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행문 >
동남아시아 사찰 순례기- 태국 고대도시 치앙라이 (6)
치앙 센 (1)
란나 왕국(1292-1774) 최초의 수도
글 | 김형근 (본지 편집인)
태국사찰 구조
태국 사찰은 대개 우보솟, 위한, 살라, 불탑, 그리고 경전을 보관하는 장경각인 호 뜨라이와 종각 등이다.
‘우보솟ubosot' 혹은 줄여서 ’봇bot'이라 부르는 법당으로 한국 사찰의 대웅전에 해당한다. 봇의 모양은 직사각형의 텅 빈 홀로, 한쪽 끝에 불상이 놓여 있다. 봇은 절의 스님들이 모여 명상하고 설법하는 곳이며, 특히 승려의 수계식은 반드시 여기서 행해진다. 봇의 둘레에는 ‘바이 세마ib saema'라고 부르는 여덟 개의 지계석이 땅에 박혀 있다.
위한wihan'은 절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불당이다. 형태는 봇과 비슷하지만 크기는 약간 작다. 여기에는 절의 불상들이 모셔져 있다. 사찰에는 또 ‘살라sala'라고 부르는 정자가 있다. 살라는 봇과 비슷한 직사각형의 건물로 기둥과 지붕만 있고, 벽이 없어 시원하다. 동네 주민이 수시로 와서 이곳에서 쉬거나, 기도를 드리거나 설법을 듣는다. 살라는 때로는 마을 주민이 모여 마을 축제 등과 같은 공동의 행사를 앞두고 회의를 하는 곳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태국 사찰은 또 ‘쩨디cedi’ 혹은 ‘쁘랑prang'라고 하는 불탑이 있다. 쩨디는 종의 꼭대기에 뽀족탑을 얹어 놓은 형태로 스리랑카가 그 기원이다. 쁘랑은 옥수수 속대와 같은 형태로 캄보디아로부터 수입되었다. ---이 상은 <태국, 불교와 국왕의 나라‘ 조흥국 지음>에서 뽑았습니다.
1296년에 치앙마이를 수도로 하여 ‘백만 논(畓)의 왕국’이란 뜻의 란나 왕국을 건설한 멩라이왕(Mengrai, 1239-1317)은 중국위안족인 따이 위안(Tai Yuan)에 의하여 지금의 치앙 센 지역(치앙 센 근처라고만 알려졌을 뿐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에 세워진 녹양((Ngon Yang)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22세에 부왕의 뒤를 이었고, 1262년에 치앙라이에 도시를 건설하여 치앙콘, 판 등 북부타이의 분지와 작은 평야에 흩어져있던 작은 토후 국가들을 통합하여 왕국의 영토를 넓혀나갔다. 1287년 치앙마이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멩라이왕(King Mengrai)은 같은 타이족인 쑤코타이 왕국의 3대 왕인 람캄행 왕(1277-1298), 파야오 왕국의 응암무앙과 민족동맹을 맺고, 하리분짜야(현재의 람푼)지역에 있는 버마 몬족을 1291년부터 1292년까지 공격하여 하이푼차이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건설하였다. 그 후 란나 왕국 건설 당시인 1294년에 도읍지였던 위앙쿤캄은 핑강의 대범람으로 침수되었다. 그래서 1296년 새로운 도시인 치앙마이를 건설하였다. 이런 정복과 통합의 과정에서 치앙센, 치앙라이, 위앙쿤캄, 치앙마이로 도읍지가 이동하였다.
멩라이 왕에 이어 그의 손자 센프(Saen Phu)가 3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왕조가 안정되어감에 따라 그들의 뿌리인 녹양((Ngon Yang)을 재건하게 되었고 도시 이름을 자기 이름을 따서 ‘치앙 센’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치앙 센은 란나 왕국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도시이고, 작지만 고도의 역사를 지닌 도시인 것이다. 이곳에서 불교 유적으로 내가 본 것은 국립박물관과 ‘왓 파싹’, ‘왓 째디 루앙’ ‘왓 뭉 무앙Wat Mung Muang’ 그리고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산위에 있어 전망이 좋은 ‘프라타트 파나움(Phra Dhat Pha Ngao)등이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큰 규모의 현대적인 건물의 중국 절도 보였지만 방문하지는 않았다.
이런 역사가 있는 도시이지만 태국의 국력이 모자라서인지 치앙 센은 허물어진 채 방치되고 있는 옛 유적이 여기 저기 많이 있었다. 사찰도 마찬가지인데 다행히 왓 째디 루앙이 복원되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눈뜨면 탁발을 가고 부처에 감사드리며 하루 일과가 끝나고 또 부처에게 감사를 드린다. 지극히 평화로운 생활이다.
시내 중심가에서 조금만 앞으로 가면 메콩강이 보이고, 강 너머는 라오스이다. 인구 6만 정도이고 중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최근에 신축 건물의 큰 중국사찰이 있다. 이곳이 국경도시이고, 미얀마를 가려면 이곳을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기 때문에 한국불교계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지 몰라도 개신교의 ‘미전도종족선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들이 선교활동도 또한 많은 지역이다.
2021년 11월 하순 오후 2시 경에 치앙 센에 도착했다. 치앙라이에서 60km 정도이고 1시간 거리였다. 이곳은 중국인들이 많이 살고, 라오스, 미얀마와 접경 지역이다. 치앙 센에 들어서자마자 ‘왓 파싹’과 ‘왓 째디 루앙’이 바로 나온다. ‘왓 째디 루앙’대한 탑에 갑자기 도착하였는데 너무 큰 탑에 나는 놀랐다.
왓 파싹
치앙 쎈에 들어서자 마자 이 사찰이 바로 나온다. 이곳과 대찰인 왓 째디 루앙은 지근거리에 있다. 왓 파싹 바로 옆에 치앙 센 성벽이 남아 있다. 이 성벽과 치앙 센 사이에는 조그만 하천이 있다. 왓 파싹 경내에는 도처에 파괴된 유적들이 널려 있었다. 우보 소나 위한 등 사찰 전각의 잔재는 없지만, 터는 잘 정리해 놓은 상태이다. 상처를 많이 입었지만 골격은 제대로 남아 있는 탑은 크면서도 아름답고, 정교하게 조성되었는데 벽면에는 몇 개의 불상들이 남아 있었다. 경내는 꽤 넓은 면적이었다. 탑 뒤쪽에는 아주 커다란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에는 건물 잔해가 뚜렷하게 보였다.
이 사찰은 1295년에 란나 3대 쌘프 왕 시기에 건설되었다. 한국은 고려시기이다. 이 사원에는 많은 대략 300여 그루의 티크 나무들이 있는데 ‘티크 숲 사원’이라는 의미가 있는 숲이라고 한다. 경내에서 가장 크게 보이는 탑이 있다. 다섯 개의 종 모양으로 마무리를 한 ‘만다파’ 모양 체디로 체디 쿠 쿳의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아 그 기초 위에 건설되었다. 한편 첨탑의 유골실은 람푼 지방의 체디 치앙 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건축의 장식은 푸감, 중국, 쿠메르, 수코타이의 건축양식을 고루 반영하고 있다.
왓 째디 루앙, 탑을 본 순간 그 크기에 놀랐다
이 사원은 도로 바로 옆에 있다. 이 사원에 도착하여 탑을 본 수간 그 크기와 늠름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방문 당시 사원의 복원 공사 관계로 여기저기 부서진 것들과 건축 자재들이 널러 있었지만 다행이 탑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 탑이 잘 보존된 것은 너무 커서 파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탑은 기반이 팔각형이고 종모양의 형태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사찰은 1344년에 멩라이 3대 왕인 쌘프가 부처님의 가슴뼈 조각을 보존하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 1515년에 프라 케우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그 후 500년이 지난 후인 2014년 5월 5일에 치앙라이에 6.3도의 지진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이 탑도 손상을 입었다. 방콕 라디오와 7번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이 탑의 복구를 위해 돈을 기증하였다.
망그라이 왕조의 3대 왕인 샌프 왕은 차이 송 크림 왕의 장자이며 란나 왕조를 세운 망그라이 왕의 손자이다. 그는 1820년 출생하여 1861년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수년 후 1871년에 아들인 캄푸에게 양위하고 구 도시 근처에 신도시를 건설했다. 그 도시는 왕의 이름을 따서 치잉 쎈 이라고 불렸다. 그는 불교를 후원하여 파삭 사원을 설립하고, 챙시 분 루앵 사원의 오래된 탑 위에 새로운 탑을 건설했으며, 프라 탓 촘 키시, 프라 탓 도이 푸 카오, 프라 탓 도이 랑, 프라루앙 등 여러 사찰을 수리했다. 1878년 그는 치앙 쎈 시에서 운명했다. 캄푸 왕이 그의 아버지를 메콩강에 장사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고, 요녹의 연대기나 그 지역의 전설에 따르면 캄푸 왕이 부왕의 화장한 유골을 구 도시인 치앙 쎈 노이에 모셨다고도 한다.
내가 방문할 당시에는 큰 건물을 짓는 복원작업을 하고 있었다. 탑 옆에 대규모 대웅전 공사를 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기념품 가게가 몇 개 있었다. 사찰 입구 정문 양 변에는 사자 상이 있었고 이 사찰과 인연 깊은 샌프 왕의 동상이 있다. 방문자는 많지 않았는데 내가 방문할 때는 젊은 남녀 한 쌍이 이 동상에 향을 피우고 절을 하였다. 사찰 경내 안의 나무들도 큰 나무였다.
여기저기 부서진 것들이 널러 있었지만 다행이 탑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 탑이 잘 보존된 것은 너무 커서 지진으로도 파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큰 건물을 짓는 복원작업을 하고 있었다. 탑 옆에 대규모 대웅전 공사를 하고 있었고, 주변에는 기념품 가게가 몇 개 있었다.
사찰 입구 정문 양 변에는 사자 상이 있었다. 사찰 경내 안의 나무들도 큰 나무였다.
치앙 쎈이 란나 왕국의 첫 번째 도읍지였는데 도읍지가 옮기면서 치앙 쎈의 큰 사찰인 ‘왓 째디 루앙’은 도읍지로 함께 옮겨 갔기 때문에 란나 왕국의 마지막 도읍지인 치앙마이에 같은 이름의 ‘왓 째디 루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