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글 조성내
시인, 컬럼비아 의대 임상 조교수
공양기도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어린 아이들한테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아느냐고 물어보면, 나를 멍하니 쳐다볼 것이다. 이 사람이 미쳤나? 왜 밥 먹는 곳에, 와서 이런 엉터리 같은 질문을 다 하지? 어린이들은, 배가 고플 때면 엄마가 밥을 갖다 준다. 맛있게 먹기만 하는 된다. 어린이들은 음식이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면, 어머니한테서 왔다고 말할 것이다.
어른들은 다르다. 음식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돈이 가져다주었지”하고 말할 것이다. 돈은 어디서 왔는데? 그러면 “매일 일해서 내가 번 돈이지” 하고 말할 것이다. 여기까지만 생각한다.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의 사고방식은 보통 사람들하고 다르다. 기독교인들은 음식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음식을 먹을 때는 꼭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교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여럿이서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습관적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두 손을 한데 모으고서, 신(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다.
불자들은 어떤가? 절에서 식사할 때 불자들은 공양기도를 드린다. 그런데 집에서 밤을 먹을 때도 공양기도를 들이는 불자들이 많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식당에서 여럿이서 밥을 먹을 때, 경건한 마음으로 공양기도를 드리는 불자들은 아직 보지 못했다.
서로 원수를 갚는 일이거든
<불교대사전>에, “오백생원(五百生怨)이란 말이 있다, 옛날 한 여자가 있었다. 아이를 땅에 두고 다른 곳에 연(緣)을 찾아갔다. 돌아와서 보니 아이가 없다.
이리가 자기 아이를 먹어버렸다. 그 여자는 이리에게 찾아가서 말했다.
“이리야, 어찌하여 내 아이를 잡아먹었느냐”
이리가 대답했다.
“네가 나를 원망하는 구나. 지난 5백 생(五百生)을 사는 동안 일찍이 네가 내 아이를 잡아먹었었다. 내가 이제 너 아이를 죽이는 것이 원수를 서로 갚는 일이거늘 왜 성을 내느냐”
전생 5백 생에서는 네가 내 아이를 잡아먹었었다.
이제는 내가 너의 아이를 잡아먹는 차례라는 것이다.
이게 인과응보 때문일까? 이게 자연법칙일까? 내가 이번에 너를 죽이고, 또 죽이고, 항상 내가 너를 죽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다음번에는 네가 나를 죽이게 된다는 말일까. 오래오래 살다보면 공평해진다는 것일까?
이 세상을 돌고 돈다
<별역잡아함경>(제16권)에 보면. 비구들이 세존에게 “저희들이 나고 죽음에 있으면서 몸에서 나왔던 피가 저 항아 물과 넷 바다 물보다도 많다고 봅니다.” 라고 말했다. 우리가 지난 수없는 전생을 살아오면서, 나고 죽고, 잡아먹고 잡아먹으면서, 우리가 흘린 피가 태평양이나 대서양 물보다도 더 많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비구들에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누구라도 그대들의 부모· 형제· 자매· 처자· 권속 그리고 화상과 아사리와 높이는 이가 되지 않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또 이 세 상에서 한 중생도 그대들을 살해하거나 그대들에게 원수가 되지 않는 이도 없으며, 또한 단 한 중생도 그대들의 몸과 살을 먹지 아니한 이가 없어서, 그와 같이 끝없이 나고 죽고 했느니라.”
다시 말하면, 우리는 지난 수없는 전생을 살아오면서, 먹어보지 않는 사람이나 먹어보지 않는 동물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다 먹어보았고 모든 동물들도 다 먹어보았다는 것이다. 이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현실은 괴로운 것이다, 그러니 전생에 나를 잡아먹었던 동물이나 사람을, 지금 이 세상에서 내가 이네들은 음식으로써 먹고 있다는 것이다.
공양기도는 사색(思索)하게 한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얼마나 사색적(思索的)인가! 얼마나 철학적이고 얼마나 종교적인 물음인가?
우리가 소고기를 먹는다고 가정해보자. 우리가 직접 소를 죽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돈을 들고 간다.
정육점에서 소고기 한 조각을 산다. 수많은 소고기들 중에, 왜 하필이면 바로 이 소고기가 내 밥상위에 올라와 있단 말인가? 밥상위의 소고기 중에도, 어떤 소고기는 자식들이 먹는다. 어떤 소고기는 아내가 먹는다. 그리고 이 중에서 내가 먹는 소고기는 따로 있다. 소고기의 소도 한 때는 살아 있었다. 소가 풀을 뜯어먹으면서, 어느 훗날, 나와 내 가족의 불고기가 되기 위해서, 풀을 뜯어먹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인연으로, 그 소가 지금 내가 먹고 있는 바로 내 밥상위에 올라와 나의 음식이 되었단 말일까?
전생의 자기 몸뚱이
사람이 죽는다. 땅에 묻힌다. 벌레가 먹는다. 벌레가 새끼를 낳는다. 새끼들이 여기저기 퍼진다. 동시에 시체는 서서히 썩는다. 땅속에 스며든다. 이게 풀의 거름이다. 풀이 자란다. 풀의 씨앗이 바람에 불리어 여기저기 사방에 퍼진다. 소가 풀을 뜯어먹는다.
우리는 쇠고기를 먹는다. 자기 밥상 위에 놓인 쇠고기는, 먼 전생의 내 몸뚱이에서 자란 풀을 먹었을런지도 모른다. 만약 먹었다면, 나이 밥상위의 쇠고기는 전생의 내 몸뚱이의 일부인 것이다. 내가 먹는 음식은 내 전생의 내 몸뚱이의 일부를, 혹은 내 가족의 몸뚱이의 일부를 먹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서로 엉키고 섞이어 있다고 믿고 있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욕심이 인간을 괴롭힌다. 보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심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그날그날 열심히 일하다보면 그에 상응한 돈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려고 욕심을 부린다. 남을 속인다. 도둑질을 한다. 그러면서 부정한 돈을 벌려고 한다. 그런데 공양기도에서는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라”고 했다. 여기서 온갖 욕심을 버리라고 했지, 매일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지 말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 말씀대로, 가족도 부양하고 국가에 세금도 내고, 친구들에게 따뜻한 공양도 대접해준다. 스님들을 위해 보시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회에 기증도 하라고 부처는 말씀하셨다.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이 음식도, 한때는 살아있었다. 살아 있었을 당시, 행복하게 장수하고 싶어 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에 와서는 나의 음식이 되어있다. 나는 이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다.
비록 내가 직접 죽인 것은 아니고, 이미 죽어 있는 것을 식품점에서 샀지만, 그래도 한 때는 살아 있었던 것이니까, 한때는 살아있었던 것을 먹으니까, 간접적인 살생이라고 볼 수는 있다. 그렇다면 먹으면서 항상 죄의식을 느끼면서 먹어야 하는가?
낚시꾼이나 사냥꾼들은 자기가 잡은 먹이를 먹을 때마다, 죄의식을 느끼기는커녕, 자신들이 직접 잡았다고 해서 오히려 승리감을 가지고 자랑스럽게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이분들은 살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불교인들은 아니다. 그래서 이해할만 하다.
그런데 부처님도 매일 음식을 잡수셨다. 잡수시면서 죄의식을 느끼면서 잡수셨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불경에서 읽어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도 살기 위해서는, 죄의식 없이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공양기도문에서,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라고 돼 있다. 부끄러움으로 끝나는 일인가?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내가 무슨 권리가 있다고?
남의 생명을 먹을 수가 있단 말인가. 없다. 없는데 먹는다. 왜 먹어야 하는가?
살아있는 자들은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는 것은 정상이고 정당화되어 있는가 보다.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우리 불교인뿐만 아니라, 무한하게 긴 과거부터, 우리는 태어나고 죽고, 생사를 반복해오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병이 들어 아픈 것도 고통이다. 죽기 싫은 데 죽어야만 하는 것도 고통이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도를 닦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부처님은 <별역잡아함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질은 바로 무상(無常)한 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곧 ‘내’가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없다면 곧 내 것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 진실을 알고 보면 바른 지혜로 관찰하면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또한 다시 그와 같으니라.
그러므로 비구는 만약 물질이 잠시 동안 있더라도 과거와 미래와 현재 그리고 안과 바깥과 가까운 데와 먼데에서도 이 모두 ‘나’와 내 것이 없나니, 그와 같은 것만이 실지에 알맞게 바른 소견으로 본 것이니라.”
내 몸뚱이는, 실은 내가 먹고 있는 음식물의 집합체이다. 몸뚱이는 내 말을 안 듣는다. 내가 늙지 말라고 했으면 안 늙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말을 듣지 않고 이 몸뚱이는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몸뚱이는 내 것이 아니다. 이 몸뚱이는 또한 나 자신도 아니다. 그렇다면? 몸뚱이는 누구일까?
음식을 먹고 있는 이 몸뚱이는 누구일까? 누가 몸뚱이를 소유하고 있을까. 도대체 내가 누구이고 이 몸뚱이의 소유자는 누구인가를 알아보고 싶지 않으신가? 알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바로 불교인들이다.
불교의 궁극의 목표는, 도를 닦아서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열반의 세계, ‘참나’의 세계는, 공의 세계이다. 색(色)이 없는 세계이다. 수·상·행·식(受相行識)도 없는 경지이다. 안이비설신의도 색성향미촉법도 없는 경지이다. 이런 열반의 세계에서는 살아도 먹지 않으면서 살아있는 삶인 것이다. 먹지 않는다는 말은, 더 이상 살생하지 않고,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불교의 공양기도는, 우리에게 우리가 매일 먹고 있는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사색하게 해준다. 그리고 먹어야 하는 이유는, 첫째는 살기 위해서 이고, 둘째는 도를 닦기 위해서 이다. 도는 어떻게 해야 닦을 수 있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내 스스로가 매일 수행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