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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불교┃ 5. 업설과 연기설 - 무아와 업보

작성자염화미소|작성시간08.04.19|조회수189 목록 댓글 1

 

   5. 업설과 연기설

 

         무아와 업보

    세존은 업보를 인정하였지만 불멸의 자아는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불교의 업설은 무아설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잡아함 335 경>에서 세존은 무아와 업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겠다.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으며, 좋은 의미가 있고, 순일하게 청정함이 가득하며 범행梵行이 청백淸白한 법으로서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제일 근본이 되는 空을 이야기한 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잘 듣고 바르게 사유하라. 그대들을 위하여 이야기하겠다.

     

    어떤 것이 '제일의공경'인가? 비구들이여, 안眼(보는 자아)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眼(보는 자아)은 부실하게 생기며, 생기면 남음 없이 없어진다.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업을 짓고 보를 받는 자아)는 없는 것이다. 이 음陰(오온)이 사라지면 다른 음陰이 상속한다. 그러나 속수법俗數法은 제외된다. 이, 비, 설, 신, 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속수법은 제외된다.

     

    속수법이란 '이것이 있는 곳에는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집기集起한다. 그리고 '이것이 없는 곳에는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질 때 저것이 사라진다'는 것으로서 무명이 사라지면 행이 사라지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사라진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제일의공경'이라고 부른다.

     

    <제일의공경>이라는 경의 이름이 시사하듯이 이 경은 공空의 의미를 밝힌 경이다. 세존은 이 경에서 업보는 있으나 업을 짓고 보를 받는 행위의 주체로서의 자아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보는 자아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 자아가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본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보는 나'를 의식하며, 이러한 의식을 토대로 '자아'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보는 나'를 볼 수 없고, '듣는 나'를 들을 수 없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나'를 우리는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부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보기 때문에 '눈', 듣기 때문에 '귀',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라고 불린다. 이 모든 것은 그(아트만: 自我)의 활동에 대한 이름들일 뿐이다.

     

    이러한 우파니샤드의 견해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눈이 사물을 본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아'가 눈을 통해 사물을 본다고 생각한다. 우파니샤드의 철학자들은 눈, 귀 등을 통해 사물을 지각하는 자아를 '아트만'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들은 "볼 때 보는 자를 볼 수 없고, 들을 때 듣는 자를 들을 수 없고, 생각할 때 생각하는 자를 생각할 수 없고, 알 때 아는 자를 알 수 없으나 그 모든 것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트만'이다"라고 주장했다. '아트만'은 불멸의 존재로서 "보이지 않으나 보는 자요, 들리지 않으나 듣는 자요, 마음에 생각할 수 없으나 생각하는 자요, 알 수 없으나 아는 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세존은 <제일의공경>에서 우파니샤드에서 주장하는 '아트만'과 같은 '자아'를 비판한 것이다. 과연 우파니샤드에서 이야기하는 '자아'는 실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보고, 듣고, 생각할 때 이러한 행위의 주체로서 '자아'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자아를  찾아보면 우리에게 관찰되는 것은 행위하는 자아가 아니라 지각, 즉 보고 들음으로써 생성된 느낌 뿐이다. 이런 느낌이 보고, 듣는 '자아'의 실체이다. 즉 '볼 때' 우리에게 '보는 자'가 있다는 생각이 나타나며, 이 생각을 '자아'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는 자'는 보지 않을 때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만약 볼 때는 나타나고, 보지 않을 때는 사라지는 '보는 자'가 '자아'로서 실재한다면, 그 '자아'는 보기 전에는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볼 때는 나타나고, 보지 않을 때는 다시 그곳으로 사라져야 할 것이다. '자아'가 나타날 때 오는 곳과 사라질 때 가는 곳이 과연 존재하는가?

     

    '보는 자(眼)'가 볼 때 온 곳이 없이 나타나고, 보지 않을 때 간 곳이 없이 사라진다면 그러한 '보는 자'는 실체성이 없는 존재이다. 여기에서 세존은 단언한다. 보는 행위(業)와 그 결과 나타나는 지각(報)은 분명히 있지만 '보는 자'로서의 자아(作者)는 없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無我이며 공空이다. 연기설에 기초한 무아설과 공사상은 바로 불교의 업설業說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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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대원거사 | 작성시간 12.02.04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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