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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2017년 10월호] 스리랑카 재가(在家) 여승들 태라바다 불교정신의 수호자 /윤시내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17.10.14|조회수146 목록 댓글 0


    스리랑카 재가(在家) 여승들 태라바다 불교정신의 수호자

     

     글/윤시내




    “보리수 나무 아래 여인들 (Women under the bo tree)”의  저자 테사 바톨로뮤즈 (Tessa Bartholomeusz)는 플로리다주 탈라핫세에 있는 플로리다 주립대학의 종교학과 부교수이다. 1983년 휴가 중 스리랑카를 방문한 바톨로뮤즈는 자칭(自稱) 승가라고 부르는 집단에 속해 살고있는 여승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재가여승들이 늘 입는 흰색 승복이 아니라 남자승려들이 입는 주황색 승복을 입고 있었다. 승가에 속한 집단생활과  주황색 승복, 이 두 가지는 그때까지 남자 승려들에게만 허용되었던 것임으로 여승들의 행동은 남자 승려의 영역을 정면에서 침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바톨로뮤즈는 세속을 등지고 수도원에서 사는 여승들의 생활은 어떤 것일가. 남자 승려들과 재가신도들이 그들을 보는 시각은 어떠한가.  그리고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여승들의 불교관은 전통 불교관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빠알리 경전 중에서 여승들의 승가 생활에 관련된 경전을 찾아 번역하였고, 그 과정에서 부처의 정통적 가르침이 현대 불자들의 실제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데 초점을 두고 연구를 시작하였다. 몇 년 뒤 다시 스리랑카를 찾은 바톨로뮤즈는 전에 만났던 여승들을 면담하고 관찰하면서, 고대 불교 사회에서 존재했던 여승들의 승가 생활을 스리랑카의 여성불자들이 다시 발견하여 재활시킨 경로를 연구, 발표하였다.
    고대 스리랑카의 역사책, Dipavamsa 와 Mahavamsa 에 의하면,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쇼카 왕이 그의 아들 마힌다 스님을 포교의 임무를 주고 파견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때 스리랑카 왕의 후궁 아눌라(Anula)가 마힌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크게 깨달아서 자신도 승려가 될 수 있개 해주도록 왕에서 청을 하였고, 왕은 마힌다에게 아눌라와 궁녀 500명의 출가 의식을 부탁하지만 마힌다는 자신이 여성들에게 계를 주어 출가시키는 것은 법에 어긋남으로 자기 누이동생 상가미타가 하는 것이 옳겠다고 하여 아쇼카 왕에게 누이동생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계를 받은 여승 (bhikkhuni) 상가미타는 출가의식에 필요한 다른 여승들과 함께 험난한 여정 끝에 스리랑카에 도착하였다. 상가미타는 부처님이 그 아래서 정각을 이루셨다는 보리수 나무의 묘목을 갖고와서 아뉴라다푸라 (Anuradhapura)에 심었고 아눌라와 궁녀 500명을 출가시킴으로서 스리랑카에 비구니계보의 시원(始原)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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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리랑카 전역에 불교를 보급하는 일 외에도 여승들은 해외에 불교를 전했다. ‘비구니 전기”에 의하면 서기 429년, 선장 ‘난디’가 스리랑카 여승들을 배에 태우고 송나라 수도 남경에 데리고 왔는데 그들이 온 목적은 비구니 계보를 중국에 세우기 위해서였으며, 중국여성 300여명이 출가의식을 거켜 여승이 되었다. 이들은 왕의 후원을 받아 여승승가에 살았으며, 10세기 기록에 의하면 “보리수 나무에 물을 주는” 여승들로 불리우며 마을 사람들의 존경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11세기에 여승들에 대한 기록은 스리랑카 역사책에서 사라졌고, 같은 시기에 남자승단도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승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진” 이유를 저자는 이 책에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남자승단의 부활은 11세기 말 버마 승단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성승단 재건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승려를 포함해서, 여자들이 세상을 등지고 승려가 되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스리랑카에 불교를 퍼뜨리는데 여성들이 공헌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승계보를 부활시키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들의 여성관은, 여성은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고, 아내와 어머니의 역활을 충실히 하며, 가족들의 안위와 사회적 성공을 목표로 살아야한다는 것이었다. 빠알리 경전에도 여자들이 승려가 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 그들에게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 불교의 도움을 받아 여성승가의 부활을 시도하는 사람들과, 중국 불교는“너무 타락하였고”대승불교이기 때문에 테라바다 불교의 율법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보수적 불교지도자들과의 대립으로 인해 여승승가 재건의 문제는 아직도 해결을 못보고 있다.
    약 800년의 공백 기간을 지나 출가여승들의 문제가 사회에 대두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그 배후에는 스리랑카 재가신자들의 역활을 새롭게 정의한 개혁불교 (Protestant Buddhism)가 있었다. 개혁불교의 핵심은, 개인은 누구던지, 중간 매개체를 통하지 않고서도 각자 궁극의 목표를 추구하며, “승가를 통해서만 열반을 추구하고 도달”할 수 있다는 재래불교관을 거부하였다. 다시 말해서, 개혁불교에서는, 천주교에서 파생한 기독교 신교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권리와 의무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었다. 개혁불교는 출가한 남자 승려들만 아니라 남녀 재가신자들의 의무와 권리를 새롭게 해석하였고, 스리랑카의 불교가 근본불교에서 많이 멀어졌음을 지적하였다. 불교의 정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고,  여성들은 세속의 편안함을 등지고 출가하여 스스로 고행하며 수행하였으나 정통의 여성승가 조직이 있지 않았음으로 재가여승 (lay nun) 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시기에, 재가불자 여성들이 세속을 등지고 승가형식의 수도원 (lay nunnery)에 들어가는 것이 스리랑카 불교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아나가리카 담마팔라 (Anagarika Dharmapala)였다. 그는 금욕 독신주의자 불교 신지학파 (Buddhist Theosophist) 였으며 스리랑카 불교가 고대 불교경전에 준하여 개혁되어야 하고,  “이상적”인 불교사회에서는 고대불교에서 자기들에게 허용되었던 자유와 같은 수준의 자유를 다시 찾은 재가여승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교 순화를 목적으로 스리랑카의 재가신자들은 조직을 만들었다. 그 중의 하나가 1891년 담마팔라가 설림한 마하 보디 소사이어티 (Maha Bodhi Society – MBS) 이다. “불교의 기원지”와 그 외 불교국가에서 “불교를 회생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 단체는 불교회생의 한 요소로 여성들의 불교교육을 손꼽았다. 그리하여 국내에서뿐 아니라 외국 여성들을 초빙하여 어린이들에게 불교교육을 시켰으며 그 결과 여성불자들을 위한 수도원이 수백년 만에 나타날 수 있었다. 같은 목적으로 콜롬보의 재가불자 여성들은‘스리랑카 여성 교육 소사이어티 (the Women’s Educational Society of Ceylon  (WES) 를 스리랑카의 두 큰 도시, 콜롬보와 칸디에 설립하였다.
    여성들의 불교교육을 위해 서양에서 온 여성 중의 하나가 카운테스 미란다 데 수자 카나봐로 (Countess Miranda de Souza Canavarro)이다. 그녀는 샌드위치 섬의 폴투갈 대사 미국인 부인이며 과거에는 천주교 신자였는데19세기 말 미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동양종교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97년 담마팔라를 만난 이후 속세의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뉴욕에서 불교로 개종한 뒤 담마팔리의 요청으로 콜롬보에 와서 스리랑카 최초의 재가수녀원, 상가미타 우파시카라마야 (Sanghamitta Upasikaramaya) 를 설립하였다. 카운테스 카나봐로의 출현은 콜롬보 불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서양여인이 불과 수개월의 불교 공부 후에 수계를 받은 여승이 되었다는 것과, 담마팔라와의 순탄치만은 않은 관계, 우파시카라마야 설립과 운영 과정에서 생긴 많은 잡음 때문이었다. MBS회원들은 부도덕함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수도원에서 내쫓았고1990년 10월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많은 잡음과 스캔달이 있었지만 스리랑카에 여승수도원을 세워 여성들의 불교교육에 크게 공헌하였다.



    스리랑카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 교육을 받은 캐터린 드 알위스 (Catherine de Alwis)가 칸디에서 만난 버마 여승의 영향을 받아 불교로 개종하고 재가여승이 되기 위하여 버마로 떠난 것은 1900년대이다. 스리랑카와 버마는 1070년대부터 불교교류가 있었으며, 버마의 남,녀 승려들은 콜롬보와 칸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특히 두 나라는 승가의 계보 전통을 지키기 위해 협력하여 필요할 때면 서로 방문하였는데 1803년 영국 지배하에서 쇠퇴된 불교중흥을 위해 버마 승려들이 스리랑카를 방문하여 남자승려의 계보를 다시 확립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1905년경 칸디로 돌아온 알위스는 주위 불자들의 도움을 받아 여승승원 Sudharma Upasikaramaya를 설립하였다. 이 개원식에는 영국 총독 부인 레이디 블레이크 (Lady Blake)가 초대되었다. 다른 총독부인들과는 달리 그녀는 스리랑카 불교중흥과 교육에 관심을 갖고 돈과 시간과 정력을 쏟아 성원하였으며, 영국에 돌아간 뒤에도 런던 불교 잡지에 이 수도원에 대한 글을 발표하였다.
    영국 지배하의 스리랑카 불교계는 남성들의 보호 감독을 벗어난 여성들의 자율(自律)적인 집단이 사회적으로 불가(不可)하다고 여겨서 그러한 움직임을 규제하였다. 그러나 1948년 독립 이후 각계각층의 여성들은 승복을 입고 청빈, 금욕, 수행, 봉사의 삶을 살기 위해 출가하였다. 특히 지방 여성들이 재가수도원에 들어가기 시작하였고, 현재까지 계속하여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독립 전과 후에 설립된 재가수도원의 공통된 점은, 재가여승들이 불교의 중흥은 물론 스리랑카의 국가 발전에도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출가하여 승려가 된 여성들에 대한 사회의 관점은 변하지 않았다. 고대 인도에서처럼 남성의 감독을 받지않고 여성이 자율적인 승가생활을 한다는 것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보호의 명목으로 여러가지 제약이 적용되었다.
    현대 스리랑카 여성들은 사회적 임무와 종교적 의무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있다. 일단은  가정을 이끄는 사회적 임무에 우선권을 주고 그 임무에 충실하려는 현대 재가여승들을 ‘다사 실 마타 (dasa sil mata)’ 라 한다. 그들은 불행한 가정생활에서 탈출하거나, 결혼에 대한 회의, 독신생활을 계속하며 자기 계획을 실현하려는 욕구 등으로 재가여승이 되었다. 그들에게 결혼이나 사회 생활은 고통(dukkha)의 근본원인이었고 출가하여 재가승가 (lay nunnary) 에 속함으로써 최소한의 보호를 사회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많은 여자들이, 수행에 전념하기 위해서보다는  막다른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승이 된 것이 사실이었다.  그들은 동네 집단에 속해 살며 수행, 푸자, 봉사의 생활을 한다. 그들은 자신을 진실한 불자, 테라바다의 계승자, 테라바다의 순수함을 지키는 수호자로 생각한다.
    재가여승 힛따티야 담마와티 헤와비타라니 실 마타봐 (Tiththatiya Dhammawati Hewavitarane Sil Matava) 의 75세 생일을 경축하는 자리에서 소개된 바에 의하면, 그녀는 1906년에 태어났고 1916년에 종교생활을 시작하여 일생동안 변함없이 수행과 봉사의 생활을 하였다. 그녀가 한 일을 요약하면:

    -콜롬보 지역 여성들의 결혼과 장례비용을 도와주기 위해 “쿠란하나 사미티야”를 세움.
    -“스리 라훌라 마타 잡지”를 3달에 한번씩 발행.
    -20여년 동안 재가수도원을 조직하고 운영.
    -아뉴라다푸라에의 절에 미륵불을 위한 법당을 건설.
    -불사에 참여한 약 15,000명의 승려들에게 보시.
    -고아들과 도움을 청하려온 사람들을 도와줌.
    -다수의 재가여승에게 계를 줌.
    -본인의 어머니 이름과 같은 “헬렌 라나와케 아람마야” 건물의 초석을 1962년에 놓고 1965년에는 그곳에 보리수 나무를 심었으며,
    -스리랑카 역사 상 처음으로 전국에 있는 재가여승 협회를 만들고,
    -1974에는 연로한 재가여승들의 집을 사회복지부에 넘겼고,
    -1979년에는 다른 여승들과 함께 인도를 순례하며 불교의식에 참여하고 보시하였다.
    저자는 1992년 스리랑카를 다시 방문하였다. 재가수도원의 여승 수효가 감소됐을 것이라는 저자의 예상과는 달리 그 수효가 1989년에 비해 3-5배 증가하였다. 또한 집 없는 재가여승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는데 그들은 특히 아뉴라다푸라와 그 근처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살고 있었다. 정부, 승가, 다른 재가여승들로부터 보리수 나무 아래를 떠나라는 지시를 받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아뉴라다푸라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살 것이라고 한다.
    생각컨대, 중요한 것은 그 재가여승들이 어디에서 사는가가 아니라 하루 하루의 생활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 그리하여 끊임없이 길로 나가고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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