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이상… 그 간격의 갈등 '뮤지컬 렌트'
글/스텔라 박
베버리 힐즈 사반 극장 투어 공연
지난 7월 16일부터 열흘간 베버리 힐즈의 사반 극장(Saban Theatre)에서 뮤지컬 <렌트(Rent)>가 공연됐다. 이 뮤지컬은 벌써 20년 전인 1996년,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초연된 후 오래지 않아 브로드웨이로 진출했다. 2008년 9월까지 무려 12년 4개월 동안 연속해서 5140회가 공연됐다. 역대 롱런 공연 기록으로는 9위의 성적이다. 물론 공연 예술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토니상도 받은 바 있다.
<렌트>의 스토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이 뮤지컬을 만든 조나단 라슨(Jonathan Larson)은 쟈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La Boheme)>에서 그 스토리라인을 따왔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20세기 뉴욕으로 옮겨온 것이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클래식 작품들은 창조적인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켜주는 뮤즈이다.
뮤지컬 렌트 VS 오페라 라보엠
<라보엠>을 원작으로 한 만큼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일치한다. 푸치니가 <라보엠>을 완성한 것이 1896년이니 대충 그 당시를 시대적 배경으로 했을 터이고 구체적인 때는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 그리고 공간적인 배경은 프랑스 파리 라틴쿼터의 한 허름한 아파트이다. 반면 <렌트>는 199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 공업지역의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인 시인 로돌포는 작곡가인 로저로 변신했고 그의 절친인 화가 마르첼로는 비디오 아티스트 마크가 되었다. 오페라 라보엠에는 로돌포가 미미에게 “그대의 찬손”이라는 아리아를 부르며 자신이 시인이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있다. 그 시대의 시인은 요즘 세상에서 아름다운 노랫말에 가락을 붙여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일 수 있다.
화가 마르첼로를 비디오 아티스트로 바꾼 것도 기가 막힌 해석이다. 그 시대 화가였다면 분명 매체가 많이 바뀐 20세기에는 비디오 아티스트로 활약했을 터이니.
로저와 마크는 렌트비를 못 내고 전기도 끊긴 추운 날씨에 영화 시나리오와 로큰롤 포스터로 불을 지피며 청승을 떨고 있다. <라보엠>에서 이 두 친구의 룸메이트인 철학자 콜리네는 컴퓨터 천재 콜린으로 바뀌었다. 음악가인 쇼나드 대신 작가는 콜린이 거리에서 강도에게 뭇매를 맞을 때 그를 도와주었던 거리의 드럼 주자 앤젤을 등장시킨다. 그 역시 음악가라는 점에서는 쇼나드와 다를 바가 없다. 스토리를 더욱 드라마틱하고 20세기 관계(relationship)에 맞추기 위해 앤젤은 여장 남자로 살짝 바꾸었다.
오페라 <라보엠>에서 마르첼로의 옛 애인인 뮤제타는 모린이라는 이름의 자유분방한 행위예술가로 나온다. 원작에서는 돈 많은 남자에게 가기 위해 마르첼로를 헌신짝 버리듯 하고 떠나지만 <렌트>에서는 마크와 헤어진 후 성적 취향이 바뀌어 동성애자가 된다. 그녀의 새 애인은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의 공익변호사인 조앤.
함께 춥다고 청승을 떨다가 마크는 모린의 전화를 받고 외출하고 로저는 옛애인을 생각하며 곡을 구상 중이다. 그런데 아래층 사는 미미가 전기가 끊겨 촛불을 켜려 하는데 성냥이 없다며 그의 아파트 문을 두드린다. 이 장면은 오페라 <라보엠>과 싱크율 100퍼센트이다.
<라보엠>에서 미미는 폐병에 걸려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얼굴은 파리하고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여인이다. 그 당시 젊은 예술가들의 목숨을 앗아간 가장 치명적인 질병이 폐병이라면 20세기 예술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병은 무엇일까. 작가는 이 병을 AIDS로 바꿔치기 한다.
<라보엠>의 미미는 수를 놓으며 생계를 유지하던 여인이었는데 <렌트>에서의 미미는 마약에 중독된 댄서이다. 촛불에 성냥 불을 붙여주며 이 둘은 첫눈에 반하고 사랑에 빠진다.
자, 이 정도 두 작품의 유사성에 대해 묘사했으니 이제는 <렌트>에 충실한 스토리 텔링을 해보겠다. 미미가 자기 집으로 가고 마크는 콜린, 엔젤과 함께 음식과 돈을 갖고 아파트로 돌아온다. 분위기가 훈훈해지려는 찰나, 집주인인 베니가 들어온다. 베니는 <라보엠>에서는 브누아였다. 원작의 이름을 잘 살려낸 작명이 기막히다.
베니는 로저와 그 친구들에게 건물 철거 반대 시위 공연을 막아준다면 집세 늦은 것을 눈감아 주겠다고 말하지만 친구들은 거절한다. 그날 이후 엔젤과 콜린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로저와 미미도 동거를 시작한다.
로저와 미미 그리고 그 친구들이 뉴이어 파티를 열고 있는 가운데 집주인 베니가 들어와 미미가 사실은 자신의 정부였다는 것을 폭로하자 파티는 엉망이 된다. 미미는 로저와 크게 말다툼 끝에 집을 나가 다시 베니와 지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로저는 질투에 눈이 멀어 미미와 싸우고는 뉴욕을 떠난다. 마크는 TV 쪽에 일자리를 얻고 엔젤은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다.
1년 후 다시 모인 친구들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로저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그렇게 쓰고 싶어 했던 곡을 완성한다. 마크는 자신의 꿈인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TV 일자리를 그만둔 상태다. 앤젤을 잃은 콜린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해 큰돈을 번다.
서로의 안부와 현주소를 나누고 있는 자리에 친구들이 죽어가는 미미를 데리고 들어온다. 로저는 죽어가는 미미에게 자신이 완성한 노래를 들려준다. 의식 불명 속에서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은 미미는 자신을 살린 것이 엔젤이라고 말한다. 친구들 모두는 삶의 경이로움을 노래한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 우리에게는 오직 오늘이 있을 뿐!(No day but today!)" 이라고.....
파격적 소재의 저예산 뮤지컬
뮤지컬 <렌트>는 여러 면에서 기존의 히트 뮤지컬과는 다르다. 대박 작품들의 공통적인 요소인 '중산층 정서에 맞는 내용 그리고 휴머니티 넘치는 구성'이 아니다. 다소 아웃사이더의 관심사라 할 수 있는 에이즈(AIDS), 동성애, 마약중독 등이 소재라 일반 대중들의 공감을 얻기에는 지나치게 파격적이다.
<렌트>는 또한 음악으로 볼 때도 예사롭지 않다. 브로드웨이 스타일의 듣기 좋고 귀에 쫙 들러붙는 선율이 아니라 록, 탱고, 발라드, 가스펠, R&B 등 대중 음악의 모든 장르가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는 만큼 어느 정도는 실험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제작비도 대작 뮤지컬의 10퍼센트밖에 들지 않은 저예산이다. 하지만 작품의 흡입력이나 감동의 깊이는 대작들에 못지 않다. 그래서일 거다. 렌트는 1996년 퓰리처 최우수 드라마상과 토니상 뮤지컬 작품상, 음악상, 각본상, 남우조연상 그 외에도 수많은 상들을 주렁주렁 받았다.
우리에게는 오직 오늘이 있을 뿐
세상 좋다는 공연은 다 보고 다녔지만 뮤지컬 <렌트>가 LA를 찾을 때면 꼭 다시 가서 본다. 2시간 남짓 똑같은 음악과 무대에 나를 내어맡기는 이유는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피날레 장면의 노래, <No day but today>의 가사에서 찾을 수 있다.
“가슴은 얼어붙거나 데일 수 있지만
그로부터 배운다면 고통은 엷어지겠지.
미래도 과거도 없어.
이 순간이 끝은 아니야.
우리들만이 있을 뿐. 이것만이 있을 뿐.
후회 따위는 잊어. 그렇지 않으면 넌 삶을 놓친 거야.
다른 길, 다른 방법은 없어.
오늘 외에는 아무 날도 없어.
오늘 밤만이 있을 뿐.
무엇이 옳은지 알려면 그냥 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어. 오늘 밖에는 없어.
운명을 조절할 수는 없어.
난 나의 영혼을 믿어.
내 유일한 희망은 그냥 존재하는 것.
바로 지금, 바로 여기만이 있어.
사랑에 너를 내맡겨봐.
그렇지 않는다면 두려움 안에서 살게 되지.
다른 길이나 방법은 없어.
오늘밖에 다른 날은 없어.”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 머무는 것만이 삶의 해답임을 이 노래는 들려주고 있다. 한 순간도 소홀할 수 없고 놓칠 수 없다. 지금 당신은 진정으로 살고 있는지, 참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고요히 머무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