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행문 >
동남아시아 사찰 순례기- 태국 고대도시 치앙라이 (5)
치앙라이 사찰들 (4)
왓 프라싱, 왓 째요
글 | 김형근 (본지 편집인)
태국사찰 구조
태국 사찰은 대개 우보솟, 위한, 살라, 불탑, 그리고 경전을 보관하는 장경각인 호 뜨라이와 종각 등이다.
‘우보솟ubosot' 혹은 줄여서 ’봇bot'이라 부르는 법당으로 한국 사찰의 대웅전에 해당한다. 봇의 모양은 직사각형의 텅 빈 홀로, 한쪽 끝에 불상이 놓여 있다. 봇은 절의 스님들이 모여 명상하고 설법하는 곳이며, 특히 승려의 수계식은 반드시 여기서 행해진다. 봇의 둘레에는 ‘바이 세마ib saema'라고 부르는 여덟 개의 지계석이 땅에 박혀 있다.
위한wihan'은 절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불당이다. 형태는 봇과 비슷하지만 크기는 약간 작다. 여기에는 절의 불상들이 모셔져 있다. 사찰에는 또 ‘살라sala'라고 부르는 정자가 있다. 살라는 봇과 비슷한 직사각형의 건물로 기둥과 지붕만 있고, 벽이 없어 시원하다. 동네 주민이 수시로 와서 이곳에서 쉬거나, 기도를 드리거나 설법을 듣는다. 살라는 때로는 마을 주민이 모여 마을 축제 등과 같은 공동의 행사를 앞두고 회의를 하는 곳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태국 사찰은 또 ‘쩨디cedi’ 혹은 ‘쁘랑prang'라고 하는 불탑이 있다. 쩨디는 종의 꼭대기에 뽀족탑을 얹어 놓은 형태로 스리랑카가 그 기원이다. 쁘랑은 옥수수 속대와 같은 형태로 캄보디아로부터 수입되었다. ---이 상은 <태국, 불교와 국왕의 나라‘ 조흥국 지음>에서 뽑았습니다.
왓 프라싱
2021년 11월 24일 오후 방문
왓 프라싱이란 ‘신성한 사자의 사원’이란 뜻으로 전통 란나의 건축양식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사원 중 하나이다. 싱하(SINGHA)는 태국어로 ‘전설의 숲의 왕’이라는 뜻으로 힌두교에 나오는 사자 형상을 한 전설의 동물이다. 사찰 이름이 사자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정문 양 기둥 위에 사자상이 있다.
왓 프라케우 맞은편에 있는 이 사찰은 란나시대 양식 건물로 최근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건물 크기가 작았다. 작으마한 사찰이었고 방문자도 많지 않았다. 원래 사찰은 1345~ 1400년 마하프롬 왕 시대에 지어졌다. 왓 프라 싱에는 오랫동안 팔리 어학원이 있었으며 2005 년 7 월 22 일 (22 กรกฎ คม 2548) 여왕의 70 번째 판사를 기념하여 새 건물이 헌납되었다.
우보 소, 위한, 탑과 커다란 보리수 나무 등이 보였다. 또 이 사찰에는 마야부인이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無憂樹)나무에서 아기 부처를 출산하였는데 이 사찰에 있는 살라 랑카 (Sala Lanka)나무가 그 나무라고 하는데 무우수 나무가 살라 랑카인지는 잘 모르겠다.
우보 소 안에는 양쪽으로 기둥이 2개씩 4개 총 8개가 있었다. 불상은 항마촉지인이다. 창문도 작았고, 기둥을 비롯한 우보 소 안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위한의 조그만 불상은 나무로 정교하게 짜여진 탑 모형의 안에 모셔져 있다. 기둥은 검정색으로 되어 있고 벽에는 여러 가지 벽화가 있다. 사찰에서 스님들은 볼 수가 없었고, 이 사찰에서 만난 여성 신도가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해 주었다.
‘왓 프라싱’이라는 사찰은 치앙마이에도 있다. 그것은 멩랑이 왕 1262년에 치앙라이에 첫 번째 도읍지로 건설하여 치앙 콘, 판 등 북부타이의 분지와 작은 평야에 흩어져있던 작은 토후 국가들을 통합하여 왕국의 영토를 넓혀나갔다. 그리고 1296년에 치앙마이를 수도를 하여 란나 왕국을 건설하였다. 수도가 치앙마이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치앙라이에 있던 큰 사찰인 ‘왓 프라싱’도 수도인 치앙마이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원래 이곳에 있던 불상이 치앙마이 왓 프리싱으로 옮겨갔고 현재 이곳에 있는 불상은 그 불상의 모조품이다.
미주현대불교 2020년 7월호에 치앙마이 사찰이 소개되었다. 이름이 같은 것은 불상 때문이다.
2020년 7.8월호에 소개된 ‘치앙마이 와 프러싱’글을 다시 소개한다.
원래 사원 이름은 ‘왓 리 창 프라(Wat Li Chang Phra)’로 불리다가 1376년 프라싱(Phra Singh)불상이 이 사원에 오면서 그때부터 ‘사자 부처 사원’이라는 뜻의 ‘왓 프라싱(Wat Phra Singh)’으로 불리게 되었다. 프라싱(Phra Singh)은 ‘사자 모양의 불상’이지만 실제로는 일반 부처상과 큰 차이가 없다. 과거 불교를 부흥시킨 스리랑카에서 제작된 여러 불상 양식중의 한 형태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석가모니의 원명 Shakyamuni Buddha의 또 다른 이름인 ‘The Lion of Shakya'에서 유래 되었다. 즉 사자처럼 당당한 석가 부처의 모양을 기초로 만들어진 좌 불상으로 가부좌의 형태에 오른손을 무릎 위에 얹어 놓은 불상의 한 양식이다.
그 프라싱 불상이 이곳 치앙마이에 오게 된 사연은 이렇다.
12세기 크메르를 몰아내고 최초로 타이족을 통일한 수코타이는 힌두교를 몰아내고 테라바다(남방불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그리고 수코타이 3대 왕 람캄행 왕은 당시 남부 수코타이의 속국으로 있던 ‘나콘시탐마라’왕국에 수코타이 불교를 상징할 보물을 구해오라고 명령한다. 이에 ‘나콘시탐마랏’ 왕은 스리랑카에서 프라싱 불상을 가져다가 람캄행왕에게 바친다. 이를 범상치 않은 불상이라 여긴 람감행왕은 이 보물을 수코타이의 보물로 삼는다.
1378년 아유타야가 수코타이를 멸망시키고 이 불상은 아유타야의 캄펭펫이라는 곳으로 옮겨진다. 후에 란나에서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아유타야로 도망한 왕자가 우연히 캄펭펫에서 이 영험한 불상을 발견하고 ‘프라싱’을 란나의 샌 무앙마왕에게 바치고 죄를 사면 받는다. 란나의 13대 왕 무앙 깨오(Muang Kaeo 1495~1525) 왕은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불상인 프라 부타상(Phra Bhuthasing)을 모실 건축물을 세우라고 명령한다. 그리하여 세워진 이 비하라(작은 불당)이 바로 란나 건축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비하라 라이 캄(Vihara Lai Kham)이다. 라이 캄 벽면에는 용과 신들의 조각상이 있으며 당시 생활상과 풍속 그림 등 다채로운 예술작품을 볼 수 있다. 황금의 금박과 붉은 옷칠로 장식한 화려한 내부와 금박 장식의 극치를 보여주는 박공 장식의 예술은 이 불당이 치앙마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란나의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이 건축물의 이름도 라이 캄(아름다운 금박 무늬)라는 이름을 붙여 비하라 라이 캄(Vihara Lai Kham)이 된 것이다.
이 것은 불상에 대한 내력이다. 여기 있었던 불상이 란나 왕국의 수도인 치앙마이의 사찰로 옮겨지게 되었고, 그 사찰 원래 사원 이름이 ‘왓 리 창 프라(Wat Li Chang Phra)’이었는데 불상 때문에 ‘왓 프라싱’으로 바꾼 것이다. ‘사자 부처 사원’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도 사자의 조각이 탑등에 많아 등장한다. 그에 관한 글을 옮겨 소개한다.
“중국에서는 황제를 상징하는 것이 용이지만 인도에서는 코끼리나 사자가 동아시아의 용과 같은 역할을 했다. 코끼리나 사자는 인도에서 동아시아로 넘어오면서 그 중요성이 낮아지는데 당연히 중국에서 살지 않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용이 중국에 살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경전에서 코끼리와 사자는 흔희 문수.보현보살과 함께 등장한다. 사찰에서 사자가 등장하는 주요 장소는 세 군데이다. 첫째는 큰스님의 설법 좌대이다. 사자를 장식한 의자를 사용하는 대상은 인도에서는 ‘왕’과 ‘성자’이다. 이때는 수사자 네 마리를 네 모퉁이에 조각하는데, 왕의 통치와 위엄을 상징하고 성자가 모든 삿된 견해를 물리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통이 동아시아의 불교로까지 전해져 큰 스님의 설법 좌대에 사자가 조각된다.
둘째는 사찰 입구이다. 사자의 용맹성이 수호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으로, 사찰 입구의 좌우에 위치하는 사장상과 탑 주변에 네 모서리의 사자상 장식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중국은 이러한 사자 장식이 널리 보편화되어 베이징의 자금성이나 호텔 등 고급 건축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인도문화에서 사자 조각은 모두 수컷만 사용되는데 동아시아에 와서는 암수가 반드시 함께 등장한다는 것이다.”--- ‘자현스님 저서 사찰의 비밀, 264쪽에서 옮김--
왓 째요
11월 25일 오전 11시 방문. 날씨 약간 흐림
왓 째요 사찰은 치앙라이 시내에 있다. 이 사찰은 삼거리에 있는데 정문에서 바로 앞으로 나가면 서울식당이 있다. 하지만 이 식당은 2021년 11월 현재는 코로나 때문에 한국 관광객이 오지 않아서인지 닫혀 있었다. 정문 양 기둥 위에는 사자상이 있다. 이 사찰은 우보솟과 그 뒤에 불탑이 있고 위한은 없다. 왼쪽에는 큰 건물이 있었다. 불탑 뒤쪽에도 건물이 있었는데 내부 수리 중이었다. 사찰의 많은 부분을 재건축 중인 것처럼 보였고, 공사관련 차량들이 경내에 왔다 갔다 했다. 사찰 입구 종무소에서는 불사에 동참하는 사람들에게 벽돌에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이 사찰에는 원래 승가학교가 있었는데 10년 전에 문을 닫았다고 사찰 종무원이 말했다. 왼쪽 건물과 뒤쪽 건물이 승가학교 건물로 사용된 건물 같았다. 5명의 대중스님들이 살고 있는데 스님들을 만나지는 못했다. 이 사찰을 포함하여 부근에 7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상주 스님이 없어서 7개 사찰이 통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사찰의 불탑에 기둥이 7개라고 한다.
이 사찰은 1844년 'Brakrubakuntha Kunthawungso'스님이 건립하였다.
그 후 1938년 9월 27일 Wisungkamasima (Wisungkamasima 발음)로 제례를 거행하였다. ‘Wisungkamasima’는 사원과 국가의 땅과의 경계의 의미한다. 이것은 태국의 왕이 특별히 승려들에게 사찰을 지을 때 사용하도록 왕의 명령으로 선포한 지역이라는 의미이다. Wisung Kham Sima가 부여된 사원은 유효한 사원으로 간주되며 법인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갖는다고 한다. 1978년 3등급 왕실 사원이 되었다. 원래 이 사찰은 군인들의 안전 귀향과 사업번창을 기원하는 사찰이었다고 한다.
우보 솟은 최근에 다시 지어진 건물인데 전형적인 북부지방의 양식이고, 안에는 대형불상이 있는데 태국 사찰에는 가끔 이런 형태의 균형이 없는 대형 불상이 있다. 그동안 본 치앙라이에서 본 최근에 지어진 사찰의 건물은 기둥이 불상을 중심으로 좌우로 4개씩 있었는데 이 우보 솟은 기둥이 좌우로 5개씩 두 줄로 총 10개가 있다. 벽면은 불화로 장식되어 있다. 불상 바로 앞과 우보 솟 건물 앞에는 12지상 장식물이 각각 2개씩 좌우로 걸려 있었다. 이 사찰은 3등급 왕실사원이어서 인지 우보 솟 안에는 왕의 사진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