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근본불교┃ 4. 중도설 - 단상중도

작성자염화미소|작성시간08.04.19|조회수344 목록 댓글 1

 

   4. 중도설

 

         단상중도

    사람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일까, 죽으면 그만일까? 이러한 의문은 '자아'가 일시적으로든 영속적으로든 실재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다. '자아'가 실체성이 없는 허망한 것임을 깨달은 세존은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견해를 상견常見이라고 부르고, 육신이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단견斷見이라고 불러 배척했다.

     

    <잡아함 300 경>에서는 이러한 모순대립을 떠난 단상중도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자기가 지은 것을 자기가 받는다고 하면 상견常見에 따지고, 남이 지은 것을 남이 받는다고 하면 단견斷見에 빠진다. 의미있고 진리를 이야기하는 주장은 이들 두 모순 대립(二邊)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 법이니, 소위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남이라.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모이며,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멸하는 것이니라.

     

    자기가 지은 것을 자기가 받는다는 것은 이 생에서 어떤 업을 지은 사람이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다음 세상에 가서 자기가 지은 업의 과보를 받는다는 뜻이고, 남이 지은 것을 남이 받는다는 것은 이 생에서 업을 지은 사람은 죽으면 사라지고 그 사람이 지은 업의 과보는 다음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받는다는 의미이다.

     

    세존은 이러한 두 가지 서로 모순된 생각은 사견邪見이므로 버려야 하며, 의미 있는 진실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연기법이라고 주장한다. 세존은 왜 '우리는 죽으면 그만인가, 그렇지 않으면 영혼은 죽지 않고 다음 세상에 가서 태어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십이연기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문제에 대한 논의는 하지 말고 괴로움을 벗어나는 수행에나 전념하자는 의도에서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세존은 이 문제를 도외시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답으로 십이연기를 이야기한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의심은 사견에서 비롯된 허망한 생각이다. 그리고 연기법은 세존께서 깨달은 인간과 세계의 실상을 보여 주는 진리이다. 인간과 세계의 실상을 보여 주는 연기법을 이해하게 되면 그러한 허망한 의심은 사라진다.

     

    단견과 상견은 모두 이전에 살펴보았던 당시의 외도들의 견해이다. 외도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아의 존재를 인정한다. 바라문교에서는 상주불멸하는 '아트만'을 자아라고 주장하고, 자이나교에서는 전지전능한 '명아' 가 자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물론적 요소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러 요소가 일시적으로 결합해 있는 몸이 우리의 자아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외도들은 영원하게 존재하든 일시적으로 존재하든 '자아는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시간적으로 존속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존재하는 자아가 죽은 후에도 변함없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견해가 상견이고, 현생 동안은 존재하지만 죽으면 사라진다는 견해가 단견이다.

     

    그러나 세존은 '시간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자아'는 무지한 중생들의 생각 속에만 있을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시간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자아' 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자아는 영원한 것인가, 일시적인 것인가?' 라는 물음은 마치 '토끼의 뿔은 한 개 인가 두 개인가?' 라는 물음과 같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십이연기는 상견과 단견이라는 무명에 휩싸인 중생들이 어떻게 거짓된 '자아'를 만들어서 생사윤회의 괴로움을 겪고 있는가를 밝혀주는 교리이다. 중생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외부에 있고, 그 세계 속에 자신과는 별개의 중생들이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 가운데서 중생들은 '육신'을 '자아'라고 생각하거나, '육신과는 다른 죽지 않는 영혼'이 있다고 믿고 이것을 '자아'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허망한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십이연기의 무명無明이다.

    중생들은 무명의 상태에서 자기들이 제멋대로 꾸며놓은 '자아'를 중심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십이연기의 행行이다.

     

    거짓되고 허망한 '자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중생들의 의식이 형성된다. 우리의 의식은 태어나면서부터 일정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의식을 형성시킨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동양 사람의 의식구조와 서양 사람의 의식구조는 같지 않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환경과 다른 삶을 살았기 대문에 달라진 것이다. 이렇게 삶에 의해 의식이 형성된다는 의미에서 행行을 연하여 식識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의식이 다르면 보이는 세상이 달라지고, 이렇게 저마다 다른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운데 '자아'와 '세계' 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고집하면서, 세상에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중생이며, 이러한 중생들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십이연기이다.따라서 이러한 사실, 즉 십이연기를 깨달은 사람은 결코 상견과 단견에 빠지지 않는다. 단상중도는 이와 같이 십이연기를 깨달아서 단견과 상견에 빠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대원거사 | 작성시간 12.02.02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