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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2018년 1월호] 탈조건화와 자기 용서 / 스텔라 박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18.01.20|조회수182 목록 댓글 0

    <스텔라의 마음공부>


    탈조건화와 자기 용서


    글| 스텔라 박



    쿠션 밖의 수행

    명상 수행을 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해본다. 명상하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내겐 이런 변화가 일었다. 철이 들면서부터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내 인식 체계에 담겨진, 검증되지 않은 신념들을 나로부터 분리해내는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 나의 쿠션 밖의 수행은 스스로 묻고 답하는 것에 집중돼 있다. 내 삶의 모든 순간의 경험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알아차릴 때,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떤 신념을 붙잡고 있기에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이 그처럼 불편한 거니?” 

    그렇게 계속 따지고 들어가보니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사회로부터, 친구들로부터, 대중매체들로부터, 책으로부터 스폰지처럼 빨아들인, 조건화된 가치관으로 만들어놓은 인식체계를 가지고 현재 이 순간의 모든 경험들을 비춰보고 있는 나를 알아차렸다. 

    알아차린 후에도 예전의 가치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하기야 건물보다도 더 단단하게 구축된 인식 체계라는 것이 어디 그리 하루아침에 쉽게 무너지겠는가.

    그래도 계속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들을 옭아매던가치관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이 온다. 그리고 우리는 구름이 아닌, 구름을 담고 있는 하늘이 되어간다. 이 과정이 디톡스, 탈 조건화, 참회, 회개이다. “적어도 어머니라면 자식이 아프다는데 괜찮냐고 물어봐야 하는 것 아냐?” 이런 신념을 붙들고 있다 보면 그렇지 않은 어머니를 대할 때 고통스럽다. 그리고 미운 마음이 인다. 나에 대한 측은한 마음도 인다. 하지만 어머니라도 자식 걱정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챙길 수 있다. 나의 어머니가 그녀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해본다. 그리고 그녀에게 있어서는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들이 최선의 선택임을 인정한다.


    탈조건화 되어 나를 보다

    탈조건화 되면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해서 이전보다 훨씬 더 깨어 있게 된다. 나는 내가 무척 정직한 줄 알았다. 나를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내가 너무나도 자주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내가 거짓말을 했던 이유는 인류애가 가득해야 비로소 가치있는 인간이라는 믿음, 가족과 친구들에게 헌신적이어야 좋은 인간이라는 믿음, “No.”라고 말하는 것은 비인간적이라는 믿음들, 그 외에도 여러 이유와 핑계들 때문이었다. 친구가 만나자고 한다. 친구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지금 내게는 혼자 있는 시간, 휴식이 필요하다. “미안한데. 나 지금 혼자 있고 싶어.” 이렇게 말하자니 뭔가 잔인한것 같다. 내 친구가 나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무척 섭섭해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가 섭섭해하지 않을 만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나중에 혹시라도 그 날에 대한 대화가 오갈 때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거짓의 내 일정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야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무척 괴롭고 피곤했다. 그런데 어느 틈에 나는 별 양심의 거리낌 없이 이런 거짓말들을 하고 있었다. 명상을 하면서 그런 나를 알아차리고 꺼이 꺼이 울어재꼈다. 그리고 내 안의 지배욕구를 본다. 친구가 내게 섭섭함을 느끼는 것을 교묘하게 조정하려는 나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사실 해결책은 단순하다. 선택하면 된다. 선택은 둘 중 하나이다. 나를 위해 휴식하고 사실대로 말하고 미움을 받던가, 아니면 친구를 위해 피곤한 내 몸을 이끌고 나가던가. 그런데 나는 내 몸도 챙기고 싶고 친구의 사랑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도, 연인도, 내가 있고 나서 있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성장한 우리들은 나를 희생하고라도 전체의 뜻에 나를 묻어가려는 경향이 크다. 그렇다고 서구 사회에서처럼 매사에 ‘나, 나의, 나를…..’을 강조하는, 자아중독자가 되는 것이가치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거짓말 하지 말라는 계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와 함께 불교에서도 거짓말 하지 말라는 것은 떡 하니 계명으로 명시되어 있다. 《아비달마법온족론》의 구절을 들여다보자. 그때에 고타마 붓다는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거짓말을 하는 이[虛誑語者]는 남을 속인 인연 때문에 포죄원(怖罪怨: 두려운 죄와 원한)을 낳아 몸과 마음이 거짓말의 업력으로부터 생겨나는 과보로부터 떠나지 못한다. 5포죄원(怖罪怨: 두려운 죄와 원한)에 대하여 적정(寂靜) 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그 누구든지간에 이번 생에서는 모든 성현의 꾸지람과 싫어함을 받으며 선법(善法)을 전수받아 증득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계율을 범하여 스스로를 포죄원(怖罪怨)으로 손상시키는 자가 되며, 죄도 범하고 타락하기도 하여, 대부분 박복하게 이번 생을 살아가고, 그러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친 후 다시 태어날 때면 나쁜 세계에 떨어지거나 지옥에 태어난다.”

    무시무시하다. 고타마 붓다가 세상을 떠나고 제자가 적은경이라 붓다의 육성인지 제자의 해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연법으로 볼 때 딱딱 들어맞는 말이라 몸을 소스라치게 떨게된다.


    내가 나를 용서하다

    나는 하다 못해 설명하기 귀찮아 ‘짜장면’ 먹었던 것을 ‘스파게티’ 먹었다고 했던 거짓말까지 포함해서 내 입으로 지은 수많은 구업에 대해 대성통곡하고 참회했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럴 때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면 모두 용서해 주신다고 하는데 나는 용서받을 곳이 없었다. 부처님 앞에 참회하면 될까. 내가 이제껏 이해하고 있는 붓다는 내 죄를 죄라고 규정하고 용서할 만큼, 오지랖 넓은 분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카르마를 용서해야만 했다. 

    “내가 알면서 또 때로는 모르는 가운데 생각과 말과 행실로 지은 모든 업에 대해 참회합니다. 특히 입으로 지은 모든 구업에 대해 참회합니다. 과거 나의 어리석음이 이런 업을 저질렀습니다.

    나는 거짓말 했던, 나의 행위를 용서하고 싶습니다. 나는 죄의식과 후회, 수치, 벌에 대한 두려움 등 부정적인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내가 나를 용서해주면 나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생각과 말과 행실로 사랑과 진실만을 드러내겠습니다. 내가 나를 용서함으로써 내가 자유롭고 행복하고 평화로워지는 것은 물론, 다른 이들도 용서받은 나의 진실을 만나게 되며 행복하고 자유롭고 평화로울 수 있게 됩니다. 난 더욱 친절하고 편한 사람이 될 것이며,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줄 것입니다. 난 내가 거짓말 한 업보를 용서하며 그 용서로 얻게 되는 자유와 평화, 행복을 받아들입니다.” 

    거짓말 하는 죄를 지었던 나는 이를 알아차리는 내 앞에서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내보인다. 거짓말 했던 나, 질투했던 나, 조정하려던 나… 내 안의 나를 바라보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준다. “괜찮아. 무지해서 그런 거잖아. 당시의 너로서는 어쩜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겠지. 이제 나와 함께 진실만을 말하고 죄짓지 않는 거야.”

    나는 내 앞에서 모든 가면을 내려놓는다. 나를 변호할 필요도 궁색한 핑계를 찾을 필요도 없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막을 칠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일 수 있도록 허락한다. 있는 그대로 허용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이런 사랑이다. 이 큰 사랑에 나는 혼절할 정도가 된다. 내가 꿈꾸어왔던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 무조건적인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 나는 내가 한 행위 자체가 아니다. 나는 내가 했던행위 때문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이를 깨닫는 순간, 내 몸에서는 뜨거운 불덩이가 일어나고 뜨거운 기운이 충만해진다. 

    나 자신을 용서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용서할 수 없었던, 용서하기 힘들었던 그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됐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세계관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음을 헤아린다. 그 최선의 선택이 그 당시의 내게 껄끄러웠던 것 뿐이다. 그에게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무엇이 진실인지, 우리는 모른다. “그저 오직 모를 뿐.” 하면서 과거의 기억에 대해서도 비판하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그대로 마음챙김한다. 그러다보면 그를 용서하게 되고, 당시의 나를 용서하게 되고, 그 상황을 용서하게 된다. 그렇게 놓아버리고 나를 자유롭게 하고, 기억을 자유롭게 하고 평화롭게 존재한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살아가기

    쿠션 위에서 마음챙김 수행을 계속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일상의 생각과 말과 행실을 하나도 놓침 없이 마음챙김하게 된다. 쿠션 위의 수행처럼 삶의 모든 순간을 진정으로 살게 된다.

    단 한 순간도 그냥 넘어감 없이 모두 깨어있는 의식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수백 수천 개의 CCTV가 돌아가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과 같다. 행위만 찍는 것이 아니라 의도까지 고스란히 찍는 카메라들… 그렇다고 내가 그앞에서 가식적으로 친절하고 선할 수는 없다.

    나는 진정 변화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긴장하거나 겁낼 필요는 없다. 그 카메라의 눈은 잘잘못을 시비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니까. 이는 사랑의 눈이다. 그렇다고 잘못한 것을 슬쩍 눈감아주는 눈은 아니다. 하늘이 보고 있음을 확연히 알게 되는 것은 물론, 결국엔 내가 하늘임을 아는 것이다. 삶이 정말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나는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했다. 오감을 통해 인식된 경험들이 과거 컨디셔닝된 가치관과 결합해 도둑놈 담을 넘듯, 마음에 진실이 아닌 거짓된 기억들을 쌓지 않도록, 깨어서 묻고 의심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더 이상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가치관, 진실이 아닌 가치관들은 폐기한다. 그렇다보니 거의 남은 가치관이, 붙들고 있을 가치관이 없어졌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모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붙잡고 있는 신념이 몇 가지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 죽음이 눈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중요한 것을 하라는 것. 늘, 항상, 언제나 사랑을 선택하라는 것. 수행은 세상을 바꾼다는 것.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수행이 라는 것.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하다는 것.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것. 오직 모른다는 것. 어쩜 남아 있는 이런 가치관들도 모두 해체되는 날이 올지 모른다. 순간 순간, 무엇이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내게 진실인지 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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