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
비구니 봉려관,
제주 불교를 시작하다
취재 / 전현자 (미주현대불교 한국주재기자)
기자: 스님! 인터뷰 고맙습니다. 여성학박사인 학송 보살님이 스님을 소개해 주었는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혜달 스님: 글쎄요. 학송 보살님이 본 저에 대한 견해가 있겠죠. 제가 봉려관 스님 관련 일을 하면서 의논할 게 있어서 한두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학송 보살님이 봉려관 스님에 대해 전혀 몰랐었는데 봉려관 스님의 행적을 알게 되면서 대중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기자: 그러시다면 봉려관 스님은 어떤 스님이셨는지요?
혜달 스님: 봉려관은 스님의 법명인데, 특이하게 법명이 3자예요. 성씨는 안 씨이고, 1865년 6월 14일 제주도 화북에서 태어나십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제주도에 종교로서의 불교가 없었어요. 1700년대 초반 이형상 목사가 제주도로 부임하면서 제주도의 신당, 불교 사찰들을 훼철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불교는 쇠락을 합니다.
기자: 그런 일이 있었군요.
혜달 스님: 절이 훼손당하기 전, 제주도 사람들은 당 오백, 절 오백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은 신당을 말하고, 신당도 5백, 절도 5백 개가 있었다는데, 좀 과장된 것 같습니다. 사찰은 꽤 있었던 모양인데, 불교가 그다지 흥성하진 않았던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숭유억불 정책을 펴던 시대잖아요.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부임해서 사찰을 불태우거나, 법당 기둥 등을 관가를 지을 때 사용하고, 스님들을 환속시키고, 불상은 바다에 던져버리거나 불태워버리는 등, 불교가 말살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일 년 후 이약동 목사가 부임하면서. 신당은 점점 일어나는데, 불교는 힘을 받지 못하고 점점 쇠퇴의 길을 걷다가 종교로서의 불교가 사라져버립니다. 당시에도 스님들은 육지에서 왔다 갔다 했지만 종교로써의 불교는 없었던 거지요. 그럼에도 다행히 불교문화는 제주도민들 생활 속에 남아 있었어요. 비록 불교라는 종교의식은 봉행되지 않았지만요. 이런 상황이 이백년간 지속 된 것입니다.
1899년 집 앞을 지나던 스님이 나무로 만든 조그마한 관세음보살 상을 봉려관 스님에게 드렸고, 그때부터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게 됩니다. 가족은 물론 이웃사람에게 지금으로 말하면 사이비 종교를 믿는 그런 취급을 받게 된 거예요. 가족들의 반대가 너무 심하니까 같은 동네에다 거처를 얻고는 집을 나옵니다. 그리고는 혼자 살면서 관음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쫓아와서 관세음보살상을 부수고 태워버리고 봉려관 스님까지 내쫓아버립니다.
동네에서 쫓겨나온 봉려관 스님은 한라산 산천단에 집을 하나 구해 살면서 관세음보살 기도를 열심히 하다가, 1901년 불상을 구하러 비양도를 건너가던 중 풍랑을 만납니다. 그때는 목선이잖아요.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힐 뻔했고 함께 배에 있던 사람들은 허둥지둥 했는데 봉려관 스님은 거기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쉬지 않고 염불했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거친 풍랑에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라 믿었고, 이때 관음신앙을 확신합니다.
봉려관 스님은 약초에 대한 지식도 해박했는데, 아픈 사람을 보면, 병에 따라 약초를 처방해 주었습니다. 당시 제주도는 세끼 밥도 먹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던 시기여서 아프면 병원이나 한의원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봉려관 스님은 치료비도 받지 않았고 처방한 대로 하면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관세음보살 기도, 관음 신앙도 6년에 걸쳐 전파합니다. 고통에 처한 많은 이들을 보아온 뒤 ‘고통에 처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출가를 결심하게 되어, 1907년 9월 배를 타고 목포로 갑니다.
목포에 도착한 봉려관 스님은 정처 없이 여기저기를 돌아보던 중 대흥사를 알게 되었고. 음력 11월 쯤 대흥사에 도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흥사 박영희 스님 구술에 의하면, 해가 저물 무렵 대흥사에 도착한 봉려관 스님의 행색은 남루하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어서 몰골이 거지같아 주지스님이 한 번 보고는 더는 만나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출가의 뜻을 전했지만, 행자교육을 받지 않고는 승려가 될 수 없다는 대답을 듣습니다. 며칠간 기거를 허락받은 봉려관 스님은 대흥사 산내를 둘러보던 중, 살이 곪아 썩어가는 스님을 발견하였고 환자를 고쳐보겠다고 했지만 그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봉려관 스님이 대흥사에 도착하기 전날, 대흥사 스님 한 분이 “내일 환자를 고칠 사람이 온다.”는 꿈을 꾸었고, 꿈이 생각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센병 환자를 봉려관 스님에게 맡기도록 했습니다.
봉려관은 묵은 된장과 병든 스님의 몸을 감쌀 천을 달라고 해서 썩어가던 상처부위마다 된장을 바른 후 전신을 광목천으로 둘둘 말고는 환자에게 “지금부터 관세음보살을 지성으로 염불 하십시오”라고 당부합니다. 며칠이 지나고 봉려관 스님이 광목천을 벗겨내자 온 몸에 구더기가 바글바글했고, 봉려관 스님은 상처를 감쌌던 천으로 된장을 쓸어내고는 마당에 멍석을 펴고 멍석위에 아궁이 재를 깔아 놓으라고 한 다음, 환자를 멍석 위 아궁이재 위에 눕히고는 둥글려버렸습니다.
기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혜달 스님: 그러자 환자 몸 여기저기에 바글거렸던 벌레가 아궁이 재 때문에 죽어갔고, 이 관경을 훗날 대흥사 주지를 수행했던 박영희 스님도 보셨다고 합니다. 봉려관 스님은 이 환자를 손수 씻겨 주었고, 그 후 썩어가던 상처 부위에 딱지가 앉기 시작했고, 이 환자 스님은 완쾌되었습니다. 그 후 대흥사 스님들은 봉려관 스님을 달리 보았고, 대흥사 산중이 이 일로 떠들썩했다고 합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봉려관 스님에게 대중공사를 거쳐 계를 주기로 했습니다.
1907년 12월 8일 성도재일 유장 비구니를 은사로 대흥사 조실 청봉 화상을 계사로 봉려관 스님은 계를 받습니다. 근대제주불교 최초 비구니가 탄생한 것입니다. 미국 조지아대 이향순 교수에 의하면 새로운 문헌이 나오기 전까지는 제주 불교 최초 비구니는 봉려관 스님이라고 합니다.
산천단의 봉려관 스님 거처가 근대제주불교 최초 사찰이 된 계기입니다. 당시 현판을 걸었는지는 불분명합니다만. 승려 봉려관은 1908년 근대 제주 불교 역사상 처음으로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봉행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 토착민들이 몰려와서 “이런 물건을 이대로 두면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고 속여 세상을 어지럽게 해서 반드시 큰 화를 불러올 것이니 쫓아내야 한다.”고 하면서 밖에서 방화를 합니다. 안에 봉려관 스님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별안간 일을 당한 봉려관 스님은 급히 불을 피해 뒷문으로 빠져나와 가다보니 이미 백록담 주변에 가 있었다고 합니다. 7일 간 제대로 먹지 못해 기진맥진한 상황에서 산길을 걷다가 발을 잘못 디뎌 산 아래로 떨어졌는데, 나뭇가지에 떨어졌고 수 천마리의 까마귀가 옷을 물어 봉려관 스님을 구제했습니다. 이때 봉려관 스님이 입었던 장삼을 훗날 진원일 스님에게 보여주면서 “이 장삼 구멍들이 수천 마리의 떼 까마귀가 주둥이로 물어 뚫어 놓은 구멍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지경을 겪어봐야만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은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고 진원일 스님은 증언합니다.
떼 까마귀가 봉려관 스님을 살린 거예요. 때마침 노인이 지나가면서 “저 아래에서 스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라고 해서, 봉려관 스님이 산천단으로 내려가 보니까, ‘운대사’라는 스님이 “그대를 찾은 지 오래되었는데 오늘에야 다행히 만나게 되었다”고 하면서 봉려관 스님에게 가사를 건네주었습니다. 이때가 1908년 5월 단오 날입니다. 이 가사를 건네받은 봉려관 스님은 제주에 사찰을 창건하겠다는 작심을 하고 한라산으로 100일 관음기도를 하기 위해 올라갑니다. 기도하던 중 봉려관 스님은 온 산에 불이 타오르면서 불이 봉려관 스님 몸 쪽으로 확 들이닥쳐서 깜짝 놀라 눈을 뜨면서 깨달음이 있으셨답니다. 눈을 뜨니 불은 온데간데없었다고 합니다. 관음정진으로 깨달음을 체험한 봉려관 스님은 거짓말을 하면 꿰뚫어보시고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대차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기도 성취한 봉려관 스님은 한라산을 내려와 육지로 나가 사형인 혜원 스님을 만나 사찰창건불사를 포함 제반사를 의논한 후, 불교의례에 필요한 용품과 불사금을 보시 받아 제주도로 되돌아온 후, 지금의 관음사 해월굴에서 관음정진기도와 사찰창건불사를 병행합니다.
잡목과 풀이 우거진 사람이 다니지도 않은 그런 곳이었는데, 혼자서 나무를 베어내고 돌을 주워내며 터를 고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기자: 비구니스님께서 홀로 하셨다고요.
혜달 스님: 그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신자들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봉려관 스님의 사형인 혜원 스님께서 “봉려관 스님이 관음사를 창건하면서 고생 많이 했다! 봉려관 스님의 손은 사람 손이 아니었다. 마음이 아파 봉려관 스님 손을 보지 않으려고 애써 눈을 피했다”라고 하셨습니다. 근대 제주의 최초 사찰을 창건하겠다는 원력이 이루어 낸 것이 1909년 봄에 창건된 한라산 관음사입니다. 최초 창건된 관음사는 제주 돌에 어욱(제주 억세)과 흙을 버무려 만든 흙덩이를 채워가면서 만든 벽, 그리고 어욱으로 지붕을 얹은 집 한 채입니다. 이 초가집 1채가 2채가 되고 또 3채가 되어가면서 관음사의 위용도 더해간 것입니다.
기자: 그 큰 관음사가 그렇게 시작했네요.
혜달 스님: 그렇게 시작한 거예요. 그게 1909년 봄입니다.
기자: 역사적으로는 한일합방 1년 전이네요
혜달 스님: 1909년 봄! 제주 불교 최초 사찰인 거죠.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사잖아요. 육지는 포집으로 아주 웅장하게 대웅전들을 짓지만, 제주도는 그렇지를 못했어요. 관음사 창건을 마친 봉려관 스님은 대흥사를 갑니다. 대흥사에서 항일의병들이 많이 죽어 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저희 노스님(광호)과 사숙님(법인)의 말씀은 대흥사에서 항일운동하던 사람이 많이 죽은 걸 보고 그때부터 봉려관 스님이 항일운동을 시작 하셨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기자: 그때부터 일본은 조선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네요.
혜달 스님: 한일합방하기 전부터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참정권을 간섭했기 때문에 스님께서는 일찍이 항일운동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기자: 일본이 외교권을 가져가고했지요. 스님!
혜달 스님: 그런데 1909년에 항일운동 하던 사람들이 해남 황사평에서 일본 신무기 때문에 후퇴하다, 대흥사 심적암까지 온 거예요. 심적암에서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서이죠. 보초를 세워놓고 쉬고 있었고, 새벽이 되도록 아무런 기미가 없자 보초들도 잠시 쉬려고 들어갔고, 스님들이 새벽 예불을 위해 준비를 하던 중, 이미 포위하고 있었던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친 거예요. 1909년 7월 9일 새벽 대흥사 심적암에서 일본경찰의 총칼에 심적암 스님 5분(혹은 6분)을 포함해서 항일의병 30여명이 참혹하게 피를 흘리고 죽어있던 처참한 모습을 친히 목격한 봉려관 스님은 그 자리에서 항일의지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기자: 비구니 스님께서 항일 운동을 하셨는데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혜달 스님: 최초지요. 봉려관 스님의 항일 실천은 1909년에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닙니다. 1911년 법정사 창건을 위시로 해서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을 거쳐 봉려관 스님이 입적하기까지입니다. 제주도에서도 여성으로서는 가장 먼저 항일운동을 하신 거지요. 현재 비구니로서도 항일운동을 한 최초의 사례가 봉려관 스님입니다. 제주도 원로스님들은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인데, 제주 일부 연구자가 봉려관 스님의 항일행적을 고의적으로 간과했다고 저는 봅니다.
기자: 참 훌륭하신 스님이셨는데 모르고 살았습니다.
혜달 스님: 제주도 사람도 이런 사실을 모릅니다. 봉려관 스님의 행적을 고의적으로 묻어버린 것이 원인이지요. 이렇게 봉려관 스님의 행적은 십 년이 넘게 왜곡이 됐어요. H씨가 주로 봉려관 스님 행적을 왜곡시켜왔고, 왜곡을 바로잡는 연구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대담하게 왜곡을 진행해 나갔죠.
기자: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라도 항일 운동하신 것을 자세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혜달 스님: 심적암에서 피 흘리고 죽어 있던 항일의병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봉려관 스님은 제주에 되돌아온 후, 항일 운동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항일할 수 있는 은신처를 찾으러 다닙니다. 이렇게 해서 창건된 것이 지금의 법정사입니다. 법정사 창건은 1911년입니다. 처음에 찾은 터는 사람의 손을 타는 터여서, 그래서 더 깊숙이 들어간 곳이 지금의 법정사 터입니다. 법정사에서 기획된 것이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입니다. 1911년 법정사를 창건하면서 봉려관 스님은 항일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군자금을 조달해 주기 시작합니다. 군자금 조달을 위해 불사를 하기도 하고, 탁발로 모으기도 해서, 이 군자금을 전달하러 대흥사를 가기도 합니다.
기자: 용성큰스님께서도 독립자금을 보내실 때는 돈도 숨기고 보내는 사람 이름도 달리해서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혜달 스님: 항일운동은 비밀결사체 운동입니다. 봉려관 스님은 군자금뿐만 아니라 항일운동 하는 사람들이 위험할 때는 숨겨주고, 사람이 필요하다면 사람을 보내주고 의식주는 물론 항일인사의 제반사를 감쪽같이 해결해 주었습니다. 봉려관 스님이 전면에 나서지 않은 것은, 항일운동이 비밀결사체인 것도 있지만, 200여 년간 암흑기를 보내야 했던 제주 불교가 일어나기 시작해 중흥기를 향해 가고 있던 시기여서, 근대제주불교 중심에 서 있던 봉려관 스님의 항일운동이력이 드러나 버리면, 제주 불교가 맞닥뜨려야 할 광풍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어서인 것으로 사료됩니다.
기자: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나 후원자는 나중에라도 밝혀졌는데 봉려관스님은 알려지지 않았네요.
혜달 스님: 그것에 관련된 것은 법정사 항일운동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뒤에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봉려관 스님은 1911년에 법정사를 창건합니다. 조그마한 1칸 초가집입니다. 혜원 노스님께서 법인 스님에게 제주 관음사 창건 때 일을 회상하시면서, 봉려관 스님 손을 보니까 사람 손이 아니더랍니다. 그래서 봉려관 스님 손을 안 보려고 눈을 많이 피했대요. 도저히 그 손을 볼 수가 없더라는 거예요. 지금 같으면 장갑이라도 있지만, 그 시대에 무슨 장갑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굉장히 쉽게 생각해요. 우리 노스님도, 사숙님도 이 이야기 하실 때면 눈물을 흘리십니다. 어떤 스님은 “절하나 짓는 거!”라고 말하지만, 비구도 하지 못한 것을 비구니가 불교암흑기 시기에 그런 언덕배기에서, 한 칸짜리 집이지만 혼자서 장비도 없이 완성시키는 것은, 지금 대웅전 짓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지요. 그렇게 창건된 것이 한라산 관음사입니다.
매우 안타까운 것은 일부 스님들은 관음사 창건과 법정사 창건을 쉽게 생각해요. 그리고 봉려관 스님 진영은 입적하신지 8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진영각이 없어서 지장전에 세 들어 계십니다. 비구였다면 지금 조사(祖師) 대우를 받고 계실 겁니다. 이와 관련해서 많은 비구들께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쉽게 진영각이 건립되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1911년 법정사 창건을 마치고 봉려관 스님은 일정 기간 거주하시면서 은신처로서 적합한지를 몸소 살펴보십니다. 3.1 운동보다 5개월여 앞선 1918년 법정사 항일 운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아 대부분의 국민이 모르고는 있지만요.
1918년 법정사 항일 항쟁은 강창규, 김연일, 방동화, 박주석이 주도합니다. 봉려관 스님이 한라산 영실 쪽 움막에서 살던 이 분들을 법정사로 보냅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후원하셨지요. 1918년 봉기한 법정사 항일항쟁으로 인해 이분들이 수감되었을 때도 봉려관 스님은 이들을 형량을 반으로 줄여 조기 출감할 수 있게 모든 힘을 쏟았고, 그래서 형량이 반으로 줄어들었다고 방동화 스님은 증언하셨습니다. 그 후, 봉려관 스님의 은혜를 갚는다고 법화사 중창불사 때 다 같이 가서 일을 도왔다고 합니다. 봉려관 스님은 로비도 잘하신 분같습니다!
이들 중에서도 봉려관 스님과 가장 호흡을 잘 맞춘 분은 방동화 스님입니다. 법정사를 창건한 후, 거주 인원이 점점 늘어나니까 확장을 했는데, 그 때도 봉려관 스님하고 방동화 스님 둘이서 대부분의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법정사가 세 구역이 된 것입니다. 은신처, 종교 의례를 봉행하는 곳, 체력을 단련하는 곳, 이 세 구역이 있었다고 해요. 법정사 항일항쟁의 시작은, 우리나라는 배와 같고 제주도는 배의 닻에 해당하기 때문에 제주도에서부터 항일항쟁이 일어나면 전국으로 퍼진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1918년 법정사 항일항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1919년 3월에 그야말로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일어나잖아요.
기자: 스님! 대단한 역사, 꼭 알아야 할 역사를 배웁니다.
혜달 스님: 제주도에서부터 시작된 항일 운동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일제가 법정사 항일항쟁을 ‘보천교의 난’이라 명명해버렸어요. 보천교는 동학계열의 종교인데, 일제에게는 사이비로 취급받습니다. 그때 제주도에 보천교도들이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보천교는 제주도민에게조차도 집안을 망하게 하는 집단이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가 이런 감정을 이용한 거지요. 이처럼 제주도민에게 조차도 인정받지 못하다가, 1991년 1월 제주향토사학자 김봉옥 선생님이 ‘정구용재판기록’을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현재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에서 찾게 됩니다. 그래서 ‘보천교의 난’이 아니고, 주체 세력이 스님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때부터 ‘무오 법정사항일항쟁’으로 불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명칭도 바뀌게 된 것입니다. ‘보천교의 난’에서 ‘무오 법정사 항일항쟁’으로 세상에 알린 가장 큰 공로는 김봉옥, 임혜봉 스님, 윤봉택, 서귀포시청에게 있습니다. 적어도 불교계에서는 이들의 공로를 치하해야 합니다.
봉려관 스님은 당시 제주상권 중심부에 516평의 땅을 매입해서 1925년 성내포교당을 창건합니다. 제주시내 분들이 한라산 관음사를 가려면, 산천단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그 다음날 아침에 공양물을 가지고 올라가서 사시에 불공을 하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게다가 점점 늘어나는 신도를 관음사가 수용할 수도 없었고, 포교확장을 위해서도 도심포교당이 필요했고, 겨울에 눈이라도 오면 신도들이 관음사를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봉려관 스님이 시내 중심부에 포교당을 창건한 것입니다.
기자: 그 당시에 도심 포교당을요?
혜달 스님: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봉려관 스님은 1924년에 한라산 관음사에 온수 욕실도 세웁니다. 70년대에도 온수 욕실이 있는 집은 소수였어요. 부엌에서 따뜻한 물 떠다가 세수했지요. 1924년에 온수 욕실을 완성한 분이세요. 우리는 이 분을 보통 여성으로 보면 안돼요. 이 분의 리더십이라든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식견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지혜를 바탕으로 앞서는 분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분을 고의적으로 숨겨 놓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1924년에 봉려관 스님은 이회명 스님을 초청해서 제주불교협회를 조직하게 하고, 성내포교당 안에 제주불교협회 건물을 둡니다. 1925년에는 ‘성내포교당’ 낙성식을 하고, 1926년에는 제주불교부인회, 제주불교소녀단을 조직합니다. 그리고는 신여성 양성에 집중합니다.
봉려관 스님이 절을 창건하거나 중창하는 것에는 세 가지 패턴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수행중심, 포교, 역사적 가치라는 이 세 패턴입니다. 최초 창건한 관음사는 수행중심 사찰이고, 포교를 위한 사찰로는 산천단 소림사, 성내포교당, 백련사, 월성사 등이 있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찰은 중창을 하는데 법화사, 고관사, 불탑사가 대표적이지요. 그렇게 해서 근대 제주 불교를 일으킨 분이 봉려관 스님입니다.
그런데 봉려관 스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론매체의 언급이 없습니다. 관음사에서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노스님(광호 스님)이랑 사숙님(법인 스님) 말씀은 독살 당하셨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일 운동한 것이 발각되어서 독살 당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봉려관 스님이 1938년에 입적하셨는데, 항간에 봉려관 스님이 독버섯을 드시고 돌아가셨다는 말들은 꽤 있었습니다만, 확실한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주도를 비롯해서 문도 스님들 채록을 하다가 알게 된 의외의 사실들이 있었습니다.
봉려관 스님이 1938년 5월 29일(음력) 점심공양을 마치고 오후에 관음사에서 공양주를 데리고 산행을 나가셨는데, 봉려관 스님이 야생버섯을 발견하시고는 공양주에게 버섯을 따서 저녁에 대중들과 함께 먹자고 하셨고, 공양주는 그 버섯을 채취했다고 합니다. 산행을 마치고 관음사로 되돌아온 공양주는 저녁에 버섯으로 국을 끓여 관음사 대중들에게 드리기 전, 먼저 봉려관 스님께 한 그릇을 드렸고, 봉려관 스님이 버섯국을 2수저 드시자 바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공양주는 도망을 갔고, 인적이 드문 장소로 숨어들어가 아픈 사람들에게 약초를 처방해 주며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하니 공양주도 약초들과 버섯들을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지요. 봉려관 스님은 약초, 버섯 등 야생 먹거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이런 지식에 의거해 병자들도 많이 쾌차시켰는데, 당시는 3끼 먹는 것도 어려운 시절이어서 야생에서 먹거리를 많이 채취해서 끼니를 대신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봉려관 스님께서 독버섯을 모르실 리 없고, 설사 독버섯 국을 드셨다 해도 2수저 드시자마자 바로 사망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안광호 스님 구술처럼 봉려관 스님이 항일자금조달을 하고 항일운동 한 것이 발각되어 독살당한 것이라 한 것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봉려관 스님 유골은 무슨 이유에서 인지 바로 산골 되지 못하고 제주항아리에 담겨 관음사 산에 묻혀 있었던 것을 제주 4.3이 끝나고서야 대지월(봉려관스님의 제자) 스님의 유훈에 따라 인흥(봉려관스님의 손제자) 스님이 묻힌 장소를 찾아서 파내어 유골항아리를 열어보고서야 봉려관 스님이 독으로 사망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흥 스님이 봉려관 스님의 유골을 잘게 부수어 관음사 산에 산골하고서야 마음이 후련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후손들은 “이 유골이 지금까지 보존되었더라면 사망 원인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봉려관 스님께서 귀히 대했던 안광호 스님은 봉려관 스님이 입적하신 후 제주도를 찾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봉려관 스님은 관음사에서 입적하셨고 화장해서 산골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지월 스님이 봉려관 스님의 유골을 뒤로 빼돌린 것으로 봐야 합니다. 도대체 당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숨기고, 말들이 다르고 할까요?
기자: 사진이라도 찍었더라면...
혜달 스님: 봉려관 스님의 움직임들을 당시 일간지나 언론매체들이 기사화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봉려관 스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을 안 해요. 언론매체도 전혀 언급이 없어요. 그게 참 이상 했었어요 저는. 당시 봉려관 스님의 죽음은 밖으로 알릴 수 없었던 그런 죽음이었구나 생각됩니다. 어른 스님의 독살이라는 말씀이 맞다는 생각이 됩니다. 봉려관 스님과 함께 했던 어른 스님들의 말씀이니 맞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법인 사숙님은 봉려관 스님의 한을 풀어드려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기자: 스님께서 봉려관 스님께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시게 된 계기들이 많겠습니다
혜달 스님: 제가 봉려관 스님에 관심을 둔 것은, 1989년에 안광호 노스님이 입적하셨을때, 49일 동안 부산 보덕사에 있으면서 일을 거들어드렸습니다. 그때 법인 스님께서 3일 간에 걸쳐서 저를 앉혀놓고 봉려관 스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밥먹고, 화장실 가는때를 빼고는 앉혀놓고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니, 왜 저에게 봉려관 스님의 삶을 말씀하시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한산 모시 적삼을 저에게 주시면서 ‘내가 니 이거 준다. 니 나하고 약속 하나 해라. 봉려관 스님 생애정리를 한다고, 나하고 약속을 해라.’ 하시며 거의 협박하시듯 다그치셨습니다. 저는 그 한산 모시 적삼에 눈이 팔려서 제가 한다고 답을 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들은 그 많은 봉려관 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다 잊어버린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제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법인 스님께서 해 주신 이야기 중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런 중 다행히도 법인 스님께서 봉려관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3일에 걸쳐서 하시고 마지막 하신 말씀이,
“니가 만약에 이걸 잊어버리거들랑 제주도 가면 대처승 연종 스님이라는 분이 있는데 연종 스님을 찾아가서 녹음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연종 스님이 자세히 말을 하면 1주일을 하실 것이고, 간단하게 얘기하면 3일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분을 만난 것은 돌아가시기 2달여 전이었습니다. 하여, 제가 질문을 하면 “기야” “아니야” “나쁜 놈” “잊어버렸어” 짧은 답만 하셨습니다.
기자: 훌륭하신 스님의 삶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감동입니다.
혜달 스님: 1989년 봄, 제주 관음정사 효명(현재 91세) 스님과 법렬 스님, 그리고 부산 보덕사 법인 스님과 저까지 스님 5명 재가보살 2명 총 7명이 한라산을 갔어요. 저는 그때 한라산 구경하러 가는 줄 알았는데, 백록담 아래에 도착하자 법인 스님께서 봉려관 스님이 기도하시던 장소를 찾으시면서 “여길까, 저길까?”하시면서 근처를 살피시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내려왔습니다. 법인 스님께서는 저에게 봉려관 스님의 기도처를 알려주시려고 한라산을 올라가신 거였어요. 그때 만개한 철쭉 앞에서 찍은 사진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한라산을 내려와서 간 곳이 법선 스님께서 계시던 제주 보현암입니다. 법선 스님은 봉려관 스님과 함께 근대 제주 불교 중흥에 헌신했던 분입니다. 당시 보현암은 수목이 울창하고 좀 어두컴컴한 건물이었어요. 그때 저는 법선 스님을 처음 뵈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기도 했습니다. 그 해 11월 제가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으니까요.
유학 간 뒤로는 봉려관 스님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방학 때 한국에 나와 법인 스님을 뵈러 가면 법인 스님은 늘 봉려관 스님 생애 정리한다는 다짐을 저에게 꼭 받으셨습니다. 그러고 한참 세월이 흐른 뒤, 2017년에 제주도를 갔고 마침 제주대학교에서 관음사 영산대제 관련 세미나가 있었어요. 관음사 주지 허운 스님이 세미나에 참석하라는 요청이 있어서 부담 없이 그냥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한금순씨가 논문을 발표하는데 봉려관 스님이 산천단에서 입적하셨다는 것입니다. 입적지가 관음사가 아닌 산천단으로 느닷없이 바뀌어버린 거예요. 아무 근거도 없고 근거자료 제시도 없이 말입니다. 그때, 제 머리가 멍해져버렸습니다.
저의 노스님이신 안광호 스님께로 부터 분명히 관음사라고 들었고, 돌아가신 후 화장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도 분명히 들었고, 법인 스님도 관음사에서 돌아가셔서 관음사에서 화장했다는 말씀 하신 것을 제가 분명히 들었거든요. 왜 갑자기 봉려관 스님이 산천단에서 돌아가셨다고 되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세미나에 참석했던 봉려관 스님 후손들은 발칵 뒤집어졌고 난리가 난 거예요.
도대체 이렇게 될 연유가 무엇인가! 한참을 생각하고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제가 우선 그동안 발표된 한금순씨의 논문과 모든 발표문을 전부 수집 했습니다. 그리고 오성 스님이 발표한 글도 찾아서 함께 교차검증과 분석을 했습니다. 그 결과 오성 스님과 한금순씨가 발표한 글의 내용과 제가 기억하고 있던 봉려관 스님의 생애가 완전히 뒤틀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살아계신 분들을 찾아서 채록을 시작했고 80여분의 채록을 하면서 그 전말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즉 10여년에 걸쳐 한금순씨가 봉려관 스님의 생애를 왜곡시켜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봉려관 업적에 1+1으로 끼워 넣기를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한금순이 유독 이 인물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이분 족보를 찾아서 신상부터 파악했습니다. 이 분은 출가해서 승려가 된 후 부인을 셋을 두고 아들을 넷을 둔 분입니다. 이 분을 중심으로 근대 제주 불교사를 재편하려 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 분이 1946년에 건당을 하면서 ‘상운’이라는 법호를 받습니다. ‘상운’이라는 법호는 1946년에야 생긴 것이죠. 봉려관 스님이 1908년 5월 단옷날 ‘운대사’에게서 가사를 받으셨는데, 1946년에 상운이라는 법호를 가지게 된 이 사람을 1908년의 운대사라고 주장을 합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왜곡사건들이 계속해서 발생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대제주불교사는 왜곡에 왜곡이 계속 진행되었고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더더욱 웃지 못 할 일은 이 왜곡된 것을 제3자가 다시 인용을 해서 왜곡이 재생산되고 있었고, 학술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근대제주불교관련 자료만 보아도 왜곡임이 쉽게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교차검증 없이 실어줍니다. 왜곡된 역사에 날개를 달아준 역할을 한 것입니다.
왜? 봉려관 스님이 산천단에서 열반하셨다 해야 되지요? 왜 이렇게 잘못된 정보를 마치 사실인양, 진실인양 퍼트려야하나요? 물으며, 사실과 진실을 밝히고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나한테 이런 말까지 했어요. “학자는 돈이 없어서 돈만 주면 써달라는 대로 써준다. 역사는 돈으로 만드는 것이다”
기자: 참 슬픈 일이네요.
혜달 스님: 제가 이 말을 듣고, 나도 공부하는 사람이지만 참 듣느니 처음 듣는 말이고, 슬펐고 놀라웠습니다. 아~, 봉려관! 돈으로 봉려관 스님의 생애를, 근대 제주 불교역사를 이렇게 완전히 망쳐 놓아버렸구나! 라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자: 스님! 제주 근대불교사에 대해서 알려주십시요
혜달 스님: 근대제주불교사는 두 번의 왜곡이 시도됩니다. 한 번은 이회명 스님을 위주로 근대제주불교사를 재편하려고 했는데, 실패를 합니다. 또 한 번은 김석윤을 중심으로 근대제주불교역사를 재편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대체 한금순씨가 왜 이렇게 무모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는데, 최근 그 의문의 답을 찾았습니다. 하여 저는 단호히 말합니다. 「이 왜곡을 지시한 제주출신 승려 1분과 이 지시에 의해 기획하고 감수하는 또 다른 제주출신 승려 1분, 그리고 이 왜곡역사를 직접 생산해 낸 제주출신 재가제자 4분이 왜곡된 역사를 제자리로 되돌려 놓아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보천교의 난’에서 ‘법정사 항일 운동’으로 명명되기까지의 과정과 법정사의 모든 성역화 사업 경위를 살펴보면, ‘무오법정사항일항쟁’이라 불리게 된 공로는, 김봉옥 선생님, 임혜봉스님, 윤봉택, 서귀포시청에 있습니다.
그런데 한금순이 이 법정사 항일 운동에 또 김석윤을 끼워 넣습니다. 현존해 계신 원로들은 법정사에는 김석윤의 ‘김’자도 관련이 없다고 하십니다. ‘1+1’입니다. 근대 제주 불교사 중요한 사건마다 다 끼어놔요. 그런데 확실한 근거는 제시도 못하면서요. 설령 근거로 제시한 자료를 보면, 위아래 문장의 관련은 무시하고 딱 필요한 것만 핀셋으로 쏙 뽑듯이 근거로 제시합니다. 이게 제주도에서 먹힌 거예요.
봉려관 스님 직계후손들, 특히 제주도에 거주하는 문도에는 학자가 없습니다. 봉려관 스님 직계후손들이 근대제주불교관련 세미나가 있으면, 참석해서 의견을 말해도 학자들이 귀담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들어주지도 않고, 채록도 안 한 거예요. 예를 들면, 제주도에 거주하는 후손들이 세미나마다 찾아가서 봉려관 스님이 항일 운동 한 사실을 아무리 말해도 그 누구도 참고하지 않았고 구술채록을 요청한 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기자: 학문하는 분들은 사실과 진실을 찾아 규명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혜달 스님: 2018년 11월 22일 탐라 성보 문화원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 제가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는데, 그때 한금순씨가 토론자로 결정되었고 본인도 참석한다고 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논문을 받아본 후, 토론자인데 참석을 하지 않았어요. 학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다른 분께 들은 것으로, 어느 세미나에서 있었던 일인데, 한금순씨가 논문을 발표했고, 토론자가 한금순이 발표한 논문 내용의 문제점을 근거를 제시하면서 말하던 도중, 한금순씨가 발표장을 나가버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 것인바 학자로써 학문을 대하는 개인적 태도도 크게 부족하다 생각됩니다.
우리 노스님(광호)께서 1983년에 하신 말씀으로, 저의 사숙이신 법인 스님이 하신 봉려관 스님 이야기를 제가 거의 다 잊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해요. 그런데 채록을 하면서 구술자가 하는 말을 듣다보면, “아, 맞아. 그때 그 말을 들었지.” 이렇게 기억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근거로 바로 내놓지 못합니다. 뒷받침해주는 다른 구술이 있었을 때 저는 인용했습니다. 뒷받침하는 구술이 없었을 때는, 저는 절대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기자: 스님께서는 설령 꼭 알리고 싶은 좋은 내용이라도 보증 자료나 근거 없이는 논문을 쓰시거나 발표하시지 않으신다는 학자로써의 꼭 필요한 태도를 말씀해 주셨는데요, 스님께서는 어떻게 봉려관 스님에 대하여 알리실 수 있으신지요?
혜달 스님: 자료가 다 있습니다. 자료는 ‘이게 봉려관 스님 것이다.’ 하고 딱 따로 명목지어 있는 것은 아니에요. 아쉽게도 비구니는 더 그렇죠. 명목지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만.. 다른 자료와 섞여 있기도 합니다. 그래도 잘 찾으면 나옵니다.
근대 제주 불교를 연구하는 일부 연구자의 문제점은, 교차 검증을 안 한다는 거예요. 연구에 임하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해야만 하는 것은 교차 검증인데도 말입니다.
기자: 스님은 불교사를 연구하셨습니까?
혜달 스님: 아니요, 제 전공은 중국 당대, 송대 선종사예요.
당대, 송대 선종의 사상을 전공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봉려관 스님 일을 안 하려고 했어요. 관음사 허운 스님이 근대제주불교사 연구를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전공분야가 아니어서 머뭇거리니까, “봉려관 스님의 역사가 근대제주불교사이고, 근대제주불교사가 봉려관 스님의 역사다”라고 하셨어요. 그런 말씀을 듣고도 제가 불교역사 쪽으로 훈련을 받지도 않았고. 근대불교사에 관련된 자료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게다가 제주도 관련 근대역사이고 해서 제가 못하겠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금순씨 그 논문 때문에 저의 생각이 바뀐 거예요. 노스님과 사숙님께서 봉려관 스님을 부탁한 것에 대답했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고, 어른 스님들의 부탁에 대한 말 시늉이라도 해야 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자료 수집과 채록을 병행했습니다. 봉려관 스님의 전 생애가 조금씩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고, 봉려관 후손들은 소지하고 있던 자료들을 저에게 다 내놓았습니다. 이처럼 많은 제주의 원로 스님과 육지에 계신 원로 스님 그리고 10여 년간 마음고생을 삭혀야했던 봉려관 스님 후손들의 도움으로, 저의 연구에 의미 있는 결과가 있게 된 것입니다.
기자: 훌륭하십니다. 당, 송대 선종사 공부는 대만에서 하셨겠네요.
혜달 스님: 네. 대만에서 했습니다. 왜냐면 중국 불교이기 때문에 중국말로 중국의 선종사를 느끼고 체험하고 연구하고 싶었습니다.
기자: 비구니스님께서 창건주이신 관음사만이라도 비구니 스님께서 주지를 하시는 것도 의미가 크겠습니다.
혜달 스님: 그 면에 대해서는 봉려관비구니 스님께서 창건하셨다 해도 조계종단의 계획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허운 스님이 봉려관 스님 진영을 국사 급으로 조성했습니다. 그런데 봉려관 스님의 진영각이 없으니까 지장전 한쪽에 모셔져 있어요. 셋방살이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진영을 해주신 것을 참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듭니다. 과연 봉려관 스님이 비구였다면 지장전 한 쪽에 셋방살이하듯 진영이 놓여 있을까? 번듯한 진영각을 지어서 분명히 모셨을 거예요.
저희가 숙원 하는 바는 봉려관 스님의 진영각이 관음사에 반듯하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문도 스님들의 숙원입니다. 현존해 계신 91세, 80대, 70대 이상 노스님들의 숙원이 봉려관 스님의 진영각이 관음사에 건립되는 것입니다.
기자: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자비는 모두에게 향하는 것이고 비구니스님들을 존중해주시는 비구 스님분들과 재가자들 모두에게 존중하는 그 순간 존중심이 먼저 그 마음에 생기는 것이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 부처님제자의 삶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시는 스님께 존경심이 일어납니다. 2014년 미국의 대선 때에 힐러리 클린턴후보의 패배승복 연설 중에 “ 소녀들이여! 결코 의심하지 마시오. 스스로가 소중하고 강하며, 미래의 꿈을 이룰 기회와 가능성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이라고 한 말이 떠오릅니다.
스님께서는 봉려관 스님의 일을 연구 삼고 완성해나가시는 것이 스님의 목표이신지요?
혜달 스님: 제 목표는 그것이 아닙니다. 봉려관 스님이 근대제주불교를 일으켜 세워놓고 돌아가신 분이잖아요. 그런데 봉려관 스님이 초기에 주지로 계셨어도, 주지라는 명칭에 연연해하지 않으신 것으로 짐작되며, 봉려관 스님께서는 스님 될 만한 여건을 조금만 갖추고 있어도 무조건 스님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왜냐면 제주에 불교를 일으키는 것이 봉려관 스님 혼자만으로는 어려우니, 스님이 많아야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기자: 아 그려셨군요
혜달 스님: 남자들은 비구가 되도록 반 강제성을 띤 권유도 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심지어, 자손이 있고, 아내가 있어도 불교에 대한 신심이 있으면, 스님 되라고 권유하셨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스님이 되신 분이 수두룩하다고 합니다.
기자: 봉려관 스님의 카리스마가 대단하셨나봅니다
혜달 스님: 그렇게 해서 스님들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 사실도 제주도에 계신 스님들에게서 나온 구술이예요. 나중에는 관음사 주지를 비롯해서 제주사찰의 주지를 비구들이 하도록 하잖아요. 그래도 신도들은 보시금을 봉려관 스님을 찾아서 드렸다고 합니다. 당시 봉려관 스님이 제주 불교에 미친 영향력은 굉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도들이 봉려관 스님 한 번만 뵙는 걸로서도 무척 행복해했고, 스님께서 마을로 내려오시면 신도님들이 그렇게 좋아했다고 합니다. 어떤 불사든 봉려관 스님이 들어서지 않으면 그 불사가 진행되질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 공을 비구들에게 돌리셨다 합니다. 제가 항상 드는 비유가 있어요. 은쟁반에 아무리 예쁜 색을 입혀도 그 색이 벗겨지면 언젠가는 그게 은쟁반이라는 걸 다 알게 된다는 거예요.
저희는 봉려관 스님을 선양하고 싶은 게 아니고, 봉려관 스님의 업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됩니다. 저희가 해야 할 소임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래서 2019년 ‘사단법인 봉려관 불교문화연구원’을 창립했어요. 불교문화가 아니고, 불교 and 문화예요. 봉려관을 연구하는 단체가 아니고, 봉려관은 대명사이고, 육지와 제주의 불교와 문화를 교류하고 연구하는 단체입니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봉려관 스님을 있는 그대로 봐달라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 덧붙이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봉려관 스님은 전체를 장악하는 힘이 있었어요. 시대적으로 비구들이 주지를 살던 그런 시기여서 비구들한테 준 것도 있지만, 봉려관 스님께서 전체 장악력을 가진 것은 신도들의 뒷받침이 있어서였습니다. 예를 들면, 안도월 스님도, 오이화 스님도 봉려관 스님을 ‘주장 스님’이라고 불렀답니다. ‘주장’은 지금으로 말하면 회주나 조실입니다. 주지보다 웃어른 대접을 해 준거예요.
후대에 내려오면서 봉려관을 끌어내리고 비구를 올리려고 하다보니까 봉려관이 짓밟히고 봉려관 직계문도에는 학자가 없었기 때문에 속앓이 하면서 계속 짓밟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도가 10여년에 걸쳐 받은 마음의 상처에 대해서는 가해자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저희는 어떤 목표를 정하거나 달려가지는 않을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꾸준히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갈 것이고, 내가 못하면 그 다음에 문도들이 받아서 할 것이고. 이 소임은 저에게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기자: 우리가 사는 지구별에는 사람도 있고, 꽃도 있고, 나무도 있고, 물고기도 있고, 동물들도 있고, 바이러스도 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데 공동 운명체라고 할까요! 그럼에도 부처님 당시에도 깨달음을 이룬 비구니부터 수많은 비구니들의 삶이 있었음에도 비구의 삶에 비하면 없다시피한 역사의 흐름에서 봉려관 스님을 통하여 비구니의 삶을 드러내주시는 비구니이신 스님은 누구십니까?
혜달 스님: 저는 봉려관 스님의 직계 후손이 아니예요. 안광호 스님을 봉려관 스님이 굉장히 예뻐하셨다고 합니다. 안광호 스님이 저의 노스님이십니다. 근대 비구니의 대표성을 띠는 분이세요. 비구니로서 통도사 강원 대교과를 비구들과 함께 졸업하신 분이고, 본사인 선암사 주지를 역임했던 분이세요. 당시 선암사에 비구니 강원이 있었는데, 운문사 학장을 역임하신 명성스님께서 중강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기자: 스님은 누구십니까?
혜달 스님: 저는 혜달입니다. 안광호 스님의 상좌가 법희 스님이고, 법희 스님의 막내 제자가 저입니다.
인터뷰 장소: 경기도 광주소재 혜달스님연구소이며 2020년 11월 12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