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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2019년 4월호] 《전쟁과 선》Zen and war -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 편집부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19.05.29|조회수465 목록 댓글 0


    < 책 소개 >





    국가는 종교를 어떻게 전쟁에 활용했는가


    《전쟁과 선》Zen and war





    지은이 |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저자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Brian Daizen Victoria)는 미국 앤티오크 대학 교수. 일본 고마자와 대학에서 불교학 석사 학위를, 미국 템플 대학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에서 불교에 귀의하여 일본 최대의 선불교 종파 조동종의 인가를 받고 정식 승려가 되었다. 종교인으로서 베트남 반전 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하여 40여 년 동안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연구했다. 특히 자비와 평화의 종교로 여겨져 온 불교가 일본 군국주의에 동원된 이유와 배경을 분석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연구 성과를 본격적으로 정리해 출간한 첫 번째 책 《전쟁과 선(Zen at War)》(1997)으로 학계와 종교계에 일대 충격을 불러왔다. 빅토리아의 통렬한 고발은 일본 선불교 승려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 협력한 과거를 잇달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슬라보예지젝,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 종교와 사회를 논하는 다양한 지식인들의 담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뒤이어 내놓은 《불교 파시즘(Zen War Stories)》(2003)에서 그는 선불교를 포함한 불교 전체로 시야를 넓히는 동시에 이름 높은 선사들이 저지른 교리 왜곡과 군국주의와의 야합을 한층 더 치밀하게 추적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중 우리는 기독교와 불교를 사랑의 종교, 자비의 종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사랑의 종교와 자비의 종교는 사랑과 자비만을 낳지 않았습니다. 종교는 폭력도 낳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종교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력의 역사가 씌여졌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 책을 쓴 일본 불교 소토선의 승려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는 종교와 폭력의 역사 가운데 최근의 역사,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와 종교가 어떻게 결탁했는지, 사랑과 자비의 논리가 어떻게 폭력을 정당화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의 불교는 6세기 중반 한국에서 전래된 이래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불교는 도쿠가와 시대에 그 세력이 절정에 달했으며, 사실상 국가 종교 역할을 수행합니다. 일본정부는 기독교를 축출하기 위해 불교 촉진책을 펼쳤고, 사찰의 구조를 피라미드식 형태로 만들어 중앙 사찰에서 모든 종단을 통제하는 체제를 확립합니다. 불교는 정부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승려들은 정부의 충직한 부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본불교의 특징은 사실 불교의 전래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명목상 종교의 자유를 부여했을 뿐, 어떤 종교의 추종자라도 민족적 도덕성과 애국주의에 반드시 맹세하게 했습니다. 일본의 종교 신도는 종교학자의 표현대로 본질적으로 민족주의가 새롭게 날조한 종교였으며, 불교는 이러한 신도에 편입됩니다.

    국가 신도는 신사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규제, 천황의 사제 역할, 국가신도의 의식 창출과 후원, 일본과 해외 식민지의 신사 건립, 취학 아동들에 대한 신도 신화에 입각한 교육과 그에 따르는 강제적인 신도 의식 참여, 그리고 타종교 집단의 확립된 신도 신화의 일부 양상들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에 근거한 그들에 대한 박해를 포괄하는 체제적 현상이었다. - p.44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로 변모하고 전쟁을 일으키면서 불교계에선 신불교 운동이 전개됩니다. 이 운동은 일본은 세계 유일의 참된 불교 국가이며 동양의 몰락에 대한 책임이 일본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 불교가 아시아의 모든 불교 중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일본의 불자들은 중국과 한국의 불자들을 깨어나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논리를 폄으로서 전쟁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합니다. 이런 변화 덕분에 일본 불교는 견원지간이였던 기독교와 화해합니다. 일본 불교와 기독교는 힘을 합쳐 전쟁을 야기한 애국주의를 찬양했고, 죽음과 파괴를 미화시킵니다. 러일전쟁 당시 지휘관들은 종교의 신앙과 전장에서의 용맹성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종교는 칼보다, 총알보다 효과적인 학살무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해 주류 종교계는 모두 애국적인 충성을 바쳤지만, 사람들의 생명을 희생하는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펴는 정부에 반대하는 소수의 승려도 있었습니다. 조동선종의 승려 우치야마 구도는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며 천황을 암살하려 했고, 불교부흥청년연맹과 같은 양심적인 종교인들의 조직이 반전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소수에 불과했고, 정부는 이런 저항을 효과적으로 차단했습니다. 결국 청일전쟁부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주류 종교계는 이데올로기적인 지지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전쟁에 관여합니다. 당시 종교계의 입장은 D.T.스즈키가 말한 짧은 대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종교는 무엇보다 국가의 존속을 추구해야 한다.'
    조동선종의 총무원장이자 소지사의 주지였던 세키 젠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평화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이상이다.
    평화는 인간 최고의 이상이다. 일본은 평화를 사랑한다. 우리는 평화와 근본적인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우리가 속해 있는 국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국가를 잊는다면 진정한 평화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조국에 대한 의무를 잊어버린다면 우리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주장하는 방식에 관계없이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기는 해도 언제나 일본의 전쟁은 평화의 전쟁이다." - p.125
    전쟁이 끝난 직후에도 종교계는 전쟁에 종교가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불교계가 전쟁의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 것은 전쟁이 끝나고도 시간이 흐른 1987년에 와서야 공식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군국주의에 사용되었던 종교의 이데올로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상급자에 대한 규율과 복종 그리고 충성이라는 전쟁 이데올로기는 고스란히 기업의 문화로 변모해 전후 산업계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대량학살을 벌일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학교를 통해, 기업을 통해 전파되고 유지되며 우리의 피에 흐르고 있습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인류는 바로 이 순간에도 종교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엔 성스럽거나 거룩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유명한 저작《만들어진 신》에서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오히려 윤리 또는 철학 체계로 볼 수 있고 그래서 내가 분노를 표현할 주공격대상이 아니다' 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도킨스가 보기에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선 인류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낮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가 말하듯이, 그런 불교마저도 광란의 역사에 얼마든지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교가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원인 중 하나로 일본에서는 승가가 독립성을 유지하는데 불가능했기 때문에 군사정부들이 국가적인 필요에 따라 종교적 수행을 규제하고 종속시켰다고 지적합니다. 저자는 폭력의 역사를 비춤으로서 군국주의와 민족주의, 애국심과 같은 전쟁의 이데올로기는 불교의 자비와 비폭력에 관한 가르침에 대한 배신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불자들에게 교리들을 윤리적 결과를 통해 사고하며, 부처의 본래 가르침에 의거해 검토할 것을 촉구합니다.아이러니하게도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불교가 전파된 이래 단 한번도 본모습 그대로 지켜진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석가모니 자신은 국가의 이상적인 형태로 공화제를 찬양했지만, 불교는 불교가 전파된 나라에서 공화제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저자는 불교가 그 초기의 가르침에 충실한 채로 남아 있었다면 불교는 그것을 받아들인 나라들 속에서 번창하기는 커녕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불교의 모든 윤리적 행위의 바탕에는 보편적 사랑과 자비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의 근본적인 가르침대로라면 전쟁이라는 인간의 대량살상 행위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국가의 이름을 외치며 총을 잡고, 언제든지 적이라고 설정된 대상을 향해 살인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불교가 진정한 자비의 종교, 평화의 종교가 되고자 한다면, 이런 모순속에 해답이 있을 것입니다.


    출판사 리뷰
    일본불교의 “지하세계” 탐험기 러일전쟁(1904-5) 당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양국 사이의 반전 평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일본 선불교의 지도자 샤쿠 소엔에게 연대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소엔은 자신의 선사상에 입각하여 냉소적으로 거절하였다. 비록 부처는 생명을 취하는 것을 금하였으나, 그는 또한 모든 중생들이 무한한 자비의 수행을 통해 함께 연합할 때까지, 평화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소이다. 따라서 양립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 조화를 일으키는 수단으로서, 살생과 전쟁은 필요한 것이오. 모든 생명에 대한 살생을 금지하는 평화의 종교라고 알려진 불교에서 어떻게 이런 반응이 가능할까? 이는 일본 불교만의 특수성일까 아니면 불교 자체에 전쟁 폭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광적인 핵심이 있는 것일까? 『전쟁과 선』의 저자 브라이언 다이센 빅토리아는 이런 의문의 답을 메이지유신 이후 오늘날에 이르는 일본불교사의 맥락에서 찾아보고 있다. 그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된 이유는 미국인으로서 선승이 되기 위해 일본에서 수련하던 초기의 경험 때문이다. 그는 불교계 대학인 가와지마 대학 졸업생이자 조동종 소속 선승으로서 자신의 신앙에 따라 당시 한창이던 베트남전 반대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조동종의 지도급 인사인 니와 렘포에게 호출되어 훈계와 함께 경고를 받았다. “선승들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네.” 그리고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승적을 박탈당하게 될 걸세.” 이 경험 이후 빅토리아는 25년 동안 “선승(禪僧)은 사회와 그 구성원들, 국가와 복지, 그리고 정치와 사회적 행동주의와 어떤 관계에 있으며,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탐구해왔다. 그에 따르면 그가 이런 문제를 연구하는 과정은 불교의 “언더그라운드” 혹은 “지하 세계”를 탐험하는 기묘한 체험이었다. “선승들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네.” 그가 탐험한 일본 선불교의 “지하세계”에서는 “전쟁과 살육은 부처의 자비의 현시로 묘사되었다. 선(禪)의 ‘무아’(無我)는 천황의 의지와 명령에 절대적이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복종이었다. 그리고 종교의 목적은 국가를 보위하고, 감히 국가의 자기 증대의 권리에 맞서는 나라와 인간을 처벌하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주장을 한 사람들이 서양에서는 선불교의 진인(眞人)으로 알려진 선사(禪師)들, 예를 들어 D.T. 스즈키나 하라다 소가쿠 같은 대가들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하라다는 전장을 깨달음을 위한 도량으로까지 칭송하였다. “저벅저벅 행진하라든가 탕탕 쏘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이는 [깨달음]에 관한 최고의 지혜의 발현이다. 내가 말하는 선과 전쟁의 일치는 [현재 수행 중인] 성전[러일전쟁]의 마지막까지 확장된다.” 선승들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발언과 전장을 깨달음의 장으로 격상시키는 발언 사이에는 어떤 연관관계가 있을까? 글쓴이는 이 모순적인 두 가지 발언 사이의 관계가 가장 첨예한 양상으로 드러난 시기를 1868년의 메이지유신과 1945년의 패전 사이로 본다. 그는 이 극단의 시기를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사회적 무기력증에 빠진 종교가 어떻게 정치권력과 결탁하는지를, 그리고 이러한 결탁이 종내는 신도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동원하는지를 살펴본다. 글쓴이는 나아가 이 극단의 시기가 단순한 일탈이었는지 아니면 선불교의 교리와 역사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문제의 발현인지를 묻는다. 따라서 책은 1868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극단의 시기 뿐 아니라 불교의 발원지 인도에서 불교가 전개되는 양상에서부터 동아시아 전체에 전파되면서 변형되는 양상까지 개괄하고 있다. 특히 글쓴이는 일본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선불교가 일본의 국가 종교 이데올로기인 신도(神道) 및 사무라이정신인 무사도와 결합하여 나타나는 “사무라이 선”에 주목한다. 결국 일본의 선불교는 철저하게 지배자의 종교가 되며 민중적 역동성을 상실한다. 1868년 메이지유신 당시의 불교는 이와 같이 “화석화된” 무기력한 종교가 되어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선불교는 내부의 창조적인 사유를 통해서 국가와 주체적인 관계를 갖는 데 실패하고, 국가의 방침을 불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철저하게 수동적인 국가 기구로 전락하였다. 과거사를 넘어서 이 책은 2006는 제2판이 발간되던 당시에 이미 독일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는 물론 폴란드어판까지 출간되어 유럽에서 열렬한 관심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본어판까지 출간된 상태이다. 특히 일본어판은 일본불교계의 ‘늦어도 너무 늦은’ 전쟁참회 성명을 이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었다. 비록 뒤늦은 참회 움직임이나마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화 정책과 전쟁동원의 고통이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는 한국 사회로서는 반가운 일일 것이다. 『전쟁과 선』의 한국어판은 최근에 역시 ‘늦어도 너무 늦게’ 나온 『친일인명사전』의 발간과 함께 일본제국주의의 문제가 결코 지나가버린 과거사가 아니라 극복되어야 할 현재임을 일깨우는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쟁과 선』이라는 책이 갖는 의미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아니 현재적으로 진행되는 과거사 극복이라는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하며 현재적인 의미가 있다. 이 책이 유럽에서 각광받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의 포스트모던 문화, 특히 포스트 모던 종교문화에 관하여 매우 중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근대성을 비판하는 탈근대주의 학자들은 서구 근대성이 기독교와 결합한 인간중심주의이자 남성중심주의적 정신성을 배태하였으며, 오늘날의 갈등과 폭력 그리고 환경의 위기는 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주장해왔다. 그들은 그 대안적인 참조점을 ‘동양적 정신성’에서 찾아왔으며 특히 선불교는 동양적 정신의 정수로 평가되었다. 이때 탈근대주의의 ‘주체의 죽음’은 불교의 ‘몰아(沒我)’ 혹은 ‘무아(無我)’라는 교리와 대응된다. 오늘날 종교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문화적 분야에서 넘쳐나는 ‘뉴에이지’ 경향은 이러한 평가에 대한 대중문화적인 응답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근대성과 계몽주의적 근대성을 조심스럽게 구별하는 일군의 학자들은 이러한 ‘동양적 정신성’이라는 것이 동양 그 자체의 본질이라기보다 서구적 욕망의 시선에 드러난 동양, 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요구하는 정신성에 붙여진 이름일뿐이라고 반박해왔다. 따라서 그들에게 오늘날 서구에서 각광받는 불교는 결코 ‘동양의 불교’가 아니라 ‘서구불교’일 뿐이었다. 특히 슬로베니아 출신의 라캉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러한 비판의 선봉에 서있다. 그에 따르면 뉴에이지 종교 혹은 서구불교는 “광란의 시장경쟁 속도에 대하여 내적인 거리를 두고 무관심할 것을 설교하는 대중문화의 한 현상으로서, 이는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듯 보이면서도 자본주의 역학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완벽하게 참여하는 방법(『죽은 신을 위하여』, 45쪽)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위하여 『전쟁과 선』을 폭넓게 참조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 출신의 한국인으로서 한국사를 전공하는 학자인 박노자 역시 이 책을 참조하면서 종교와 사회에 관한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종교는 극복되어야 하는가? 종교는 그 사회적 위치 상 이러한 문제와 갈등을 일으키는 적극적인 행위자로 기능할 수 없다. 실질적으로 모든 사회적 갈등은 정치적인 것이다. 이는 클라우제비츠가 갈등의 극단적인 형태인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라고 주장한 바와 같다. 또한 보수적인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의 근본이 인간을 “적과 동지”로 나누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전쟁과 선』의 저자 빅토리아에게도 일본의 불교는 전쟁을 일으킨 주체가 아니라 동원된 대상일 뿐이었다. 문제는 종교가 이와 같이 정치와 주체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동원되어 정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의 기제로 작동하게 되는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다. 『전쟁과 선』의 저자 빅토리아를 꾸짖었던 선사 니와 렘포의 발언은 정확히 그것을 보여준다. “선승들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네.” 정치에 무관심한 종교는 세계에 무관심한 종교이며 신자들이 구체적인 삶에서 견지해야할 종교 윤리적인 원칙을 제시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종교이다. 종교가 종교 그 자체에 머물 때 종교는 주어진 세계에서 무의미해지며 존재의 위기에 봉착한다. 비로 이 무기력증에 빠진 종교는 종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제도화된 종교 그 자체를 수호하기 위해 권력과 결탁한다. 이 책을 옮긴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 목사이다. 그는 옮긴이의 글을 통해 ‘종교 간의 대화와 화해’라는 선한 의지에 딴지를 건다. 그에 따르면 종교는 정치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와 대화하고 진정한 화해에 이르기 위해 종교간 갈등은 물론 종교 내부의 갈등도 불사해야 한다.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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