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루나 칼럼 >
밥 묵고 하자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묵자
요새 중국 사람들은 한자로 묵자라고 써 놓고도 묵자라고 못 읽고 ‘모찌’ 비슷하게 읽는 모양이다(모찌는 일본 찹쌀떡인데?). 물론 표준어인 만다린의 경우이고 중국 안에서도 저 변방에는 우리처럼 옛날 그대로 기역 받침소리를 아직 달고 있는 곳도 있나 보더라.
짐작하시겠지만 지금 우리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중 한 사람인 묵자(墨子Mòzǐ, Mo Tzu, Micius BC 470?~391?)와 그의 추종자들을 아우르는 묵가(墨家 Mohism, Moism)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참인데 얼마나 길어질지 혹시 밥 묵고 해야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이 양반 그저 간단히 넘어갈 인사가 아니란 말씀이다. 아시는가? 대륙굴기에서 우주까지 넘보는 중국은 2016년에 쏘아올린 세계 최초의 자기네 양자통신 실험위성의 이름을 묵자호(墨子號 ; Micius)라고 지었다는 둥.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한 학자들
웬 인공위성에 묵자 이름? 하시겠지만 묵자는 그냥 제자백가 가운데 이름을 남겼던 한 사상가가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니라 중국의 과학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며 병법에 있어서도 손자와 쌍벽을 이룬다는 이야기다. 중국 과학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였던 조지프 니담(Joseph Needham 1900-1995)도 묵가의 사상이 녹아 있는 묵경(默經)을 읽어 보고는 크게 감명을 받아서 고대 중국의 과학기술을 깊이 연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의 인공위성에 그의 이름이 척하니 붙은 걸 보면 적어도 그의 사상이나 행적이 한 때 공자마저도 대대적으로 배척하였던 중국 당국의 비위에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는 말이 된다. 한편 공격에 능한 손자의 병법에 반하여 수비 및 방어라면 묵자를 제일로 치는데 철통같은 수비와 방어로 침략군을 좌절시킴을 뜻하는 묵수(墨守)라는 말이 바로 묵자 때문에 생겼다는 말씀.
그나저나 부처님, 예수님만 해도 종교에 빈자리가 모자라고 제자백가 저리 가랄 정도의 잡다한 사상과 이념, 주장과 억지들이 들끓는 어지러운 판국에 웬 뜬금없는 묵자 얘기를 또 꺼내나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다. 지금 이 시점에 우리 한국 사람들이 갇혀 고생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해결 방법을 찾는데 있어서 묵자와 묵가야말로 적지 않은 실마리를 보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
묵자는 중국 전국시대, 그러니까 공자(孔子 Kǒngzǐ 쿵쯔 Confucius BC 551 - BC 479)보다는 좀 뒤이고 맹자(孟子 Mèngzǐ 멍쯔 Mencius BC 372년? - BC 289년?)보다는 좀 앞서는 기원전 4•5 세기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뭣 하나 확실한 기록도 없고 심지어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실제로 살아 있었던 인물인지 지어낸 인물인지도 아리송해 하는 학자들도 있는 형편이다. 왜 그렇게 됐냐고 하면 묵자를 따른다는 묵가라는 인간 집단들과 그 사상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에는 토사구팽 되어 쫄딱 망해 버린데다가 한나라 이후 유가가 득세하여 확고히 자리를 잡은 뒤에는 이 묵가 패거리는 지리산의 빨치산처럼 완전히 맥이 끊겨 기록마저 대부분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동방의 헤로도토스(Herodotus, Ἡρόδοτος BC 484 – BC 425)라 일컫는 사마천(司馬遷, Sīmǎ Qiān 쓰마첸 BC145? – BC86? 사실 헤로도토스는 여러 면에서 사마천의 상대가 안 된다)의 사기(史記)에서도 묵자는 따로 열전(列傳)으로 취급되지 않았으며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이라 이름 붙인 맹자와 순자의 열전 뒤에 고작 스물네 글자로 간략히 언급되고 말았다. 이미 이때는 유가가 세력을 잡았고 묵가는 거의 사라진 한나라 초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천 가라사대;
‘묵적은 송나라의 대부(大夫)로서 나라의 방어를 잘 하였고 절용(節用; 절약)을 주장하였다. 어떤 이는 공자 때 사람이라 하고 어떤 이는 그보다 뒷사람이라 한다.’
여기서부터는 일단 묵자가 실존인물이라 받아들이자. 묵적의 적(翟)은 묵자의 본이름이라고 하니 묵(墨)은 성이 되어야 하는데 이게 간단치가 않다. 그 당시 이런 성씨가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다 ‘묵’의 뜻이 그야말로 검은 ‘먹물’이기 때문이다. 이 ‘묵’자를 두고 예전부터 여러 해석이 있어 왔는데 이 묵가들은 종일 현장에서 뛰는 지원병 노릇을 하며 사회봉사를 하는 블루칼라 내지는 현장 투쟁의 운동권이었기 때문에 볕에 얼굴이 타서 이들을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묵자가 얼굴이 검은 남방 출신의 외국인이었다는 설도 있다. 혹은 묵자가 무슨 죄목으로 이마에 먹물을 들이는 형벌(墨刑, 入墨, Tattoo)을 받았다는 설, 늘 먹줄을 가지고 목재를 다듬는 일을 하는 목수였다는 설, 그리고 묵가들이 무슨 전투집단이나 컬트처럼 검정 유니폼을 입고 강력한 규율에 맞춰 단체행동을 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 경우 묵자는 그런 집단의 존경받는 지도자 내지 회장 격이 되겠다.
사실 묵가의 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다고 하여 전해오는 책, 곧 <묵경(默經)>이라고도 불리는 <묵자(墨子)>를 볼라치면 다른 점이 눈에 띈다.
공자나 노자 등 다른 제자백가의 책들은 거의 수장 한 사람이 지도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담은 서술이라 볼 수 있지만 <묵자>의 경우 어떤 특수한 집단이 모여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하고 걸러낸 결과 최종적으로 이것만은 해야 한다, 이것만은 지키자, 이것만은 돼야 한다 식의 결론을 낸 느낌을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묵자는 송나라의 대부 출신이었다고 사기에는 적혀 있지만 그보다는 동쪽인 노나라 태생인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사상 전체가 어떻게 하면 고통 받는 하층민을 대변하고 그들을 고통에서 구해내느냐에 집중되어 있는데다 전해오는 그밖의 여러 행적으로 보아 그 자신이 하층민 출신 기술자로 보인다. 묵자는 전국시대 초기에 활동하였는데 이때는 잦은 전쟁과 함께 철기의 보급이 본격화되고 소로 논밭을 가는 것이 일반화되는 등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였다. 따라서 하층민인 사농공상(士農工商)가운데서도 공민(工民), 즉 성냥바치들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커진 시기이기도 했다.
그야 어찌됐든 우리는 왜 이리 출신도 불분명한데다 이천 년도 더 된 켸켸묵은 옛날 사람의 뒤를 캐고 있는가? 그것은 그가 일찍이 동방의 전통에서는 아주 드문 일종의 불온사상(?) 내지 혁명사상을 가지고 유가과 맞서며 일세를 풍미했기 때문이고 그 불씨가 얼마 전부터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혁명당 사건에 엮이어 빨갱이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장기수가 되었던 신영복(申榮福, 1941 – 2016)은 묵자가 얼마 전부터 다시 세상에 나오고 세인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을 일컬어 이천 년만의 복권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묵자가 주장하고 퍼뜨린 사상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사상은 왜 이천 년이나 잠복해 있다가 이제야 다시 고개를 쳐드는가?
묵자의 사상은 춘추전국시대 당시에는 공자의 유가보다 훨씬 성행했던 학문이자 종교였다.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비롯한 하층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가이면서 다른 한편 전쟁도 지휘하는 등 유능하고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맹자는 맹렬한 라이벌 의식을 느끼며 ‘천하의 학설이 양주(楊朱 Yang Chu BC 440–BC 360)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로 돌아간다.’고 한탄했다.
묵자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농민을 비롯한 기술자들과 장인들, 무사들이었는데 이들은 철학과 기술에 관한 저술을 모두 공부하였으며 단체로 조직생활을 하였다. 아무튼 묵자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끊임없이 사회에 봉사하였으므로 심지어 그를 반대하거나 비난하는 자들로부터도 봉사와 헌신 한 가지에 대해서만은 칭송이 잇달았다. 전국시대의 법가(法家) 한비자(韓非子 BC 280? - BC 233)가 말하기를 묵자의 사상은 유가와 쌍벽을 이루면서 크게 드러난 학파[顯學]로 당대의 사상계를 지배했다고 하였고 여불위(呂不韋Lü Buwei ? ~ BC 235)의 <여씨춘추>는 이르기를 공자와 묵자의 제자들이 천하에 가득 찼다고 하였다.
그런데 묵자가 주창한 사상으로는 무엇보다도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사랑하라는 겸애(兼愛) 사상이 단연 돋보인다. 요즘에야 박애니 뭐니 해서 이런 것이 적어도 겉보기에는 당연한 소리 같지만 당시로서는 너무도 위험한 사상이요 말도 안되는 억지로 들렸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아성(亞聖)의 반열에 든다는 맹자마저도 이를 힐난하여 아비도 모르는 가르침[無父之敎]이라 했겠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의 아버지를 어찌 자기 아버지처럼 대한단 말인가 하는 것이 맹자의 항변이었고 그렇다면 유교는 결국 좁은 가족 이기주의로 떨어질 것이라는 게 묵자의 경고였다.
겸애 말고도 묵자의 히트 상품은 많다. 요새말로 하자면 노동의 가치에 관한 얘기라든지 잉여생산물의 재분배를 주장하는 등 원시 공산주의와 통하는 부분도 있으니 말하자면 동양판, 고대판 공산주의의 원조다. 이 세상에서 이런 얘기를 처음 꺼낸 이가 묵자라는 말이다. 그런가하면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주의, 평화주의, 반강권주의 등 무정부주의(아나키즘)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런 것들은 지금 21세기에도 나라에 따라서는 거칠게 제재당하거나 백안시되는 것이 눈앞의 현실인데 이천 년도 더 된 옛날에, 예수가 태어나기도 몇 백 년 전에 오고간 말들이라니 당시의 봉건 기득권층이나 다른 학파들에서 느꼈던 충격이 어땠을까 짐작이 쉬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묵자라는 사람을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이런 사상들을 품게 되었을까?
무릇 어떤 사상가를 이해하려면 그가 살았던 시대배경부터 알아봐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위에서 말했듯이 묵자는 하층민 출신으로 그 자신 기술자였으므로 그가 본 현실이 특히 주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하층민의 현실이었음은 자연스럽다. 춘추시대 말기와 전국시대 초기에 걸쳐 중원에는 너무나 참혹한 전쟁이 많았고 백성은 모질게도 수탈당하였으며 잦은 기근과 역병은 사람들을 한층 더 괴롭혔다. 이런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현실을 고민한 묵자는 이러한 참상의 원인을 깊이 고찰하였고 그것은 바로 지배층들이 지나치게 권력욕, 재물욕, 명예욕 등 갖가지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들을 채우려 하기 때문임을 간파하였다. 이 욕망 추구의 연쇄반응과 후과로 인하여 사람들은 생존에 급급하게 되고 이윽고 독약과 불로 서로를 공격하고 해치며 마침내 한 가족 안에서도 불신하며 화합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회의 부를 독차지한 사람이 그것을 못 가진 사람을 억누르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공격하고 재물을 많이 가진 자는 더 빼앗으려 안달한다. 그리고 배운 자가 못 배운 자를 업신여기는 세계 -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묵자는 당시의 세상을 이렇게 간략히 진단하였다.
‘배고픈 자 먹지 못하고 추운 자 입지 못하며 일로써 지친 자 쉬지 못한다.’
세상에 문제가 있음을 눈치채고 그 원인을 알았으면 이제 해결의 방안이 나올 차례다. 그런데 문제의식을 갖는 첫 단계부터 만만치가 않다. 일례로 작금의 한국 상황을 보면 같은 한국 사람들 사이에 너무나 문제의식부터가 다르다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러니 문제의 원인도, 그에 대한 처방도 한 지붕 아래, 한 이불 속에서도 각각으로 노는 것이다. 선비가 무엇이며 지식인이 무엇이뇨? 제대로 된 문제의식을 가진 이가 바로 그들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묵자는 이 모든 고통과 무질서와 혼란의 원인을 알아내었으니 그에 대한 처방이 필요하였다. 개인의 수양과 선의에 의한 자선으로 해결할 것인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일을 꼬이게 할 수 있다. 구세군이 불우한 이웃을 돕는 세상보다는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필요없는 세상이 낫다. 그리고 그러한 자선행위는 자칫 문제의 초점을 흐려 근본적인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지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이 눈먼 욕망 때문에 고통의 굴레에 빠져 끝없이 사바세계를 윤회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고통의 치료학’인 부처님의 가르침과 지침에 따라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닦아 부처를 이루면 이 굴레를 벗어나 해탈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묵자는 그런 내면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방향이 아니라 곧바로 현실의 물적토대인 의식주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물적토대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통치권력, 통치 시스템으로 눈을 돌린다. 이것들을 다스리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 평화와 안락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이들을 다스려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할 것인가? 묵자는 여기에 일생을 걸고 도전한다. 그리고 그 해답을 찾아낸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는 사랑[兼愛, 겸애, Universal Love]을 베풀라는 겸애설이 그것이다.
아니, 잘 나가다 어디로 빠진다더니 기껏 찾아냈다는 것이 고작 차별없는 사랑이라고? 얼핏 기독교의 ‘사랑’이 떠오른다. 그렇다. 묵자의 사랑은 공자의 어짊[仁]과도 다르며 불교의 자비(慈悲)와도 빛깔이 다르다. 공자의 어짊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지배층들의 평화다. 이들이 서로를 어질게 대하여 평화가 오면 백성들은 저절로 행복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자비란 욕심, 성냄, 어리석음의 어둠에 싸여 생로병사라는 윤회의 굴레를 쳇바퀴 돌며 괴로움에 젖어 있는 중생들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다.
그런데 묵자가 이렇듯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데다 그 사랑의 궁극적인 새암을 이 인간세상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느님이 계시는 저 드높은 하늘나라에 두고 있다니! 그래선지 한국 기독교, 특히 그 가운데서도 진보적인 개신교 인사들 중에서 반향이 일어났다. 일찍이 기세춘(墨店 奇世春, 1933 - )과 문익환(늦봄 文益煥 1918 - 1994) 목사가 <예수와 묵자>라는 책을 낸 바 있으며 문 목사는 예수와 묵자는 쌍둥이처럼 닮았다고까지 말을 하였다. 그뿐인가? 일부 진보적인 개신교인들 사이에서는 묵자의 어록인 <묵자편>을 바이블의 구약과 신약 사이에 끼워넣어 성경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키자는 움직임마저 있었다. 물론 세계 어느 곳보다 교조주의, 근본주의, 원리주의에 매달리는 많은 한국 개신교도들에겐 택도 없는 소리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묵자의 겸애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이른바 기독교의 무조건적인 사랑과는 통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박애는 정신적이고 희생적이며 무조건적인 부분을 강조한다. 반면에 묵가의 겸애는 철저히 세속적이고 실용적이다. 내가 남을 사랑해야 남도 나를 사랑하여 더 나은 세상이 될 것 아니냐인데 이를 이타적 이기주의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겸애든 박애든 실천하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말이다.
사랑의 실천이 공허한 말장난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제로 이행해야 할 하느님의 명령이라면 그러한 실천이 가능하게끔 사회의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는 것이 묵가의 입장이다. 따라서 겸애는 개인에 묶이지 않고 실천을 위해 연대로 나아간다. 그리고 장애물을 치우거나 개선해 나간다. 이제 묵자의 겸애란 지배층의 무한정한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새로운 통치 시스템, 사회시스템의 확립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을 통하여 최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생활 욕구를 채워 주는 것을 일컫게 된다. 요새의 시사용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경제정의를 실현하고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하여 복지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면 겸애가 곧 기독교적인 사랑이 될 것이며 그게 아니면 아니다.
겸애를 이렇게 단정하는 데는 우리가 몇 가지 사항을 톺아서 여기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우선 묵자는 인간 본성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성악설 편에 선다. 아시다시피 성악설이란 인간 본성이 험악한 현실을 맞닥뜨리면 살아남기 위해 악한 경향을 띤다는 판단이다. 이들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하자면 후천적인 교육과 수양, 훈련과 상벌이 필요하다는 것 아니겠나. 말하자면 유가(儒家)의 순자(荀子 BC 298? - BC 238년?)에서부터 법가(法家), 도가(道家), 묵가가 모조리 성악설이고 성선설은 사실상 맹자 하나뿐이다. 어떻게 보면 이상보다 현실을 직시한 쪽이 성악설을 주창한 이들이다.
그야 어찌됐든 성악설의 결론은, 사람의 선한 본성이나 경향에 기대어 덕으로 다스리자는 인치(人治)가 아니라 객관적인 법에 의한 다스림, 곧 법치(法治)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미국이고 한국이고간에 법치국가가 맞다면 이는 기본적으로 성악설 위에 세워진 나라라는 뜻이리라.
유가는 말하기를 인간의 욕구와 욕망은 이익 추구를 하게 마련이고 그것이 공동체의 분란과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욕구나 욕망 같은 것들을 입에 올리기를 꺼렸지만 묵자는 당연히 주제로 삼아야 할 것으로 간주하였다. 사실 묵자도 처음엔 유학을 배웠으나 많은 미비점을 발견하고 이를 보완하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다보니 독자적인 학파를 이루게 된 것이었다.
중국 제자백가
공자는 가라사대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고 하여 의(義)와 리(利)를 대치시켰는데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를 더욱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선비란 이윤이나 이익을 따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래가지고야 무슨 상업이, 경제가 제대로 일어날 수 있었을까! 양반집 아이는 돈이 필요하면 그냥 돈 달라고 해야지 구체적으로 셈하여 얼마 달라고 요구하면 장사치 같다고 부모에게서 회초리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묵자는 사람들의 이러한 의식주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를 결코 더러운 욕망이라 책하지 않았으며 유가에서처럼 경원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적극 긍정하였다. 그런데 묵자가 말하는 이(利)는 그냥 이익이 아니다. 더불어 함께 가지는 이익, 나누어지는 이익이다. 그리고 단순한 이(利)의 늘어남이 아니라 이것이 모든 구성원들에게 공유되고 나누어지는 것이 목표였다. 이것이 묵자가 말한 의(義)로움이었다. 이익이 모두에게 공유되지 않고 고루 분배되지 않으면 정의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사람은 각자가 자기 이익만 주장하다보니 혼란이 오므로 사회 구성원들끼리 잘 합의해서 표준적이며 보편적인 사회의 공의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묵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군주의 통치 시스템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만백성이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질서가 잡혀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군주의 무절제한 욕망에 인민이 휘둘리지 않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제대로 된 시스템을 구축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분석과 당위성만으로 어떻게 군주를 이 시스템 안에 붙잡아 둘 수 있을까? 요즘같은 21세기의 법치국가에서도 최고 통치자가 제멋대로 굴기 시작하면 참으로 이를 제어하기 어렵다. 명목상으로는 시민의 권리를 절차에 따라 일시적으로 위임하였을 뿐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권리를 장기간 빼앗긴 것이며 투표의 순간이 지나면 곧바로 그 위임받은 자로부터 멸시와 핍박을 받는다. 어디 국가원수뿐이랴? 한국의 국회의원들을 보라! 평소에는 나 몰라라 개판쳐 놓고 선거 때에 줄지어 길바닥에 무릎 한 번 꿇으면 그만이다. 이럴진대 그 옛날 봉건 군주가 뭘 바라보고 이 시스템에 자신을 고개숙여 고분고분 따르고 싶었겠나.
놀라지 마시라. 여기서 묵자는 인격적인 하느님을 끌어들인다. 세상의 질서를 위해서는 단순히 강력하고 잘 짜인 통치권력과 국가권력이 있어야 한다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 통치 권력과 시스템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구속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군주는 하느님의 뜻을 대행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주신 법치의 시스템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군주를 정기적인 선거에 의하여 뽑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이를테면 미국의 건국이념과도 큰 차이가 없을 지도 모른다. 훗날 전한(前漢)의 대표적 유학자인 동중서(董仲舒 BC 176? ~ BC 104)가 천자를 제어하기 위해서 하늘의 명령[天命]을 끌어들인 원형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로서 묵가는 일종의 종교집단이 되었고 그 도그마에 의하여 묵가의 멤버들은 종교적 사명에 헌신하게 되었다.
이렇듯 묵가의 집단은 종교적이면서도 비밀결사의 성격을 띠었다. 사유재산은 공동체에 공유되었고 개인적인 명리를 탐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으며 교리를 어기는 자는 자기 자식이라고 해도 주저없이 죽여 버리기도 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진나라의 조정에 묵가 조직의 책임자[巨子]인 복돈이 있었다. 어느 날 복돈의 아들이 살인죄를 저질렀는데 복돈이 나이도 많은데다가 죄인이 외아들이라 진나라 혜왕은 복돈에게 죄를 감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복돈은 묵가의 법을 들어 남을 죽인 자는 죽어야 하고 남을 해친 자는 벌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 온 세상의 대의이므로 묵가 사람인 자기는 묵가의 법을 지킬 수밖에 없다면서 자기 아들을 처형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엄격함은 훗날의 법가나 무슨 이념 서클을 연상시키거니와 이는 묵가의 사상이 높이 평가되는 요인이 된 동시에 너무 빡빡하고 살벌하여 누구너 선뜻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되기도 했다.
한편 묵가에서는 제자들을 각자 특기와 적성에 맞게 나누어 길러내었다. 책과 문헌을 정리하는 설서(說書), 수공업과 군사기술, 성곽방어 등을 몸으로 때우는 종사(從事), 묵가의 이론을 전파하고 유세하며 설득하는 담변(談辯)이 그것이다. 공자는 시와 서, 예와 악 등 여러 과목을 제자들 하나하나가 모두 충실히 익혀 전인적인 군자가 되길 바랐지만 묵자는 전문가 양성에 주력하였다.
이상이 묵자의 겸애에 관련하여 살펴본 바이거니와 우리가 정작 묵자의 행적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는 유명한 반전 사상가인데 실제로 행동에 뛰어들어 여러 전쟁을 멈추게 한 능력있는 전략가였으며 군사 지휘자요 발명가, 과학자였다.
전쟁은 백성들에게 재앙을 주므로 묵자는 모든 전쟁을 반대하였다. 제후국들 중에서 누가 전쟁을 일으키려는 낌새를 보이면 그는 곧바로 그 나라로 달려가 제후와 대면하여 말리고 설득하였다. 그래도 안되면 침략당할 나라에 추종자들을 이끌고 찾아가 그 나라를 군사적으로 방어하였다. 송나라를 침략하려던 초나라의 왕을 열흘 동안 걸어가 설득하여 전쟁을 그만두게 한 적도 있다.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는 것도 저지하였으며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려는 것도 막았다. 불가피하게 전쟁이 일어나면 침략 당할 나라로 달려가 방어를 주도하였다.
송나라를 치려는 강대국 초나라의 혜왕 앞에서 묵자와 공수반(公輸般)이 공격과 수성의 모의 전투 시뮬레이션 게임을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공수반은 당대 최고의 목수이자 군사기술자로서 공성 무기인 고가 사다리차, 곧 운제(雲梯)를 발명한 사람이다. 이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공수반은 일반적인 공성 방법과 자기가 자랑하는 운제를 이용한 공격을 하였다. 그리고 성 아래로 땅굴을 파는 방법 등 아홉 가지 방법으로 공격을 했지만 묵자는 이를 모두 물리쳤다고 한다. 그러자 공수반이 크게 화를 내면서 ‘내가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을 알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고 하자 묵자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고 한다.
‘내가 보인 이러한 수성 방법은 내 제자 금활리(禽滑厘) 등 삼백 명이 이미 알고 있고 그들이 이미 송나라 쪽으로 갔으니 나 한사람 죽여 봐야 아무 소용이 없소이다그려.’
결국 초나라 혜왕은 송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거두었다고 한다.
당시 묵자는 모의 전투 과정에서 연발식 화살 발사장치, 원통형 방어무기, 수중음파탐지기, 독가스 등 온갖 첨단기술을 동원하였다. 중국이 서구에 한참 앞서 이런 첨단 무기들을 개발했었는데 훗날 허무하게 서양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을 보면 아연하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만 시작은 역시 반일 뿐이다.
이렇듯 실전에 있어서도 힘 약한 나라의 방어를 위해서는 침략군이 도저히 성을 함락하지 못하게 할 갖가지 방어무기와 전술이 동원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이 묵자와 그의 무리들이 정교한 방어무기를 많이 개발하여 상대편의 공성 무기보다 전투에 있어서 우위에 섰기 때문이다. 묵자가 개발한 방어 무기들은 지금 중국의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이렇게 목숨 바쳐 방어해 준 덕분에 생명을 연장한 약소국이 위기를 넘긴 후 차차 부강해지더니 이제는 도리어 이웃 나라를 침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에 묵가들은 거꾸로 예전의 침략 국가를 도우러 가야할 형편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밑 빠진 독이었다.
이러한 사태를 맞아 묵자는 다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제후국들이 만약 하나로 통합이 된다면 이러한 비극은 근원적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희망하게 되었다. 전쟁 종식을 위해서도 그렇고 그가 말하는 이상인 겸애를 위해서도 그러했다. 최대다수의 기본적인 생활보장은 정치단위의 규모가 클수록, 그리고 정치단위 내부의 조직과 질서가 안정되며 확고하고 일사불란할수록 달성될 여지가 높아질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묵가들이 심사숙고 끝에 결국 택한 나라가 서쪽의 진나라였다. 현재의 남북한도 만약 하나로 통일이 된다면 양쪽의 전체 주민들에게 고루 겸애를 실천할 여지가 훨씬 높아질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통일을 하려면 어떤 기준이나 명확한 표준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묵자는 생각하였다. 어쩌면 그들이 무사였고 공돌이였으므로 전장이나 현실 생활에서 자주 이러한 문제에 부닥쳤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이야기는 훗날 진시황의 도량형 통일이나 문자 통일을 떠올리게 하는데 실제로 진시황의 이런 업적들은 진나라로 들어간 묵가들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오쩌둥
오늘날의 중국 사람들도 대륙의 통일을 지향하며 분열과 혼란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여러 시행착오로 수많은 인민을 도탄에 몰아넣어 굶겨죽인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둥 Máo Zédōng 1893년 - 1976)이 여태 중국 사람들의 영웅으로 숭앙받고 있는 것도 혼란의 중국을 통일하여 어쨌든 질서를 잡아 준 공로가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의 홍콩 사태라든지 신쟝이나 티베트의 독립 문제를 대하는 중국 사람들의 자아중심적인 경직된 편집증의 정체를 이해하거나 설득하려면 민주화나 민족자결의 당위성만으로는 씨가 먹히지를 않는다. 중국인들의 이런 천하혼란에 대한 두려움을 반드시 고려에 넣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고대 중국의 사상가들 가운데 묵자의 특이한 점은 사상가로서보다는 기술이나 과학에 관련된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그 중 몇 가지를 들자면, 삼년에 걸쳐 나무로 새를 만들었더니 날기는 했지만 하루만에 부서졌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거꾸로 된 상이 맺히는 카메라의 원리를 발견했다는 기록도 있다. 게다가 묵자가 ’지구는 둥글고 움직이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기하학이나 논리학에 관한 놀랄만한 언급도 있는데 가령;
- 원은 하나의 중심에서 같은 거리다. [圜, 一中同長也]
- 힘은 형체가 움직이는 원인이다. [力, 刑之所以奮也]
- 조건, 그것을 얻으면 이루어지는 것이다.[故, 所得而後成也]
- 필요조건, 그것이 있다 해도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없으면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 [小故, 有之不必然, 無之必不然]
- 충분조건, 그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렇게 되고, 그것이 없으면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나타나면 그것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大故, 有之必然, 無之必無然 若見之成見也]
그렇다면 묵자가 남긴 묵가의 경전인 <묵자>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묵학(默學)은 한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자취를 감추었었다. 묵가와 함께 사라졌던 <묵자>는 1894년에야 복원을 마쳤다. 서한(西漢) 시대에 71편으로 정리되었던 <묵자>는 그 후 18편이 없어지고 현재 53편만 전한다. 양계초(梁啓超, 량치차오 1873- 1929)가 이를 연구하였으며 호적(胡適 후스 Hú Shì 1891 - 1962)이 중국철학사대강(1919년)에서 현대적인 연구를 하였다. 그러다 중국의 공산혁명 이후에는 다시 연구가 더뎌지게 되는데 이는 그 당시 묵자의 하느님 사상이 권력에 거부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반대론은 계급투쟁을 반대하는 논리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위에서 소개한 겸애(兼愛)와 비공(非攻) 외에 <묵자>에 실려 있는 묵자의 사상에는 어떤 것들이 더 있는가?
묵자는 물자의 절약[節用]과 의례의 간소화[節葬]를 강조하였다.
궁중에서 호화로운 악기를 만들어 음악을 즐기는 것을 반대하였다[非樂]. 정치인의 흥청망청을 경계함이다.
운명론을 거부하였으며[非命] 운명은 스스로 얻는 것이라 하였다.
게으르고 가난하면서도 운명을 내세우며 고고한 척 하며 생산활동을 천시하고 오만과 안일을 탐하는 유학자들을 비판하였다[非儒]. 먹고 마시는 것은 탐내면서도 노동은 싫어하며 헐벗고 굶주려 굶어죽고 얼어죽어도 거기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 유학자라고 했는데 전부는 아니지만 조선시대 유학자들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임금은 따르라고 했다. 임금이 백성의 민정을 살피는 일도 중요하며 그렇게 해야 선악에 따라 상벌을 내릴 수 있다고 했다[尙同]. 효율적인 겸애를 위해 사회의 가치를 일원화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현인을 숭상하라. 임금은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고 무능한 사람을 강등시켜야 한다. 재능만 있으면 출신에 관계없이 보통 사람들도 얼마든지 관직에 오를 수 있음을 역설했다[尙賢].
하늘의 뜻을 살피고 귀신의 존재를 밝힌다[天志. 明鬼]. 하늘은 만물의 창조자이며 주재자로 의지가 있다. 천체의 운행과 자연계의 변화 등으로 인간세상의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하늘이 백성을 이처럼 사랑하사 임금이 만일 하늘의 뜻을 어기면 천벌을 받고 하늘의 뜻을 받들면 상을 받는다. 귀신의 존재를 믿으며 귀신은 인간세상의 임금과 귀족들에게 선악에 따라 상벌을 내린다. 하느님은 인격신이지만 몸이 없다(따라서 하느님의 인격은 섭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민중과 별도의 인격을 갖는 게 아니라 민중의 뜻이 바로 하느님의 인격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렇게 독특하고도 특출한 사상을 지니고 헌신적인 봉사와 실천을 한 묵가가 왜 이천 년 동안이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야만 했을까?
먼저, 이들의 조직이 준군사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직은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혼란기에는 존재가치가 있고 월등한 역할을 할 수 있었으나 일단 천하가 통일되고 안정기에 접어들면 정권을 차지한 새로운 지배층에게는 당연히 불필요한 위험요소가 된다. 난이 끝나면 의병은 해체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일제시대의 독립군이나 여러 무장단체들이 해방 후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을 생각해 보라. 묵가의 무리들은 천하통일의 후보자로 진나라를 택하여 이를 도왔는데 일단 진이 천하를 통일하자 묵가는 제국을 위협하는 잠재적인 후보자로서 맨 먼저 토벌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잔존 세력도 한무제 때에 완전히 거덜이 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묵가의 그 혁명적인 사상에 있었다. 하층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겸애를 주장한 묵자의 사상은 전국시대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유가와 함께 가장 영향력이 큰 사상이었다. 하지만 전제군주의 입장에서는 사회계급을 타파하고 평등을 주장하는 무리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외부적인 요인뿐만 아니다. 묵학 자체의 너무 높은 이상과 학설이 현실과 틈을 벌려 후대에 제대로 계승 발전되지 못했다는 이론도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전국시대의 뛰어난 사상가요 과학자며 평화의 실천가인 묵자가 다시 필요한 시대가 다가왔다. 단지 그 무대가 중원의 벌판에 국한되어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구촌 방방곡곡으로 확대되었을 뿐이다. 부유한 나라의 부유한 계층은 살빼기에 돈과 시간을 쏟아붓고 바로 그 이웃 골목, 이웃나라에는 굶주린 아이들의 퀭한 눈망울이 허공을 바라본다. 아직도 저 아프리카의 사반나에서부터 아시아의 뒷골목, 아메리카의 산골짜기에 이르기까지 ‘배고픈 자 먹지 못하고 추운 자 입지 못하며 일로써 지친 자 쉬지 못한다.’ 세계화도 좋고 현대화도 좋다. 하지만 밥부터 묵고 하자. 영적인 성장, 웰비잉 웰다이잉 다 좋다. 밥이 사랑이다. 예술도 학문도 좋고 운동도 종교도 다 상관없다. 하느님 나라 부처님 나라 어디 있느냐 우리 이제 밥 묵고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