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음악에 관한 한 생각(1)
목차
1. 불교음악과 수행
1) 세존의 음악관
2) 청각문화의 현실
3) 미국 불교에서 불교음악 수용의 사례
2. 불교음악과 선음악
1) 전통 불교음악과 전통 선음악
2) ‘삶의 무상성’과 그리스도적 ‘동체대비’의
사상이 드러난 서양의 수많은 명곡
3) 한국의 현대 선음악
① 김영동씨의 선음악
② 김도향씨의 태교음악
③ 뉴에이지 음악
④ 그밖의 한국의 명상음악
3. 선음악의 발전을 위한 제언
참고문헌
선음악에 대한 고찰에 들어가기 위해 필자로서는 일반적으로 운위되는 불교음악을 살펴본 뒤, 불교음악 내에서 선음악에는 어떠한 것이 있으며, 이러한 선음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하는 순서로 논의를 진전시켜보고자 한다.
1. 불교음악과 수행
1) 세존의 음악관
세존(世尊; 석가모니 부처님)은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경전 상의 여러 곳에서, 우선 세존은 가무(歌舞), 즉 음악을 금지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아함경』을 보면, 세존이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비구들에게 현성팔관회의 법(法)을 설할 때 음악을 금지하고 있는 대목과 마주칠 수 있다. 또한 『장아함경』 권 제11 『선생경』에는 장자의 아들 선생(善生)에게 이르기를 여섯 가지 재물을 손상케 하는 업(業)이 있으니, 그중 하나가 기악과 가무에 미혹되는 것이라 하여 역시 음악을 금지하고 있다. 『증일아함경』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속박하는 데에 아홉 가지가 있는데, 세존은 노래하고, 춤추고, 기악 하는 걸 첫 손에 꼽고 있다. 『우바새오계위의경』에서는 노래와 춤, 음악, 악기 연주가 방일함의 원인이 될 수 있으니 금하라고 한다.
이러한 경부(經部)에서뿐 아니라 율부(律部)에서도 세존은 비구, 비구니는 물론 재가신도에 대해서까지 음악을 금지시키고 있다. 『마하승기율』에서 세존은 말한다. “오늘부터 악사들의 기악을 보지도 듣지도 말아라. (중략) 공연을 지나가다가 보게 되면 죄가 되지 않지만 만약 일부러 가서 본다면 비니죄(毘尼罪)를 저지르는 것이다.” 『마하승기율』의 다른 대목에서 세존은 길거리에서 공연을 본 비구니를 나무라면서, “이제부터는 기악을 듣지도 보지도 말아라. 한번 들은 사람은 반드시 다시 듣게 되느니라. 만약 비구니가 기악을 보았다면 비구니의 가벼운 죄를 범하느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세존은 음악을 영원히 금지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보았을까? 『법원주림』(法苑珠林) 제36 패찬편 「음악부」에 의하면, 세존 재세시에 사위성 사람들이 음악으로 세존을 찬탄하고 스님들께 공양하였다고 한다. 이에 세존은 기악을 지어 스님들을 공양한 공덕에 의하여 미래 일백겁 중 악도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한다. 한편, 『도세품경』에는 보살에게 청정하게 하는 열 가지 일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불법을 모시는 절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노래로 찬탄하여 맑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중생을 위해 법문을 전해 주는 것이며, 존신을 모시는 절에서 기악을 하고 금, 생, 적 등의 음악으로 부처님의 탑과 절에 공양을 올리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장아함경』의 『석제환인문경』에서는 음악을 예찬하는 세존의 모습이 보인다. “착하고 착하도다 반차익(般遮翼)이여, 그대는 청정한 음성과 유리금으로 여래를 찬탄하는구나. 그대의 금과 그대의 소리는 길지도 짧지도 않고 완곡하고도 애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구나. 그대가 연주한 금 소리에는 모든 뜻이 다 갖추어져 있어 욕망에 얽매임도 있으며, 범행과 사문과 열반도 설하고 있구나.”
이와 같은 검토를 통해, 세존은 금지할 음악과 긍정적인 음악을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세존은 수행자를 어지럽히고 수행에 방해가 되는 음악은 금하고, 불보살을 찬탄하며, 고(孤),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진리를 설파하는 음악은 권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존이 말하는 긍정적 음악이든 부정적 음악이든, 인간은 청각을 통해 음악을 지각한다. 그런데 인간의 5가지 감각 중에 청각이 지니는 특징이 무얼까?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중에서 가장 예민한 감각이 귀라는 과학적 실험결과가 있다. 귀보다는 눈이 더 예민해 사람한테 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 수 있다. 실제 실험에서 실험참가자들에게 영상과 소리가 있는 화면을, 처음엔 영상만 보게 했다가 이어 소리만 들려주었다. 그리고 순서를 반대로도 해보았다. 이어 어느 쪽이 만족도가 더 높냐고 했더니, 대부분이 영상을 못볼지언정 소리를 듣는 쪽을 택하겠다는 응답이 나왔다.
능엄경(楞嚴經)의 핵심 교의 중 하나로 꼽는 이근원통(耳根圓通)도 이런 청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이근원통이란 “귀에 의지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소리를 내서 소리를 듣고 관(觀)하는 수행이 가장 쉽게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이행문(易行門: 용수보살이 설한 자성[自性]을 깨닫는 쉬운 방법)으로서 염불수행의 중요성을 뒷받침할 뿐 아니라, 또한 현대인들에게 좋은 음악이 지니는 중요성을 각성케 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2600년 전에 세존이 그토록 간곡하게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에게 좋지 않은 음악을 금하도록 역설한 까닭도, 부정적인 음악이 인간의 청각을 통해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염두에 두어서일 것이다. 또한 세존이 긍정하는 좋은 음악이 미치는 영향력도 좋은 쪽으로 대단할 수 있음은 물론이겠다.
2) 청각 문화의 현실
이와 같이 마음을 가장 자극하는 감각은 청각이라고 과학이나 불경에서는 말한다. 또 우리가 숨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있는 의식은 듣는 의식이라 하며, 어느 신문에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사람이 환자 주변에서 하는 말을 다 들었다고 하여 놀랐다는 기사도 보도된 적이 있다. 그러기에 절집에서 임종 때 마지막 가시는 분을 위해서 하는 염불, 조념염불(助念念佛)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요즘에는 심리학 분야에서 음악을 수단으로 마음을 치료한다느니, 젖소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었더니 젖이 더 많이 나왔다느니, 식물에도 좋은 음악을 들려주었더니 더 잘 자랐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어떤 학자는 소리에도 긍정적인 소리와 부정적인 소리가 있는데 가장 나쁜 소리는 기계톱으로 나무 자르는 소리이며, 음악으로는 랩 음악이라 했다 한다. 이런 소리 했다간 요즘 아이들한테 딱 원성사기 알맞을 뿐 아니라, 시대에 뒤진 구닥다리 소리라는 힐난을 듣기 십상이겠지만 일리있는 말이라 생각된다. 그러면서 필자를 포함해 불자들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마저, 세존이 꾸짖고 경계한 좋지 않은 음악에 내맡겨두고도 태평하게 지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케 한다.
동양 철학에서 눈은 양의 기운으로 태양과 연결되고 귀는 음의 기운으로 달로 상징된다. 현대 문화는 육근(六根)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즉 육근의 민주적 조화를 이룬 육근이 골고루 참여한 문화가가 아니요 TV 등 영상문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눈’의 기능만 유난히 발달한 문화다. 귀를 통해 전수되었던 과거의 교육 환경과 달리 현대의 아동들이 주의력이 산만하고 심리적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이유도 다 ‘눈’ 중심의 편향된 교육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일지 모른다.
3) 미국불교에서 음악 수용의 사례
모름지기 ‘눈’과 ‘귀’의 조화로운 발전을 도모해야 하겠다. 이러한 데서 좋은 불교음악, 선음악은 ‘귀’의 발전에 기여한다 하겠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불교계에서는 좋은 음악을 널리 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던가? 세존이 하도 곳곳에서 음악과 춤에 대해 금하라는 말을 많이 해서인지 한국불교 역사에서도 그렇고(물론 불교가 국교이다시피 했던 신라, 고려의 경우는 예외지만), 미국불교 역사에서도 불교계의 음악 수용이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이야기 미국불교사』라는 책을 보면 이와 관련된 대목이 나와 있다.
불교를 서구화하려는 방법을 놓고 여러 고민을 해 본 결과 미국 출판업자이자 불교를 열심히 공부하던 폴 카루스는 음악 도입이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카루스는 달마팔라의 싯구와 그밖에 불교의 경구를 베토벤과 쇼팽의 음악과 독일민요에 접합시켰는데, 카루스의 이 ‘과감한 시도’는 그와 서신 왕래를 하던 스코틀랜드 승려 아난다 메테야의 강한 반대에 부닥친다. 메테야는 국제불교도협회 의장이었고 3,000부가 발행되는 〈불교〉(Buddhism)지 편집장으로, 랭군 본부에서 카루스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낸다. “불교도에게 음악은 감각에서 추출한 추잡한 것들 중 하나입니다. 불교라는 종교는 음악을 신도들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원인 중 하나이므로 삼가하라고 가르친 점을 귀하께서는 망각하신 듯합니다.” 세존이 역설한 부정적 음악에 대한 경계를, 메테야는 음악 일반에 대한 금지로 극단화시킨 것이다.
카루스는 메테야의 반대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지만, 메테야에게 붓다는 감각적 쾌락의 극단이나 금욕주의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추구하지 말고 중도(中道)의 길을 가도록 가르쳤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또한 시와 마찬가지로 음악도 매우 저속한 생각뿐만 아니라 매우 숭고한 사상도 표현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이어 카루스는 메테야에게 스즈키가 번역한 『대승기신론』의 한 부분을 따서, 마명대사는 파탈리풋트라 사람들에게 “고전적이고 슬프면서 곡조가 좋은 가락을 작곡해 인생의 비참함과 공허함 및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무아(無我)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도”하여 불교도로 개종시켰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카루스는 아잔타 동굴 벽화에 기타와 다른 악기들을 가진 승려들이 그려진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유럽의 고전음악은 깊은 종교적 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므로 가히 불교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쇼팽의 야상곡 37번 작품을 ‘열반을 향한 염원’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승려인 메테야보다 경전과 불교역사에 더 충실한 쪽이 카루스임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설득에도 메테야는 자기 의견을 굽힐 줄 몰랐지만, 카루스는 캘리포니아에서 많은 동조자를 얻었으니, 가장 열성적 후원자는 새크라멘토에 있는 불교교회 주지 마찌난다 스님이다. 마찌난다는 ‘수년간의 고생’ 끝에 300명 이상을 불교로 개종시켰으며, 자신의 노력 중에서 스스로 미국인에게 맞게 작사·작곡한 노래(예를 들어: ‘나의 붓다 곁으로 더 가까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카루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그리스도교 숭배의식을 본떴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붓다도 로마에 가면 로마 사람이 하듯이 행동하라고 가르쳤어요.” 이와 같이 카루스와 마찌난다의 사례는 불교계에서 음악을 수용하는 경우에 참고할 수 있는, 바람직한 중도적 접근의 사례가 아닐까 한다.
선사들 가운데는 수행 중 삼매 속에서 들려왔던 음악에 대해 소참법문이나 대담에서 말한 분이 계시다. 또한 많은 경전에 따르면, 세존이 성도했을 때나 법열의 경지에 들었을 때 음악이 울려 퍼졌다 한다. 어쩌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전통 속의 훌륭한 불교음악이란, 이렇게 수행 중에 삼매에 든 가운데 하늘에서 들린 음악을 기록한 건지 모른다. 적어도 하늘에서 나는 음악소리를 들을 정도에 버금가는 수행 속에서나 만들어지고 연주되었으리라 추측해본다. 수행 속에서 감각이 정화되지 않고서는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작품을 써내고 연주하기가 불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우리 모두가 수행을 여법히 해나갈 때만, 건강한 청각의 회복을 통해 연주나 작곡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좋은 음악을 선별해 자신에게는 수행의 조도(助道)로 활용할 수 있을 테고, 특히 아이들에게 들려주어 그네들의 불심을 함양케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