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번역물

[2022년 8월호]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 (3) / 김재성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2.12.27|조회수109 목록 댓글 0

 

< 번역 >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 (3)

 

 


번역 / 김재성
능인대학교 대학원 대학교 명상심리학과 조교수

 

 

 

 

본지는 5.6월호 부터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에 대한 글을 소개한 책 ‘THE LIFE OF NYANATILOKA THERA, THE BIOGRAPHY OF A WESTERN BUDDHIST PIONEER’을 번역 소개한다. 번역자는 서울에 있는 능인대학원대학교 명상 심리학과 김재성 조교수이다.

 

                                                                                                               김재성

 

Nyanatiloka 스님(1878~1957)은 현대 세계에서 불교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자 최초의 유럽대륙 출신의 불교 승려였다. 본명은 안톤(Anton Walther Florus Gueth)이며, 음악을 전공하던 소년 시절부터 영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프랑스에서 작곡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마친 후, 1902년에 불교 승려가 되기 위해 인도를 거쳐 스리랑카로 가게 되었다. 25세가 되던 1903년, 스리랑카에 도착했지만 영국인 불교 승려인 아난다 메떼야 비구를 만나가 위해 버마(미얀마)로 가서 그해 가을 출가하여 사미가 되었다. 그리고 1904년 초에 비구계를 받았고 법명을 ‘삼계(三界)를 아는 자’라는 의미의 냐나띨로까Nyanatiloka로 받았다. 버마에서 빨리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빨리어와 빨리 문헌에 대한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1905년에 스리랑카로 갔다. 2년 가까이 스리랑카에 머물면서 빨리어 공부와 부정관, 죽음명상을 수행했다. 1906년 말에 앙굿따라 니까야의 번역을 위해서 버마로 가게된다. 그리고 1906년에 첫 번째 저작인 <붓다의 말씀>을 독일어로 출판하였다. 1907년에 빨리어로 버마 사람들에게 사성제를 법문했고, 버마어와 빨리어에 능통한 통역자가 버마말로 통역하였다. 이후,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를 다니며 불교를 전하였고, 1911년에 스리랑카로 돌아와서 도단두와의 호수 한가운데 있는 버려진 섬에 Island Hermitage를 만들어 지내게 된다. 이후 이곳을 중심을 스님은 많은 서양인 제자들을 양성했다, 
이 책은 원래 스리랑카 캔디에 있는 ‘불자출판협회-Buddhist Publication Society Inc. 에서 출판되었다. 그런데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의 출판물에 대한 모든 책의 한국어 출판권은 ‘고요한 소리’에 있다. 본지는 ‘고요한소리’와 한국어 번역에 대한 저작권 계약을 맺었는데 ‘고요한 소리’ 회주 활성 스님께서는 무료로 계약을 해 주셨다. 
서양인으로 120년 전인 1903년에 출가하였지만 냐나띨로까 스님은  세계 1차 대전 2차 대전을 겪으면서 단지 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영국정부에 의해서 스리랑카에서 추방되기도 하고, 수용소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때에도 그는 경전 번역을 했다고 한다. 서양인 스님으로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에 유럽과 스리랑카와 미얀마 등에서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수행과 경전 번역을 하고, 제자들을 길러낸 감동적인 내용이 가득한 이 책을 독자들의 많은 애독을 바란다. ---편집자 주 

 

 

1부 독일의 불교
 

발터 페르시안, 1931년
 
독일의 거의 모든 불교도는 불교의 근본 형태인 '테라와다'를 지지하지만, 가르침의 세부적인 점에 대한 견해가 상당히 다를 수 있으며 실제로 종종 그러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가 아시아 불교 공동체의 어떤 전법 활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문학을 통해 독일에 도입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양한 종류의 상당히 많은 순수 문학 모음집은 독일인들에게 불교 사상을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불교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독일 철학은 이미 불교 사상으로 가득 차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미 지난 세기의 처음 30년 동안, 열린 열정으로 붓다의 종교를 옹호했고, 이로써 독일 안팎에서 불교의 전파자가 되었다. 그는 불교를 가장 완벽한 종교로 이상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비관주의적"이며 무신론적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다.

 

냐나띨로까 스님

 

          쇼펜하우어                                                                                                막스 뮐러


그에게 신약성경의 기독교는 인도 정신적이며, 따라서 인도 기원으로 보였다. "실제로는 유대교가 아니라 불교와 브라만교가 정신과 경향에서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 종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정신과 윤리적 경향이지 신화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기독교 교리가 이 두 고대 종교에서 어떻게든 파생되었다는 확고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가 그런 말을 한 후, 불교의 내적 우월성과 압도적인 수의 추종자 때문에 그가 불교를 지상에서 가장 숭고한 종교로 여겼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쇼펜하우어를 통해 유행하게 된 우파니샤드Upanishads의 페르시아어 번역 오프네카트Oupnekat가 프랑스어로 번역된 이후, 불교에 관한 논문과 기사의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여기에서 그 저술들에서 북부, 특히 티베트와 중국의 자료가 독점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학자인 J. J. 슈미트Schmidt가 불교를 브라만교 이전 시대에 두었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한다. 쇼펜하우어에게조차 불교와 브라만교 사이에 뚜렷한 구별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불교와 브라만교의 체계적인 통합에 불과하다. 그의 윤리는 불교적이지만 그의 형이상학은 브라만교적이다.
불교에 대한 쾌펜Koeppen의 기념비적인 독일어 저작(1859)은 전적으로 부탄, 네팔 등의 인도 북부 지방의 출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저작에서 저자는 불교 윤리를 에너지(노력)가 아닌 부정적, 즉 포기의 도덕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불교 분야에서 가장 지칠 줄 모르는 선구자 중 한 명인 옥스포드 대학의 위대한 독일 학자 막스 뮬러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1869년 킬Kiel에서 열린 문헌학 학술회의에서 뮬러는 처음으로 불교가 허무주의적이라는 생각에 맞서 싸웠고 불교와 상키야Sankhya 철학이 엄격하게 분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다음 수십 년 동안 인도북부 출처의 영향을 받아, 불교에 대한 신비로운 개념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밀교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 필립 메일렌더Philip Mailaender는 1876년 <해탈의 철학> The Philosophy of Deliverance이 출판된 다음 날 스스로 총을 쏘아 목숨을 끊었다.

 

리하르트 바그너


그러나 학문적, 철학적 세계는 불교 사상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불교 지혜의 심오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예술가 중 한 명이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이다. 가장 깊은 내면의 필요 때문에 바그너는 인도의 해탈의 교리를 붙잡았다. 그는 마틸드 베센동크Mathilde Wesendonck에게 보낸 편지(1859년 2월 22일)에서 "내가 어떻게 본능적으로 불교도가 되었는지 알잖아요.“라고 썼다.
가르침의 다양한 점을 바그너가 납득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기의 우울한 50년대에 태어나 그의 삶의 더 행복한 시기인 말년에도 상당히 지배적이 된 그의 큰 열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1856년 5월 16일, 바그너는 오페라 '승리자(The Victor)', 즉 붓다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30년이 지난 그가 죽은 후, 대략적인 스케치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불교적 세계관에서 그는 쇼펜하우어의 편에 서있다. 바그너는 후기 작품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관점을 아주 공개적으로 따르고 있다. 그의 불교 정신의 가장 큰 특징은 "신들의 여명"의 두 가지 결론이다. 처음에 브룬힐덴Brunhilden의 노래는 매우 낙관적으로 끝났고 다음 구절에서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쁨과 슬픔 속의 축복
오직 사랑만이 줄 수 있네.
 
그런 다음 낙관주의는 사랑 자체도 화라는 불교적 통찰로 바뀌었습니다. 북유럽-독일의 발키르Valkyr는 불교 지혜의 마지막 완성을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내가 없애려고 것을 그대는 아는가?
욕망의 집에서 나는 떠나네.
영원히 빈집을 떠난다.
 
끊임없는 생성의 열린 문
내 뒤에서 닫아버리네:
가장 신성하고 선택된 땅으로
소원과 허영심으로부터 멀리 있는 곳,
 
세계로의 이주의 끝까지.
영원히 재생에서 벗어나네
아는 사람은 잘 안다네.
 
영원한 것들의 축복에 찬 종점.
내가 어떻게 찾았는지 그대는 아는지?
 
애도하는 사랑의 가장 깊은 슬픔
나는 눈을 떴다네
세상의 끝을 나는 보았네.
 
쇼펜하우어를 통해 첫 번째 자극을 받은, 불교에 대한 이러한 열광은 에드아드 폰 하르트만Eduard von Hartmann의 무의식의 철학이 불교의 비관주의와 금욕주의적 비관주의가 일종의 영웅적 비관주의라고 선언했을 때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 이렇게 대중화된 비관주의는 지난 세기의 80년대에 출판된 비관적 서정시에 대한 세 종류의 큰 독일어 선집에서 증언한 바와 같이 문학, 특히 서정시에서도 유행이 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한다. 영어로 번역된 그들의 제목은 옷토 켄너Otto Kenner의 비관주의 가사집Pessimistic Song-book, 막스 셀링Max Selling의 비관주의 세계 개념 자료Sources of Pessimistic World-conception, 페레우스Fereus의 세계의 비탄의 목소리Voices of the World-woe이다.
 
동시에 불교적 향방에 대한 또 다른 충동은 비록 그 자신은 불교도가 아니었지만 올덴베르히Oldenberg의 저작인 붓다, 그의 가르침Buddha, seine Lehre 등에 의해 제시되었다. 1881년에 출판된 이 책은 당시의 어떤 책보다 독일에서 불교의 급속한 대중화에 기여했다. 붓다의 인격과 가르침에 대한 고도의 예술적 묘사는 비판적 명료성뿐만 아니라 그 스타일에 있어서도 탁월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올덴베르히는 불교가 전체적으로 윤리적이며 모든 형이상학적 사변과 이론이 붓다에 의해 거부되었음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나아가 그는 불교도에게 윤리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올덴베르히에 따르면 불교 도덕은 확실히 자기중심적이고 부정적이며 조용하다. 그러나 그가 막스 뮬러와 마찬가지로 비관적이라는 일반적인 비난에 맞서 자신을 변호한다는 점을 언급해야 한다.
철학자 니체(Nietzsche)조차도 자신이 헬레니스트이지만 그의 안티그리스도 Antichrist에서 불교가 기독교보다 백 배는 더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불교는 우리가 역사상 유일하게 아는 실증주의적 종교이다."

 

올덴베르희


그 시절에 독일 불교계는 기독교에 대한 공개적인 투쟁으로 변했다. "독일 불교도" 테오도르 슐체(Theodor Schultze)가 영어로 번역한 법구경Dhammapada(1885)은 이미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논쟁은 정확하게 말해서 이미 루돌프 세이델(Rudolf Seydel)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그는 기독교 복음이 유대교가 아닌 모든 것, 특히 그들의 시적인 부분이 불교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가장 폭넓은 관심을 끌었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유명한 독일 장군의 아내인 마틸데 루덴도르프(Mathilde Ludendorff)가 그녀의 저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해방(Deliverance from Jesus Christ)에서 강력하게 옹호하는 이론이다. <계속>
metta  & sati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