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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滿洲國

작성자pong|작성시간17.07.23|조회수245 목록 댓글 0

만주국  滿洲國

 

 

1. 만주국 탄생의 배경

 

20세기 초 일본은 청일전쟁 후 연해주를 획득하여 군대를 진주시켰는데 당시 만주 전체의 장악을 꾀하던 러시아 제국의 남하정책은 일본의 국가안전보장에 최대의 위협이었다. 1900년에 러시아는 의화단 사건을 핑계로 만주를 점령하고 권익의 독점을 획책했다. 이에 일본은 미국과 함께 만주의 각국 개방을 주장하면서 영국과 동맹을 체결했다. (영일동맹)

 

결국 일본과 러시아 제국은 1904년부터 1905년에 걸쳐 러일전쟁을 벌여 고생 끝에 일본이 승리하여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조선반도의 확보와 요동반도의 조차권, 만주에서의 철도부설권을 얻어냈다. 그 후 일본은 처음 주장과 반대로 러시아와 타협하면서

만주의 권익을 독점하려 했기에 중국대륙에서 벌어지던 열강의 잇권다툼에서 미국의 반발을 초래했다.

 

이 상황에서 당시 일본에 체류중이던 포르투칼의 외교관이던 벤셀라우 모라에스는 <미일 양국은 가까운 시일 내에 무서운

경쟁상대가 되어 결판을 내어야 할 것이다. 광대한 중국대륙은 미국으로도 포기할 수 없고 일본도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물러설 수 없기에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 밖에 없다>라고 예언했다.

 

1917년에 제 1차 세계대전 중이던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소련 공산정부가 들어섰다. 일본은 시베리아에 출병하여

북만주에 있던 러시아 극동군의 내정간섭을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공산주의의 확대와 방어거점으로서의 만주의 중요성은

매우 높아져 <만주는 일본의 생명줄>이란 인식이 일본에선 강해졌다.

 

 

2. 만주국 건국이전 만주의 상황

 

만주는 청나라 시절부터 청조의 고향(여진족의 발상지)으로서 한족의 유입을 제한했지만 창 말기에 이르자 중국내륙의 유민들이 급속히 만주로 유입되었다. 이를 눈여겨 노린 자가 청말의 실력자인 위안스카이(원세개)로 그는 만주의 자기세력하를 꾀하여 러시아와 일본의 권익을 탈취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청조의 혼란과 위안스카이의 사망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위안스카이의 사후 만주에선 마적들의 우두머리인 장쭤린(張作霖)이 위안스카이가 임명한 봉천총독 두안지구이(段芝貴)를 추방하고 다른 군벌의 지지하에 세력을 확립했다.

만주를 일본의 생명줄로 여기던 관동군은 <만주왕>으로 불린 장쭤린을 지지하면서 일본의 권익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이율배반적인 장쭤린의 행동은 일본을 곤혹하게 만들었는데 더우기 중국내륙에선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이 전력을 모아 난징에서 북상하여(북벌) 군벌들을 차례로 괴멸시키자 그 영향력은 만주에까지 파급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20년 후반부터 관동군의 참모이던 이시하라 칸지는 만리장성 동쪽의 모든 만주를 일본의 영항하에 두어 소련과 중국 국민당의 침탈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3. 만주사변의 발발

 

1928년 5월, 만주왕 장쭤린은 베이징을 점령했지만 국민당 군에 패해 만주로 후퇴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수상은 장쭤린의 지지를 천명했지만 관동군의 고급참모이던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가 일본의 권익에 방해만 되는 장쭤린을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해 그를 살해했다. (장쭤린 폭살사건)

 

관동군은 자작극을 벌여 사실을 은폐하려 했지만 장쭤린의 아들인 장쉐량(張學良)에 의해 일본군이 저지른 짓임이 밝혀지자 그는 일본을 비난하면서 국민당 측으로 기울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장쉐량은 저항을 포기하고 만주에서 철수해 만주는 관동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또 당시 일본국내는 세계공황으로 인한 불경기가 심화되고 있을 때였는데 메이지 유신이후 급격히 불어난 인구문제 탓에

1890년 이후 미국 및 브라질로 이민을 보내 인구문제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1924년에 미국이 일본인 농민의 이민을 막아 많은 빈농을 구제하는 것이 일본의 시급한 문제였다.

 

그리하여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당시 와카츠키 레이지로 내각의 전쟁억재방책은 무너지고 국가경제와 실업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일본국내의 여론은 만주사변을 옹호하면서 더욱 강경하게 대륙진출을 정당화하는 목소리가 높아만 갔다.

 

 

4. 만주국의 탄생

 

1931년 9월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은 전 만주지역을 점령하고난 후인 1932년 2월에 관동군 각 사령관들이 봉천(현 심양)에 모여 만주의 지배책을 둘러싸고 토의를 벌였다. 이에 일본군이 직접 만주를 다스리는 것은 현지인의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고여겨 일본의 괴뢰국을 창설해 간접지배하는 형태로 다스려야 한다는 의견으로 모아졌다.

 

이에 장징후이(張景惠)를 위원장으로 하는 동북행정위원회(東北行政委員會)가 결성되어

2월 18일에 이 단체는 국민당 정부에 대해 공식적으로 동북지역의 각 성들이 분리독립한다는 것을 선포했다. 이에 원수로서 청조 마지막 황제이던 아이신주러우 푸이(溥儀)를 즉위시켜

1932년 3월 1일에 만주국의 탄생을 선언했다.

 

이에 연호는 대동(大同), 수도는 장춘(長春)이 결정되어 장춘은 다시 신칭(新京)으로 개명되었다. 그리고

1934년 3월 1일에 푸이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만주국은 제정국가가 되었다. 연호는 다시 강덕(康德)으로 변경되고 수상으로는 장징후이가 임명되었다.

 

 

5. 만주국의 인종구성

 

1908년 당시 만주의 인구는 1,583만명이었는데 만주국 건국직전인

1931년에는 3,000만명이 증가해 4,300만명이 되었다.

성비는 여성 100에 남성 123의 비율이어서 남성이 많은 것은 이민국가라는 측면이 강했다.

1934년 당시 만주의 인구는 약 3,088만명으로 만주인(한족, 만주족, 조선족)이 97%를 차지했다. 나머지는 일본인 및 러시아, 몽고인이었다.

 

이 중 만주인 속에는 약 68만명의 조선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측의 자료에 의하면

1940년 만주국의 전체 인구는 43,233,954명으로 나와 있는데 다른 통계에선 36,933,000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같은 차이는 드넓은 만주지역을 현재도 정확하게 인구숫자를 측정하기란 불가능한 것에 기인한다.

 

만주국의 공식언어는 중국어인 한어(漢語)였지만 그 외 조선어, 일본어, 몽고어, 러시아어도 혼용되었다.

 

 

6. 만주국 국민의 무국적 상태

 

만주국은 최후까지 국적법이 없었기 때문에 법적인 의미로 만주의 <국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적법이 제정되지 않은 배경은 2중 국적을 인전하지 않는 일본의 국적법 상, 일본인 이민자가 <일본계 만주국인>이 되면 일본국적을 포기해야 했는데

이것은 신규의 일본인 이민자들이 감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한편 조선인을 일본국민으로 취급했던 조선총독부의 정책상, 다른 국가의 국민으로 만들어 징병이나 징용을 하지 못하는 것을 막기위한 조치였다고도 생각된다.

 

 

7. 만주국 내의 일본인

 

1931년부터 1932년에 만주에는 약 59만명의 일본인이 거주했는데 이 중 10만명은 농민이었고 나머지는 군인이었다.

일본정부는 1936년부터 1956년까지 500먼명의 일본인 이주를 계획하여 1938년부터 1942년까지 20만명의 농촌 청년,

1936년부터 2만명의 가족이주자를 각각 만주로 보냈다. 이것은 일본이 만주에서의 제공권 및 제해권을 상실할 경우 중지될 예정이었다.

 

소련군이 전쟁말기에 만주로 침공했을 때 약 85만명의 일본인 이주자들이 포획되었는데 공무원과 군인을 제외한 일반인은 1947년까지 단계적으로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당시 만주국의 수도이던 신칭의 대동(大同)거리.

 

 

8. 만주국의 정치

 

만주국은 공식적으론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이념으로 하여 다민족국가인 미국을 모델로 해 건설되어 아시아의 다민족 공생국가를 천명했다. 오족협화는 일본인, 한인, 만주인, 조선인, 몽고인의 단결을 내세우며 국민국가를 만들며 왕도낙토는 만주국 황제를 중심으로 한 이상적인 국가정치를 의미했다.

 

만주국은 오족 이외에도 러시아 혁명당시 공산정권하의 소비에트를 탈출해 온 백계 러시아인도 받아들였다.

그 중에서 특히 볼세비키에게 패해 도망해 온 우크라이나인 세력에 만주국은 접촉해 반소운동을 꾀하면서 소련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의 열세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만주국의 지배층은 사실상 일본인 및 관동군의 인물이 대다수였지만 일본지배에 굴복한 조선인, 대만인 등을 한족보다 우위에 세워 <제 2의 일본인>이란 지위로 채용해 실제로 중간관료, 군인 등에서는 많은 조선인과 대만인이 채용되어 대만인 시제스(謝介石)는 신칭의 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9. 만주국의 국기 및 국가

 

만주국의 국기는 1928년 이전의 중화민국의 깃발이던 적, 청, 백, 흑, 황의 오색기를 기본으로 하여

1932년에 제작되었다. 색의 의미는 청색은 동방, 적색은 남방, 백색은 서방, 흑색은 북방, 황색은 중앙을 의미하는데 이는 중앙행정(황색)이 사방을 다스린다라는 의미였다.

 

만주국의 국장은 중국의 나라꽃인 매화꽃을 상징화했다. 그리고 군기는 만주국의 국기색을 위로 배열한 것을 사용했는데

군모에는 오각형의 별이 다섯가지 색으로 배치되었다. 

 

 

만주국의 국가(國歌)

 

神光開宇宙 表裏山河壯皇猷              신의 빛이 우주를 비추고 황제의 치세는 산하를 튼튼히 한다

帝德之隆 巍巍蕩蕩莫與儔                 높은 황제의 덕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

永受天祐兮 萬壽無疆薄海謳              영원히 하늘의 인도를 받으며 만수무강하리라

仰贊天業兮 輝煌日月侔                    하늘의 천명을 해낸다면 그 영광은 일월과 같으리라

 

 

 

10. 만주국의 행정 및 최고원수

 

만주국은 국가원수로는 집정(후에 황제), 의결기관인 참의부(參議府), 행정기관인 국무원(國務院), 사법기관인 법원,

입법기관인 입법원, 감찰기관인 감찰원이 조직되어 있었다. 만주국 총리가 실세인 국무원에는 총무청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국무원 총리를 보좌하는 기관이었지만 일본인 관리가 주체였기에 실질적으론 총무청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외 기관은 명목상의 기구에 불과해 입법원은 정식으로 개설되지도 않았다. 만주국의 최고 원수는 청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였지만 형식상의 원수에 불과했고 황위계승권도 일본천황과 관동군의 재가를 얻어야 한다는 조항이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11. 만주국의 외교관계

 

만주국은 사실상 일본군에 의한 괴뢰국이었기 때문에 국제연맹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만주국을 정식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며 일본을 비난했다. 이것은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는데 제 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일부 국가 및 일본과 친교관계에 있거나 지배하에 있던 국가들만이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당시 만주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는 추축국이던 독일과 이탈리아, 추축국의 일원인 태국, 헝가리, 폴란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핀란드였고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버마, 필리핀, 자유인도 임시정부, 몽고연합 자치정부도 만주국을 승인했다. 그리고 왕자오밍의 난징 중화민국 정부도 교류를 맺었다.

 

그 외엔 독일과 이탈리아의 영향력으로 바티칸이 수교했으며 남미의 엘 살바도르는 일본정부에 이어 두 번째로 만주국과 수교했는데 이것은 당시 엘 살바도르의 독재자이던 마르티네스 장군 개인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였다.

 

 

12. 만주국의 경제

 

만주국은 일본자본의 도입에 의한 중공업화가 추진되어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는 전쟁물자의 보급기지라는 측면에서 일본이 지원한 결과였다. 그리고 중일전쟁 이후 과중한 경제부담은 만주국 국민들의 불만요인이 되었다. 통화단위로는 만주국 원(圓)을 사용했으며 관동군의 법정통화였던 조선은행의 조선엔(朝鮮圓)도 사용되었다. 또 일본엔도 사용되기도 했다.

 

만주국의 교통수단으로는 남만주 철도회사(만철)가 세운 철도망이 있었으며 항공편으로는 만철의 자회사로 일본과 조선, 만주를 연결하는 만주항공이 있었다. 그리고 탄광, 인쇄, 농림, 축산의 대부분은 일본계 자금과 조직으로 운영되어 사실상 일본의 제 2 경제권이라 해도 무방했다.

 

 

13. 만주국의 군대

 

 

 

만주국군 장교(소위) 복장의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

 

 

 

1) 만주국 국군의 창설

 

1932년 4월 15일에 공포된 육해군 칙령에 의해 만주국에도 국군이 창설되었다. 처음엔 당시 군벌의 군대에 관동군의 고문을 두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국내의 치안 및 변방영해의 경비라는 명목으로 창설되었다. 1932년 9월 15일에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가 체결되자 만주국의 국방은 일본과 공동으로 진행한다는 조항에 의해 관동군의 주둔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이에 관동군과 관동군을 지원군으로 하는 만주국군이 성립했지만 대부분의 만주국 방어는 일본군이 부담했다.

 

2) 만주국 군대의 부대구성 (1932년 당시)

 

1. 군정부(軍政部) - 병력 130명, 중앙의 군정을 담당.

2. 도령 경비군(洮遼警備軍) - 병력 16,200명, 수도인 신칭 서북쪽 지역을 담당.

3. 봉천성 경비군(奉天省警備軍) - 병력 17,153명, 봉천성을 담당.

4. 길림성 경비군(吉林省警備軍) - 병력 44,692명, 길림성을 담당.

5. 흑룡강성 경비군(黑龍江省警備軍) - 병력 43,485명, 흑룡강성을 담당.

6. 흥안성 경비군(興安省警備軍) - 병력 12,921명, 흥안성을 담당.

7. 강방함대(江防艦隊) - 병력 392명, 흑룡강 및 우수리 강, 발해만 연안을 담당하는 해군병력.

 

이들 군은 1935년에 다시 제 1, 2, 3, 4, 5관구로 나뉘었으며 흥안성 경비군은 흥안성 동, 서, 남, 북 4지구로 다시 분할되었다.

이들 병력의 숫자는 큰 변함이 없었지만 일본해군의 지원책으로 인해 강방함대는 인원이 719명으로 늘어났다.

만주군에는 일본인 군사고문관이 있었으며 항해 및 전투기 조종사같은 전문요원 대부분은 일본군에서 차출되었다.

 

3) 만주군의 장교양성 교육시설

 

1939년에 수도 신칭에는 육군 군관학교가 설립되어 장교의 양성을 담당하게 되었다. 여기엔 만주계열 학생 외에도 일본인, 조선인, 대만인, 몽고인 등 다른 민족도 입학이 가능했다. 한편 제 1기 입학생도 중 일본인 학생은 172명이었다고 한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탓에 생도들 중에는 조선인 출신이 많았다.

 

이들 대부분은 제 2차 세계대전 후에 창설된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했기에 일본육군 출신자들이 한국군의 근간이 되었다.

또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 등 정치적으로 걸출한 인물도 있었다.

이중 백선엽은 1941년에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종전 뒤에 대한민국 국군의 참모총장이 되었으며 박정희는 1940년에 만주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1942년에 일본육사에 파견되어 57기로 졸업했다.

 

당시 만주에는 의사의 숫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만주국군 의학교가 설립되었었다. 이것은 일본의 육군 군의학교와는 달리 중학졸업자를 입학시켜 의학교육을 실시해 4년 후 군의소위로 임관시킨 것으로 사실상 의학전문학교였다. 이 건학사상은 후에 패전 후 일본의 방위의과대학 창설에도 이어졌다.

 

4) 만주군의 해산

 

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확충이 계속된 만주국 군대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괴뢰국가이던 군대였기에 사실상 관동군의 지배하에있는 제 2선급의 군대라 보급과 처우에 불만을 품은 자가 많았다고 한다. 때문에 노몬한 사건당시 보병 제 14단 제 1영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대전말기에 소련군이 침공해 오자 부대를 이탈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1945년 8월 8일에 황제 푸이가 퇴위를 선언하고 만주국이 소멸되자 만주국 국군도 정식으로 해산되었다.

만주국 고급군인의 대부분은 소련군의 포로가 된 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겨져 수용소로 보내져 처벌을 받았다.

또 중국인 군인들은 국공내전이 발생했을 때 각각 국민당 군과 공산당 군에 편입되기도 했다.

 

 

 

14. 만주국의 멸망

 

1945년 일본의 항복이 가까워진 8월 8일에 소련군은 일본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고 만주국으로 침공해왔다.

당시 만주국의 관동군 대부분은 남방으로 차출되었기에 방어에 충분한 병력과 장비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정예부대가 대부분 빠져나가 약체화된 관동군은 소련군에게 쉽게 무너져버려 8월 10일에 관동군 수뇌부들은 만주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혼란상황이 벌어진 만주국 국내에서 황제 푸이가 8월 8일에 황제직을 퇴위해 만주국은 사실상 소멸해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신칭으로 진공한 소련군은 푸이 및 만주국의 요인들을 포로로 잡았고 잔혹하게 다루며 수용소로 보냈다.

소련군 병사들은 시내로 진공하면서 살인과 약탈, 방화와 강간을 자행했는데 이러한 행위는 여러 문헌에 기록되었다.

 

한편 만주에 체류중이던 일본인 이주자들도 태반이 만주를 탈출했는데 탈출하던 도중 소련군에게 포위되어 살해당하는 갈근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피난도중 부모와 헤어진 일본인 고아들은 중국에 그대로 남겨져 후에 잔류일본인 중국고아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만주국은 공식적으로는 일본이 항복한 날인 8월 15일에 소멸했다. 이 날은 일본의 또다른 괴뢰국이던 몽고연합 자치정부가 소멸한 날이기도 하다. 현재 구 만주국의 대부분 지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 3성(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에 포함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및 중화민국(대만)에서는 역사에서 이를 다룰시 만주국이라 칭하지 않고 <괴뢰만주>라 역사책에 표기한다.

 

 

 

출처 : 고지마 노보루 <만주제국>, 1983년 문예춘추 발간. 사진은 상업적 사용이 제한된 공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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