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자유 게 시 판

고려 흙수저 신돈의 죽음 1371년(고려 공민 20)

작성자challenze|작성시간23.12.04|조회수123 목록 댓글 0

고려 흙수저 신돈의 죽음 1371년(고려 공민 20)

 

공민왕의 개혁정책과 신돈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hm/view.do?levelId=hm_053_0010

--------------

'선을 넘는 녀석들'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와 관련된 석탑?!

우리나라 최초의 대리석 탑 '경천사 십층석탑'

 

https://enews.imbc.com/M/Detail/289883

---------------

승려 흙수저 신돈[辛旽/?~1371]

 

https://blog.naver.com/oneplusone21/223152592974

------------

의견;

승려 흙수저 신돈은 백성을 위하고,

상류층 권력자 선비들에게는 눈에 가시가 되었다.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백성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으나

변질된 그의 만행으로 죽음에 이르게된다.

 

한국에도 개혁이 필요하다.

 

어느 정치인이 국민과 나라를 위해 개혁을 할 것인가?

누가 썩은 정치인들 [부동산으로 재산이나 불리고, 주식투자나하고,.. 친일파 망국정치를하는] 이런 것들을 제거 시킬까?

누가 친일파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나라를 개혁 할것인가?

 

누가 사형제도를 부활시켜

묻지마 살인자들을 사형에 처할것인가?

 

긴 제목으로 불교교리에만 집착하는, 현실에 아무 도움이 안되는 글만 올리는 보수 금바위 새끼는 아니다.

---------------

신돈은 공민왕이 개혁 정치를 위해 등용한 인물로 ‘개혁자’라는 평가와 ‘요승’이라는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개혁자라고 보는 쪽에서는 강제로 노비가 된 평민들을 노비에서 해방한 것과 ‘전민변정도감’ 설치를 통해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정책을 폈던 점을 강조하는 반면,

요승이라는 근거로는 과도한 권력 욕심, 최악의 처신, 불교 축제와 제사를 열기 위해 자주 일으킨 백성 수탈, 정도가 심한 부녀자 희롱과 겁탈 등이 제기되고 있다.

 

고려 말 공민왕 때 개혁정치를 담당하였던 승려 신돈은 본관이 영산이며 속성은 신이며 법명은 편조인데 돈[旽]은 집권 후에 퇴속해 고친 이름이라고 하며 호는 왕이 내린 법호는 ‘청한거사’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으며 다만 영산에 무덤이 있었다는 정도이고

어머니는 계성현 옥천사 사비라고 한다.

 

어려서 승려가 되었지만 모계 때문에 신분적으로 천한 위치에 있어 산방에 거처했다.

그러다가 왕의 측근인 김원명의 추천으로 공민왕을 처음 만나게 되어 궁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공민왕 자신이 독실하게 불교를 신봉하였고 신돈 또한 총명해 왕의 신임을 받고 사부로서 국정을 맡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국정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정세운 같은 그를 배척하던 인물들이 사라진 다음에야 정치의 표면에 나설 수 있었다. 신돈이 정계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지 3개월째 되는 때부터다.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뒤 공민왕이 정치에 뜻을 잃자 신돈이 공민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정치 전면에 나섰다.

이때 그는 법명인 ‘편조’[遍照]를 버리고 환속해 ‘신돈’으로 개명했다.

왕의 신임을 받게 된 신돈은 1365년 12월, ‘고려 개혁’의 핵심 인사로서 등용된다.

 

신돈의 집권은 1365년[공민왕 14] 5월, 공민왕이 그를 사부로 삼고 국정에 대해 자문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승경은 신돈을 ‘나라를 어지럽힐’ 인물이라 비난하고 정세운은 그를 요승이라 하여 죽이려는 등 그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고, 이에 왕은 그를 피신시켰다.

이후 그를 반대하던 자들이 죽은 후 신돈은 다시 공민왕을 찾아와 궁 안에 거처하며 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 결과 신하들이 왕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통로는 차단되고 실질적인 권력은 신돈 개인에게 집중되었다.

이러한 신돈의 ‘집권’은 신돈의 정치적 욕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공민왕의 강력한 명령과 의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민왕은 세신대족과 초야신진, 유생이 서로 연결되어 당파를 만드는 것이 개혁을 막고 있다는 인식 하에 이들과 관계가 없는, 세상으로부터 독립한 사람인 신돈을 등용해 당대의 폐단을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신돈이 집권한 후, 공민왕은 그를 통해 왕권으로 제압하기 힘들 정도로 성장해 있던 정치세력들을 숙청하고 여타 정치세력들에 대해서도 그들을 국왕을 중심으로 결집시키기 위한 대대적 개편작업을 단행했다.

그리고 대규모 숙청이 단행된 후인

1365년[공민왕 14] 7월, 신돈은 ‘진평후’에 봉해졌으며,

1366년[공민왕 15] 5월에는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판사가 되어 권세가들이 탈점한 토지와 노비를 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전민변정사업은 이전 시기에도 실시되었지만,

이때는 대대적인 세신대족 숙청 이후 행해진 것이기에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 개혁은 상층계급의 반감을 샀고, 왕의 신임을 기화로 점차 오만해져서 방탕과 음란을 일삼았으므로 점점 배척당하게 되었다.

1366년에 간관 정추와 이존오 등이 탄핵을 하다가 도리어 폄축을 가했으며

1367년 10월에는 오인택․경천홍․김원명 등이 제거하려고 하자 장류를 내렸으며

1368년 10월에도 김정․김흥조․김제안 등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장류되던 도중에 죽여 버렸다. 그리고 그는 기거하던 기현의 집에서 독립한 1367년부터는 처첩을 거느리고 아이를 낳고 주색에 빠져 비난이 높아졌다.

 

이로 인해 점점 신돈의 정치에 불만을 품는 세력이 등장했는데 우선 신돈 자신이 키워낸 신진사대부 세력이 가장 먼저 그를 불신했다.

신돈은 정도전의 스승이자 좌주인 유숙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그를 죽였는데, 그가 지은 시를 볼 때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하여 그를 죽였다. 유숙은 고려 말 학식이 매우 뛰어나 이제현, 홍언박, 이색 등과 더불어 공민왕 시절 손꼽히던 대학자였고, 고려 말에 초기 신진사대부의 주축이었다.

 

유숙의 죽음으로 인해 정도전을 비롯해 많은 백성들이 슬퍼하였고, 이로 인해 문생들과 성균관 유생들의 분노를 샀으며 정도전의 경우는 신돈을 가장 먼저 비판했다. 무관 측 핵심 인사였던 최영마저도 그를 싫어했으며 사실상 신돈 자신과 이춘부 같은 소수의 파당 빼고는 모두가 적이었다. 애초에 적을 많이 만들 수밖에 없는 위치였는데 신돈은 본인 스스로가 부패했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표적이 되었다.

 

공민왕은 자기 심복이라 할지라도 그 권세가 너무 강해지면 제거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신돈이 사심관제를 부활시켜 5도 사심관이 되려는 야망을 키우자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던 공민왕의 생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결국 공민왕에게 제거되리라 예측한 신돈은 1371년에 그의 일당과 함께 왕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결국 신돈은 공민왕에게 숙청당하기 전에 왕을 시해하여 선수를 치려다가 자신의 밑에서 문객으로 지내던 선부의랑 이인의 고발로 실각을 당했으며, 역모죄로 유배를 떠났다.

그 뒤 이틀 만에 임박을 신돈에게 보내어 죄상을 따지고 목을 베고 사지를 찢어 사방에 돌리고 서울의 동문에 목을 내달았다. 그의 두 살 난 아들도 죽였으며 신돈의 충실한 부하였던 기현, 이춘부, 이운목 등도 죽였다. 이 사건으로 목이 잘린 사람이 20여 명이고 유배를 당한 사람이 14명이었다.

 

이로써 신돈의 개혁정책은 끝났고 신돈에 의해 쫓겨났던 벼슬아치들이 조정으로 돌아왔다. 최영․안우경․이성계․경복흥[경천흥] 등 무장세력과 이색․백문보 등 온건개혁을 지향하는 신진유학자들이 대거 등용되었는데 이들이 새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