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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불교┃ 4. 중도설 - 유무중도

작성자염화미소|작성시간08.04.19|조회수736 목록 댓글 1

 

   4. 중도설

 

         유무중도

    유무중도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중도를 총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작타작, 단상, 일이의 모순대립은 근본적으로는 유무의 모순대립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은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다는 주장은 죽지 않고 존재하는 영혼이 있으므로 자아는 상주한다는 상견常見이며, 동시에 영혼과 육신은 다른 존재라고 보는 견해이다.

     

    한편 남이 짓고 남이 받는다는 주장은 영혼과 육신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상주하는 영혼은 없고 육신이 죽으면 '자아'는 단멸한다는 단견斷見이다. 결국 상주불멸하는 '자아'의 유무에 의해 상견과 단견이 모순 대립하고, 영혼과 육신에 대한 상반된 견해의 대립이 있다. 따라서 유무중도는 자작타작중도, 단상중도, 일이중도를 총괄하는 중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존은 외도의 모든 사상을 <증일아함 유무품有無品>에서 다음과 같이 유무有無 2견二見을 분류하고 있다.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두 견해를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두 견해인가? 유견有見과 무견無見을 두 견해라고 말한다.

    만약 어떤 사문과 바라문이 이 두 견해를 익히고 외워도 마지막에 가서는 그 법을 따를 수 없을 때, 그 이유를 여실하게 알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곧 사문도 아니고 바라문도 아니다. 사문에서 사문의 법을 어기고, 바라문에서 바라문의 법을 어기게 되므로, 이 사문과 바라문은 결국 자신들이 주장하는 열반을 스스로 증득하여 그 경계에서 노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문과 바라문이 이 두 견해를 배우고 외운다 할지라도 이것은 버려야 한다고 알아서 버리고, 버려야 하는 이유를 여실하게 안다면, 이 사람은 곧 사문의 행을 지니고 있는 사문이며, 바라문의 행을 알고 있는 바라문으로서 자신이 열반을 증득하여 그 경계에서 스스로 노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이 두 견해를 배우고 익혀서는 안 된다. 마땅히 남김없이 버려야 한다."

     

    유견有見과 무견無見은 '자아'가 현세에만 존재하는가, 과거세와 미래세에도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립된 견해이다. 만약 '자아'가 과거세에도 있었고, 현세에도 있고, 미래세에도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유견이고, 현세에는 있으나 과거세에는 없었고, 미래세에도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무견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에세 과거세와 미래세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유견이고, 현세만 있을 뿐 과거세나 미래세는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무견이다.

     

    현세에 '자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생이나 내세가 있는가 없는가, 즉 '자아'는 전생부터 존재해서 현생을 거쳐서 내세로 가는 것인지, 그렇지 않고 현생에서만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아마 전생이나 내세에 대하여 갖가지 주장을 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상주불멸하는 자아'가 있느냐 없느냐의 두 가지 견해, 즉 유무有無 이견二見에 속할 것이다. 세존이 이야기하는 유무 이견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며 유무중도는 이러한 모순된 두 견해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윤회를 이야기하는 불교에서는 '상주불멸하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존은 이것은 상견이며 유견이라고 배척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없다는 견해를 지지하지 않고, 이것은 단견이며 무견이라고 해서 역시 배척하고 있다. 세존은 왜 이렇게 모든 견해를 물리치고 있는 것일까?

     

    <잡아함 301경> 에서 세존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세간世間은 유有와 무無 두 가지에 의존하나니 유와 무는 보이거나 들리거나 생각한 것(所觸)을 취한 것이다. 보이거나 들리거나 생각한 것을 취하기 때문에 유有에 의지하기도 하고 무無에 의지하기도 한다.

     

    만약 이 취함이 없다면, 마음이 경계에 묶여 경계를 취하지도 않고, 경계에 머물지도 않고, '자아'를 제멋대로 꾸며내지도 않고, 괴로움이 생기면 생기는 것에 대하여, 멸하면 멸하는 것에 대하여 의혹이 없이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도 능히 알 수가 있다. 이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하며, 이것을 이름하여 여래가 시설한 정견이라고 한다.

     

    그 까닭은 세간이 생기는 것(집기하는 것, 모여 일어나는 것)을 여실하고 바르게 보아 안다면 세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세간이 멸하는 것을 여실하게 바르게 보아 안다면 세간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래는 모순 대립하는 두 변을 떠나 중도에서 이야기하나니, 소위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큰 괴로움의 덩어리가 생기며,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하여..... 내지 큰 괴로움의 덩어리가 멸하는 것이다.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모두 '상주불멸하는 영혼으로서의 자아' 가 있다는 생각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거나, 그런 것은 없고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자기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모르는 채 그 생각을 고집하고 있다. 세존은 그러한 생각이 우리가 눈 귀, 코, 혀, 몸, 마음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나는 가운데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생각된 것- 이들을 세존은 경계라고 부른다- 가운데서 자기의 마음에 드는 것을 취하여 저마다 달리 '자아'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세상 사람들은 연기법에 무지하여 '거짓된 나'를 꾸며놓고, 그 '거짓된 나' 가 상주불멸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죽으면 그만이다고 생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경계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이런 경계에 끌리지 않을 뿐 아니라, 거짓된 나를 꾸미지도 않기 때문에, 거짓된 나로 인해서 생기는 생사의 괴로움이 생기는 과정과 없어지는 과정을 아무 의혹없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세존은 이것을 정견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으며, 이것이 십이연기이다.

     

    세존은 세간이 생기는 것과 멸하는 것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보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세존의 이야기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세존은 우리가 어떻게 세상이 생기고 멸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세존이 이야기하는 세간은 산이나 강이나 바다나 지구나 우주가 아니다. 이 우주가 생기고 없어지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렇게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을 보라고 할 리는 만무하다.

     

    세간이란 "이 세계와 나는 별개의 존재이다. 나는 나와는 별개의 존재인 세계에 태어나서 죽는 존재이다. 이렇게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 나는 상주불멸하는 존재이거나 죽으면 그만인 존재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간이 생기는 것과 멸하는 것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보라는 세존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러한 생각이 생기고 멸하는 것을 잘 살펴보라는 말인 것이다.

     

    세존의 충고대로 우리의 이러한 생각을 살펴보자. 만약 우리의 생각이 진실이라면 나와는 별개의 존재인 세계가 나의 외부에 있을 것이고, 그 세계 속에서 태어나 죽는 나는 상주불멸하는 존재이거나, 죽으면 그만인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아니라면 '세계와 나'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왜 우리의 외부에 나와는 별개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눈을 통해 보이고, 귀를 통해 들리고, 코를 통해 냄새가 맡아지고, 혀를 통해 맛이 느껴지고, 몸을 통해 무엇인가가 만져지고, 마음을 통해 무엇인가가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보이고 들리고 인식되는 것은 밖에 있는 '세계' 이고,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은 안에 있는 '자아' 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안이비설신의는 六內入處이고, 보이고, 들리고, 생각되는 색성향미촉법은 六外入處이다. 이것이 十二入處인데, 이 책의 6장 십이입처설에서 살펴보겠지만, 십이입처는 모두가 우리의 마음이다. 따라서 세계와 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나와 세계가 별개의 존재라는 생각이나, 그 생각에서 비롯된 유견과 무견은 모두 잘못된 생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우리가 우리의 참모습을 알지 못할 때는 반드시 일어나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생각이 있으면 우리에게 '나와 '세계' 가 별개의 존재로 나타난다. 이렇게 '나와 세계' 가 별개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것을 세존은 '세간'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세존은 이 세간이 나타나는 것을 여실하게 보게 되면 '세간'은 비록 그것이 진실된 모습은 아닐지라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므로 없다고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와 같이 세간이 생기는 것을 여실하게 보아 안다면 '세간'은 허망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허망한 세간을 멸하기 위해 수행할 것이다. 이런 수행을 통해 무명을 없애고 우리의 참모습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잘못된 생각에 의해 생긴 세간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 사라짐과 동시에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세존은 세간이 사라지는 것을 여실하게 보게 되면 세간의 진실된 모습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있다고 할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세존은 이런 의미에서 세간이 생기고 멸하는 것을 여실하게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세존은 이와 같이 세간이 생기고 멸하는 것을 여실하게 보고, 유무 이견이 허망한 세간에 집착할 때 생긴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집착을 버림으로써 유무 이견을 떠나 중도에 설 수 있었다. 중도란 허망한 생각을 집착하지 않고, 세간이 생기고 멸하는 것을 여실하게 보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렇게 세간이 생기고 멸하는 것을 여실하게 보는 중도에서 이야기한 것이 세간의 실상을 밝힌 십이연기이다.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이렇게 모든 허망한 생각이 차례로 일어나서 괴로움 덩어리인 '나라는 허망한 생각'이 일어나 생로병사의 온갖 괴로움이 있게 되고, 무명을 없애면 허망한 생각들이 차례로 사라져서 '나라는 허망한 생각' 이 사라져 생로병사의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 이것이 세존이 우리에게 가르친 중도이고 정견이다. 세존의 가르침은 모두 이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세존의 가르침이 명료하게 이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 도리를 이해하기 위하여 세존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해야 한다. 말만 들어도 깨닫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세존은 우리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수행의 방법을 가르쳤다. 중도 수행, 다시 말해서 팔정도가 바로 세존이 가르쳐 준 세간을 멸하여 생사에서 벗어나는 출세간의 길이다.

     

    이와 같이 중도는 이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 세존은 이론적으로 중도로 십이연기를 이야기하고, 다시 실천적 중도로 팔정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수행법을 이야기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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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대원거사 | 작성시간 12.02.02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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