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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2021년 3,4월호] 미주한국불교 역사에 관한 책 2 / 김형근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1.05.01|조회수263 목록 댓글 0

< 미주한국불교사 자료 >

 

 

 


미주한국불교 역사에 관한 책 2

 

 

1964년 서경보 스님에 의해 시작된 미주한국불교 역사 기록에 관한 책자로는 LA관음사, 뉴욕불광선원에서 사찰이름으로 년보와 주보를 묶어 단행본으로 출판하였고, 서경보스님, 숭산스님, 채인환스님, 강청화스님, 성해스님, 혜성스님, 이한상 거사에 관한 개인 활동을 정리한 자서전이나 활동을 정리한 책자 등이 있는데 미주현대불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은 총 12권이다. 이 책들 외에는 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외에 2004년에 미주현대불교 주관으로 뉴욕시 플러싱에서 열린 ‘미주전법 40주년 기념행사’ 행사 책자가 있다. 이 책자들은 당시 미주한국불교를 기록하는 언론 활동이 없는 시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역할을 하고, 그 기록을 통해 미주한국불교사를 기록할 수가 있기 때문에 기록한 사찰이나, 스님 당사자에게도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 책들의 발행처와 발행 년도, 내용 등을 간략하게 5-6번에 걸쳐 소개하려고 한다. 

 

 

글 / 김창송(본지 편집인)

 

 

홍법원에서 법거량 장면. 1990년대 초.

 

 

 

숭산행원대선사법어
천강(千江)에 비친  달

저자: 숭산 행원     편역: 한정섭 김호성
발행인: 대한불교조계종 화계사, 재미홍법원관음선종회 
발행처: 불교통신 교육원    발행년도: 1987년 

이 책은 총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차를 보면

서언(序言) 조계종 종정 이성철
하서(賀序)  태고종 종정 안덕암
머리말(저자)  숭산행원
일러두기
숭산행원선사이력

 


이어서 1편부터 4편으로 이어진다. 
1편은 숭산스님의 생애, 2편은 법어로 ‘선의 나침판, 선학강좌, 도화백칙 등의 선서(善書)를 집약한 것이며, 3편에서는 수시법어와 법거량 등 다양한 문서를 편집하였고, 4편에서는 세계 성지순례 포교기를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의 편집한 한정섭 불교통신대학원장은 ‘일러두기’에서 이 책이 숭산스님 “4반세기 포교생활과 회갑”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즉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책인 것이다. 한정섭씨는 불교포교 활동을 한 사람이지 전문 출판인이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면 편집에 있어 아쉬운 점이 많다. 이 책의 가치는 이 책을 내기 위해서 숭산스님 본인이 많이 노력을 한 흔적이 보인다는 점이다. 저자에 숭산행원이라고 되어 있다. 숭산 스님 본인을 저자로 하여 낸 책인 것이다. 비록 편집이 엉성하게 되어 있어도 1987년까지의 숭산스님의 흔적을 연구하는 데는 귀중한 내용들이 많이 담겨있다. 
이 책 맨 앞에는 많은 사진이 있다. 회갑 기념 출판을 축하하기 위해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서옹스님과 경봉스님의 서예 작품을 비롯하여 남농 외 8인이 함께 만든 작품, 달마도로 유명한 소공 이명우 선생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도 실려있다. 미국 관련 사진으로는 프로비덴스 활동 사진들과 로스엔젤레스 지역에서 활동한  일본 사사기 스님, 하와이에서 활동했던 미국인 에이겐. 그 외에도 신부, 심리학 박사 등 여러사진도 실렸다. 

 

숭산스님


 이 책에서 숭산스님의 미국 활동 부분은 <제1편 생애> 부분에 있다. 이 책에는 미국 포교 활동외에도  평안남도 순천시 순천읍에서 1927년 8월에 태어난 스님의 집안과 성장기와 평양공업고등학교 생활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 1945년 일본 패망과 더불어 해방 정국의 혼란한 시대를 살았던 스님의 철저한 반공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에 묘향산 보현사로 도망간 이야기도 있고, 일제시기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는 일본 사람들을 탄압하면서부터 일본 군군주의 정부에서부터 사용하던 ‘빨갱이’라는 말을 수 없이 사용하고 있다. 이북 정권을 바라보는 숭산스님의  시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책이다. 해방 정국의 혼란한 상황에서 월남했고, 동국대에 입학했다는 짧은 기술이 있다. 스님의 연혁에 보면 1946년에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하여 1949년에 불교학과를 졸업하였다고 한다. 숭산스님은 해방 직후 평양에 있었고 이어 월남하여 서울에서 있었기 때문에 이 두 도시를 직접 본 사람이었다. 당시에 스님처럼 이북에서 월남한 청년들이 회원인 서북청년단이 있었다. 스님은 이 단체와 관련해서도 몇 군데에서 기술하고 있다.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스님은 주장하고 있지만 관련이 있다고 본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50쪽에 보면 “스님께서 동대를 다니는 동안 다행히 라디오 기술이 있어서 그걸로 학비 조달을 했는데 그때 당시에 이남으로 내려온 학생들이 조직한 서북청년회라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스님은 그곳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 이남에 와서 보니까 서북청년회가 너무 악질적으로 놀았다. 사람을 잡아다 치고 하는데 그곳 간부가 다 스님의 친구들이고 해서 가끔 만나면 너무 심하게 하지 말라고 충고할 뿐이었다. 실로 그런 것을 보니 아주 정치에 정이 떨어져서 그냥 학교만 열심히 다녔다. ”
또 70쪽에 이런 기술도 있다. 
“그런데 빨갱이들이 쳐들어오는데 보니까 이 사람들이 본색을 드러내는데 빨갱이 들이었다. 그러니 스님이 여기에 그냥 있다가는 죽게 생겼다. 왜냐하면 이북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또 이남에서는 서북청년회와 연계되어 빨갱이를 잡았고 하니 어쩔 수가 없는데 마벽초 스님이 보더니 행원이는 여기 있으면 큰일 나니까 피해야 된다 하고는 밤중에 천장사에 데리고 가서 숨겨주었다.   ~ ~ 중략 ~~  
스님께서 말을 들으니까 BJ 스님하고 BU 스님이 법당 부처님을 전부 몰아다가 큰방 부엌 마루에 넣고 회의를 여는데 정혜사에 다 모였다. 그런데 제1차 숙청, 제2차 숙청, 제3차 숙청해서 명단을 뽑는데 춘성스님, 일엽스님, 행원이, 최동일 스님이 1차 숙청대상인데 사상불순자이고 2차는 벽초스님, 원담스님 등 간부를 지낸 사람들이고 제 3차는 반대파인 큰스님, 여승들을 집어 넣었다.”

 

홍법원에서 법거량 장면. 1990년대 초.


스님의 출가에 대해서도 51쪽에 매우 짧게 나와 있다. 
“1942년 3월에 졸업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3.1절이 돌아왔다. 빨갱이들은 남산에서 기념식을 하고 우익학생들은 서울 운동장에서 기념식을 하고는 모두 시가행진을 하는데 농림부자리 남대문 옆을 우익진영 학생들이 돌아가는데 빨갱이들이 총질을 해서 몇 사람이 쓰러지니까 <저놈 빨갱이들을 죽여라>해서  싸우는데 그만 남대문 일대가 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내가 그것을 보고 머리를 깍았다.  
이제는 우리 한국은 망한다. 도저히 살 길이 없는 것이 3.1운동 기념식은 온국민이 하나가 되어서 우리의 독립을 위해서 2천만 민족이 한덩어리가 되어서 일본군과 싸웠는데 오늘 해방이 되어 3.1 운동을 추모하는 행사를 하는 이 마당에 왜 총질을 하느냐. 이것은 망국의 징조다.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사는 놈들이다. 해서 그날로 머리를 깎고 사상전집 10권을 짊어지고 김구선생이 공부하셨다고 하는 마곡사에 들어갔다. 그때 당시에 스님 반 친구중에 마곡사 출신의 스님이 한 명 있었는데 안남철이라고 했다. ~ 중 략 ~ 
그때는 중이 되려고 간것도 아니고 다만 세상이 싫어서 사상전집 10권만 짊어지고 간 것이었다. 가지고 갔던 돈이 적은 액수였지만 그것을 절에 드리고 부담없이 공부하고자 하였다. 
~ 중  략 ~
그래서 ‘난 속가에 있으니까 뭐 또 소리가 들리고 시끄럽고 그러니까 절에 가서 좀 살아야 되겠다. 주석찬이가 대교과를 마쳤다고 하니까 절로 가야겠다’하고는 절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니까 신소천 선생이 쓴 금강경 한권을 줘서 노란표지 책인데 금강경을 보아 나가는데 ‘범소유상 ~ ’하는 대목에 이르니까 그만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그것과 일치가 되면서 머리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 중 략 ~ 
불경은 다 보아도 그 말이 그 말이다. 그러니 나도 이제는 잊어버려야 하겠다. 불교가 이렇게 좋은데 왜 세상 사람들은 이걸 모르나. 반야심경을 보더라도 그곳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나오고 제법공상이니, 불생불멸이니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말이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이 과학을 했기 때문에 과학에 있는 말과 꼭꼭 들어맞아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과학한 사람이 불교를 보니까 정말 꼭꼭 들어맞는 말 뿐이었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등이 아주 가슴에 와서 탁탁 들어 박혔다. ‘중이 되느냐 ! 안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그런 생각 중에 스님은 ‘내가 우리 집에 4대 독신인데 만약 우리 부모가 남한에 찾아와서 내가 중이 되었다면 얼마나 슬퍼할까’하다가 ‘4대 독신이 월하는 것이냐 부처님은 왕자로서 나라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처자도 버리고 설산으로 들어가셨는데 이만한 용기가 내게는 없는가’하면서 마지막 싸움을 하는데 이것이 몇 개월이 지났다. 마침내 결심하기를 ‘내가 정치도 그만두고 공부도 그만두었다. 이제 나 하나라도 도를 깨쳐서 우리 중생들을 구제해야 되겠다’하는 결심이 굳어져서 9월 10일에 중이 되어서 9월 20일에 백일기도를 들어갔다. 득도는 마곡사 큰절에서 했는데”

 

프로비덴스 홍법원 개원 사진


책에 의하면 스님은 해방 정국의 혼란한 상황이 싫어서 절에 들어가 책을 보면서 진로를 모색하다가 불교 관련서적, 금강경, 반야심경 등을 읽고 고민하다가 출가하였다는 것이다. 마곡사에서 출가를 하고 행자 생활을 하다가 1947년 10월에 수덕사 박고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다고 되어있다. 고봉스님에게 받은 법명이 행원이다. 1940년대에 출가한 스님이다. 

이 책의 103 쪽에서부터 미국 활동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숭산 스님은 1972년에 뉴져지 거주 동국대출신 유영수씨 초청으로 미국에 왔다. 원래는 미국에 자꾸 오라고 해서 구경삼아 3개월 있다가 올 생각으로 미국에 왔다고 한다. 그 후에 생각이 바꿔 미국에서 활동하게 되었는데 1987년에 발행된 이 책에 숭산스님이 파악한 1970년대의 미국의 상황이 기술되어 있다. 103쪽에 “ 스님께서 72년에 미국으로 옮겼는데 미국에서는 65년부터 월남전 반대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해서 70년도에는 극단에 이르렀다. 이 해 미국을 중심으로 구라파와 일본까지 젊은 세대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서 기성세대를 불신하게 되었는데 ~~ ~
이러한 것이 나오게 된 이유는 전부 자기 개인의 견해와 자기의 입장과 자기의 환경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대자연으로 돌아가자’‘대본성품으로 돌아가자’하는 운동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히-피 사상이다.”라고 대략적인 당시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구경하러 온 미국에서 어떻게 해서 미국에서 포교를 할 마음이 생겼는지가 109페이지에 나와 있다. 한국에서부터 알았던 이 계향 보살(김진모 거사 어머님)의 동생 남편으로 초대 육군군악대장을 역임하고, 한국 국뉴욕한인회장을 역임한 김판기씨 안내로 맨하탄 56가 일본 선방을 가서 50여명이 참선을 하는 것을 보고 울화통이 터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선을 보급해야 한다는 의욕이 확 치밀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초창기 활동의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있다.  로드 아일랜드 주에서 스님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학생들이 몰려왔다는 내용이 있다. 이 당시에는 미국에 어느 스님이든지 스님이 와서 모임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시절이었다. 지금과는 완전 다른 상황이었다.  스님이 설법을 하는데 통역이 안되는 어려운 이야기도 나오고, 최면술을 거는 내용도 나온다. “그래서 처음에는 선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최면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누구든지 오면 최면술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 교수에게 통역을 시키고, 심호흡하는 법, 즉 단전호흡법과 최면 법만 가르쳐 주고는 내가 무엇인가를 의심해 나가라 하고 시켰다. ” -P111.  

이 책에는 스님이 돈을 벌기 위해서 세탁소에서 일은 하였다는 것도 써 있는데 평양에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님은 세탁소에서 주로 재봉틀을 수리하였다고 알려졌다.  어쨌든 스님의 초창기 포교 활동이 생생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미국불교사를 정리하는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은 숭산스님 주장을 그대로  기술되어 있어서 중요하지만 사실 관계가 맞지 않는 내용도 일부 있다. 예를 들어 108쪽에 L.A 달마사를 미국의 첫 번째 한국 절이라고 했는데 109 페이지에는 “그전에 내가 소문 듣기로는 서경보 스님이 미국에 절을 만들어서 능인선원이라 해서 필라델피아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곳에도 한번 가봐야 하겠다 생각하고 L.A 구경을 마치고 시카고를 거쳐서 뉴욕으로 갔다”고 써 있다. 서경보 스님이 이미 숭산스님 미국에 오기 전에 한국 절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도 달마사가 미국의 첫 번째 절이라고 하고 또 재미홍법원과 삼보사 건립 연도 문제는 많은 논쟁이 있고, 뉴욕원각사 창건, 시카고 불타사 창건에 관한 것도 숭산 스님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이 책에 나오는 이 부분은 기억의 오류로 보인다. 
 “1942년 3월에 졸업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3.1절이 돌아왔다. 빨갱이들은 남산에서 기념식을 하고 우익학생들은 서울 운동장에서 기념식을 하고는” 부분에서 1942년은 기억의 오류인 것 같다. 아마도 1946년이나 1947년 일 것으로 추측된다. 1942년 해방이 되지 않아서 3.1절 기념식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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