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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현대불교 2023. 3월호] 냐나딸로까 스님의 생애2부-김재

작성자무량수|작성시간23.05.17|조회수116 목록 댓글 0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 (3)

 

번역 김재성
(능인대학원대학교 명상심리학과 조교수)

 

 

 

냐나띨로까 스님

 

 

3장 : 실론과 버마, 1903-1910

 

실론에 잠시 머무는 동안, 캔디 호수에 있는 말바타 사원을 방문했는데, 이곳은 실론에서 가장 유명한 사원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사원 도서관 사서인 실라난다 스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즉시 나를 승려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당시 승려들 사이에서 드물게 훌륭한 영어를 구사했습니다. 나는 이 출가문제를 내가 이전에 들은 적이 있던 스코틀랜드 사람과 먼저 논의하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아난다 멧떼야Ananda Metteyya라고 불렸고, 버마에 살고 있었습니다. 실라난다 스님은 아난다 멧떼야의 정확한 행방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를 밤발라뽀띠야Bambalapitiya에 있는 감독관 리차드 페레이라Richard Pereira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카시우스 페레이라Cassius Pereira 박사(1947년에 승단에 출가해서 깟싸빠 비구Kassapa Bhikkhu가 됨)의 아버지였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불과 1~2년 전에 실제로 승려가 된 아난다 멧떼야의 주소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또한 미래 버마에서의 주된 후원자가 된 라옹 Hla Oung 여사의 주소도 얻었습니다.
남은 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투티코린과 마드라스를 거쳐 버마의 랑군까지 여행했고, 여행 도중에 들렸던 곳에서는 땅바닥이나 벤치에서 잠을 잤습니다. 오늘도 나는 기차의 3등석, 심지어 가능하다면 4등석을 타고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여행합니다. 배를 타면, 선실도 아니고 침대도 없는 갑판에서 잠을 잡니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편안함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버마에서 처음 15일 동안, 나는 버마인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은, 아주 친절한 라 옹 Hla Oung 여사의 별장에서 살았습니다. 그녀는 탈레인Talein(몬Mon) 왕자의 후손이었으며 대부분 캘커타에 살았던 인도 재무장관 라 옹Hla Oung과 결혼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아난다 멧떼야Ananda Metteyya와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로스트Rost 박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부 병원의 주치의였으며 나중에는 대령이 되었습니다.
큰 관심을 가지고 나는 <국민의 영혼> The Soul of the People이라는 멋진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버마 사람들의 성격과 풍습, 생활 방식을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라 옹Hla Oung 여사의 집에서 나는 또한 빠알리 삼귀의와 내가 승단에 들어갔을 때 암송해야 했던 초보자를 위한 10가지 계를 암송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또한 거기에 있는 동안 젊은 버마 여성이 불러준 노래를 피아노 반주를 하며 옮겨 적었는데, 리듬이 불명확해서 연주할 때 약간의 문제를 일으켰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나는 1903년 9월 우 아사바 U Asabha 스님의 지
도하에 다키 Ngda Khi 파고다에 있는 사원에서 사미가 되었습니다. 그 후 나는 아난다 멧떼야Ananda Metteyya와 함께 단칸방에서 한 달 동안 살았습니다. 나중에 나는 당시 여전히 숲과 경계를 이루고 있던 근처의 춘도Kyundaw 사원으로 갔습니다. 약 4,5개월 후(1904년 1월 또는 2월) 나는 냐나킬로까Nanatiloka라는 이름으로 승가에서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나는 우 꾸마라 대장로U Kumara Mahathera 밑에서 비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불교사에서 나는 유럽 대륙 출신으로 최초로 불교승단에 들어갔습니다.

 


버마에서 나는 아름다운 황금빛 쉐다곤Shwe Dagon 파고다와 매일 꽃 공양을 하고 고귀한 스승인 부처님께 경의를 표하는 매우 친절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난다 멧떼야는 나에게 빠알리어를 배우지 말고 버마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라고 조언했지만 나는 빠알리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버마어를 배우는 것을 자제하고 싶었기 때문에 정반대로 했습니다. 4년 후 나는 빠알리어를 아주 잘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구어체 버마어에 대한 실용적인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버마어는 중국어와 관련이 있고 티베트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매우 간단한 언어입니다. 그것은 단음절 언어이며 배우기 가장 쉬운 언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버마인의 친근함과 의사소통에 대한 의지, 특히 어린이들 때문에 배우기가 상당히 쉬웠습니다.
나의 수계사(upajjhaya, 화상)는 아비담마에 대한 철저한 지식이 있었고 발취론Patthana(조건 관계)라고 하는 아비담마Abhidhamma 여섯 권을 암송할 수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나는 정해진 스승없이 아비담마 뿐 아니라 빠알리도 배웠습니다.

사실, 혼자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았지만, 얼마 후에는 버마와 스리랑카 스님들과 함께 빠알리어로 매우 쉽게 불법의 어려운 쟁점을 토론할 수 있었습니다. 이 토론을 통해 나는 이해를 깊이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미 1907년에 나는 몰메인(Moulmein) 근처의 탑에서 많은 군중들 에게 사성제(四聖諦)에 대해 빠알리어로 예정에 없던 법문을 했습니다.

 

1904년에 나는 스리랑카 조력자(까삐야)와 함께 배를 타고 싱가포르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에는 평판이 좋지 않은 아일랜드 승려인 우 담마로까U Dhammaloka와 머물렀고, 그 후 매우 우호적이고 결혼한 일본인 승려와 약 2주 동안 머물렀습니다. 기대했던 배를 싱가포르에서 계속 기다리지 않기 위해, 말레이시아 셀랑고르주의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당시 비어 있던 스리랑카 사원에서 약 한 달 동안 살았습니다. 거기에서 일부 스리랑카인들의 초청으로 마을에서 약 5km 떨어진 바투 동굴을 방문했습니다. 두 동굴의 입구는
숲이 우거진 산의 경사면에 있습니다. 아래에서 접근하여 도달하는 첫 번째 동굴은 밝고, 건조하며 거대한 성당처럼 상당히 높습니다. 앞뒤가 트여 있고 바닥은 위아래로 걷기 좋게 만들어진 듯 부드럽습니다. 더 높은 곳의 일부 천연 틈새와 구멍에서 우리는 몇 년 전에 그곳에 살았던 불교 승려들이 남긴 대나무 침대들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동굴은 폭이 약 20~40미터입니다. 그것은 매우 높고 길며 너비가 약 10m인 비교적 작은 입구가 있습니다. 이 동굴에 들어간 직후, 우리는 스리랑카 친구들과 우리와 함께 온 몇몇 중국인들이 가져온 횃불에 불을 붙여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더 용기를 내어 계속들어갔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수백 미터 깊이의 깊은 구멍에 직면했습니다. 횃불의 도움이 없었다면 분명히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완만한 내리막 길을 계속 내려가니 해변의 바다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점점 더 강해지는 들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소 무서웠습니다. 그후 우리는 박쥐 배설물 속을 점점 더 깊이 걷있었고, 결국 무릎 높이까지 도달했습니다. 동시에 우리 머리 위로 수백만 마리의 박쥐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박쥐 동굴을 지나고나자 길은 바위 위로 내려갔습니다.

 

승복을 입고 올라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손에 불을 붙인 횃불 하나를 들고 뒤에 남아서 다른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고 얼마 후 멀리서 다시 위로 걸어가다가 마침내 왼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다림에 지쳐 가까이 있는 바위에 기대어볼까 생각하다가 겨우 이 바위 위에서 거대한 뱀이 다행스럽게 자고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돌아보니 내 주변의 거의 모든 바위 위에 연한 녹색의 뱀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약 30분 후, 다른 사람들이 마침내 돌아왔을 때, 나는 다시 더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1904년 말, 내가 없는 동안 인도를 방문했던 나의 인도인 친구이자 승려 코삼비 담마난다Kosambi Dhammananda와 함께 랑군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사가잉 산맥의 동굴에서 살았던 북부 버마로 함께 갔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성인(아라한)으로 알려진 승려의 지시에 따라 집중명상(사마타)과 통찰명상(위빠사나)을 수행했습니다. 담마난다Dhammananda는 나중에 승복을 벗고 미국 캘커타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빠알리 주석문헌인 청정도론Visuddhimagga 편집본과 여러 중요한 책들을 썼습니다.

 

1906년에 나는 빨리어와 경전을 철저히 연구하는데 전념하기 위해 실론으로 갔습니다. 같은 해에 나는 이미 1907년에 첫 번째 책을 출판한 앙굿따라 니까야(증지부)의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붓다의 말씀> The Word of the Buddha는 이미 1906년에 출판되었고 그 이후로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역주: 한국어역은 김재성이 2002년 고요한 소리에서 <붓다의 말씀>으로 출판했다. 이 번역은 고요한소리 홈페이지에 PDF로 공개되어있다. www.calmvoice.org

 

아난다 멧떼야

 

나는 1906년에 태국 왕자인 프리스당 줌사이Prisdang Jumsai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유럽 주재 태국 대사였습니다. 시암(오늘날 태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출라롱꼰 왕을 전복시키고 스스로 왕좌에 오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는 태국을 탈출해야 했고 결국 실론에 와서 승가에 들어갔습니다. 콜롬보에서 그는 코타헤나에 있는 유명한 디파두타라라마 사원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나는 마타라Matara 근처의 작은 갈고디야나Galgodiyana섬에 정착했는데, 그는 그것을 쭐라 랑카CullaLanka (“작은 랑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코코
넛 잎으로 만든 작은 오두막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암스테르담 출신의 부유한 사업가 아들인 베르겐달Bergendahl이라는 20세의 네덜란드인이 우리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수줍음이 많았지만 승려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슈탕게Stange라는 이름의 독일인이 왔습니다.
그는 나중에 소브작Sobczak 박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폴Pole과 함께 왔습니다. 나는 베르겐달과 슈탕게를 순노Suñño와 수마노Sumano라는 법명으로 사미가 되었습니다. 많은 축하 행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얼마 후 순노는 인도로 가서 마드라스Madras 근처 아디야르Adyar에 있는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 회장인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여사를 방문했습니다. 아디야르에 머무는 동안 그는 정신병적인 상태로 인해 일련의 의아한 환각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환각을 진짜로 받아들였지만, 곧 내가 그에게 그에 대해 일깨워주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순노는 폐소공포증 문제가 있었습니다. (내 제자들의 다른 병리학적 사례에 관해서는, 나는 침묵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이것은 정신과 의사에게 흥미로운 조사 분야가 될 것입니다.)
반면에 수마노는 곧 폐병 때문에 힘들어했습니다. 이런 상태는 아마도 그가 승려가 되기 전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실론을 떠나 유럽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독일 대사는 선박 여행을 위한 돈을 선불로 지급했습니다 (당시 180 루피에 불과했습니다). 태국 왕자는 그 돈에 대한 보증인 역할을 했습니다.

 

나도 수마노가 떠난 직후 실론을 떠났습니다. 부모님의 권유로 나는 3개월 동안 비스바덴을 방문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수마노Sumano는 모범적인 방식으로 그를 돌봐준 불교신도인 의사와 함께 슈타이어마크Steiermark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추운 계절이 시작되면서 수마노는 의사의 추천에 따라 실론으로 돌아왔고 나도 그와 함께 독일을 떠났습니다.

우리 둘 다 제노아Genoa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실론에 도착하자마자 콜롬보의 마이트레야 홀에서 머물렀습니다. 이곳은 내가 자주 머물렀던 곳이었고, 리차드 페레이라 Richard Pereira 감독관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고지대에 있는 핫톤Hatton으로 갔습니다. 기차역 근처에서 우리는 불교 학교에 머물렀는데, 그 위층은 승려들의 거처였습니다. 여기서 나는 기관지염에 걸렸고, 그 병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추운 어느 날 밤에 내가 한 장밖에 없었던 담요를 수마노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폐병 때문에 그는 특히
조심해야 했습니다.
1906년 당시, 나의 첫 번째 저술인 <붓다의 말씀>이 막 출판되었고, 한 권이 나에게 보내졌습니다.
1906년 말, 나는 홀로 버마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쭌도 사원Kyundaw Kyaung과 고지의 매묘Maymo에
머물면서 앙굿따라 니까야 번역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그곳에서 두 번이나 뱀과 마주쳤습니다. 첫 번째는 뱀 보호 게송(Khandhaparita, AN4:67)을 암송한 직후였습니다. 왔다 갔다 하면서 걷다가 무심코 무시무시한 코브라를 밟았습니다. 두 번째는 저녁에 목욕하고 돌아올 때였습니다. 나는 시종 역할을 하는 어린 왕자와 함께 작은 숲을 걷고 있었습니다. 큰 비단뱀을 나의 샌들로 밟았을 때 소년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내가 뱀을 발견했을 때, 그 뱀 앞의 땅에 엎드렸습니다.

 

쭌도 사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라 옹 여사는 아난다 멧떼야와 저를 위한 집을 지었습니다. 그것은 꽤 외딴 지역에 있었습니다. 내가 사미로 받아들인 실라 짜라Silacara도 나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터 마크르라프Walter Markgraf가 왔는데, 나는 그를 사미로 받아들였고, 그는 나의 네 번째 유럽출신 승려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네 제자 중 스코틀랜드 실라짜라만이 현재(1948년) 살아있고 나머지 세 사람은 죽은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수마노S 반다라왈라Bandaravala 근처에서 1910년 1월에 사망했고, 마크그라프(담마누사리 Dhammanusari)는 전쟁 중 1914년에 사망했으며, 순노는 1915년에 사망했습니다. 실라짜라 일련의 불교서를
저술했으며 작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수마노 Sumano는 <빳밧자Pabbajja> (출가)를 썼기 때문에 알려졌습니다. 마크그라프는 불교 출판인이 되었고 불교에 관한 서적도 저술했습니다. 또한 그는 독일 빠알리 협회(Deutsche Pali Gesellschaft)를 설립했고, 나는 명예 회장이 되었습니다.
1907년에 나는 버마에서 열린 대규모 모임에서 빠알리어로 사성제에 관해 법문하도록 요청받았는데 어떤 식으로든 준비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몰메인Moulmein의 파고다Pagoda 앞 연단에서 번문이 진행되었고 참석한 버마의 빠알리어 전문가가 통역을 맡았습니다.
어느 날, 랑군에 있는 아름다운 쉐다고 파고다에서 한 젊은 버마 남자가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오, 우리 종교는 확실히 세계 최고입니다! 그렇죠?" 나
는 "당신은 세상의 모든 종교를 알고 있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곧 그가 자신의 종교인 불법(Buddha-Dhamma)도 잘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나는 또한 붓다의 가르침에 무르익은 사람들에게 불법은 해탈에 이르는 최선의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경우와 같이, 무지가 수반된 헛된 자랑을 고마워하지는 않습니다.
또 한번은 말이 끄는 마차에 앉아 랑군의 거리를 지나갔습니다. 담마노사리Dhammanusari가 나와 함께 있었고 우연히 생선을 파는 생선 장수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에게 소리쳤습니다. "어떻게 살아있는 생명을 죽일 수 있습니까? 살생은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남자는 "오,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담마누사리 사미는 반년 동안만 승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내면의 불안 때문에 그는 다시 유럽으로 돌아갔습니다. 따라서 그는 승려로 있었을 때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아난다 멧떼야는 불교 전법을 위해 영국으로 갔고 마크그라프는 스위스 남부에 불교 사원을 세울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때 코에노비움 : 자유 연구 국제 저널(Coenobium : rivista internazionale di liberi studi)의 출판인인 루가노씨(가리발디의 친구)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를 위해 아름다운 고산의 산장을 찾아주었습니다. 보바기오Novaggio 뒤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몽테 레마Monte Lema 산기슭에 있었고 해발 약 800m였습니다. 나는 유럽으로 떠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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