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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교기행

[2016년 6월호] 중국 장백현 발해 시대의 영광탑 답사기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16.06.14|조회수578 목록 댓글 0

    중국 장백현 발해 시대의 영광탑 답사기


    김형근



    발해 석등 앞에서 필자




    필자는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 조선족들과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에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로온 북경 중앙민족대학 교수를 시작으로 연변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인 장정애 교수를 비롯하여 전경 교수, 안호상 교수 등 여러 사람들과 뉴욕에서 만나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 후에도 연변대학교 총장들이 뉴욕을 방문하면 이들을 안내하는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1995년 처음 연길을 방문한 후에 한때는 매년 연길을 방문했지만 2010년을 마지막으로 한 동안은 방문하지 못했다. 잡지사 인력이 너무 부족해 편집 일 외에도 발송, 행사 준비 등으로 일도 많고 비용도 조달이 어려워 심리적으로 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연변을 방문하면  장정애 교수와 공안의 간부였던 장 교수 남편의 도움으로 일제시대 조선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용정을 비롯하여 연변근교의 중국 사찰들, 도문에 조선족에 의해 건설되던 사찰, 김정구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의 무대라고 하는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역인 두만강 유역도 아주 자세하게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백두산도 3차례나 올라갔고, 흑룡강성 목단강 유역까지도 가보았다.그리고 연길에서 차로 7-8 시간 걸리는 흑룡강성 동경성에 있는 ‘발해’ 당시 도읍이었던 상경성에 가서 발해 궁궐터와 발해 석등을 보았다.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한 국가 ‘발해’가 중국 흑룡강성에 지명으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던 필자는 이 천 년 세월을 넘어 꿋끗하게 원래 그 자리에 서있는  발해 석등이 인상이 너무 강렬하여 몇년 후 한 번 더 방문을 하였다.
    연변지역과 인연이 많은 한국의 유명스님은 수월스님과 용성스님이다. 경허스님의 제자인 수월스님은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로 도를 통한 스님으로 일제시대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입적한 스님이다. 용성스님은  일제시대 이곳에서 대각교당과 선농당을 건설해 방황하는 동포들의 돕는 활동을 하였다. 연길에는 신흥불당이라는 조선족들이 이용하는 법당이 있는데 여기 조사전에 수월스님과 용성스님의 영정이 걸려있다.  필자는 전에 연변을 방문할 때 3-4차례 이 신흥불당을 방문하였는데 이곳에서 한때 출가한 경험도 있고 가족들과 호주로 이민가서 살다가 연변에 와서 이 지역 불교포교 활동을 하던 지안법사를 만났다. 그로부터 연변 불교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길림성에 발행시대 탑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즉 발해시대 건축물이 2개가 있는데 한 개가 흑룡강성의 발해 석등이고 다른 건축물로 탑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곳은 차로 7~8 시간을 가야 하는 먼 곳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귀가 번쩍 트였다. . 그래서 언젠가는 그곳을 꼭 방문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 연길을 방문하지 못한 것이다.    
    지난 4월 5일 연길에 도착하여 몇 시간 보낸 후 오후 5시에 연길공항에서 비행기로 백두산 공항으로 갔다. 6년 만에 방문한 연변은 시내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상가 간판이 아주 잘 정리되어 있었다.

    연변대학교



    필자의 방문에는 장백현이 고향인 연변대학교 영문학과 김원빈군이 안내를 해 주었다. 그는 1994년 생으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일본어도 부전공으로 함께 공부를 한다고 한다. 장백현에서 태어나 조선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함께 졸업한 조선족 친구들은 60명인데 그 중 20명이 연변대학교로 함께 진학했다. 그의 부모들은 아직도 장백현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는장백현을 손바닥 처럼 알고 있었다. 그는 방학이면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친구들이 대부분 방학에 고향인 장백현으로 오기 때문에  헤어졌던 친구들을 만나는데 친구들을 만나면 형제처럼 반갑다고 한다. 그로부터 북한 탈북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시골에서 자란 탓인지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연길을 출발하여 1시간도 안되어 백두산 공항에 도착하였다. 4월이지만 공항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김원빈 학생이 미리 연락을 한 택시를 타고 장백현으로 출발하였다. 공항에서 장백현까지는 140km로 2시간 정도 가야한다. 택시는 장백현에서 온 차였다. 도로 포장은 대체적으로 잘되었지만 차량은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가끔 공사중이 곳이 나타났다. 저녁 8시 무렵에 장백현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장백조선족 자치현’인 것이다. 현이란 연길시 보다 작은 곳으로 한국으로 하면 군 정도 되는 것 같다. 길림성 안에 소수민족의 자치현이 3개 있다고 하는데 조선족 현은 이 장백현이 유일하다. 1958년 자치현이 되었다고 한다. 2년 후에는 60년이 되는 것이다. 인구가 대략 7~8 만 정도라고 하는데 조선족은 1만 정도라고 한다. 문제는 연변과 마찬가지로 조선족이 계속 줄고 있다고 한다.
    장백현에 도착하자 압록강변 도로에 장식해 놓은 한글 현수막이 캄캄한 어둠속에서 전기빛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장백현의 대부분의 간판은 한글이 조그만하게 위에 있고 그 밑에 크게 중국 한자로 써 있었다. 그 드넓은 중국 땅에  어느 기업의 로고나 광고 간판이 아니고 그 지역을 행사를 알리는 한글 현수막이 펄럭인다는 것은 보통 일은 아니다.
    필자는 저녁 식사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의 여행을 위한 안내자를 하는 김원빈 군은 20대 초반으로 식성이 아주 좋은 나이이기 때문에 그의 안내대로 따랐다. 채소 위주로 하는 식당으로 안내를 하였다. 김원빈 군은 연길시와 장백현의 차이를 여러가지로 필자에게 설명을 하였다. 장백현과 연길의 가장 큰 차이는 음식값의 차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싱싱한 채소라 맛도 좋고 양이 많고 값도 싸기 때문에 이 고향이 너무 좋다고 한다. 방학 때면 어머니가 음식을 많이 주어 개학에 연길을 가면 살이 빠지기 시작하여 학기 말쯤이면 살이 많이 빠진다고 한다. 필자도 대학시절 고향에 가서 방학내내 매일 대합을 먹고 살이 많이 오른 기억이 있다.

    장백현 식당 음식


    4월 6일 아침에 호텔을 나와 호텔 부근 산책을 하면서 조선족 초등학교를 방문하였다. 학생들이 등교를 하였는데 학교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약속이 안되어있어 안을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학교 바로 옆에 한글 간판으로 교회라는 간판이 보였다. 이곳에도 한국인들이 설립한 교회가 있는 것이다. 조그마한 소도시지만 아침 식사를 파는 식당들이 많았다. 부페 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음식과 반찬을 가져다 먹는데 계산은 사용한 그롯에 따라 한다.

    장백현 시내 모습


    장백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에 바탕을 둔 도시였다. 앞에는 압록강을 경계로 건너편이 북한 혜산시이다. 그리고 뒤에는 산이 있다. 탑산이라고 부르는 데 택시로 탑산 초입까지 갔고 산으로 약 30분 올라갔다. 초입에 최근에 중국 정부에서 건설한 큰 사찰이 보였다. 장백 영광사라고 하는데 최근에 건설한 것이고 아직도 공사중이었다.  김 원빈 학생에 의하면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 체육시간에 이 탑까지 뛰어가는 운동을 많이 했다고 한다. 산 정상에 올라 가보니 공원이었다. 공원에서 5-6명의 여성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찹은 산정상 공원에서 약 100미터 정도 거리에 있었다.
    필자에게 처음으로 이 탑을 알려준 지안 법사가 현재 연길 신흥불당에 없기 때문에 이 영광탑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하여  알아보았고 아래는 이를 바탕으로 정리한 글이다.

    이 탑의 원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광탑이란 이름을 갖게 된다. 1908년 5월 청나라 조정은 장봉대(張鳳台)를 파견하여 장백부(長白府)를 설치하기 위한 준비를 하게 함과 동시에 동북지역의 봉천성과 길림성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장봉대는 장백현에서 이 탑을 발견하고는 “노(魯)나라에 있었던  공자의 사당의 영광전 처럼전란을 겪으면서도 의연히 서 있다”하며 영광탑이라 명명하였고, 이때부터 ‘영광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름과는 달리 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면서 이 탑은 여러 차례 수리를 받게 된다. 명나라 때 탑 상부가 훼손된 것을 1936년에 보수한 기록이 있는가 하면, 중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1950년대 이후 최근까지 조사와 보수를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1980년대초에 발해시대의 탑으로 확인되었으며  특히 1988년에는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급의 문물보호단위인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선정되는데, 우리나라의 사적이나 국보처럼 국가차원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왕실의 비호아래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불교미술 또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불교가 성행하면서 많은 사원과 탑이 건립되었으리라 짐작되는데 현재 알려진 발해의 절터는 40여곳 정도이고, 탑은 12기 가량 된다. 그 중 9기는 목탑이고, 3기는 벽돌을 쌓아 만든 전탑이다. 아직 발해에서 석탑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영광탑, 정효공주탑, 마적달탑 같은 3기의 전탑은 다른 나라의 탑들과는 달리 무덤위에 세워진 묘탑이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묘탑은 승려의 시신을 화장한 후 수습한 사리를 봉안한 부도(浮屠)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발해의 묘탑은 성격이 조금 다르다. 우선 승려가 아닌 일반인의 시신을 화장하지 않은 채 지하에 매장하였고, 그 위에 전탑을 건립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매장형식은 다른 국가에선 보기 힘든 독특한 것으로 발해 매장형식의 독자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발해의 전탑이 묘탑이란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정효공주의 묘를 발굴하면서이다.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네 번째 딸인 정효공주의 묘는 1980년과 1981년 연변조선족자치구박물관이 발굴하였는데, 무덤안길에서 묘비가 하나 발견되었다. 정효공주는 발해 제3대 문왕 대흠무의 넷째 딸로, 792년에 사망하였다. .-법보신문 임석규 글 인용

    필자가 탑을 답사하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도 찾아왔으나 그들은 탑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마 이 도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에 많이 본 사람들인 모양이다. 전에 탑을 답사하고  쓴 많은 글에서 이 탑이  로마의 피사의 탑처럼 좀 기울어졌다고 했는데 피사의 탑은 오른 쪽으로 기울어졌는데 이 영광탑은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이 탑은 주변에 나무를 보호대를 삼아 심었고 또 낮은 울타리 있었다. 탑 앞에는 이 탑에 대한 설명서가 한글과 한자로 써 있었다. 그 설명은 아래와 같다.
    “령광탑은 당나라 발해시기(698-926년)에 쌓았으며 해발 869m의 산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평면정방형의 루각모양으로 이루어진 벽돌탑이다. 높이는 13m이며 도합 5층으로 되었다. 탑 의 몸체는 반반하면서도 소박해 보인다. 맨 아래층 처마밑 네 면의 복판에는 네모난 창살창문 이 있다. 령광탑의 모양과 구조는 서안 홍교사에 있는 당나라 때의 현장탑과 비슷하며 당나라 의 풍격을 갖고 있다. 이 탑은 발해시기의 문화와 건축물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력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
     “靈光塔爲唐代渤海時期(698-926年)所築. 坐落在海拔869米的山頂上. 爲一座平面呈方形的樓 閣式磚塔. 高約3米, 共五層. 塔身光平素朴. 底層檐下四面皆有紋飾花磚. 第二層至第五層四面 正中均有方形直欞窗. 其形制與西安興敎寺唐代玄奘塔相似. 具有唐代風格. 該塔對于硏究渤海時 期的文化和建築具有重要歷史價値.(표지석에는 약자로 되어 있음)
    서안 흥교사는 원측대사가 활동했던 절이고 현장은 당나라 시대 스님으로 인도를 방문하고 돌아와 대당서역기를 남긴스님으로 제자에는  원측과 규기등 많은 제자가 있었다.
    탑 주변은 화장실 등을 새로 건축 중이었고 관리인은 보이지 않았고 기념품 가게도 없었다.  탑에서 조그만 더 가서 앞을 보면 압록강을 경계로 있는 장백현과 혜산시가 한 눈에 보인다. 주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망 때문에 발해시기 이전부터 오랜 동안 여기가 군사적 요충지였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영광탑에서 탑을 1시간 정도 머무르면서 사진도 찍고 탑을 돌면서  위로 아내로 본 후 건너편을 보았다. 장백현과 북한 혜산시를 연결하는 다리가 하나 보였는데 오가는 차량이나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개 국경도시는 무역이 성행하고 문물이 교차하는 것이 통상적인 예인데 장백현과 혜산시를 연결하는 다리는 통행금지 시킨 다리처럼 보였다.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가 전에 처럼 긴밀하지 못하다는 뉴스를 접했지만 그 다리는 너무 썰렁하였다. 
    탑 답사를 마치고는 다시 장백현 시내로 내려와 점심 식사를 하였다. 낮에 본 장백현 시가는 새로운 건물도 많고 여러곳에서 공사를 하고 시장의 거래도 활기를 띄었다. 조선족 자치현이어서 대부분의 간판은 한글과 한자로 되어 있었다. 어느 곳에는 막걸리 간판도 있었는데 김원빈 학생은 얼마 전 까지도 없던 간판이라고 했다. 점심시간이라 고등학생들도 학교 밖으로 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있었다. 점심 식사는 김원빈 학생의 큰어머니가 경영하는 식당으로 갔다. 조그마한 식당이었지만 안에는 손님들이 아주 많았다.  손님이 아주 많아 김원빈 학생의 어머님도 점심에는 도와주러 와서 몇 시간 일을 돕는다고 한다. 꽁나물, 무우채, 나물, 두부 요리등이 나왔다. 녹두 전, 만두 비슷한 아주 빛깔 좋은 음식이 나왔다. 소도시의 인심을 보여주는 듯한 아주 푸짐한 음식이었다.
    식시가 끝난 후에는 압록강변을 걸었다. 강 저쪽으로 북한 혜산시의 북한 주택들을 뚜렷하게 보였고 군인들이 일하는 모습도 보였다. 강변 군데 군데 정자를 만들었고 이 정자에서 주로 남성들이 봄날의 따사로운 햇볕속에서 세상사를 이야기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중에 조선족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과는 자연스럽게 북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대부분 북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가 많았다. 그 조선족들에 의하면 전에는 혜산시에 자주 방문하여 놀다가 오기도 하였는데 이제는 가지 못한 지가 아주 오래되었다고 한다.
    장백현이 고향인 김원빈군의 안내를 받아서 가 본 영광탑은 천년 세월의 풍상을 견디고 의연히 서 있었다. 비록 몸체가 조금 기울었지만 그 기상의 늠늠함은 잃지 않고 있었다. 발해 시대에 건립된 영광탑이 서 있는 장백현이  발해 자손들인 조선족의 자치현으로 계속 남아 있기를 바라고 또 장백현과 혜산시 주민들이 많은 왕래를 하는 날이 빨리 돌아오기를 기원하면서 3일간 머물다가 다시 연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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