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행문 >
실크로드기행 (23-마지막회)
터키공화국과 지중해
글 | 이치란 박사 (원 응 보검)
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아시아불교평화회의(ABCP 본부 몽골) 한국회장
국제불교연맹 이사(IBC 본부 인도)
동방불교대학 전 총장
한국불교신문 전 주필
현: 해동불교대학장
(www.haedongacademy.org)
중국 인도구법승들에 관심 갖고 시작했던 실크로드 여정… 상상 초월한 미지의 세계였다
터키 공화국(이원집정부제)은 인구 8천만 명을 갖는 중동과 유럽의 중간지대에 있는 나라이다. 중동이면서도 유럽에 가까운 국가이다. 터키 공화국은 무려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북서쪽으로는 불가리아, 서쪽은 그리스, 북동쪽은 조지아, 동쪽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남동쪽으로는 이라크, 시리아와 접하고 있으며, 북쪽에는 흑해가 위치하고 있다. 바다로는 마르마라 해, 다르다넬스 해협, 보스포르루스 해협을 끼고 있는데, 이 바다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로 두 대륙에 걸쳐 있다. 터키는 지중해와 흑해 사이에 있는 특이한 지형을 갖고 있으면서, 중동과 유럽의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터키는 역사적으로 유럽을 공격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유럽 세력의 경제적 식민지가 되기도 했으며, 현재도 유럽에 기대는 형국이 되고 있다. 한때 그리스 등 유럽을 지배했다는 자긍심만은 살아 있고,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어계 나라들의 형님 역할을 하고 있다. 유럽도 중동도 중앙아시아도 외면할 수 없는 지정학적 정치경제적 역사적 민족적 종교적 관계에 얽혀 있으면서, 내분까지 겪고 있는 고민이 많은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동로마인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리고, 서구문명의 출발지인 그리스를 식민지화 했던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국가이지만, 21세기 현재는 불안한 정국을 잘 수습해 가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1923년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지도로 민주주의, 세속주의를 받아들인 입헌 공화국으로 근대국가를 세웠다. 터키는 유럽 이사회, 북대서양 조약기구, OECD, WEOG(서유럽 및 기타그룹), G20와 같은 국제기구에 가입, 서방 세계와 점차 통합의 길을 걷고 있으면서 2005년에는 유럽 연합의 정회원국 가입 협상을 시작했다. 한편 터키는 이슬람 회의 기구(OIC)와 경제 협력 기구(ECO)에 가입하여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위시한 동양과도 문화, 정치, 경제, 산업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세계의 정치.경제 학자들은 터키를 지역 강국으로 간주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쿠데타를 신속하게 진압하고 관련자들을 대거 숙청하고 있다. 그러면서 배후를 미국에 자진망명중인 무함메드 페툴라 귤렌을 배후로 지목하고 미국정부에게 터키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2014년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이번 쿠데타의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정치적 반대파인 귤렌은 터키의 저명한 교육자이자 이슬람 사상가, 평화 운동가 및 저자로서 60여 권의 연구서를 저술하였고 20여 개 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2008년 포린 폴리시지가 운영한 공개 설문에서 세계 100대 지식인 중 최고 지성으로 선정되었다. 귤렌은 2013년 제17회 만해평화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터키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이다. 파무크(Ferit Orhan Pamuk, 1952~)는 터키의 소설가, 수필가로서,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이기도 하다. 포스트 모더니즘적 경향을 지향하고 있다. 2006년 10월 12일에 터키인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책은 58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2005년도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에 선정되었다.
터키는 1925년에는 여성들의 복장 개혁과 남녀평등교육을 시행하였으며, 이슬람력을 폐지하고 유럽식 그레고리력으로 대체했으며, 일부일처제를 확립한 바 있다. 1928년에 터키어의 아랍 문자 표기법을 폐기하고 로마자 표기법으로 변경하였고 1930년에는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다시 이슬람주의로 돌아가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터키의 이스탄불은 비잔틴제국 시대에 사실상 실크로드의 서쪽 종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리스나 서로마까지도 연장선상에서 봐야 하지만, 서쪽 중심지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었고,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콘스탄티노플로 모여들었다. 북아프리카의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 등지에서도 동로마인 콘스탄티노플로 집중했던 것이다. 실크로드라고 하면 메인로드가 중국 서안에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인데,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지역인 이란과 이라크 또한 중요한 중간지역이다. 지중해연안에 이르러서 시리아 레바논도 중요 거점이었다. 한 때는 사우디아라비아반도 또한 실크로드의 중점지역이었다. 서쪽 실크로드 선상에서 보는 지중해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중심이었고 모든 길은 동로마로 통하고 있었다. 천년왕국이었던 비잔틴 제국을 넘겨받은 오스만 튀르크는 그리스까지도 식민지화했다.
지중해 연안 터키 땅 자체가 그리스였다. 지금도 지중해에 가면, 터키에 바짝 붙어 있는 섬들은 전부 그리스에 속하는 도서(島嶼)들이다. 튀르크족들은 섬을 싫어했다. 유목민의 유전자가 있었기에 섬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하지만 육지 부분은 전부 자기들의 속령으로 삼
았다. 지중해는 한반도 면적의 100배 크기이다. 동쪽으로는 흑해가 있고, 서쪽으로는 아프리카와 스페인 사이의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면 대서양에 이르게 되는데, 해협의 길이는 불과 14km에 불과하다. 대항해시대 이전에 지중해는 큰 바다였다. 따라서 고대시대 지중해는 중요한 교역로였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페니키아, 카르타고, 그리스, 레반트(근동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로마, 무어인(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인), 튀르크 등 이 지역 여러 민족들이 물자와 다양한 문화를 주고받았다.
지중해를 로마인들은 ‘우리 바다(Mare Nostrum)’로 또는 ‘내해(Mare Internum)’로 불렀으며, 그리스어로 ‘내륙, 안쪽’이라는 뜻의 ‘메소게이오스(Μεσόγειος=가운데 땅)’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서에서는 ‘뒤쪽 바다’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여러 이름이 등장한다. 터키어에는 지중해를 ‘하얀 바다’로 칭하고, 아랍어에서도 ‘하얀 가운데 바다’로 불렀으며, 실크로드 시대에는 이슬람이나 아랍에서는 ‘로마(비잔티움제국)의 바다‘로 불렀다.
지중해는 어느 나라가 패권과 해상권을 장악하느냐에 따라서 이름도 다양하게 불리어왔고, 교역도 그 나라 중심으로 이루질 수밖에 없었다. 동서로마 분리 후, 동로마 시대에는 그리스까 지가 비잔티움제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그리스는 기원전 한때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인도
북부까지도 점령했던 고대시대의 강국이었으나 로마제국에 병합되고, 동로마제국인 비잔틴제국으로 천년을 지탱하면서 민주주의와 서양 철학, 올림픽, 서양 문학, 역사학, 정치학, 수많은 과학적ㆍ수학적 원리, 희극이나 비극 같은 서양 희곡 등을 창출한 서양 문명의 발상지이다. 이런 서양문명의 발상지가 비잔틴제국과 함께 오스만 튀르크의 유목민에게 통째로 넘어가는 비운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여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할 때, 수많은 그리스의 지식인들이 서유럽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서유럽의 르네상스는 이 지식인들이 고대 그리스의 지적유산을 전해줌으로써 가능했다고 한다. 이로써 서양문명의 발상지였던 그리스는 1821년부터 1829년까지 오스만 제국과의 독립전쟁을 할 때 까지 그리스는 역사에서 개별국가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리스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존속한 것은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인정한 국내 非 이슬람교도의 종교 자치체)제도에 의해서 그리스 정교를 믿는 본토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타지 사람과 섞이지 않고 결속을 유지하며 정체성을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스의 정체성 존속에서 그리스 교회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리스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기독교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가 설정된 이후, 그리스 지역 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재치권을 받고 있었으나, 1833년 그리스 국왕 오톤의 바이에른 관료들의 정치적 결정에 따라 그리스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독립하여 자치 교회가 되었다. 그리스 정교회의 독립은 185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승인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나는 실크로드를 추적하면서 실크로드의 서쪽 종점인 이스탄불에 와서 또 다른 거대한 세계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지중해였다. 지중해의 중심 국가는 그리스와 로마였지만, 이집트와 레반트(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등지)도 그냥 지나칠 지역이 아님을 인식하게 됐다. 실크로드의 직선 서쪽 끝이 이스탄불이지만, 실크로드 무역은 페르시아에서 아라비아 반도를 돌아서 레반트를 거쳐서 이스탄불로 향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랍은 부를 쌓았고 부를 바탕으로 한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슬람은 지중해 연안의 북아프리카 중동 인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국에 까지 퍼져 있다. 다시 지중해로 눈을 돌려보면, 그리스는 한 때 엄청난 제국이었다. 기원전 그리스가 인도에 남긴 유산은 대단했었다. 종교적으로도 그레코 불교가 탄생할 정도였다. 그리스 예술은 인도는 물론 중국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런 그리스였지만, 그리스는 로마에게 패권을 넘겼고, 로마제국은 지중해를 장악하고 인도와의 무역을 차지했다. 그리스가 개척했던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와의 무역을 로마제국은 계승했다. 동로마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실크로드의 센터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며, 기원전부터 이루어졌던 그리스-로마의 무역을 계승했기에 가능했다. 그레코-로마의 문화와 문물은 인도로 이동했고, 인도의 불교사상은 헬레니즘과 융합하면서 그레코-불교가 탄생했고, 페르시아의 파르티아는 이런 그레코 불교를 수용하고 용해해서 중앙아시아와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서 중국에 전해주어서 오늘날 동아시아 불교가 탄생하게 되는데 촉매역할을 했다.
이후 인도불교는 와한 계곡을 넘고 파미르를 넘어서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 나라들에 퍼져갔으며, 중국에 이르게 되었다. 비단 불교만이 아닌 경교 마니교 이슬람교까지 실크로드를 타고 이들 지역에 전달되었다. 실크로드 무역 최전성기였던 당나라 시대에 인도불교는 당나라로 물밀 듯이 밀려들어가서 인도 서역(중앙아시아)의 모든 경론(經論)이 한역되었다. 인도의 중기 대승밀교는 히말라야산맥을 넘어서 티베트에 전해졌고, 범어의 경론은 티베트어로 역경 되어서 장전(藏傳)불교로 집대성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중국의 서안에서 터키의 이스탄불은 물론이지만,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 레반트 이집트 그리스 로마까지 입체적으로 파악해야 동서 문명 교섭사의 전모가 확연해진다는 결론을 얻었다.
사실 실크로드기행은 필자에게 너무나 엄청난 주제였고, 힘든 리서치과제였다. 중국의 인도구법승들에 관심을 갖고 덤벼들었던 실크로드 여정이 이렇게 길고 엄청난 스케일이 되리라고는 처음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였다. 처음엔 중국 서안에서 출발하여 서역(중앙아시아)을 거쳐서 인도 정도에서 그치리라 계획했던 여정은 그리스까지 연장되었다. 다만 아쉽게 생각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아라비아 이집트 레반트 등지를 건너뛴 점이다. 그리고 실크로드가 육로의 초원이나 사막의 오아시스로만이 아닌 해상실크로드와 5대 지선이 있는데, 해상실크로드와 5대 지선은 부분적으로 답사하고 리서치를 했기에 언젠가 정리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내가 주로 관심을 가졌던 서역불교 그레코-불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윤곽을 파악했지만, 앞으로 더욱더 심화된 연구가 필요하다고 다짐하면서, 그리스 아테네에서 한동안 지낸 것을 정말 추억으로 생각한다. 그레코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리스 사상과 철학을 이해해야 함으로 아테네에서 시간을 가진 것은 값진 일이었다. 실크로드기행은 이 정도 선에서 일단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치란 해동 세계 불교 선림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