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루나 칼럼 >
머나먼 푸른 섬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지구별이 몸살을 앓고 있다. 이상기후와 천재지변은 잦아지고 역병은 온 누리에 크게 번져 이른바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할 것 없이 뾰족한 방어대책 없이 허둥댄다. 그러다 겨우 갈피를 잡는가 하는데 또 어떤 더 심한 것들이 잇달아 나타날지 자못 염려스럽다. 그 동안의 문명의 진보니 산업화니 번영이니 하던 것들이 눈 깜짝할 새에 빛을 잃을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지구 전체가 되돌릴 수도 없이 기후 온난화의 구렁텅이에 미끄러져 드니 어디로 달리 헤쳐 나올 방도가 없어 보인다. 이젠 지구를 떠나야 하나?
어디로? 화성으로? 토성으로? 태양계의 별들 사이 어중간한 곳에 인공별이라도 새로 만들거나 아니면 은하계 어디로 멀리 가야 하나? 공상 영화에는 그런 곳들이 있어 좀 낯설기는 해도 멋있기도 하더라만 아니나 다를까, 아무리 허구라지만 그런 인공구조물의 세상도 우리가 상상해 왔던 극락세계나 파라다이스는 영 아니데. 도적도 있고 배신자도 살인자도 침략자도 구색을 갖추고 있으니 사람 살기 어디 가나 매 한가지란 말인가? 인간의 희로애락과 벗하여 닥쳐오는 것이 길흉화복이니 혹시 우리가 우주의 테두리를 영영 벗어나 해탈하지 않는 한 별 수가 없나 보더라.
이렇듯 설사 우리가 저 푸른 하늘 너머를 향해 떠나가 있더라도 그럴진대 하물며 이 지구별 껍데기에 빌붙어 살며 지내온 지난 수천 년, 수만 년의 인류 역사에는 기록이 다 안 돼서 그렇지 우리 조상들이 내몰린 역사의 구비구비마다 막다른 골목마다 얼마나 갑갑한 일들이 많았겠나! 그렇게 수없이 맞닥뜨린 절박한 골짜기에서 마지막 숨이 넘어가기 전 두 팔을 휘저으며 허덕이던 숱한 사람들에게 한 가닥 숨통을 틔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흘 굶어서 담 안 뛰어넘을 놈 없다고, 자포자기하여 제자리에서 죽음을 기다릴 바에야 마지막 안간힘으로 탈출의 모험을 감행함은 당연하다. 가서 죽든 살아남든 아니면 살아서 되돌아오든 그건 알 수 없는 일이고 일단은 새 땅을 목숨 걸고 찾아 나서 보는 것이지. 이리하여 어쩌다 성공하면 무슨 대발견이니 침노니 식민이니 대이동이니 집단 이주니 하겠지만 이 세상에 본래 주인 없는 집, 임자 없는 땅이나 보물이 얼마나 있었겠나? 다른 한편 그 땅에 미리 눌러 살면서 느닷없이 당하는 쪽에서 보자면 이런 마구잡이 덮침은 눈뜨고 못 볼 지옥도가 눈앞에 널려짐에 다름 아니다.
그런 지옥도 가운데 유럽 중세사회에 큰 환난을 불러온 바이킹의 침략과 이주가 있다. 그리고 그 무리의 한 가닥이 서쪽으로 거친 대양을 건너갔는데 사람이 살지 않아 모처럼 살육의 피비린내를 풍기지 않고 뿌리를 내렸던 행운의 섬이었다. 그리고 다시 거기를 발판으로 더 서쪽으로 나아가다 보니 하얗게 빙하가 덮인 높은 산들의 발끝 가장자리에 금 그은 듯 숲이 있고 풀이 자라는 머나먼 푸른 섬에 다다랐던 이야기를 한 번 해 볼까 한다. 해를 넘기는 세계적 대역병의 지겨움 속에서 잠시나마 숨통 좀 틔우시라고 여러분을 저 세계에서 가장 크고도 한적한 섬 그린란드로 안내한다.
지금의 스칸디나비아, 곧 노르웨이, 스웨덴 및 덴마크가 자리한 지역은 숲과 바위, 협만[피요르드 Fjord]과 호수로 덮인 곳으로 한 해 거의 늘 으스스하게 춥고 흐리며 거친 땅이다. 일찍이 주로 게르만 계통의 백인들[노르드인 Norseman]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러다 8세기 이후 유럽 전역은 날씨가 조금 따뜻해진다. 그러면서 농업기술이 발달하고 인구가 크게 느는데 이는 스칸디나비아도 마찬가지였다.
얼마간 그러다 이제는 늘어난 입들을 먹여 살리기가 버거워지며 한계에 다다르게 되는데 바이킹이라 불린 이 북쪽 사람들은 드디어 떼를 지어 밖으로 터져 나와 다른 민족들이 사는 지역을 시도 때도 없이 약탈하고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가볍고 날쌔며 튼튼한 배를 지어 멀리 항해하고 전투를 하는데 뛰어난 이들은 유럽 본토와 러시아는 물론이고 동쪽으로는 멀리 아시아의 페르시아까지, 서쪽으로는 북아메리카의 그린란드와 뉴펀들란드, 그리고 남쪽으로는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지중해 연안까지 휘젓고 다녔다. 제2의 게르만 이동이었다.
이 바이킹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었는데 스웨덴에 근거지를 둔 무리들은 주로 발트 해를 지나 러시아나 동유럽의 강을 따라 내륙을 쏘다니며 약탈하였고 덴마크를 중심으로 한 집단들은 서쪽이나 남방으로 대양의 연안지역을 들쑤셨다. 그런데 이들은 약탈만 한 것은 아니고 현지인들과 교역을 하거나 침략한 땅으로 옮겨가 살며 지방민을 꺾고 다스려 왕국을 이루기도 했다.
스칸디나비아의 영웅담[saga]에 의하면 언젠가 노르웨이 출신의 나도드(Naddodd)라는 사람이 대서양을 서북쪽으로 항해하다가 눈에 덮인 아이슬란드(Ísland, Iceland)를 처음으로 발견하여 눈섬(Snæland)이라 이름했다는데 그때까지 누구도 산 적이 없는 무인도였다. 그 후에도 이 섬은 몇 사람의 항해가들로 인해 몇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식민의 서>라는 문서에 의하면 서기 874년에 노르웨이에서 잉골프 아르나르손(Ingólfr Arnarson)이 처음으로 이 외딴 섬에 옮겨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고향에서 씨족간의 갈등으로 튕겨져 나와 가족을 거느리고는 아이슬란드로 옮겨 갔다고 하는데 그가 가보니 실은 그보다 먼저 아일란드의 수도승이요 은둔자들인 파파르(papar)들이 몇 사람 먼저 와 살고 있었다고도 한다.
화산도인 아이슬란드는 날씨가 추웠지만 난류의 영향으로 북극에 가까운 고도 치고는 그런대로 따뜻한 편이었으며 바닷가 지역은 풀도 얼마만큼 자라고 목축도 제법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한 크기의 땅덩어리에 오늘날도 인구가 고작 33만 명쯤이니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에는 꽤 거칠고 생산성이 아주 낮은 땅이다. 그런데도 이런 저런 연유로 이 먼 곳까지 사람이 너무 흘러들어오니 낙담시켜 덜 오게 하려고 섬이름 중에서 얼음땅, 곧 아이슬란드를 택해 그대로 굳어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리하여 이 외딴 섬은 비교적 소수인 국민들이 비교적 문제없이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혈통이나 문화, 언어를 거의 그대로 간직하며 살아오고 있다. 일례로 이 사람들은 주로 이름(first name)만 쓰며 한 집안의 성(last name)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성이 필요한 자리에는 누구의 아들 아무개, 누구의 딸 아무개 식으로 부르는 것이 성을 갈음한다. ‘개똥이’가 아들을 낳으면 아들의 정식 이름이 ‘돌쇠, 개똥이아들’, ‘돌쇠’가 딸을 낳으면 딸은 ‘꽃순이, 돌쇠딸’ 하는 식으로 할아버지, 아들 딸, 손자 손녀로 내려가면서 성(last name)이 매번 바뀐다. 그래서 전화번호부도 성이 아니라 이름을 알파벳 순서 대로 싣는다. 서양의 성 가운데 존슨(Johnson)이니 안데르센(Andersen)이니 하는 것들이 다 이런 풍습의 흔적이다.
그런데 북구의 영웅담인 사가 가운데 13세기에 아이슬란드에서 쓰인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Eiríks saga rauða)>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언젠가 노르웨이의 야다르(Jadarr)라는 곳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범인인 토르발(Thorvald)은 민회에서 추방형을 선고받자 가족을 데리고 아이슬란드로 이주한다. 그런데 피는 못 속였는지 토르발의 아들 '붉은 머리' 에이리크는 아이슬란드에서 또 사람을 죽여서 삼 년간의 추방형을 당한다. 그래서 에이리크는 군뵤른 울프손(Gunnbjǫrn Ulfsson)이 서쪽으로 가다가 봤다는 육지를 자신이 찾아가 보기로 한다. 그가 항해하여 찾아가 보니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라 정말로 옮겨가 정착을 했는데 그곳이 그린란드의 브래타흘리드 지역이었다.
이 사가에는 에이리크의 그린란드 이주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레이프(Leif Erikson)가 긴 항해 끝에 뱃길을 벗어나 ‘포도의 땅(Vinland)’을 발견한 사건들을 연대기로 싣고 있다. 레이프는 콜럼버스보다 오백 년쯤 앞서 북대서양을 건너 뉴펀들랜드나 아메리카 대륙의 본토인 래브라도, 세인트로렌스 강 연안에 상륙한 것으로 보인다.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와 한 쪽은 서쪽 유럽 방면으로, 다른 한 쪽은 동쪽 아시아 방면으로, 시베리아에서 다시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로, 그리하여 수만 년 이상 떨어져 살던 두 대륙 사람들이 마침내 다시 마주친 것이다.
한편 추방 기간이 지나 아이슬란드로 돌아온 에이리크는 자기가 발견한 그 섬에 가서 살자고 사람들을 꼬였다. 그는 살기 좋은 곳이라고 사람들을 호리려고 80% 이상 얼음으로 덮이고 나머지도 거의 바위투성이인 이 섬을 그린란드(Grønland, 푸른 땅)라고 불렀으니 상당히 과장 광고를 한 셈이었다. 다만 당시에는 요즘보다 기후가 상당히 따뜻해서 일부 해안 지역에는 실제 여름에는 풀이 자라고 얼마간의 농사도 가능했기에 완전한 사기라고 하기에는 좀 봐 줄 여지가 있겠다.
당시 아이슬란드에는 먹고 살아갈 자원에 비해 사람이 이미 너무 많은 터라 이 광고에 혹한 이들이 꽤 있었다. 이리하여 서기 985년, 이민자들은 스물다섯 척의 배에 나눠 타고 서남쪽으로 떠났지만 험한 바다에서 사고를 당해 열네 척만 목적지에 닿는다. 그 후 십년 동안 세 번에 걸쳐 이주민들이 그린란드로 옮겨왔다. 이들은 거의 모두 날씨가 좀 따뜻한 섬의 서쪽 해안에 정착했는데 이곳의 두 지역을 개발해서 농장을 만들어 갔다. 한 때에는 농장이 수백 군데 있었다는 사실을 훗날의 유적 발굴로 알 수 있었다.
이러다 보니 서기 1000년께에는 포화상태에 이르러 그린란드에서 집을 짓고 목축을 하기에 알맞은 땅은 꼭 차 버렸다. 서해안의 두 정착지 중에서도 서쪽 정착지에 천 명쯤, 동쪽 정착지에 사천 명쯤 살았다. 1002년에는 새 이민자들에 묻어온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때까지 그린란드의 왕처럼 군림하던 에이리크도 이때 죽었다.
에이리크가 죽기 얼마 전에 그의 아들 레이프가 배를 타고 탐험을 떠났다. 십여 년 전에 헤르욜프손(Bjarni Herjólfsson)이라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찾으러 아이슬란드에서 그린란드로 항해해 오다가 거센 바람으로 서쪽으로 한참 떠밀려 가서 새로운 땅을 보고 온 적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레이프는 서쪽과 남쪽으로 항해하여 차례로 '너른 바위의 땅'[Helluland: Baffin Island], '숲의 땅'[Markland: Labrador], '포도의 땅'[Vinland: Newfoundland]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가 발견했다는 포도는 포도가 아니라 삭혀서 술을 만들 수 있는 야생 딸기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라브라도르(숲의 땅)는 지도에서 보듯 캐나다의 확실한 대륙이니까 레이프가 유럽인으로서는 섬이 아닌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사람이 된다.
그 후 레이프의 처남인 칼세프니(Karlsefni)가 바이킹 백육십 명을 데리고 가서 ‘포도의 땅’에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원주민인 인디안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사람들과 소 같은 큰 가축을 보고 무척 놀랐다. 바이킹은 마주치는 에스키모나 인디언을 '스크랠링(Skræling)’이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소리 지르는 사람'이라는 뜻인 것 같다. 처음에는 인디안과 바이킹 양측이 우호적으로 물물교환을 하기도 했지만 곧 갈등이 불거져 몇 차례 전투 끝에 바이킹은 아메리카 본토에 발을 못 붙이고 물러나거나 사라진 것 같다.
그런데 사가에 나오는 이런 내용들은 전적으로 믿을 것은 못될지라도 허구는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1960년대에 뉴펀들란드의 란스메도스(Lance aux Meadows)에서 바이킹의 주거지가 발견됐는데 여러 채의 집과 대장간, 선박 수리 작업장 같은 것들이었다. 바늘, 실패 같은 여자들이 쓰던 물건도 나왔다. 아마도 이들은 멀리 남쪽에서 식량을 구해 오고 사냥과 물고기 잡이로 이 주거지에서 살아간 것 같다.
바이킹은 여러 곳에서 원주민들과 다양하게 접촉한 것 같지만 아마도 인디안의 등쌀에 밀려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얼마 후 그린란드로 돌아갔거나 인디언 부족에 흡수됐거나 그도 아니면 모두 죽어 없어진 것 같다. 오백 년이 더 지난 훗날 아메리카에 다시 상륙한 유럽인 내륙 탐험가들의 목격담에는 원주민들 가운데 어쩌다 금발 벽안의 인디언이 섞여 있는 것을 보았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한편 그린란드의 본거지는 어찌 됐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곳도 450 년을 버티다 결국 깡그리 소멸하고 말았는데 그 주요인은 기후 변동이다. 바이킹이 처음 도착한 980년 즈음, 그린란드의 기후는 현재보다 훨씬 온화해서 일부 해안지역에서는 포도나무를 기를 정도였다.
서기 900년에서 1300년 즈음까지를 중세 온난기라 한다. 당시 유럽은 요즘처럼 따뜻했다. 그러다 1257년, 멀리 인도네시아 롬복 섬의 화산이 폭발했다. 지난 7000년 동안에 있은 지구상의 화산 폭발 가운데 가장 엄청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성층권으로 방출된 황산염은 햇빛을 가려 전 지구의 기후가 내려갔다. 이 때문에 농사가 잘 안 되어 유럽은 그 후 한참 동안 굶주림에 시달렸다. 1300년께부터는 점점 더 추워졌다. 이른바 소빙하기가 시작이었다. 그린란드의 환경 조건도 상당히 나빠졌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린란드 바이킹이 멸망한 까닭은 기후가 다가 아니며 환경 변화에 사람들이 어떻게 대응했느냐가 또한 주요한 요소가 된다. <총ㆍ균ㆍ쇠>를 쓴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 1937~)는 이르기를 그린란드야말로 무너져 사라지는 문명의 특징을 고루 갖춘 좋은 사례라고 한다. 그의 견해를 포함하여 그린란드 바이킹이 멸망한 원인을 간추리자면 다음과 같다.
1. 숲과 흙의 파괴, 산림자원의 고갈
처음에 천 명쯤 되던 그린란드의 바이킹은 곧 사오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집을 짓고 배를 만들고 쇠를 녹이고 겨울을 날 땔감으로 나무를 베어 냈지만 다시 자라게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목축을 위해 풀밭을 만들려고 숲을 불태웠다. 점점 추위가 심해지는데도 이들은 노르웨이에서 하던 대로 나무 없는 땅에서 말, 소, 양, 돼지, 염소를 계속 길렀다. 토양 침식이 심해지고 농사는 더 어려워졌다. 결국 그린란드의 얼마 안 되는 산림 자원은 바닥이 났다.
나무가 거의 사라져 새 배를 짓거나 헌 배를 수리할 수 없었다. 물에 떠내려 온 나무를 줍거나 멀리 떨어진 노르웨이에서 실어 오거나 아니면 먼 래브라도 해안까지 가서 목재를 얻어야 했는데 나중에는 땔나무까지 모자라게 되었다.
반면, 근처에 살던 이누이트(Inuit, Eskimo)들은 얼음을 깎아 이글루를 만들었고 바다표범가죽으로 카약을 만들었으며 바다짐승의 기름을 땔감이나 등잔으로 씀으로서 나무를 거의 쓰지 않고도 문제를 거뜬히 해결했다.
2. 쇠의 모자람
그린란드에서는 쇠가 매우 모자랐다. 철광석을 캘 수는 있었지만 쇠로 녹일 땔감, 곧 숯을 만들기 어려웠다. 쇠가 모자라 뼈와 돌로 연장을 만드니 석기시대로 돌아가 일의 효율은 떨어지고 원주민과의 사냥과 무력 등 힘겨루기에서도 우위에 설 수 없었다.
3. 추위 부적응
바이킹은 추위에도 떨어야 했다. 땔나무가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혹독해지는 추위에도 이누이트처럼 바다표범 가죽으로 만든 파카와 털바지를 만들어 입을 생각을 않고 유럽식 의복을 고수했다. 여자들은 그 추위에도 양털로 만든 짧은 가운을 입었다.
4. 먹을 것 부족
기후가 척박하다보니 목축도 농사도 시원찮은데다 겨울이 길어지고 기온이 내려가 곡물 수확이 크게 줄었다. 그리고 왠지 이들은 아이슬란드나 스칸디나비아에서와는 달리 물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다. 그린란드에 들어온 후 얼마 안 되어 어업을 포기한 것인데 이는 식량 사정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아마도 종교적인 이유 같은데 대체로 하층민의 유골에서 해산물의 흔적이 더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교회에 의해 해산물이 금기시된 것 같다.
원주민인 이누이트는 카약을 타고 먼 바다로 나가 고래를 잡았지만 바이킹은 얼음에 갇힌 고래를 어쩌다 챙길 수 있었을 뿐이다. 이누이트는 개썰매를 타고 바이킹보다 훨씬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했으며 반달바다표범을 사냥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이킹은 이런 기술을 채택하지 않았다.
5. 원주민과의 갈등
바이킹은 이누이트와 어울려 살지 않고 따로 놀았으며 이들을 멸시하여 서로 교역도 별로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바이킹들은 원주민의 사냥 기술 등 생존의 지혜를 배울 마음이 없었으며 문화적 인종적 우월감과 종교적 편견에 젖어 이들과 충돌하고 오히려 피해를 입기 일쑤였다. 1379년에는 그린란드의 동쪽 정착지에서 이누이트들의 습격으로 열여덟 명의 남자가 죽었다.
6. 내부 갈등과 종교적 원리주의
이 작은 집단 안에서도 계급 갈등이 꽤나 심했다. 몇몇의 부자는 큰 농장을 가진 반면 암소 한 마리가 전 재산인 사람도 많았다. 생활이 각박해지자 사람들 사이에 잔인하고 격렬한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지배계급의 근시안적인 이익 추구에 매달렸다. 권위를 세우는 데 필요한 사치품 수입을 줄이고 철과 목재를 더 많이 수입할 수도 있었다. 교회는 지나친 권위를 행사하며 교조주의적으로 사람들을 지배하였으며 현실의 절박함을 도외시했다.
7. 본토와의 단절
1400년대 초에 소빙기가 시작되어 해안이 얼어붙고 유빙이 생겨 그린란드와 노르웨이 간의 교역이 힘들어졌다. 노르웨이에도 흑사병이 돌아 인구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 통합되면서 노르웨이의 위상이 크게 떨어졌다.
이전까지는 아랍의 방해로 무역로가 막혀서 인도의 코끼리 상아가 유럽에 공급되지 않게 된 탓에 그린란드의 바다코끼리 상아가 주요 수출품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십자군 원정으로 유럽에 다시 코끼리 상아가 들어오자 바다코끼리의 상아는 가치가 떨어진다. 게다가 나중에는 유럽에서 상아 제품의 기호도 자체가 떨어지니 결국 그린란드와 유럽 간의 교역이 중단되고 만다. 철과 목재, 그리고 기독교 문화의 공급선을 잃어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세계화의 폐해였다.
8. 멸망의 모습
바이킹의 후예들은 지난날 그들이 들여온 생활양식에 끈질기게 집착하여 계속 농사와 목축에 매달렸고 심지어 기후가 바뀌었는데도 옛날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추위에 떨며 살다가 마지막까지 남았던 사람들은 결국 굶어 죽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의 기록은 1408년에 끊어졌다.
그 죽어간 사람들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한 목장의 가장 위층에서 기둥, 지붕 목재, 문, 가구, 그릇, 십자가 등 최후의 생존자가 남긴 것들이다. 작은 들새와, 토끼의 발뼈, 갓 태어난 송아지와 새끼양의 뼈, 소의 발굽뼈, 사냥개의 뼈 같은 것들이 발견됐는데 이는 마지막까지 남은 자들이 다음해에 기를 새끼 가축과 사냥개까지 잡아먹고서는 굶어 죽은 흔적이다.
소빙하기에 바이킹은 사라졌지만 이누이트는 오히려 번성했다. 그럼 그린란드를 비롯하여 북아메리카의 북극권에 퍼져 사는 이누이트(Inuit, 원주민의 말로 ‘사람들’이란 뜻), 곧 에스키모란 누구인가를 간략히 살펴보자.
바이킹이 살다 한참 전에 사라진 그린란드의 현재 인구는 5만 6천 명쯤 되는데 대부분이 수도인 누크(Nuuk)에 몰려 살며 전체 주민 가운데 일부 백인과의 혼혈을 포함한 원주민이 거의 90%를 차지한다. 그린란드는 여러 역사적인 굴곡을 거쳐 지금은 덴마크의 영토로서 외교, 군사 외엔 자치권을 행사하는 자치주이다. 정식명칭은 이곳의 공식 언어인 원주민의 말[Greenlandic]로 칼라알리트 누나아트(Kalaallit Nunaat)이다.
소빙하기에 그린란드에서 바이킹이 소멸할 즈음의 100년 동안, 지구의 기온은 북반구에서 겨우 0.2도쯤 내려갔다. 그런데 인류가 화석연료를 사용해 온 지난 100년 동안 전 지구의 기온은 무려 0.85도가 올라갔다. 한 쪽이 내려가면 다른 쪽은 올라가는 시이소오처럼, 이러한 급격한 지구온난화로 나머지 세계는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였지만 그린란드에서는 오히려 기대가 부풀고 있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얼음이 많이 녹으면 땅이 더 드러나 숨겨진 광물을 캘 수 있으며 농사도 목축도 더욱 넓은 지역에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뱃길이든 하늘길이든 북극항로가 붐비면서 관광객과 물동량이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얼음이 녹은 낮은 땅과 얕은 바다의 유전이 꿈을 부풀게 하고 있다. 이런 희망에 따라 덴마크로부터 완전 독립을 꿈꾸는 움직임도 보이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강대국들의 눈독을 받아 전화위복(轉禍爲福)이 아니라 전복위화(轉福爲禍)가 될 우려도 없지 않다.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라스카를 거저 줍다시피 헐값에 사서 횡재를 했듯이 그린란드를 가지고 더 한 번 히트를 친다면 어떨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더니 트럼프 대통령이 연전에 입맛을 다시다 그 짝이 났다. 덴마크에 그린란드의 구매 의사를 밝혔다가 일언지하에 퇴짜를 맞았는데 이런 게 그냥 한 때의 해프닝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아르헨티나보다 조금 작은 이 북방의 얼음섬을 미국이 차지한다면 정말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비할 데 없이 크고 강한 나라가 더욱 크고 강해진다면, (미국에게만 말고) 전세계 인류의 평화와 운명을 위해 과연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그런 거시적인 관점이 아니더라도 흰 땅이든 푸른 땅이든 그 땅의 운명에 관한 최종 결정은, (아무리 힘이 미약하더라도) 칼라알리트 누나아트에 사는 이누이트들의 자유의사에 전적으로 달려 있어야 함은 마땅하리라.
그건 그렇고, 기원전 2,500 년쯤 고대 이누이트들이 그린란드에 들어왔는데 이들은 본래 아시아의 시베리아에서 기원했음은 다른 후속 이누이트들의 물결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린란드에는 잇달아 사카크(Saqaaq) 문화, 도르셋(Dorset) 문화, 독립(Independence I & II) 문화 등으로 이름지어진 생존 방식을 가진 이누이트들의 물결이 그린란드의 해안을 따라 시차를 두고 차례로 밀려왔다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바이킹이 그린란드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개썰매와 바다표범 가죽의 카약으로 대표되는 툴리(Thule) 문화를 가진 새로운 이누이트들이 바이킹과 거의 동시에 그린란드의 해안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무튼 그때의 바이킹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지만 이 이누이트들은 소빙하기 동안 그린란드에서 거뜬히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중세 온난기 동안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은 서로 도우며 힘겹고 거친 환경을 이겨냈다. 그럴듯한 교회를 지어 예배를 보며 로마 가톨릭에 십일조를 보냈으며 유럽 본토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거래했다. 그린란드의 정착지는 노르웨이 본국과 종교적, 법적, 경제적으로 한 몸이었다. 그러나 그 후 소빙하기의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바이킹은 살아남는 법을 이누이트에게서 배우지 않았다. 자기들의 정체성을 애써 지키느라 생존을 위한 변화를 거부한 것이다. 이는 다른 문명과 모듬살이를 업신여기며 오만하고 어슬프게 팬데믹에 대처한 이른바 서구의 선진국들은 물론이요 세계화의 그물에 얽혀 살아가야 하는 본국과 해외의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일깨우는 바가 없지 않다.
이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관습과 이념에 너무 사로잡히지 말 것을 가리키지 않는가! 한 쪽 통로가 막히기 전에 다른 통로들을 유연하게 뚫어 놓아 어떤 경우에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소통이 장기간 막히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일깨움이다. 게다가 물질이든 정신이든 가진 밑천을 낭비하지 말고 갈무리하라는 호소이며 한 배를 탄 식구들은 서로를 헐뜯지 말고 끝까지 아끼고 돌보라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상대가 그 누가 됐든 제발 얕보지 말며 그 앞에서 지레 꿇리어 수그러들지도 말지어다. 다만 누구에게서나 겸허하고 당당하게 배울 수 있고 베풀 수 있는 몸가짐을 할 때 우리는 어쩌다 머나먼 흰 섬에 갇힐지언정 그 땅을 푸르게 가꾸며 살아남아 앞날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런 밝고 넓은 시야를 가린 채 제 도그마에 갇혀 세상을 잘못 이끄는 종교에 자신이 끌려 들어와 있다면 지금 바로 과감히 그 창틀을 깨고 스스로 성채를 벗어나야 함도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