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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물

[2022년 9,10월호]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 (4) / 김재성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2.12.28|조회수99 목록 댓글 0

< 번역 >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 (4)

 


번역 / 김재성
능인대학교 대학원 대학교 명상심리학과 조교수

 

 


본지는 5.6월호 부터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에 대한 글을 소개한 책 ‘THE LIFE OF NYANATILOKA THERA, THE BIOGRAPHY OF A WESTERN BUDDHIST PIONEER’을 번역 소개한다. 번역자는 서울에 있는 능인대학원대학교 명상 심리학과 김재성 조교수이다.

 

김재성                                                                                                        

Nyanatiloka 스님(1878~1957)은 현대 세계에서 불교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자 최초의 유럽대륙 출신의 불교 승려였다. 본명은 안톤(Anton Walther Florus Gueth)이며, 음악을 전공하던 소년 시절부터 영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프랑스에서 작곡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마친 후, 1902년에 불교 승려가 되기 위해 인도를 거쳐 스리랑카로 가게 되었다. 25세가 되던 1903년, 스리랑카에 도착했지만 영국인 불교 승려인 아난다 메떼야 비구를 만나가 위해 버마(미얀마)로 가서 그해 가을 출가하여 사미가 되었다. 그리고 1904년 초에 비구계를 받았고 법명을 ‘삼계(三界)를 아는 자’라는 의미의 냐나띨로까Nyanatiloka로 받았다. 버마에서 빨리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빨리어와 빨리 문헌에 대한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1905년에 스리랑카로 갔다. 2년 가까이 스리랑카에 머물면서 빨리어 공부와 부정관, 죽음명상을 수행했다. 1906년 말에 앙굿따라 니까야의 번역을 위해서 버마로 가게된다. 그리고 1906년에 첫 번째 저작인 <붓다의 말씀>을 독일어로 출판하였다. 1907년에 빨리어로 버마 사람들에게 사성제를 법문했고, 버마어와 빨리어에 능통한 통역자가 버마말로 통역하였다. 이후,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를 다니며 불교를 전하였고, 1911년에 스리랑카로 돌아와서 도단두와의 호수 한가운데 있는 버려진 섬에 Island Hermitage를 만들어 지내게 된다. 이후 이곳을 중심을 스님은 많은 서양인 제자들을 양성했다, 
이 책은 원래 스리랑카 캔디에 있는 ‘불자출판협회-Buddhist Publication Society Inc. 에서 출판되었다. 그런데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의 출판물에 대한 모든 책의 한국어 출판권은 ‘고요한 소리’에 있다. 본지는 ‘고요한소리’와 한국어 번역에 대한 저작권 계약을 맺었는데 ‘고요한 소리’ 회주 활성 스님께서는 무료로 계약을 해 주셨다. 
서양인으로 120년 전인 1903년에 출가하였지만 냐나띨로까 스님은  세계 1차 대전 2차 대전을 겪으면서 단지 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영국정부에 의해서 스리랑카에서 추방되기도 하고, 수용소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때에도 그는 경전 번역을 했다고 한다. 서양인 스님으로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에 유럽과 스리랑카와 미얀마 등에서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수행과 경전 번역을 하고, 제자들을 길러낸 감동적인 내용이 가득한 이 책을 독자들의 많은 애독을 바란다. ---편집자 주 

 

 


1부 독일의 불교
 

발터 페르시안, 1931년
 

 

냐나띨로까 스님


위에 언급한, 불교에 대한 뛰어난 사상가이자 열렬한 투사인 슐츠Schultze는 인도-유럽 문화의 영역 안에서 종교적 마음의 미래의 재건을 위한 발효물로서 <베단타와 불교>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더욱이 슐츠는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독실한 어린이 같은 경건과 애정이 불교에 없다고 불평한, 유명한 인도학자 레오폴트 폰 슈뢰더의 공격에 맞서 불교를 옹호했지만, 반면에 슐츠는 바로 거기에 불교의 우월성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슐츠는 오늘날 기독교를 단지 이름뿐인 종교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불교를 무신론이라고 부르는 대신 불교의 신으로부터 자유로움을 강조한다. 
이기적인 기독교의 사랑 대신에 그는 불교의 자애(maitri, metta) 즉 모든 중생에 대한 보편적인 선한 의지의 감정을 옹호했다. 그는 예수가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을 거두면서, 기독교는 어린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믿음이라고 주장하지만, 오늘날의 성숙한 사람에게는 불교만이 만족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낙원은 주관적으로 이상적이며 어린이에게만 적합하지만, 불교의 열반은 성숙한 마음에 평화를 줄 수 있는 객관적으로 실재적인 형이상학이다. 
이 붓다되기(깨닫기) 운동은 예수회 달만Dahlmann이라는 가장 가혹한 상대를 만났다. 달만은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올덴베르히와 막스 뮬러가 옹호한, 소위 불교의 약한 측면을 다시 공격했다. 그와 다른 사람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독일에서 점점 더 많은 기반을 확보했다. 

 

칼 자이덴슈튀커


과학적 탐구와 함께 불교 사상은 독일인의 종교적 욕구를 통해 점점 더 퍼졌다. 아시아 국가의 불교 공동체의 자극과 격려 없이도 기독교에서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보다 불교에서 종교적 감정에 대해 더 큰 만족을 느끼는 독일인이 많이 있다. 그들은 지성인 계층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투쟁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자신의 힘든 직업적 노동 외에도 종종 집중적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공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편으로 신지학, 신비주의, 염세주의 또는 소위 응접실-불교와 세상의 삶을 포기하고 노숙자의 고귀한 길을 단호하게 따르고 있는 존경할 만한 영웅적인 사람들을 잘 구별해야 한다.
그리고 독실하고 올곧은 평신도들이 있으며, 부처님과 그의 교리에 대한 깊은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집에는 명상하는 붓다의 평화로운 이미지가 영예의 자리를 차지하고, 많은 기독교 가정에는 십자가에서 고통받는 구세주의 이미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처음에는 불교에 대한 독일인의 대부분의 저술이 대승불교에 기반했지만, 당시 독일인들은 아시아 남부 국가들에서 따랐던 원래의 테라와다 불교에 더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을 언급할 수 있다.
그 무렵 리차드 바그너 챔피언인 안젤로 노이만Angelo Neumann의 재능 있는 아들인 칼 유진 노이만Karl Eugen Neumann에 의해 분량이 작은 불교 선집이 출판되었고(1892), 1년 후에는 그의 법구경Dhammapada 번역이 출판되었다. 인도 철학과 빠알리어를 공부한 후 노이만은 당시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불교 문헌 번역가가 되었다. 그의 불교 경전 번역은 기념비적인 일생의 작품을 대표한다. 그 자신이 불교의 진정한 정서와 정신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노이만은 자신의 번역을 독일어의 정신과 형식에 맞추는 데 성공했다. 14세기 빠알리어 문헌인 사라상가하(Sarasangaha)에 대한 에세이와 함께 노이만은 위대한 번역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 후 맛지마 니까야(중부), 테라가타(장로게), 테라가타(장로니게), 숫따니빠따 및 디가 니까야(장부) 번역이 이어졌다. 노이만이 성취한 것은 붓다의 설법에 대한 그의 깔끔한 작은 책을 읽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번역 덕분에 불교에 동조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크고 작은 연합을 형성할 수 있었다.
따라서 칼 자이덴슈튀커Karl Seidenstücker 박사가 1905년 독일 최초의 불교 잡지이자 유럽 최초의 불교 잡지인 <불교도>를 출판했을 때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03년 라이프치히에서 불교전도협회가 설립되어 독일어가 사용되는 땅에서 불교의 출판과 전파, "불교학" 연구의 촉진을 목표로 선포했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1) 불교 서적, 논문 및 소책자의 발행, (2) 잡지 발행, (3) 불교에 대한 강의 개최 등의 활동이 계획되었다. 
1906년에 지금은 "불교협회"라고 불리는 불교전도협회는 독일에서 최초의 불교대회를 개최했다. 독일 불교 운동의 전반적인 발전에 힘입어 <불교 전망대>Die Buddhistische Warte, <불교계>Buddhistische Welt, <불교도의 길>Der Buddhistische Pfad, <신불교지>Neubuddhistische Zeitschrift, <모음집>Brockensammlung, <세계거울>Weltspiegel( 그림Grimm 박사), <붓다의 길과 불교도>Der Buddhaweg und Wir Buddhisten(마틴 슈타인케 도준 Martin Steinke Tao Chun)과 같은 여러 잡지가 탄생했지만, 전쟁 도중과 그 후에 불리한 조건으로 인해 출판을 중단해야 했다.
1908년 냐나틸로까의 제자인 발터 마크그라프Walter Markgraf에 의해 독일 빠알리 협회가 설립되었으며 냐나틸로까는 명예 회장이 되었다. 그 후 본Bohn 박사는 "불교생협”을 만들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둘 다 사라졌다. 위에서 언급한 마크그라프는 브레스라우Breslau에서 첫 번째 불교출판사를 시작했으며, 전쟁 후 슈로스 베르락Schloss Verlag이 그 뒤를 이었다. 현재 베나레스 베르락(Benares Verlag)이라고 불리는 이 출판사는 빠알리 문헌의 역사적 저작과 학술 번역 외에 불교사상계에 대한 일련의 훌륭한 입문서와 관련 주제에 관한 책을 출판하는 독일 유일의 불교 출판사이다. 이 출판사의 가장 저명한 협력자는 이 출판사의 가장 저명한 협력자는 빌헬름 가이거Wilhelm Geiger(상윳따 니까야(상응부), 1권)와 칼 자이덴슈튀커(빠알리 불교, 쿳다까빠타(소송경), 우다나(감흥어), 이띠붓따까(여시어경) 등) 외에 잘 알려진 독일 불교 승려인 실론의 냐나킬로까이다.
1903년에 냐나띨로까는 불교 사미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유럽 대륙의 첫 번째 비구가 되었다. 그 이후로 그는 점차 자신의 모국에서 불교 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이제 불교학자들이 거론될 때마다 무엇보다 그의 이름을 거론할 만하다. 그를 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 그의 작품을 소개하려면 특별한 참고 문헌이 필요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독일에서 거의 신화처럼 들린다. 독일에서는 그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많은 "불교학" 저술에서는 그를 저명한 학자로 언급한다.
그의 작품을 통해 불교에 대한 독일인의 시각은 상당히 넓어졌다. 그가 다른 어떤 작가보다 더 많이 번역한 빠알리어 문헌에 대한 많은 번역은 단지 저명한 문헌학적 공헌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그 번역들은 그의 가장 깊고 가장 깊은 존재로부터 태어났다. 냐나띨로까의 주요 작품 중에는 앙굿따라 니까야(증지부, 5권), 밀린다 빵하(밀린다 왕문경, 2권), 뿍갈라 뺜냐띠(인시설론), 위숫디막가(청정도론) 등이 있다.
가장 엄격한 비평가인 달케Dahlke 박사는 이미 1920년(신불교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냐나띨로까는 우리 시대 최고의 불교 전문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의 번역은 우리 문학의 최고봉에 속하며 모든 사람에게 추천되어야 합니다..."
맛지마 니까야 번역 서문에서 노이만K. E. Neumann은 "빠알리어를 아는 사람은 빛을 빌릴 필요가 없습니다. 해가 비출 때 우리는 달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냐나띨로까 비구의 수고를 통해 작지 않은 성취를 발견했다는 의미이다. 그는 조국의 열렬한 불교도들을 위해 독일어로 알아들을 수 있는 빠알리 문법과 빠알리 사전과 함께 빠알리 선집을 최초로 준비했다. 근면함과 연구와 함께, 독일 불교도들은 이제 붓다 자신의 말씀에서 붓다의 원래 가르침을 읽을 수 있다. 
항상 신선한 활력으로 우리가 존경하는 테라와다의 큰스님은 여전히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의 작업을 하고 있으며, 특히 독일 전체 불교계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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