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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2021년 7,8월호] 난암 유종묵의 수행교화와 일본행적에 대한 시론적 고찰 / 원영상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1.07.25|조회수282 목록 댓글 0

< 특별 소개 >

 

 

 

 

난암 유종묵의
수행교화와 일본행적에 대한 시론적 고찰

 


글 | 원영상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1991년 로스 엔젤레스 관음사에서 열린 조국통일 기원 불교도 합동법회는 1945년 광복이후 남북 불교계 및 해외동포 불교계 인사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인 행사였다. 이 행사가 성사에는 미주현대불교가 조선불교도 연맹에 제안을 하여 행사 참석에 대한 긍정적인 답신을 받고, 조선불교도연맹에서 참석하는 사람들의 미국국무성에서 비자를 받는 문제 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때 일본에서 황봉수 재일본조선불교도협회 회장을 비롯하여 3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이들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유종묵 스님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이들을 통해들은 난암 유종묵 스님은 매우 흥미로운 스님이었고 일본 동포사회에서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긴 스님이었다. 한암스님의 제자였으며 남북 분단 전인 일제시대부터  일본에서 큰 활동을 한 스님이었다.   
하지만 유종묵 스님은 남북 분단이후 조총련 계열에서 활동한 스님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보안법 때문인지 한국불교계에서는 이 스님의 보도가 나오지 않았다. 불교방송에서 제작한 고승열전에서도 한암스님 이야기 하면서 제자에 그냥 유종묵 스님이라는 이름만 언급하는 정도였다.  1991년 이후 나는 월정사 출신 스님들에게 난암 유종묵 스님을 물어보면 대개 이 스님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항상 궁금해 했는데 한국불교학지에 실린 유종묵 스님 관련 글을 보고 필자인 원영상 교수에게 연락하여 원 교수로부터 글을 받아 본지에 소개한다. 한국불교계 언론에서 유종묵 스님의 사진이 공개되는 것은 본지에서 처음이다.  

--편집자 주--

 

 

조국통일기원법회 사진. 본지 1991년 12월호에 상세 보도
서태식 스님                                           윤건차 교수                                        홍봉수 회장

 

 

Ⅰ. 난암의 행적
Ⅱ. 일본 내 사찰에서의 난암의 활동
Ⅲ. 난암에 대한 평가
Ⅳ. 난암 연구의 향후 과제


〔요약문〕
 
  본 연구는 근현대 일본에서 활약한 한국의 승려 가운데 재일동포 사회에 불교포교자로서 가장 잘 알려지고, 영향력이 있었던 난암 유종묵暖庵 柳宗默(1893~1983)을 최초로 연구한 것이다. 난암은 3·1독립운동에도 참가하였으며,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유랑하다가 월정사에 출가하여 한암 선사漢巖 禪師의 지도를 받아 수행하였다. 1935년에 도일渡日한 후에는 일본에서 경도 임제학원京都 臨濟學院을 졸업하고, 만수사萬壽寺를 거점으로, 특히 전후 일본에 남아 있던 재일조선인을 중심으로 평생을 대중포교를 위해 헌신했다. 1948년에는 불교인들과 함께 오늘날 재일본불교도협회의 전신인 재일본조선불교도연맹을 창설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 당시 희생된 조선인 1,670명의 유해를 일본정부로부터 받아 우천사祐天寺에 안치하였다. 이후 동경東京에 국평사國平寺, 大阪(오사카)에 통국사統國寺를 창건하였다. 그 외에도 대외적으로는 아시아불교도평화회의(ABCP) 및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 등의 국제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해방 후, 국내에는 한 번도 들어오지 않은 그는 1983년 일본에서 열반하였다. 
  난암의 영향을 받은 재일조선인들은 그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즉, 선승으로서의 철저한 수행자의 자세, 민족의식과 역사에 대한 투철한 의식,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열망, 재일조선인들의 복리를 위한 희생적인 역할은 물론, 한일의 특수한 관계를 넘어서 보편적인 불교사상을 전파하고 실천한 대승적 정신의 구현자로서의 난암을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평생을 비구 수행자로서 불법의 정신을 일관되게 실천한 측면에는 그가 입문했던 선禪의 세계에 대한 투철한 사상이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함에도 아직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현재 그의 제자들이 일본의 불교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의 정신을 조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도 이제부터 그에 관한 본격적인 조명을 통해 한국 근현대불교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고 있다. 향후 난암에 대한 연구의 과제로써는 한암 선사와의 관계에 대한 조명, 일본에 건너가서 그곳에서 포교하고자 한 의도, 해방 후 재일조선인사회와 난암과의 관계 규명, 재일조선인사회에서의 그의 역할에 대한 심도 깊은 조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불교사상에 대한 연구가 더욱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이처럼 난암에 대한 연구는 근현대 한국불교사나 불교사상사적인 측면에서 한국불교의 외연을 동아시아로 확장시키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본다.   

주제어: 난암 유종묵(暖庵柳宗默), 한암 선사(漢巖禪師), 재일본조선불교도연맹, 만수사(萬壽寺), 재일조선인

 

난암 류종묵선사


Ⅰ. 난암의 행적

  暖庵 柳宗默(1893~1983, 이하 난암으로 칭함)1)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아직 없다. 그럼에도 일본에서는 재일동포2)에 의해 화상和尙 또는 선사禪師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송이金松伊 선생3)이 필자의 연구를 위해 경도 만수사(京都 萬壽寺) 주지 청안(靑眼) 스님을 직접 만났으나, 난암에 대한 평전을 집필 중이어서 아직은 자료를 건네줄 수 없다는 말을 전해 받았다.4) 실제로 본 연구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가운데 난암에 대한 자료가 거의 유포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재일동포들에게 있어서는 근현대에 일본에서 활동한 조선 최고의 고승으로 여겨지면서도 그와 관련된 자료가 거의 없다는 점은 너무나 큰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난암 본인의 글이 없을 리는 없는 것으로 판단되지만, 현재로는 입수할 수 있는 길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먼저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그에 대한 행적은 일정 정도 재구성할 수 있지만, 불교사상 혹은 철학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료 보완을 통해 해결해 갈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 난암에 대해 간략한 전기 형태로 알려진 것은 홍남기와 백종원의 글에 의해서이다. 거의 소략한 형태로 소개되어 있으며,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난암의 사상을 들여다볼 여지는 없다. 그렇지만 이 글들이 소중한 것은 난암의 인물됨과 그의 행적이 일본 사회에서 특히 재일동포사회에서 큰 영향을 끼쳤으며, 해방 이후 그 사회의 정신적 구심 역할을 했음을 명확히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홍남기는 난암에 대한 소개를 59화 째에 들고 있는데, 그를 “일본 동포들의 의지처”5)라 하고 있다. 백종원은 자신의 두 저술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하나는 자서전적인 글에서「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중간 제목 하에 만수사 국평사(‘萬壽寺, 國平寺)의 유종묵 선사’6)라는 소제목으로 해방 전후의 재일동포사회의 사정과 더불어 그의 일생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또 하나는 재일동포의 역사와 관련된 저술에서「유종묵 선사와 국평사」7)라는 소제목으로 할애하여 기록하고 있다. 
  난암에 의한 활동의 시공간이 대부분 해방 후 일본에 걸쳐 있으므로 그에 대한 기록은 현재까지 한국에서는 찾지 못했다. 또한 한국과의 관계, 특히 국내에서의 출가와 수행에 대해서는 일본의 단편적인 기록 외에는 얻을 수 없다. 따라서 먼저 홍남기와 백종원의 글들을 중심으로 한암 선사(漢巖 禪師)(1876~1951)와 난암에 대한 관계를 살펴본 후에, 그의 행장을 정하는 것이 순서에 맞을 것으로 본다.
  한암 선사와 난암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본의 기록들은 특별한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홍남기는 앞의 책에서 강원도 월정사에서 한암 화상에게서 득도하고 수행했다고 한다.8) 여기서 말하는 득도는 출가를 말한다. 그 외에 한암과의 관계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백종원 또한 마찬가지이다. 두 저서 가운데 앞의 저서에서는 만주에서 돌아온 난암이 1929년에 태백산의 심산유곡에 있는 오대산 사찰의 불문에 들어와 수행을 했다는 것이다.9) 뒤의 저서에서는 같은 내용에 덧붙여 “솔잎을 먹으며 고행을 쌓았다”10)고 한다. 그 외에는 어떠한 언급도 없다. 일단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암 선사와 난암이 사제지간이라고 하는 것은 명백히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11) 그럼에도 그 이상의 불교사상적 관계와 난암의 渡日 이후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서우담이 1970년대 일본에서 직접 난암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의 모습을 본 것을 필자에게 전해준 것이 있다.12) 서우담에 의하면, 난암은 동경의 사찰13)에서 만났을 때, 난암이 한암 선사를 부처님이라 하고, 탄허 스님을 아난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진을 법당에 모시고 예불을 올리고 있다고 이야기 했다. 이 일화의 내용으로 미루어 난암은 한암 선사의 슬하에서 출가한 것에 대한 자긍심과 그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한암 선사의 제자로서 보문, 탄허(普門, 呑虛) 스님 등이 난암과 해방 전후에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서로 교류가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하는 점이다. 이제 이어서 난암의 행적을 정리, 소개하고자 한다.

 

 

1) 洪南基는 柳宗默의 호를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暖庵 외에도 煖岩이다. 洪南基(2013) p.140. 
2) 본 논문에서는 재일동포 외에도 재일조선인을 같은 의미로 쓴다.
3)본 연구를 위해 일본의 金松伊 선생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金松伊 선생은 일본 천황 및 군국주의자들의 전쟁책임 및 전쟁의 고통을 고발한 나카자와 케이지(中沢啓治, 1939~1212)의 만화『はだしのゲン(맨발의 겐)』전10권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소개한 소설가로, 이외에도 송기숙의『5월의 꿈 5월의 분노』를 일본어로 번역한『光州の5月(광주의 오월)』을 비롯하여『낫짱이 간다』,『낫짱은 할 수 있어』,『チャングムの誓い(장금의 맹세)』등의 작품을 한일 양국에서 출판한 중견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4)또한 靑眼 스님은 평전 작업이 완료되면, 모든 자료를 필자에게 건네주겠다고 한다. 필자는 자료를 받게 되면 본 논고에서 다루지 못한 사항들을 중심으로 연구해가고자 한다.
5)洪南基(2013) p.140. 6) 白宗元(2010) p.160. 7) 白宗元(2015) p.99. 8) 洪南基(2013) p.140. 9) 白宗元(2010) p.163.
10) 白宗元(2015) p.99. 오대산은 한랭 기후권에 속해 있어 소나무를 찾기가 어렵다. 따라서 예전부터 수행 과정에서 선사들이 솔잎을 먹는 이야기가 회자되는 것에 비추어 그만큼 고행을 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11) 탄허 스님이 지은 한암 스님의 碑銘에는 “門下에 得度者 有數로되 보문(普門)·난암(暖庵)·탄허(呑虛) 等이 志行이 超出하여 자못 宗風을 大振하였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수행에 철저했던 보문은 일찍 열반하였으며, 난암은 일본에서, 탄허는 한국불교계에서 혁혁한 활동을 한 것이다. 한편 김호성(1996)은 “스님의 법을 얻은 제자가 몇 사람 있었으나 오직 보문과 난암이 지행이 초절하여 자못 종풍을 떨쳤으나 보문은 불행이도 일찍이 별세하였다”라고 하며, 보문 스님의 행장을 소개하고 있다(pp.122~127). 한상길(2009)은 “제자로는 보문(普門)·난암(暖庵)·탄허(呑虛) 등이 있고, 고암(古庵)·효봉(曉峰)·서옹(西翁)·고송(古松)·관응(觀應)·범룡(梵龍)·인홍(仁弘) 스님 등이 수학하였다(p.83)”고 하고 있다. 이 내용들은 기본적으로 탄허 스님이 지은 비문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12) 필자는 서우담을 직접 만나고자 하였으나, 사정상 전화로 통화하게 되었다. 그 날짜는 2016년 3월 20일이다.

 


  먼저 월정사 출가 이전의 난암에 대한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백종원이 다소 언급하고 있다. 충청남도 천안 태생인 난암은 17세에 한일병합을 목격하고, 26세에는 3·1독립운동에 참가했다. 그 이후에는 만주의 북간도와 시베리아 연해주 등지를 유랑했으며, 1929년에 다시 국내에 들어왔다.14) 유랑 당시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백종원은 상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다.
  난암이 1929년 월정사에 출가한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원자료를 활용했는지는 모르지만,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15) 그리고 1935년에 도일하고, 1938년에는 교토(京都)의 臨濟學園16)에 유학하여 불교철학을 공부했다. 그렇다면 약 5~6년간 월정사 내지는 한국의 불교사원에서 수행을 했다고 할 수 있다.17) 그가 공부하는 기간 동안은 경도(京都)의 동복사(東福寺)에서 기거한 것으로 본다. 출가자의 신분으로 어떤 인연에 의해 이 절에 의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40년에 만수사의 주지가 된다. 
  이후 해방이 되자, 일본에 남은 난암은 이 만수사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먼저 특기할 만한 것은 1923년 관동대지진 및 1941~1945년 동안 태평양전쟁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희생자는 물론,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사건18)으로 희생된 372명의 희생자의 영혼을 제사지냈다.19) 이후에도 전쟁 중에 강제 징용되어 탄광이나 댐 공사에 동원되어 목숨을 잃어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된 동포들의 유골을 모아 제사를 지냈다. 

 

국평사


  1948년 8월 1일에는 김성해 이영표 장태성 서종도(金星海·李英表·張泰成·徐宗道) 등과 더불어 발기인이 되어 재일본조선불교도연맹(在日本朝鮮佛敎徒聯盟-이하 불련으로 칭함)을 창설함과 동시에 초대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20) 이 단체는 1955년 대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결성되자 그 산하 단체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89년에는 재일본조선불교도협회로 개명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난암은 1955년에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육해군의 군속으로 희생이 된 조선인 만 명의 명부를 입수하였다. 그리고 그 일부분의 유해가 무연불(無緣佛)로 방치된 것을 알고, 불련의 이름으로 공표하여 평안히 안치할 것을 일본정부에 요구하여 마침내 1670명의 명부와 유해를 받아 도쿄(東京)의 우천사(祐天寺)에 안치했다.21) 1964년에는 도쿄에 국평사(國平寺)를 창건하고, 불련에 의해 오오사카(大阪)에 운수사(運水寺)를 매입하여 통국사(統國寺)를 창건했다. 난암은 재일동포들의 불교신앙의 중심이 된 교토의 만수사, 도쿄의 국평사, 오오사카의 통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들은 식민지 시대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재일동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따라서 이들의 육체 및 정신적 안식처 역할을 불교사찰을 통해 해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불련을 통한 아시아불교도평화회의(ABCP) 및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 등 국제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83년 12월에 열반에 들었다. 
  그의 행장에서 드러나듯이 다음은 일본 내 사찰을 중심으로 행한 난암의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3) 아마도 국평사라고 판단된다.
14) 白宗元(2010) p.163.
15) 난암이 직접 쓴「조국방문기: 우리 종교인들의 따사로운 보금자리」에서 자신의 과거를 약간 기술하고 있는데 거의 같은 내용이다. 아마도 일반적으로 난암의 대체적인 행적은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일본조선불교도연맹본부 상임위원회 편(1980).
16) 일본의 임제종계에서 설립한 종립학교로 현재의 花園大學의 전신이다.
17) 이 기간의 활동은 한국의 자료를 좀 더 발굴해야만 알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한암 선사의 회상에서 2년 간 수행한 西翁 禪師(1912~2003)가 이 일본의 臨濟學園에서 수학하는 과정에 난암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知詵 스님에 의하면, 서옹 선사가 상원사에서 일본 유학을 생각하던 중 임제대학을 다니던 종묵을 상원사에서 만나 일본 유학에 대한 정보를 접했다고 한다. 그리고 “종묵은 서옹에게서 불교중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이력과 일본 유학의 희망을 듣고, 비용을 거의 들이지 않고도 유학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종묵의 설명을 듣고 난 서옹은 은사를 찾아가 유학에 대한 희망을 다시 요청하였다. 일본에 가는 여비만 지원해 주면 일본 사찰에 머물면서 지내고 학비는 장학금을 받아 해결하겠다는 계획을 말하였다.” 知詵(1996) p.91). 서옹은 1939년 임제학원에 유학하고 1944년에 귀국한다. 그는 수학 중 京都學派의 일원인 히사마츠 신이치(久松真一, 1889~1980)를 만나 임제선에 바탕한 참사람사상을 확립한다. 이는 난암과 한암 선사 문도와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 한일불교교류에도 난암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Ⅱ. 일본 내 사찰에서의 난암의 활동

  앞 장에서도 언급했듯이 도일 후 열반에 이르기까지 교토의 만수사, 도쿄의 국평사, 오오사카의 통국사는 난암의 활동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최초로 인연이 된 교토의 동복사는 일본의 중세 가마쿠라(鎌倉)시대의 초기인 1236년에 창건되었다. 만수사는 이보다 앞선 헤이안(平安) 후기인 1096년에 세워진 유서 깊은 사찰이다. 이 양 사찰은 중세에는 임제종계인 천룡사 상국사 건인사(天龍寺·相国寺·建仁寺)와 함께 교토 5산(京都五山)의 하나로 번영한 사찰이다. 소위 오산문학(五山文學)이 꽃피운 곳이다. 그렇다면 이들 사찰을 중심으로 한 난암의 활동은 어떠했을까.
  백종원에 의하면, 해방 후에 재일조선인은 일본에서 자유롭게 집회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집회의 장소로서나 학습이나 상담을 위해 모일 수 있었던 장소가 유일하게 교토에서는 만수사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난암이 있었던 것이다. 
  재일조선인들 가운데는 공부를 위해 멀리서 온 학생들이 있었는데 백종원은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난암은,

본당의 불상은 나무로 만들어졌으므로 지금부터는 살아 있는 내게 먼저 인사하고 본당에 들어가라.22)

고 했다. 만수사에는 종교의 유무, 직업이나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드나들었으며, 그곳에 머무는 사람은 모두 새벽 5시에 일어나 변소, 낭하로부터 정원에 이르기까지 청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침 7시에는 난암이 만든 설화(說話)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식사 전에는 외었다. 식사로 선행을 쌓는 힘을 기르고, 당시 분열되어 가던 조국의 통일을 하루라도 빨리 실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만수사의 주지가 될 무렵에는 풀들이 무성한 황폐한 절이었다. 그리고 난암은 자신의 신발을 아주 잘 수선해서 신었다. 그런데 해방 후, 난암이 이 절에 고종의 아들인 영친왕(英親王-1897~1970)이 올 예정이니 당시 학생이던 백종원에게 함께 참석하라고 했다. 아마도 그 만남을 후에 기록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영친왕 이근(李垠)이 부인 이방자(李方子1901~1989)와 함께 방문했다. 
  그 자리에 여러 사람과 함께 한 백종원은, 영친왕이 지금부터 어떻게 몸을 처신할까 고민하는 질문을 난암에게 했다. 그러자 난암은,

당신은 11세 때,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인질로 일본에 잡혀왔기 때문에 조선을 망하게 한 직접적인 죄는 없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수난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당신은 왕족의 대우를 받은 육군대장이 되기도 하여 참담한 민족의 고통을 제쳐놓고, 일본제국의 비호를 받으면서 안온하게 살고 있었다. 이것을 당신은 스스로 깊이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23)

고 담담하게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이어

민족 앞에 사죄할 마음이 있다면, 당신은 조선에 돌아가서 똥통이라도 지고 백성으로서 농사에 전념하고, 방자씨는 보육원이나 유치원의 보모로서 힘껏 조선의 아이들을 돌본다면, 민족은 당신들을 용서할 것이다.24)

고 했다. 백종원은 당시 이 말을 듣고, 난암의 이러한 모습이 추상열일(秋霜烈日)과 같은 엄한 자세였다고 말하고 있다.25) 이를 통해 난암의 역사의식이 얼마나 냉철하게 시대를 관통하고 있었던가 하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그 후 1963년 두 부부는 한국에 돌아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이방자는 죽을 때까지 장애아 교육에 전념했다. 
  홍남기는, 1937년에 경남의 3본산인 통도사·해인사·범어사의 시찰단장으로 온 金九河 화상이 영친왕이 방문한 이 만수사에서 점심을 먹고, 난암의 안내로 교토의 사찰들을 돌아보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도쿄의 국평사는, 현재의 주지인 윤벽암(尹碧巖)에 의하면, 조국의 평화통일을 원하는 재일조선인들을 위한 사찰로 난암이 조국의 ‘국’과 평화의 ‘평’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윤벽암의 아버지는 해인사의 승려였던 윤일산(尹一山26)으로, 교토에서 불교를 배우던 중 난암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난암의 뒤를 이어 국평사의 주지가 되었다. 국평사는, 교토의 만수사를 빌려 당시 유학생 가운데 가난하고 학비가 없는 학생들을 돌봐주고 있던 난암이 도쿄에 1965년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27)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식민지 시대 일본에 강제로 끌려와 죽은 재일조선인들의 유골을 모아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리고 국평사에는 남한의 동양불전연구회가 편찬한 축소판『고려대장경』(1972)과 북한의 사회과학출판사에서 출판한『팔만대장경해제』15권(1992)이 소장되어 있다. 28)  

 

 

18) 이 배는 일본해군 특설운송함으로 고국으로 귀국하고자 했던 3,725명의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이 타고 있었다. 일본정부의 공식발표에 의하면, 1945년 8월 25일 아오모리현(青森県)의 오오미나토항(大湊港)에서 출발하여 부산으로 향하던 중, 교토부(京都府)의 북부인 마이즈루항(舞鶴港) 앞바다에서 바다에 부설되어 있던 수뢰에 닿아 폭발하였다. 이로 인해 승무원 25명과 탑승자 524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생존자들은 일본의 고의 폭침이라고 보고 있으며, 여전히 그 의문은 해명되지 않고 있다.
19) 洪南基(2013) p.140.
20) 洪南基(2013) pp.140~141.
21) 洪南基(2013) pp.140~141.

22) 白宗元(2010) p.161.
23) 白宗元(2010) p.164.
24) 白宗元(2010) p.164.
25) 白宗元(2010) p.165.

26) 현재 윤일산의 두 아들인 碧巖과 靑眼은 각각 국평사와 만수사의 주지를 맡고 있다.
27) 白宗元(2010) p.165.
28) “이 책은 합천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을 한 자 한 자 적어서 축소, 인쇄해서 만든 것이다. 모두 1천부를 인쇄했다고 하는데, 유종묵 스님에게 78번째를 보내주었다.” <통일뉴스>(2009).

 

윤벽암 스님

  

윤벽암에 의하면, 일본의 동부지역 유골은 국평사가, 서쪽지역 유골은 오오사카에 있는 통국사가 맡고 있다고 한다. 국평사에는 약 1500기, 통국사엔 약 1000기, 고베(神戸) 대승사(大乘寺)에는 약 300기, 교토 만수사에는 약 1300기, 그리고 교토의 고려사에도 유골이 있다.29) 이 국평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후예의 절이며, 따라서 고승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고승이 없어 난암이 맡았으며, 이를 조선 총독부도 확인했다고 한다. 
  난암은 이 국평사를 만들면서 “통일이 되면 국평사는 없어져야 한다”30)고 말했다. 즉, 국평사는 난암의 遺志인, 식민지와 분단으로 연속된 민족 비극의 극복을 염원하는 사찰로서 재일조선인들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윤벽암은 난암에 대해 그를 대선사라고 하며, 

몸은 작지만 엄한 스님이셨다. 신발을 항상 나란히 해야 했고, 생활규칙이 엄했다. 나는 손자뻘로 이쁨과 귀여움을 잔뜩 받았던 기억이 있다.31)

고 회고하고 있다. 
  만수사와 함께 이 국평사 또한 불련 산하에 속해 있다. 불련 산하에는 이 외에도 오오사카의 통국사, 도쿄의 묘엄사(妙嚴寺) 등이 있다. 일본에는 불련 외에도 1963년에 창설된 재일본한민족불교도총연합회(在日本韓民族佛敎徒總連合會 이하 한불련이라 칭함)32)와 1994년 발족한 해동회(海東會), 그 외에 이에 속하지 않은 사찰들이 있다. 그런데 이 한불련에 속한 오오사카의 보엄사(寶嚴寺)의 주지인 김광덕(金光德)의 부친인 김혜륜(金慧輪)은 난암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말하자면 난암은 해방 전후 아직은 분화되지 않았던 재일동포사회에서 불법 포교의 제일선에 있었던 것이다. 미야시타 료코(宮下良子)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일본에 있는 한국불교의 발상(發祥)의 절은 만수사였음은 과언이 아니다”33)고 하며, 당시 난암의 역할을 크게 평가하고 있다.    불련에 의해 창건된 오오사카의 통국사는 일본에 불교를 최초의 통치원리로 삼았던 쇼토쿠태자(聖徳太子, 574~622)가 창건하여, 역법, 천문학, 지리학, 방술을 가지고 602년 도일한 백제의 승려 관늑(觀勒)이 개산주지를 맡았다. 이후 1969년에 불련 산하에 들어와 재흥되었다. 초대 주지는 난암과 함께 불련 창립을 했던 김성해였다. 현재의 주지인 최무애(崔無碍)는, 

조선과 한국의 불교의례와 전통의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원효대사의 화합의 정신 하에 조선, 한국, 일본의 차이를 넘어 불교의식, 포교를 폭넓게 행하고 있다. 또한 납골당에 조선인 순난자(殉難者) 등의 무연불, 본당에는 평화 대염주가 봉안되어 있으며, 제 영령의 공양을 통해 세계와 아시아의 평화를 매일 기원하고 있다.34)
고 한다. 최무애의 언급에서 난암의 불교정신과 맥락이 통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식민지와 분단의 고통을 여전히 불법을 통해 해소하기 위한 사찰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난암에 의해 설해진 언설의 구체적인 기록이 발굴되지 않아서 그가 재일동포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찰의 건립, 혹은 재건 등과 관련하여 난암이 불법에 의해 재일동포사회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으며, 여전히 그의 정신적 세계가 사찰을 통해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재일동포사회의 평가가 어떠한가를 통해 좀 더 그의 면모를 살펴보기로 한다. 

 

 

29) <통일뉴스>(2009).
30) 윤벽암은, “그런데 나는 2000년 6.15공동선언으로 통일이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지금 국평사의 역할은 남북이, 한일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통일뉴스>(2009).
31) <통일뉴스> (2009)
32) 1969년에 在日大韓佛敎會로 개칭되었다.
33) 宮下良子(2015) p.51.



Ⅲ. 난암에 대한 평가

  1983년 난암의 열반에 대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중앙위원회 의장 한덕수(韓德銖  1907~2001)는 조사에서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진정 유종묵 선생은 오랜 생애를 애국의 길에 바친 열성과 헌신성으로 하여 광범한 동포들과 일본의 종교인들로부터 높은 존경과 신뢰를 받았습니다. 35)

라고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난암은, 한덕수도 조사에서 지적했듯이 국제기구인 아시아불교도평화회의에서 평화상을 받았다. 그만큼 다양한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불련대표단을 이끌고 제2차세계불교도대회(1952, 東京)와 제1차 세계종교자평화회의(1961, 京都) 참가를 시작으로 국제적인 종교인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리에서는 한국의 종교인들과도 만남이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난암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불련의 강령에는 불교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우리는 불교교리를 탐구하며, 미신을 배제하고, 정법을 선양하여 불교를 현대화한다. 1. 우리는 민족적 염원인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하며, 재일조선공민들의 민주주의적 민족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헌신한다. 
1. 우리는 불살생의 계율을 받들어 원수폭을 위시한 일체 대량 살육무기를 폐기시키며, 침략전쟁을 반대하고, 국제적 분쟁은 협의의 방법으로 해결하며, 전 인류가 평화스러운 사회에서 공존공영할 것을 요구한다. 
1.우리는 국제종교단체들과의 제휴를 긴밀히 하며, 불교 및 민족문화의 교류를 도모한다.36)

 

 

34) 崔無碍(1990).
35)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중앙위원회 의장 한덕수의 조사, 1983년 12월 16일. 본 자료는 김송이 선생이 필자에게 보내온 것이다.
36) 재일본조선불교도연맹본부 상임위원회 편(1980).



  여기에서 보듯이 불련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불법의 현대적 전파를 기치로 하고, 재일동포들의 권익을 우선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불법에 바탕한 불살생의 불교계율을 통해 전쟁을 반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아마도 국제적인 종교회의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난암의 활동 또한 이러한 큰 틀과 함께 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불련의 활동은 앞에서 언급한 조선인 유골취합과 제사를 포함하여, 1950년 남북한의 전쟁에 대한 휴전 요구 및 전쟁피해자들의 구호(1952), 히로시마(広島)의 조선인 원폭희생자 위령제(1954), 2000여 명이 모여 행한 금강계단보살계첩수여대회(1956), 태평양전쟁 조선인 희생자 위령제(1956), 일본의 출입국관리법안 및 외국인학교법안에 의한 인권탄압 반대(1969)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37) 이러한 활동에는 난암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해방 후, 한국을 방문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불련과 관련하여 북한을 방문한 기록은 찾을 수 있었다. 불련자료집에서는「조국방문기: 우리 종교인들의 따사로운 보금자리」라는 제목으로 난암 스스로 북한을 방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는 여기에 자신의 일본행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어 묘향산의 보현사를 방문하여 유학 당시의 동창생인 법등이라는 사람과 감격적인 상봉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법등이 이 보현사를 복구하는 데에 앞장 선 것으로 보인다. 
  보현사에서 그는 천왕문, 4각9층탑, 만세루, 8각13층탑, 대웅전, 그리고 관음전이 그대로 복원되었음을 보았다. 난암은,

말 그대로 명산대찰이었다. 이 훌륭한 건물들이 사진들에 의거하여 복구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정말 탄복하였다. 불교도서관에는 불교의 교리를 집대성한 팔만대장경, 17세기에 그린 묘향산전도 등 불교의 유물들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38)
고 한다. 그가 불교사찰의 복원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만큼 불교의 기본 정신인 불법승 3보의 온존을 중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불교라는 정신세계에 기반한 활동으로 일관한 사회적 삶이 자신의 소명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백종원도 잘 밝히고 있다.

선사는 망국의 비운과 민족분열의 고통 속에서 애족·애국의 길을 생애 동안 걸으셨습니다. 선사는 처대(妻帶)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으며, 젊은 세대에게 민족의 미래를 위탁하였으며, 우리들에게 크게 기대를 걸고, 마음으로부터 사랑해주신 분이었습니다.39)

라고 언급하고 있다. 난암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불법을 통한 평화와 안심을 염원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일본 패망 후에 조선인 희생자들에 대한 영혼 천도를 시작으로 재일동포사회의 정신적 구심 역할은 물론, 섬 속의 섬인 일본 내 동포들의 평화로운 미래를 염원한 것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의 입장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운명을 스스로 끌어안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국평사를 개창한 것도 “조국이 통일할 때까지 의지할 절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분단으로 연동된 재일동포들의 불안한 삶에 사찰을 통해 희망을 주고자 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난암이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점은 재삼 언급해도 무리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미야시타 료코 또한 난암을 고승으로 평가하고 있다.40) 재일동포사회에서 그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홍남기는 난암으로부터 마조도일(馬祖道一)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법문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을 늘 계율로써 엄격하게 다스리고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을 보면, 난암은 한암 선사로부터 받은 선불교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선의 정신을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러했기 때문에 사회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웠던 재일동포사회에 그처럼 선사로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37) 재일본조선불교도연맹본부 상임위원회 편(1980).
38) 재일본조선불교도연맹본부 상임위원회 편(1980).
39) 白宗元(2010) p.167.
40) 宮下良子(2015).



Ⅳ. 난암 연구의 향후 과제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난암의 일생의 행적은 대체로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민족의 멸망을 목격하고, 스스로도 그러한 울분으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만주 등지로 떠돌며, 독립운동의 열망을 구현해보고자 했던 행적과, 이후 국내로 돌아와 월정사의 한암 선사의 문하에 귀의함과 동시에 출가 수행한 과정이 명확히 드러나는 점, 그리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동포사회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대승정신을 구현하고자 한 선사로서의 풍모가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이를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엇보다도 한암 선사와의 관계이다. 지금까지의 자료는 거의 소략된 것이 대부분이다. 어떠한 발심으로 해서 불문에 들어왔으며, 한암 선사와의 만남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지, 또한 이와 더불어 어떠한 가르침을 받았으며, 어떠한 수행을 했는지가 묘연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어떠한 깨침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본 연구를 시론적인 고찰이라고 내 건 것은 이러한 점 때문이다.41) 난암의 행적은 어느 정도 밝힐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내적 세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일생의 행장에서는 분명, 선불교적인 사상 내지는 철학을 담지하고 있으며, 선사로서의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를 생애 내내 견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에도, 어떠한 법문을 했으며, 불교의 어떠한 정신을 자신의 신조로 삼았는지 파악할 수가 없다.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 추후 보다 광범위한 자료 조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 일본에 건너가게 된 연유이다. 당시는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한반도의 식민지 정책도 더욱 정교해지고, 그 도가 격심하던 시기였다. 즉, 태평양 전쟁을 벌이기 위한 전진기지로써 한반도가 더욱 고통받던 시기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독입운동가들은 중국을 비롯한 해외로 나가 일본에 대항하고자 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난암은 역으로 일본행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학을 하면서 일본에 머물게 되며, 재일동포사회에 정착하게 된다. 청정비구로서의 삶 또한 그대로 유지한다. 그가 일본에 건너가게 된 이유가 어떠한 가르침에 의해서인지, 그리고 일본에서의 활동의 계기가 된 것은 무엇인지가 규명되어야만 그의 삶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여기에는 불법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한 승려로서의 자비심 깊은 자의식이 뚜렷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셋째, 해방 후의 재일동포사회의 정치사회적 입장과 난암의 자세이다. 그가 늘 염원한 것은 조국의 평화통일이었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남과 북이 한 민족이자 한 형제임을 늘 인식하고 있었던 것 또한 명확하다. 그리고 그 평화통일을 위한 실제적인 역할을 불련을 비롯한 국제적인 종교조직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해 왔다. 그럼에도 그의 활동은 남한과는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불교의 중도정신에 입각한다면, 분명 남쪽의 불교인들과도 다양한 교류채널을 통해 소통했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그러한 행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는 냉전 시대의 남북한의 온도 차이가 그대로 재일동포 사회에도 연동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42) 그러나 불교의 입장은 그러한 차이를 넘어설 수 있는 보편적 정신을 보여주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그러한 역할을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난암이 그러한 정신을 잘 발휘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지만, 현재로는 남한의 불교도인들과의 교류, 혹은 남북한 불교인들과의 교류에 관한 중간자적인 역할 등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관계로 언급할 수 없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41) 향후에는 난암이 수학했던 花園大學, 주석하고 창건한 일본 내의 사찰들, 일본 내의 언론을 비롯한 매스미디어에 기록되어 있을 자료에 대한 조사, 그리고 난암과 관련된 인물들의 구술 자료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현 시점에서는 그러한 조사를 위한 필요성과 그 가치를 언급하는 것으로 본 논의의 의미를 삼고자 한다.
42) 탄허 스님의 영향을 받은 전 중앙승가대학교 교수 송찬우(1951~2015)는 김광식과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한암 스님의 법은 보문 스님과 난암 스님이 이었는데 보문 스님은 불행히도 50으로 단명했고, 난암 스님은 일본에 가서 조총련의 거물이 되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박정희가 난암 스님의 영향력이 커서, 그 스님을 회유하려고 탄허 스님을 일본에 보내서 만나보았답니다. 난암 스님에게 가보니 김일성의 사진은 대문짝만하게 걸어 놓고, 박정희 것은 조그만하게 걸어 놓았대요. 그리고 난암 스님이 김일성을 거의 수양아버지로 여기고, 방에는 김일성에게 받은 훈장이 즐비하였고, 석가나 공자도 김일성을 못 따라간다고 여겼으니 회유가 되겠어요. 그때 스님은 난암 스님이 준 신수대장경 원본을 받아서 가져왔어요. 그것이 학하리에 있었어요. 하여간 스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이 한암 스님의 수제자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오대산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 없었고 다 떠나고 그랬지만, 오대산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 탄허 스님 계열밖에 없으니 자동적으로 탄허 스님이 수제자가 된 것입니다” <현대불교>(2013). 이를 보면, 난암은 북한과의 관계도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점은 난암의 삶이 당시의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과 깊은 관계에 놓여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재일동포사회에서의 역할을 좀 더 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난암의 행적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 사찰의 중창과 개창, 불련의 조직과 활동은 잘 드러나 있다. 그럼에도 보다 구체적인 활동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또한 이들 사찰과 일본에서의 활동에 대한 전체적인 연관성, 사찰에서의 공적인 삶의 모습은 더욱 베일에 가려져 있다. 즉, 단편적인 모습밖에는 전달이 되지 않고 있다. 난암의 삶이 고승으로 인식되고 있는 한, 그의 삶은 공적인 생애로서 더욱 조명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재일동포사회에는 그와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나 기록들이 분명 존재할 것으로 본다. 이미 그는 열반하였지만, 그의 행적을 중심으로 다양한 방식의 자료조사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렇게 된다면 민중불교사의 입장에서 새로운 평가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마지막 다섯째로는 첫 번째의 문제의식과 연동되는 점이다. 앞에서는 그의 출가와 한암 선사와의 관계, 수행과정이 중심이 되었지만 여기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입산과 수행에서 얻은 불법이 도일 이후 일본사회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는 두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의 문제의식과 직결되어 있지만, 그러한 그의 인식적 전환과 적극적 구제활동의 밑바탕에 잠재된 불법의 정신이 한암 선사를 통해 기초 지어졌다고 한다면, 일본 내에서의 계승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 또한 밝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지만, 보다 깊이 난암의 정신세계가 한암 선사의 사상으로부터 계승되어진 것이 확인된다면, 그의 활동은 불교사나 불교사상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한암 선사의 선사상이 단지 국내에만 머물지 않고 일본으로도 전파되어 새롭게 꽃을 피우게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으로 확장된 한암 선사의 불교세계는 역으로 그의 제자를 통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말하자면, 한암 선사에 의해 이루어진 동아시아 근현대 불법의 전개 연구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1991년 11월 6일 뉴욕 맨하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방문 기념사진. / 양일(카나다 대각사), 홍화두(조선불교도연맹 고문), 서태식(재일본 조선불교도 협회 부회장. 통국사 주지),박태호(조선불교도연맹회장), 송월주 스님, 도안스님(LA 관음사 주지), 홍봉수(재일본 조선불교도협회 회장), 법타스님


參考文獻

<통일뉴스>(2009), 4월 18일자(http://www.tongilnews.com 2016년 3월 20일 검색).
<현대불교>(2013), 8월 26일자, 송찬우,「방산굴의 無影樹 27: 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宮下良子(2015),「‘朝鮮人’から ‘在日コリアン寺院’へーコロニアル/ポストコロニアル状況における在日コリアンの宗教的実践ー」,「人文学報」第108号, 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  
김호성(1996),『방한암 선사』, 서울, 민족사. 
白宗元(2010),『在日一世が語る: 戦争と植民地の時代を生きて』, 東京, 岩波書店.
白宗元(2015),『語り継ぐ在日の歴史: 分断と差別·迫害に抗して』, 東京, 三一書房.
재일본조선불교도연맹본부 상임위원회 편(1980),『재일본조선불교도연맹 자료집』, 재일본조선불교도연맹본부.
知詵(1996),「주체의 길에 선 위없는 차별심」, 백양사 편,『고불총림 백양사』, 정보문화센터 첼린컴.
崔無碍(1990),『百済念仏寺の謎を解く』, 統国寺.
한상길(2009),『월정사』, 대한불교진흥원.
洪南基(2013),『朝鮮の仏教と名僧』, 東京, 同時代社.


****이 글에 언급된 것처럼 현재 일본에는 식민지 시대 일본에 강제로 끌려와 죽은 재일조선인들의  4,000여개의 유골이 국평사를 비롯해 여러 사찰에 있다. 이 유골은 유종묵 스님이 모아둔 것이다. 현 국평사 주지 윤벽암 스님은 남북한을 방문하면서  이 유골을 DMZ에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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