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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현대불교 2023. 9,10월호]테라바다 불교 종주국 스리랑카 성지 순례기 순례기 (5)- 이병욱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4.03.07|조회수16 목록 댓글 0

 

 

 기행문

테라바다 불교 종주국 스리랑카 성지 순례기 순례기 (5)

 

정법수호를 위한 결집과 삼장의 기록,
알루비하라 석굴사원에서

 

 

 이병욱

 

 

 

 

마탈레 알루비하라는 구전되어 오던 부처님 가르침을 최초로 기록해 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올라라는 야자나무 잎에 철필로 긁어서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렇게 문자로 기록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본래 부처님 가르침은 구전으로 전승되어 왔다. 제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전에 대하여 가장 믿을 수 있고 정확한 것이라고 말한다. 기록한 것 보다 더 정확함을 말한다. 기록하면 실수할 수 있다. 잘못 기입할 수 있고 한줄이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구전하면 그럴 염려가 없다고 한다. 왜 그런가? 여러 명이 합송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목숨 걸고 합송해서 구전 해 왔다.

 

 

 

 

스리랑카에서 니까야가 기록된 것은 기원전 1세기이다. 기원전 3세기에 불교가 전래된지 이세기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직접적인 원인은 기근이다. 기원전 1세기 왈라감바(또는 왓따가마니) 왕 통치 기간 중에 스리랑카는 12년 동안 기근이 들었다. 이를 바미니티야사야(Baminithiyasaya)라고 한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에 남인도의 침략이 있었다. 불교 승려들은 가르침이 단절 될 것 같은 위기를 느꼈다.승려들은 기근이 들고 외적이 침입한 상황에서 담마를
암기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기근이 들어 탁발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외적의 침입으로 모든 것이 파괴 되었을 때 담마도 사라질 것 같았을 것이다. 이럴 때 약 60명의 승려들이 구릉지로 피난가서 12년 동안 담마를 지켜 내었다.기근도 끝나고 전쟁도 끝났다. 왈라감바 왕은 14년만에 침략자들을 무찌르고 왕위를 되찼았다. 그리고 아누라다푸라로 돌아왔다. 구릉지로 피난갔던 승려들도 돌아왔다. 그러나 언제 또다시 기근과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승려들은 후대를 위해서 담마를 보전하기로 했다. 빠알리 삼장을 필사하기로 한 것이다. 승려들은 이 일을 하기 적합한 장소로서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마탈레에 있는 알루비하라 바위 사원(Aluvihare Rock)을 선택했다. 사경은 포콜라포트(Puskola poth)로 알려진 올라(ola) 잎으로 만든 책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들은 팔미라나 탈리팟 야자수의 잎으로 만든 두꺼운 조각으로 구성된 것이다. 올라 잎에 문지를 새기기 위해 금속 철필을 사용했다.

 

 


알루비하라 바위사원에 이르렀다. 국도 변에 있는데 작은 도로를 따라 꽤 들어가야 한다. 저 산 중턱에 커다란 황금빛 불상이 보였다. 사진으로만 보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지 못했다. 일정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굴사원만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알루비하라는 석굴사원답게 커다란 검은 바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다. 그야말로 커다란 바위산이라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다.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산중의 동굴이야말로 최적의 필사 장소이었을 것이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흰색의 담마스쿨 건물이 나타났다. 문은 잠겨져 있다. 쉬는 날이라고 한다. 평일인 수요일임에도 담마스쿨은 문이 닫혀져 있다.
스리랑카를 다녀온 사람에 따르면 흰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보기 좋았다고 말했다.알루비하라 바위사원은 담마스쿨 오른쪽에 있다. 구글 위성지도로 보면 엄청나게 큰 세 개의 바위가 있는데 그 사이에 석굴사원이 있는 것이다.높이가 수십미터에 달하는 바위사이에 좁은 틈이 있다. 왼쪽 바위 아래에 바위사원이 있다. 담불라 석굴사원에서 보는 것처럼 경사진 곳에 벽을 쌓아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반 석굴사원이라고 볼 수 있다.
석굴사원에 들어가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와불이다. 와불은 열반상과 잘 구분가지 않는다. 두 발이 약간 어긋나 있으면 열반상이라고 한다. 석굴상에 있는 누워 있는 부처님 상을 보니 두 발이 어긋나 있지 않다. 와불일 것으로 생각한다.
와불상 양 옆에는 선정인 좌상이 있다. 천정에는 벽화가 있는데 연꽃 모양이다.

석굴 전체가 불상과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그것도 컬러풀하다. 이곳에서 필사가 이루어진 것일까?

 

 

알루비하라 석굴사원은 협곡에 있는 것 같다. 양 옆으로 수십미터에 달하는 바위가 있고 마치 복도처럼 생긴 길이 나 있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중문이 나온다. 아마도 안과 밖의 경계인 것 같다. 저 문 안 쪽에는 무엇이 있을까?
중문 안쪽에도 석굴사원이 있다. 벽을 쌓아서 만든 것이다. 문을 들어서면 작은 방이 나오고, 한번 더 들어가야 동굴 사원이 나온다. 이 석굴사원에도 중문 바깥에 있는 사원에서처럼 와불이 있다. 구조는 비슷하다. 다만 입구 작은 방에는 지옥도가 있다.

석굴사원은 미로 같다. 작은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마치 터널 같은 입구가 있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나있는 작은 길을 말한다. 저 터널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운전을 할 때 터널을 만날 때가 있다. 터널을 통과하면 전혀 다른 세상에 오는 것 같다. 터널은 이쪽과 저쪽을 연결해 주는 통로와도 같은 것이다. 알루비하라 석굴사원에서도 비좁은 입구를 지나자 전혀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탁 트인 공간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산이 있으면 정상에 오르게 되어 있다. 터널 같은 작은 입구를 통과하자 바위산에 올라 갈 수 있는 길이 나타났다. 바위산에 오르니 탁 트인 전망과 마주하게 되었다.
바위산에는 작은 수투파가 하나 있다. 수투파에는 공양단도 마련되어 있다. 어느 신심 있는 스리랑카 불자 가족이 참배 왔다. 중년의 부부와 성장한 아들과 딸 이렇게 네 명이서 참배를 올리고 있었다.

 


중년의 여인은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스리랑카 불자들은 성지에 갈 때 팔과 다리를 가리는 긴 옷을 입는다. 그리고 대부분 흰 옷을 입는다. 그들은 스리랑카 국화인 보라색 수련을 불상 앞에 공양 했다. 그리고 합장하며 예배 했다.흰옷을 입은 스리랑카 불자는 왜 합장하며 예배했을까? 단지 스리랑카의 유명한 성지이기 때문에 예배한 것일까? 아니면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 예배한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알루비하라가 없었다면 오늘날 빠알리 삼장도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승되고 난 다음에 기근이 들었을 때 승려들은 위기를 느꼈다. 기근으로 인하여 삼장을 암송하는 승려들이 갈수록 줄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였을까? 논장의 주석서 삼모하위노다니에 따르면 기근 동안에 승원은 텅텅 비었다고 한다. 그때 마하비라 승원도 버려졌다. 수많은 비구들이 섬을 떠나 인도로 갔다. 삼장을 암송할 수 있는 비구들을 인도에 피신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기근이 끝나면 다시 스리랑카에 올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기근 동안에 스리랑카에 남아 있던 비구들의 삶은 비참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바나나 나무껍질로 연명했다. 그런데 기근이 너무 극심한 나머지 사람들은 인간고기를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12년동안의 기근과 외세의 침략은 스리랑카 불교를 위기에 빠뜨렸다. 이제까지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져내려 오던 구전 전통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런 때 승가의 가장 큰 관심사는 부처님 가르침을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었다.
500명의 장로 비구들은 마탈레 알루비하라 석굴사원에서 모였다. 이른바 율장, 경장, 논장을 체계화하기 위한 결집이 이루어졌다. 이를 불교사에서는 4차 결집이라고 한다. 또한 알루비하라 결집이라고도 한다. 4차 결집에서 체계화된 빠알리 삼장은 문자로 기록되었다. 기근이 닥쳐도 외세가 침략해도 영원히 남도록 하기 위해서 싱할라어 문자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부처님 가르침은 두 가지로 전승되었다. 구전과 기록으로 전승된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부터 쓰는 것보다는 구전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고대 인도에서 쓰는 것은 대중적이지 못했다. 아마도 쓰기에 적당한 재료가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종이가 없던 시절이니 쓰기 보다는 암송하는 것 위주였다. 암송이 더 대중적이었던 것이다.암송이 존중된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가르침에 대한 존엄성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 말씀을 문자로 기록해서 전승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경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는 스승에서 제자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었을 것 이다.가르침이 구전되면 소수의 사람에게만 진리가 알려질 수 있다. 가르침이 문자로 기록되면 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알루비하라에서 필사작업이 이루어진 것은 부처님이 널리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빠알리삼장을 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인터넷 시대에 검색만 하면 누구나 쉽게 빠알리삼장을 접할 수 있다. 더구나 각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이 모두가 삼장을 문자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알루비하라는 스리랑카 중심지에 있다. 아누라다푸라에서는 100키로 떨어진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산악지방에 있다. 이렇게 오지 바위 석굴에서 역사적인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잘 보전하기 위한 일이었다.스리랑카 비구들은 가르침을 보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 아마도 그것은 정법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후대로 갈수록 정법은 오염되고 변질되어서 마침내 사라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목숨걸고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스리랑카에서 필사가 이루어진 것은 기근과 외세의 침략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정법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대륙의 새로운 사조와 무관하지 않다.
인도대륙에서는 기원을 전후하여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다. 기원전에도 움직임은 있었다. 이는 기근 기간 중에 왓타가마니 왕(왈라감바, B.C104-88)이 아바야기리비하라(無畏山寺)를 후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아바야기리비하라는 사상적으로 개방적이었다. 그래서 대승의 교리도 받아 들였다. 이에 정통을 고수하는 마하비하라는 위기를 느꼈다. 이는 다름 아닌 정법의 위기를 말한다.왕의 후원이 끊긴 마하비하라에서는 왕도 모르게 아누라다푸라를 벗어나서 정통을 고수하고자 했다. 그리고 4차 결집을 행하고 삼장을 필사 했다. 이는 인도대륙의 변화무쌍
한 신흥사조로부터 가르침이 오염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마하비하라의 노력에 대하여 주석을 비롯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소승이라든지 은둔불교라든지 아공법유 라든지 부처님 가르침을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다든지 하는 그들을 향한 어떠한 비난이나 도전에도 별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법을 올바르게 이해(pariyatti)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고 바른 도를 실천하여(patipatti) 괴로움에서 벗어나(pativedha) 부처님이 보이신 해탈열반을 직접 실현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출가 생활이 이웃이나 불교도 들에게 가장 큰 공덕을 가져다 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세상의 위없는 복전(福田: punnakkhetta)이 된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셨기 때문이다.”(초기불전연구원 청정도론 해제 26~27쪽,
M.i.446)

 


정법은 오래 가지 않는다. 언젠가는 변질되어서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이는 경전을 보면 알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과거칠불과 관련된 경이 근거가 될 것이다.과거에 수많은 부처가 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법이 도중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아 정법이 훼손된 것이다. 이렇게 오염되고 변질 되었을 때 전혀 다른 불교가 되어버린다. 이는 역사적으로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지금으로부터 이천년도 더 전에 알루비하라 동굴에서 결집이 있었다. 결집된 것을 스리랑카 문자로 남긴 것이 오늘날 볼 수 있는 빠알리 삼장이다. 대륙에서 새로운 사조가 유행하자 이를 차단하기 위해서 스리랑카 문자, 싱할리
어로 묶어 둔 것이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정법이 수호될 수 있었다.
알루비하라 순례를 마쳤다. 역사적인 장소이지만 겉으로 보는 것에 그쳤다. 한시간도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 겉모습만 보았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신심 깊은 스리랑카 불자 가족만 있었다. 그러나 혜월스님 말에 따르면 포살일 등 특별한 날이 되면 엄청나게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큰 바위 사이에 있는 통로가 있다. 왼쪽 바위 밑에는 석굴사원이 있고, 오른쪽 바위에는 기름 등을 놓을 수 있는 감실이 있다. 감실은 사람 눈높이 정도에 따라 수평으로 일정간격에 따라 만들어 놓았다. 바위를 파서 만든 것이다.이런 감실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감실에 기름등이 밝혀 졌을 때 주변을 환하게 밝혔을 것이다. 사람들은 부처님의
정법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바랬을 것이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진리의 등불은 밝혀져 있다.
진리의 등불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정법은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율장대품 후렴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만약에 경전과 논서를 잃어버리더라도,
계율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교계는 언제나 존속합니다.”(Vin.I.99)
후렴시에 따르면 계율만 있으면 부처님 가르침이 존속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경장보다도 율장이 더 중요함을 말한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삼장의 순서는 항상 율장, 경장, 논장 순서로 소개된다.
알루비하라 높은 계단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저 멀리 산이 보인다. 야자수 너머로 아득하다.
맑고 청명한 날에 푸른 하늘과 녹색의 밀림이 조화롭다. 그 옛날 정법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비구들도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저 산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이병욱
필자 담마다시 이 병욱 거사는 전재성 박사가 이끄는
‘한국 빠알리 성전협회’에서
오랫동안 니까야 공부를 하고 있다.
그리고 블러그, 페이스북에
매일 불교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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