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번역물

[미주현대불교 2023. 5,6월호]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4)-번역 김재성

작성자무량수|작성시간23.08.28|조회수33 목록 댓글 0

 

 

<2부>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 (4)

 

번역 김재성
(능인대학원대학교 명상심리학과 조교수)

 

냐나띨로까 스님

 

4장 : 유럽과 튀니지, 1910-1911

 

독일에서는 승려들을 지원하기 위해 작은 불교 단체가 결성되었습니다. 이 단체의 정기적인 기부자 중 한 명은 카마니타 순례(The Pilgrim Kamanita)를 작곡한 시인이었습니다. 내가 루가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처음에는 비그나니 씨와 함께 지냈습니다. 그은 나의 절친이 되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나는 수바드라 비구(짐머맨 Zimmermann)와 내 형제 및 다른 사람들도 방문했습니다. 수바드라 비구의 <불교 교리 문답>은 실제로 내가 불교에 관해 읽은 첫 번째 책이었습니다. 산에 있는 알프스 오두막을 위해서 실제로 한 달에 10프랑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샌들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추위와 눈으로 고생이 많았습니다. 추위 외에도 음식은 매우 일방적이어서 지속적인 기관지염 외에도 끔찍한 종기가 머리, 얼굴 및 가슴에 생겨서 잠을 잘 수 가 없었습니다.


여기 눈 덮인 오두막에 앉아 빠알리 문법(Paligrammatik) 저술과 인시설론(인간유형론)이라는
아비담마 문헌 번역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다려온 새로운 승려 지망자가 도착했을 때, 저의 원시적 상황은 상당히 개선되었습니다. 루드비히 스톨쯔Ludwig Stolz (후에 왓뽀 스님Venerable Vappo은 음식 분야의 전문가이자 요리도 잘했습니다. 나의 유럽 체류는 모든 신문에서 다루어지고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등에서 온갖 기자들이 나를 찾아와 사진을 찍는 등의 일을 했습니다. 나는 또한 영매, 사이코패스 및 이와 유사한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환상적인 편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프랑스 백작, 가출한 밀라노 출신의 12세 남학생, 이미 많은 일을 이뤘다고 말하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나는 그를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인, 한 여성 영매가 그녀와 그녀의 영매 중독자 아들에게 영적 지원을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녀는 불행하게도 내가 이미 떠난 후에 나를 보기 위해 독일에서 왔습니다. 심지어 이탈리아의 여교사가 신들과의 화해를 통해 그녀에게 의치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종종 신지학자 블라바츠키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영국 대령과 내 동생 아르민도 나를 방문했습니다. 둘 다 마을 뒤에 있는 호텔에 살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내 알프스 산장까지는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추위와 그로 인한 힘든 생활 때문에
나는 슈톨쯔Stolz와 함께 더 남쪽으로, 아마도 북아프리카까지 가서 거기에 정착할 수도원을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첫째, 오컬티즘을 실천하던 변호사인 코스타 교수의 초청으로 우리는 토리노 근처 코스타의 고향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승려들을 위한 정착지를 시작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승려들은 하모니움을 생산함으로써 필요한 물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토리노 반대편에 있는 자신의 목공 공장을 소개하여 우리가 요구하는 돈을 벌게하려고 했습니다.
얼마 후 나는 계속해서 더 남쪽으로 가서 내 행운을 찾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기차역에서 가까운 호텔에 머물렀고 불교 관련 저술로도 잘 알려진 유명한 음악 교수인 알레산드로 코스타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프라우 헬쯔Frau Herz가 그를 위해 만든 거대한 오르간이 있는 콘서트홀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사랑스럽고 매우 재능이 있고 철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에서는 성 베드로 대성당도 방문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계속해서 나폴리로 갔고 그곳에서 팔레르모를 거쳐 튀니지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왓뽀 스님 Venerable Vappo
R.A. 베르지에 Bergier

 

알렉산드라 데이빗-닐 부인이 우리의 도착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그녀는 불교 서적을 집필
하느라 바빴고 나와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권이나 비자가 없었기 때문에 어렵게 입국이 허용되었습니다. 데이빗-닐 부인과 토목 기사인 그녀의 남편의 집에서 8일을 머문 후, 우리는 몇몇은 기차로, 몇몇은 낙타를 타고 가베스Gabes로 계속 이동했습니다.


가베스에서 우리는 곧 오아시스에 가까운 도시 가장자리에 있는 집을 찾았습니다. 다음날 나는 우리의 체류에 대해 매우 만족하지 않는 지방 당국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공중화장실 바로 옆에 있는 기둥 위에 있는 일종의 창고에 머물고 있었는데, 바닥에서 보면 우리 방과 분리되는 벽이 없었습니다. 모든 배설물은 우리의 눈과 코 가까이에서 흘러내리고 메스꺼운 냄새를 풍겼습니다.
어느 날 한 무리의 경찰이 말을 타고 와서 우리들이 튀니지를 떠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우리를 많이 신뢰하는 아랍인들이 오히려 편해서, 우리가 그 나라를 떠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로잔느를 향해 여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곳은 베르지에씨가 이전에 도시 근처에 지은 "카리타스"라고 불리는 그의 불교 암자에 머물도록 우리를 초대했던 곳입니다. 우리는 가베스를 떠나 배를 타고 튀니지로 여행했고, 다시 한 번 데이빗-닐l 부인을 방문했습니다. 그런 다음 마르세유, 리옹, 제네바를 거쳐 로잔느로 여행했습니다. R.A. 베르지에Bergier씨는 진정한 파리 사람이자 사랑스러운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그는 기차역으로 우리를 마중 나와 자기 집에서 점심을 제공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우리를 루 데샬렌Rued'Echallens에 있는 카리타스로 데려갔습니다. 매주 일요일 많은 사람들이 근처를 지나가며 이국적으로 보이는 평평한 지붕과 황금 불상이 있는 작은 2층 집에 감탄했습니다. 그들은 벽에 붉은색과 금색 글씨로 쓰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읽었습니다. 제가 로잔느에 머무는 동안 베르지에씨의 훌륭한 지원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방문했습니다.


그 중에는 우리 친구인 베르지에, 식자공 밀리우드 (Millioud), 비오네(Vionnet) 목사, 시장, 이집트인, 제네바에서 온 신지학 대표, 기자들 등이 있었습니다. 나의 자애경 낭송을 축음기 밀랍판에 녹음한 것이 로잔느 기록 보관소에 나를 기억하기 위해 보관되었습니다.
나는 또한 코스타Costa 교수의 절친한 친구인 페라리Ferrari씨가 담당하고 있는 베르가모Bergamo근처의 과수원을 방문하기 위해서 독일 여성의 초대를 수락했습니다. 페라리씨는 그의 친구 코스타교수와 함께 페루지아Perugia 근처 코스타 소유의 땅을 사용하여 승려의 정착을 시작하도록 나를 설득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승려들은 그곳에서 하루에 10시간씩 일해야 했을 것입니다.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러한 계획은 비천한 착취라는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콘단노, 냐나 띨로가, 베르지에

 

어쨌든 그러한 종류의 준비는 불교 승려에게 전혀 가능하지 않 습니다. 그래서 나는 왑뽀Vappo와 함께 밀라노과 토리노를 거쳐 피드몽Piedmont의 아름다운 지역에 있는 아오스타Aosta로 갔고, 에바리스토 쿠아즈Evaristo Cuaz 씨의 집에서 왑뽀Vappa를 만나기 위해 에바리스토 쿠아즈씨와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는 불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우리가 떠날 때 그는 나를 따르고 싶었지만 기혼자였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습니다.
우리는 성 베르나르St Bernard 산을 올랐습니다. 나는 맨발로 얼음 땅을 걸었고 내 옷은 매우 얇았습니다. 나는 추위에 떨며 저녁에 수도원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바로 잠자리에 들었지만 30분 동안 계속 떨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나를 마사지하여 따뜻하게 해주려고 했습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우리는 스위스 쪽 산을 내려갔습니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로잔느로 돌아가기 위해 마르티니에 도착했습니다.


얼마 후 유리 화가 바텔 바우어Bartel Bauer는 아시시와 페루자(로마 북부)에서 얼마동안 나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 나를 만났습니다. 나의 작은 소책자인 <붓다의 말씀>은 그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고 그에게 불교의 진리를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확실히 세속의 삶을 떠나고 싶어 했습니다. 만일 내가 그를 거절할 경우를 대비
하여 그는 독일에서 출가해서 수행자로 살기로 결정했고, 그곳에서 매일 음식을 구걸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밀리우드Millioud씨와 함께 살고 있었고 나는 그를 파리에서 매일 가르쳤습니다. 나는 그에게 빠알리어 회화를 외우게 한 다음, 그를 스리랑카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한 단어의 영어
도 모른 채, 그의 5 쪽 분량의 빠알리 회화만 외우고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나는 콘단노Kondanno라는 법명으로 그를 사미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노란 가사를 입고 유럽 땅에서 승가에 받아들여진 최초의 승려로 떠났습니다. 이 모든 것은 1910년 말에 일어났습니다. 콘단노는 프레드리히 베크Friedrich Beck와 스판링Spannring이라는 젊은 독일인이 나타났을 때 막 떠났습니다.
콘단노는 스리랑카에 도착하자마자, 배에 있는 동안 내 후원자 중 한 사람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수메다 비구가 된 이 후원자는 갈레Galle의 화강암 기둥 위에 지어진 건물에 그를 묶게 했습니다.
이 건물은 그의 이름을 따서 콘단노 홀이라고 불렸습니다. 왓뽀와 나도 스리랑카로 돌아가는 여행을 위해 짐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책이 담긴 거대한 상자는 남겨져 나중에 스리랑카로 보내졌습니다.

 

당시 우리는 코스타 교수의 친구인 신지학자 미글리오레Migliore 박사의 초대를 받아 나폴리 근처의 산타 마르타 비코에 있는 그의 오렌지 농장을 방 문했습니다. 그는 그곳을 불교도 주거지로 만들고 싶어하는 척했습니다. 내가 잘못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1911년 1월이었습니다.
나는 그곳에 있던 위험하고 거대한 두 마리의 개만 기억하는데, 그들은 마른 피만 먹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그곳에서 한 달 동안 머문 것은 전혀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베수비오 화산을 방문했고 또 다른 화산인 카프리산을 방문했습니다. 제노바에서 콜롬보로 가는 도중 나폴리를 경유하는 동안 우리의 배에 싣는 노르도이첸 로이드 선박회사에 짐을 맡긴 후, 우리는 나폴리를 떠나 로잔느로 갔습니다. 비구가 될 예정인 스팬링를 만났고, 며칠 후 귀화한 미국인 프리드리히 벡을 만났습니다. 마크그라프의 친구였던 벡은 비쿠 밧디요Bhaddiyo가 되었습니다.

 

갈릭항구


이 여행 중에는 항상 영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사
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한 영매가
나에게 와서 계속해서 악마가 자신을 사로잡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이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모든 생명체에 대한 자애를 계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온 세상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 어떤 악마도 그에게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며 모든 끔찍한 환상은 사라질 것입니다.
또 다른 도움 요청은 우리 친구였던 폴란드의 한여성 과학자에게서 왔습니다. 그녀는 화학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했지만 열등감 때문에 집필을 마무리 하지 못해 출판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출발할 때 베르지에씨, 왓뽀, 밧디야, 스판링과 내가 기차역으로 가서 기차를 탔을 때, 이
폴란드 부인이 와서 나에게 아름다운 꽃다발을 출발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전에 그녀는 노란색 가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밀라노를 거쳐 제노아로 가서 콜롬보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