), 그리고 포틸락 스님이 이끄는 ‘아속’ 공동체를 방문하려고 하였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여행을 할 수가 없어서 우선은 태국불교 기행문은 치앙마이 사찰 소개로 끝낼 수 밖에 없었다. 기회가 되면 못다 한 태국 사찰 소개를 더 하려고 한다. 2020년 11월 호 부터는 2019년 11월에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방비앵, 비엔티앤을 방문한 것을 토대로 라오스 불교를 소개한다.
글 | 김형근 (본지 편집인)
빠뚜싸이 위에 있는 네 구석에 있는 네 개의 조각품중 한 개
2019년 11월 태국 방콕에서 비행기로 루앙프라방으로 가서 3박 4일을 지낸 후에 비행기로 비엔티엔으로 갔다. 처음으로 라오스 비행기를 탔다. 조그마한 비행기였는데 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로 2사람씩 한 줄에 4명 씩 20줄 대략 80명이 탔다. 비행기에서 본 라오스는 온통 산이었다. 산에 나무들이 아주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한 시간쯤 후에 비에티엔에 도착하였다. 라오스에는 여행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 몇 군데 있다. 루앙프라방과 팟세이다. 둘 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비엔티엔은 수도이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도시이다. 비엔티엔이 라오스 수도라는 것은 나는 전에는 알지 못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 중국, 태국, 미얀만, 베트남 등으로 둘러싸인 라오스는 항상 주변국가로부터 침략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산악국가인 관계로 인구가 적어 전쟁에서 패하기가 일쑤였다. 여기에다 내분이 일어나 루앙프라방, 비엔티엔, 참싹 왕국으로 분할되기도 해서 역사가 복잡하다.
2020년 11월호 라오스 여행기 첫 번째 실린 글에 라오스 수도가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엔으로 옮긴 과정을 소개했다.
그 내용을 요약해서 다시 소개한다. 이 역사적인 사실을 이해해야 비엔티엔 사찰과 유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란상왕조(Lan xang, 1353~1694, 한국의 조선왕조 시기)의 위소운 왕의 아들 포티사라트 왕(1520~1550)은 독실한 불교도였다. 그는 현재의 태국인 치앙마이와 아유타야에서 온 두 명의 공주와 각각 결혼했으며 이들 왕국과 불교를 바탕으로 교류했다. 이로 인해 라오스는 물론 치앙마이와 아유타야에도 불교도가 늘어나게 되었다. 1525년에는 왕은 치앙마이에서 율사로서 교육받은 마하 수무다코테 스님이 주재한 왓 위소운의 수여식에서 큰스님에 준하는 성직자로 임명된 이후, 매우 깊이 있는 종교교육을 받았다. 얼마 동안 치앙마이에 머물렀던 왕은 돌아올 때 에메랄드 불상과 스리랑카 양식의 불상인 프라시캄을 모셔왔다.
그 후 세타티라트 왕(1548~1571) 때 라오스는 현재의 베트남인 안남과 태국 아유타야의 침입으로 내부적인 갈등을 겪었다. 또한 태국 북부 치앙마이 왕국에서 왕위 계승 문제로 전쟁이 발생하여 버마족과 40년이 넘는 기간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세타티라트 왕은 버마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새로운 수도로 비엔티안을 건설했다. 그는 루앙프라방에는 프라방 불상을 남겨두고 고승을 머물게 해서 일반 국민이 예배할 수 있게 했으며 에메랄드 불상과 프라시캄은 수도로 모셔 갔다.1566년에는 원래 힌두교 사원이 있던 곳에 왓 탓루앙 사원을 중건하고 탓루앙 대탑을 건립했다.
세타티라트 왕은 치앙마이와 힘을 합해 버마족을 물리쳤는데 이때 왕은 포티사라트 왕의 어머니 즉 자신의 할머니-치앙마이족의 공주였던-와 국가를 위한 사원을 건립했다. 이 사원이 바로 오늘날까지 라오스 국민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오고 있는 비엔티안의 케오사와 루오사이다. 하지만 이후 버마와 씨암의 침공으로 나라가 피폐해졌으며 불교 역시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1639년에는 수리야봉사가 왕위에 올라 55년간 라오스를 다스렸다. 그는 자신의 재위 동안 비엔티안을 불교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많은 시와 문학작품을 통해 불교 연구를 진작시켰다. 서양과의 접촉도 이루어져 네덜란드 상인이 라오스에 들어왔다. 1641년에 네덜란드 상인 게리트 반 우이스토프가 비엔티안을 방문했을 때 왕은 왓 탓루앙 사원에서 그를 맞았는데 먼 도시에서 많은 순례자가 찾아오는 아름다운 사원들과 조각, 건축, 벽화와 음악과 춤이 가득 찬 활기찬 왕국의 모습을 자랑했다. 1670년에 왕은 아유타야로 사절단을 보내 선린외교를 회복했다. 또한 그는 백성들의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모든 이들이 공평하게 지위를 누리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이때를 라오스의 황금 시기라 부른다. 수리야봉사가 사망하자 란상 왕조는 막을 내렸는데, 이와 함께 불교 역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비엔티앙의 아누웡(Anouvong) 왕은 당시 타이와 베트남(응우엔 왕국) 두 나라에 조공을 받치는 열악한 상황을 타개하고 옛 란상 왕국의 재통합을 계획했던 왕이었다. 시암(태국)의 도움을 받아 왕위(1805)를 얻게 되어 집권 초기에 시암과 협력했으나 1819년 새로 세워진 베트남의 응우엔 왕국과 동맹을 맺고 외교력을 발휘하여 분열된 3국 중 비엔티엔과 참파삭의 통합을 이룬다. 1827년에서 1828년 사이 타이를 공격 여러 도시를 정복하며 타이 수도 방콕 10km까지에도 이를 정도의 성공을 초기에 이루기도 했다.
이에 타이는 전열을 정비 아누웡의 라오 군을 격퇴시키며 비엔티엔까지 역으로 공격해 오게 된다. 타이 왕의 명령으로 1828년 비엔티엔에 있었던 6천 채 이상의 가옥이 파괴되고 거주하던 10만 명의 라오 인은 강제로 집을 몰 수 당한 후 비엔티엔을 떠나 메콩강 맞은편으로 쫓겨나게 되어 비엔티엔은 철저히 파괴되어진 숲 속에 묻혀 사라진 도시가 된다. 사원의 불상을 포함한 거의 모든 공예품들이 시암 군대에 의해 약탈되어 국외로 탈취되고 이 중 잘 알려진 에머날드 불상이 태국으로 갔다. 이로서 비엔티엔 왕국과 참파삭 왕국은 타이 영토에 복속됨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모든 사원이 이 시기에 파괴되었으나 아누워 왕에 의해 1818년 세워진 왓 시사켓(wat sisaket) 사원은 비엔티엔 사원 중 유일하게 1828년 침입한 타이군에게 파괴되지 않아 비엔티엔에서 최고 오래 보존된 사원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사찰은 태국식으로 건설된 사찰 이라고 한다.
위에서 보면 비엔티엔은 이미 란쌍 왕국 건국 이전 소국 난립 시대부터 라오스 지역에서는 루앙프라방과 함께 자웅을 겨루고 있었고, 란쌍 왕국이 1353년 건국 될 때도 루앙프라방에 이어 제2의 도시라 할 수 있었으며 이윽고 세타티랏 왕(1520-1547)이 재위하던 시기인 1563년에 란쌍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713년을 기점으로 란쌍이 루앙프라방 왕국, 비엔티안 왕국, 짬파싹 왕국으로 나뉘었던 이후에도 1828년 비엔티안 왕국이 태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비엔티안 왕국의 수도로서 기능했다.
1828년 씨암(태국)의 침략을 받아 약탈당했던 탓에 비엔티엔에서 화려한 옛 수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프랑스 식민 지배 기간 동안 도시가 정비되기 했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 외부 세상과 단절된 채 가난한 나라의 수도로 명맥만 유지했을 뿐이다. 최근에 도로가 포장되고 21세기로 들어서면서 빠르게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다. 최근 주목 되는 것은 중국과 라오스의 국영철도사업이다. 차로 유명한 중국의 윈난성의 쿠밍에서 비엔티엔까지 고속철도 공사가 곧 개통할 예정이라고 ASEAN Briefing이 발표하였다. 4-5년 전만 하더라도 산악 국가인 라오스는 철도역이 없었고, 대부분 라오스 사람들은 역을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과 라오스간의 철도가 연결되면 라오스는 큰 변혁이 일어날 예정이다. 한국이 경부고속도로 건설 후 큰변화가 왔는데 라오스의 경우는 그 이상의 변화가 예상된다. ASEAN Briefing에 의하면 그 변화는 다음과 같다.
. 첫번째 라오스 국영 철도 라인은 2021년 개통
. 첫 번째는 중국 쿤밍(Kunming) - 라오스 비엔티엔 (Vientiane) 연결.
. 라오스는 고립된 내륙국가에서 내륙과 연결되는 국가로 변화
. 상당한 외국인 투자가 라오스에 들어올 예정
이 철도는 방콕을 통과하는 철도와 연결되어 말레이반도를 거쳐서 싱가포르까지 간다. 라오스 구간의 공사는 올해 말 완공이 목표라고 한다. 2016년 12월부터 공사를 시작했고 중국 국영 철도 그룹의 6개의 중국 자회사가 참여하고 있다. 중국국경도시 보텐에서 비엔티엔까지 414km 구간의 철도 이다. 그러나 공사가 어려운 산악지형으로 총 170개 교량과 72개의 터널을 건설해야 했으며 인도차이나 전쟁의 불발탄(폭탄, 로켓, 지뢰)이 대량으로 나와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이 철도는 총 21개 역이 건설된다.
비엔테엔 인구는 80만이고 태국 농카이라는 도시의 국경과 접경에 있으며,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발달되어 있다. 많지는 않지만 한국인들이 식당, 카페,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조선의 식당도 이곳에 있다. 한국과 조선 모두 이곳에 식당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17년 전인 2005년만 해도 이 도시에는 한국인이 거의 없었으며 비엔티엔 시내에도 교통신호등이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세계 대도시나 다른 나라 수도에 비하면 비엔티엔은 여전히 지방 소도시 분위기를 풍긴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조용한 수도’라는 라는 평가이지만, 변모하는 ‘동남아시아의 오늘을 가장 잘 보여주는 도시’이기도 하다.
비엔티엔은 여행자들에게는 라오스의 관문도시 역할을 한다. 새롭게 건설된 사원이 많아 고풍스러운 느낌은 없지만 한적한 가로수 길과 18세기 후반 식민지 시대 형식의 건축물들은 바쁜 발걸음을 느리게 만든다. 반듯하게 정비된 강변도로와 메콩 강의 정취도 나쁘지 않다. 한국 기업들이 공원과 어린이 놀이터 시설 등을 만들어 준 곳이기도 하다.
비엔티엔의 라오스 말로는 ‘위양짠’이며 백단향의 도시 또는 달의 도시라는 뜻이다. 수도임을 강조하기 위해 ‘나콘루앙 위양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도시에서 유명한 것은 위대한 불탑이라는 왓 타루앙 대탑, 독립문인 빠투싸이, 왓 씨싸켓, 호파케오, 야시장, 재래시장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비엔티앙 관광은 새벽의 탁발부터 시작되었다. 호텔은 주택가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호텔 앞과 주변에서도 스님들께 공양하려는 사람들이 자리를 깔고 스님들이 탁발하러 오기를 기다렸다. 탁발 공양물에는 주로 음식, 과자, 물 등이 주류를 이루고, 가끔 돈을 살짝 주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돈을 아예 준비해 가지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루앙프라방에서는 스님들이 공양물을 받으면서 그냥 지나갔는데 이곳에서는 태국과 똑같이 공양물을 받은 후 스님들이 축원을 하였다. 한 나라의 수도이지만 태국의 대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라오스의 루앙프라방보다도 더 소박한 탁발하는 모습이었다.
개선문 빠뚜싸이(Patouxay)
미국 정부의 대외원조법에 의해 새로운 공항 건설을 위한 시멘트와 자본을 미국 정부가 지원했는데 라오스 정부는 이 돈으로 공항대신 빠투싸이를 건설했다. 라오스의 건축가 1960년대초(1962~1968년)에 만들어진 빠뚜싸이는 승리의 문,혹은 개선문이라고 불린다.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기념하는 한편 라오스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싸운 라오스 전사들을 기리기 위해 건축되었다고 한다. 겉 모양새는 파리의 개선문을 따랐고,내부의 벽화와 조각은 라오스 전통양식으로 이뤄졌다. 탑위에 올라가면 비엔티엔의 시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탑 전면에는 2004년 중국의 원조로 지어진 분수 광장이 눈길을 끈다. 기념탑 천장에는 빼어난 예술성을 가진 조각 작품들로 장식되어 있으며, 힌두교의 신들과 힌두교 설화인 라마야나(Ramayan)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동서남북 4개 방향으로 문이 있으며 동서문은 ‘란쌍거리’로 연결되는데 국가 주요 행사시 사용된다. 입장료를 내고 위로 올라가 볼 수 있으며, 올라가는 중에 각 층마다 많은 기념품 가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