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심을 깨치는 글 >
미국에서 꽃피는 대승 불교 - 우리들의 수행 이야기
지식과 지혜
Knowledge vs Wisdom / 知識與智慧
글 | 현안스님
우리가 선(禪)이라고 부르는 이 명상 즉 참선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이걸 선(禪)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른 명상법과 구분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이걸 젠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그냥 단순하게 명상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위빠사나라고도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의 목적이 다른 명상법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가르치는 이유는 여러분들의 지혜를 열도록 돕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선을 가르치는 유일한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혜가 무엇인가요? 그리고 지혜는 지식과 어떻게 다를까요?
이 글을 읽고 계신 어떤 분은 지혜란 부처님의 말씀이고, 다른 이들로부터 획득한 그 외의 것은 모두 지식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 외의 모든 말은 다 지식일 뿐일까요? 지식은 다른 이들에게서만 올까요? 지혜가 모두 부처님의 말씀이고, 지식이 모두 다른 사람에게서 왔다면, 지혜와 지식 둘 다 우리의 것이 아닌가요?
지혜와 지식에 대해서 물어보니 어떤 분은 지식은 획득하는 것이며, 지혜는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혜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지혜로운 자가 “나는 모를 뿐”이라 말한다면, 과연 그게 지혜일까요?
법문 시간에 어떤 신심 깊은 불자님은 불교 공부로 얻은 이해가 지혜라고 말했습니다. 불자가 아닌 사람이나 불교의 지혜를 한번도 공부해 보지 못한 사람은 어떤가요? 그런 분들은 지혜가 없는건가요? 불교만 유일하게 지혜에 독점권이 있을까요?
불교에서는 지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왜 불교에서 이렇게 지혜에 대하여 강조할까요? 여러분은 지혜가 없이 살 수 있을까요? 지혜가 사는데 꼭 필요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만약 지혜가 사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왜 그럴까요?
우리 모두 지혜와 지식에 대한 개념이 어느 정도 있습니다. 살면서 지식을 획득하여, 이런 지식은 우리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예를 들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력서를 쓰거나, 아파트 임대계약서를 쓰려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써야합니다. 지식이 무엇인지는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지혜는 무엇일까요? 특히 참선 수행자는 지혜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지식(智識)은 배움의 과정을 통해 얻는 것이고, 이에 반해 지혜(智慧)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 생길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마음을 사용해서 지식에 도달하는데, 즉 우리는 생각하는 마음을 통해서 배웁니다. 생각하는 마음을 써서 문제를 해결해낸다면 그것도 지식에 해당됩니다. 반대로 생각하지 않고 문제를 푼다면 그걸 지혜라 부릅니다.
어떤 사람은 수십년간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번에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지혜를 얻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도 경험을 통한 지식으로 여깁니다. 불교의 선(禪)에서 지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지혜란 생각을 멈췄으나 문제를 풀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선(禪)의 비밀입니다.
예를 들어 일상 생활에서 생각을 전혀하지 않고 다양한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멈추는 대신 지혜는 앞으로 나오도록 두는 것입니다. 생각을 멈춰야 지혜가 작동합니다.
그런데 생각이 멈췄을 때 내면에서 오는게 직관(直觀)인지 습기(習氣)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해결책이 지혜에서 온 것인지, 습관에서 나온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죠? 생각을 멈추고 해결책을 얻었는데 그게 별로면 어떻게 하죠?
우리가 완전히 생각조차 할 수 없이 완전히 조증 상태 (분노의 상태)에서 내려진 결정은 어떨까요? 이럴때 생각이 완전히 멈췄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은 겹겹이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자각을 못하는 상태에서 잠재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정신활동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보통 우리가 자각 못하는 정신활동이 있습니다.
참선교실을 운영하다보면 불안하거나 걱정이 많은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아직 자각이 안되는 분에게 “생각이 복잡하시네요” 또는 “걱정이 너무 많으시군요”, “혹시 불안증인거 아세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이 말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런 말들은 이들에게 더 많은 불안감과 걱정을 줄 뿐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대부분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는 많은 생각이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 중에서도 항상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생각이 있는데, “이게 나한테 얼마나 좋을까?” 또는 “이게 내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항상 평가하고 있지만 인지조차 못합니다.
지혜는 또한 지식을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생각을 멈출 수 있다면, 갖고 있는 지식을 훨씬 더 잘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지혜는 갖고 있는 지식을 어떻게 써야할지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또 다른 정의입니다.
우리는 항상 지식을 축적하지만 그런 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훈련받지 못합니다. 달리 말해서 평생 지혜 없이 지식만 획득한다면 지식을 잘못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 지식으로 우린 스스로를 다치게 할 것입니다. 지식만 축적하고 지혜를 열지 못하면, 지식을 바르게 쓸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스스로를 해치고 다치게 할 것입니다.
지혜란 생각하지 않고 운영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으로 문제를 풀고 싶어하지만 이런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서 예상보다 꽤 만족스런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반드시 지혜가 필요하지 않지만, 지혜는 삶을 훨씬 더 살만하도록 해줍니다. 지혜가 없다면 우리 인생이 진짜로 비참할 것입니다.
불교의 선(禪)은 지혜를 작동시키는 체계적인 방법입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참선할 때 아픈 다리를 참으라고 가르칩니다. 다리 아픈 것을 계속 참고 또 참아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아픔이 지나갑니다. 다리를 풀거나 스트레칭을 안해도 그렇게 됩니다. 셀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단련해서 경험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제가 쓴 글을 읽어보셨다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참선교실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일단 결가부좌를 권하지만, 아예 결가부좌로 앉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라도 “나도 언젠간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계속 도전하고 노력하면 됩니다. 처음 참선 자세를 시도할 때 반가부좌나 평좌로 앉아야 해도 괜찮습니다. 어떤 자세로 앉든 계속 노력하면 결가부좌로 앉을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포기하지 마세요. 아무리 잘 앉는 사람도 오래 앉아 있으면 다리의 아픔과 불편함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런 아픔과 불편함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선 훈련의 기반입니다.
아픔과 불편함을 견디는 훈련은 인내심을 키워줄 것입니다. 다리 아픔을 참고 또 참으면 인내심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이렇게 꾸준하게 단련한다면 살면서 겪는 많은 도전도 더 잘 견디고 다룰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매우 아프고 괴로운 곳입니다. 오직 불교의 선(禪)에서만 삶은 더 살만하게 해줄 수 있는 체계적 훈련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선 수행은 현생에서 겪는 고통을 더 잘 다스릴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러므로 참선은 우리 일상 생활에 필수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괴로움도 더 많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인 고통도 늘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젊어서 고생이 막심해서 지금이 더 살만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몸이 더 젊어질 수는 없고, 나이가 들수록 육신도 쇠약해집니다. 수행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나이가 들수록 괴로울 일이 많아집니다. 게다가 우리는 아는게 많아질수록 만족하기 어렵고, 요구사항도 늘어납니다.
이렇듯 인생은 압도적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나이가 많든 적든, 돈이 많든 적든, 유명하든 아니든, 건강하든 쇠약하든, 잘 생겼든 못생겼든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내면의 압박감은 늘어나고, 줄어들진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선 수행은 이런 압박감을 더 잘 다스릴 수 있게 도와줍니다. 선을 수행하는 이유는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선을 제대로 배우고 수행하면, 안전지대(comfort zone)가 더 커집니다. 즉 삶 속의 괴로움이 선 수행 덕분에 예전만큼 힘들지 않고, 다스리기도 더욱 수월해질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살면서 지식만 획득한다면 그걸로 충분치 못합니다. 인생이 비참할 것입니다. 살면서 더 많이 알수록 더 비참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 안전지대를 넓힐 수 있고, 우리는 스스로 통제능력과 힘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그런 지혜가 있다면 우리 삶에서 겪는 우여곡절을 더 잘 다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선해야하는 이유입니다.
현안賢安 27살에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 10년도 되지 않아서 꽤 성공적인 기업을 일궜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영화 선사永化禪師(Master YongHua)를 만나 참선을 처음 접한 후 수행 정진해왔으며, 2015년부터는 종교, 인종, 나이 등에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하고 배울 수 있는 ‘공원에서의 참선(Chan Meditation in the Park)’이라는 모임을 영화 선사의 지도하에 캘리포니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이끌었다. 그와 동시에 미국 전역과 캐나다, 콜롬비아, 쿠바 등 전 세계를 다니며 많은 이에게 참선 수행법을 소개해왔다. 영화선사의 한국 방문 시 동행하면서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고 불법을 더 깊게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미국 위산사潙山寺(Wei Mountain Temple)에서 영화 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현재는 스승의 뜻에 따라 한국의 보산사寶山寺(Jeweled Mountain Temple)에서 참선(챤 메디테이션)을 지도하며 수행 정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