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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 게 시 판

법화경의 핵심(숭산 행원 스님)

작성자몰라요|작성시간17.01.04|조회수191 목록 댓글 0
중국 말로 법화경은 '실상묘법경(實相妙法經)이라고 부른다.
실상은 "참' 이라는 뜻이고 묘법은 "신비한 법문'이라는 뜻이다.
"참으로 신비한 법문'이라는 뜻이다.
 
법화경은 어떻게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어떻게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을 얻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법화경은 완벽한 정적의 마음을 얻는 것에 대해 가르친다.
사실 이것들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레 얻어야 할 것들도 아니다.
그러나 한 생각이 일어나면 우리는 본래 마음을 잃어버린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동안 여러분의 마음을 휙휙 훑고 지나가는
망상들을 쫓아가면 여러분과 나는 완벽하게 분리된다.
그러나 모든 생각을 끊어서 단지 이 말을 듣고 있는 것으로 돌아오면
완벽하게 우리는 하나가 된다.
생각에 대한 집념을 끊으면 내 말과 여러분이 듣고 있는 귀는 완벽하게 일치한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이 둘이 아니요,
그것이 이미 부처님이고 예수님이다.
 
이것은 한국 사람만이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미국이나 독일, 중국 사람만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남자만 경험하는 것도, 여자만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탕'!
나는 때때로 이것을 '원점'(primary point) 이라고 부른다.
 
몇 년 전 파리에 있을 때 프랑스 신부들이 나를 찾아 왔다.
우리는 차를 마시면서 불교와 기독교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얘기가 끝나갈 무렵, 일행 중 하나가 전날 나의 법문을 듣고
의문이 생겨 밤을 꼬박 새웠다고 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선사님께서는 '원점'이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원점과 하느님의 창조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나는 그때 지금처럼 테이블을 탕 쳤다.
그게 전부였다.
몇 초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그 신부님은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하느님의 창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단지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 테이블을 치는 것은 생각 이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부처님 이전입니다.
"탕!'
하느님의 창조 이전입니다.
당신이 그 지점을 볼 수 있다면 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신부님이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당신은 신을 볼 수 있습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신부님이 입고 계신 셔츠가 까만색이군요."
 
법화경은 바로 이 지점이 "탕!" 어떻게 우리의 본성이고 모든 현상의
본질인지 깨닫게 해준다.
또 이 경지를 완벽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
미래 생의 부처가 될 것이라고 한다.
아주 재미있는 대목이다.
그것은 어떤 다른 생에서 깨달음을 얻으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다음 생은 실제 다음 생이 아니다.
이것은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을 어떤 단어로 설명하기 위해 나온 구별일 뿐이다.
실제 우리는 바로 지금,
바로 이 장소가 아닌 때에 부처가 되지 못한다.
어떤 다른 장소, 어떤 다른 시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가 되고 싶으면 단지 수행하면 된다.
바로 지금 수행한다면 '다음 생'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된다.
"탕!'
여러분은 단지 이 순간을 가질 뿐이다.
"다음 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 뭔가를 하겠다는 마음이 이미 부처의 마음이다.
 
부처의 마음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미래의 어느 순간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안과 밖이 없이,
주체나 객체가 없는 하나가 되는 그 순간을 말한다.
오직 수행하라. 그러면 부처가 된다.
 
일본 일련종(日蓮宗)의 추종자들은 '나무묘법연화경'을 암송한다.
"나무묘법연화경,나무묘법연화경,나무묘법연화경'
이것이 일본의 법화경 제목이다.
그들은 이 주문을 열심히 외우면
아름다운 집과 훌륭한 아내를 얻는다고 믿는다.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것은 마치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다 해주는 도깨비 방망이의 진언 같다.
 
그런 수행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한마음'을 유지하는 것일 뿐이다.
뭔가 얻고 싶다면 이것은 좋은 방법이다.
그렇지만 올바른 불교 공부나 참선 수행은 어떤 것도 원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나무묘법연화경뿐만 아니라 모든 진언 수행의 최종 목표이다.
어떤 종류의 진언도 똑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 공의 마음을 유지할 것인가?
그것이 절대의 상태이며,
우리가 원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점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근본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
원인이 제거되면 우리의 조건이 변하고 다른 결과를 얻는다.
고통도 변할 것이고 그러면 자비심과 행복이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연기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어떻게 근본 원인을 제거할 것인가.
단지 하나의 마음을 가지면 된다.
뭔가를 할 때 그냥 하면 된다.
이 그냥 하는 마음에는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안과 밖이 하나가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우주에너지와 연결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원점이라고 부른다.
원점을 유지하면 천천히 근본 원인이 사라진다.
생각이 원인을 만들 뿐이다.
생각을 끊으면 원인은 태양열에 증발하는 물처럼 자연스레 사라진다.
 
열심히 수행하면 이것은 매우 쉽다.
그러나 자꾸 생각을 하면
그것은 우리의 업을 만들고 업은 태양을 가려
결국 근본 원인인 물은 증발할 수 없게 된다.
어떤 수행을 하든지 큰 물음을 가지고 그냥 해보라.
노력하는 마음과 큰 의혹을 가지면 어떤 종류의 수행이든
본성을 얻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오래 전 한국에는 석두(石頭)라는 이름의 스님이 계셨다.
돌 머리라는 뜻이다.
그는 아주 멍청했지만 대단한 노력가였다.
어느 날 석두는 스승에게 물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스승은 "즉심시불'(卽心是佛),즉 마음이 부처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석두는 이를 '짚신시불'이라고 잘못 알아들었다.
즉 짚신이 부처라고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3년 동안 오로지 '짚신이 부처라니, 이 말이 무슨 뜻이냐.
도저히 모르겠다." 고 묻고 또 물었다.그러나 그는 자신의 수행 방식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스승에게 따져 묻지 도 않았다.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직 매일 일상의 한가운데서 앉거나 일어서거나 먹거나
일하거나 오직 집중해서 이 질문을 속으로 묻고 또 물었다.
화두로 삼은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언덕에서 나무를 해가지고 오다
바위에 발을 찧었다.
지게 위 나무가 머리 위로 쏟아 지고 짚신 한 짝이 멀리 날아갔다.
순간 석두는 깨달음을 얻었다.
날아간 짚신과 그의 마음이 완전히 하나의 우주가 된 것이었다.
그 때 그는 그의 본성을 보았다.
그는 크게 웃었다.
"하 하 하"부처가 바로 짚신이구나".
그는 스승에게 달려가 소리쳤다.
"스승님, 스승님, 이제 부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됐습니다."
"오, 그래, 네가 깨달은 것을 설명해 보거라."
석두는 갑자기 짚신으로 스승의 머리를 한 대 때렸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그것뿐이냐?"
"내 짚신이 다 찢어졌습니다."
스승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웃어댔다.
"훌륭하다. 네가 깨달음을 얻었구나."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수행을 해서
오직 하나의 마음을 갖느냐 하는 것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오직 마음속에 한 가지 의문을 품고 수행을 하면 모든 것이 명확해질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뭔가를 하고 있을 때 그냥 하라.
이것이 법화경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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