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
세계 최초 신문을 발견한
지봉스님
취재 / 전현자 (미주현대불교 한국주재기자)
지봉스님
1) 김영희, 「일제강점기 언론사연구와 안재홍의 “朝鮮新聞小史”」, 한국언론정보학보 64호(2013, 11), p. 97; 유길준은 “신문을 시작한 근원을 추구해보면 우리나라의 조보(朝報)같이 관리에게 베껴서 돌리다가, 그 뒤에 일반인 가운데도 부유한 자들은 세를 내고 받아 보았다. 그러다가 삼백년 전에 이르러서야 영국과 이탈리아 두 나라에서 인쇄하여 발행하는 신문이 나오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2) 김영희, 앞의 논문, pp. 88-95; 안재홍은 조신 신문의 시초로서 조보와 관련해, “선조(宣祖) 11년 무인(戊寅, 1578년) 당시의 이른바 유수배(游手輩)가 정부의 양해를 얻어서 조보(朝報)를 인행(印行)하여 팔아서 자생(資生)을 하였는데 행한지 수월(數月)에 상(上, 선조)이 진노하시사 모두 원지(遠地)에 유배당하였다.”고 서술했다(선집 4, 279쪽). 그러면서 등용하지 못하면 생계가 어려운 조선시대 양반 유생이 정계의 동향을 담은 조보를 인쇄하여 판매해서 생활했다는 점에서 창의적인 신문인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유배라는 것은 일제강점기 출판법 위반이나 신문지법 위반 또는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 1년 또는 그 이상의 엄한 정도의 형벌이라면서, 조선의 신문사가 필화사(筆禍史)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설명했다. 신문이 통제와 탄압 속에 발행되었던 역사에 대해 안재홍이 잘 이해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3) 김영희, 앞의 논문, p. 88; 조선시대 인쇄조보 발행이 서양 인쇄신문 발행과 비슷한 시기라는 점을 주목하고, 만일 인쇄조보가 탄압으로 중단되지 않았다면 세계 최초의 인쇄신문의 영예를 차지했을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육당전집편찬위원회편, 1973, p. 98).
4) 차상찬, 「조선신문발달사」, 개벽(開闢)제4호(1935, 3), 개벽사, pp. 2-12.
<민간인쇄조보>의 문헌기록이 나타나고 있는 7곳에서 보이고 있다.
①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1권, 선조 10(1577)년 11월 28일 경진 3번째 기사 1577년 명 만력(萬曆) 5년
②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1권, 선조 10(1577)년 11월 28일 경진 5번째 기사 1577년 명 만력(萬曆) 5년
③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1권, 선조 10(1577)년 11월 28일 경진 4번째 기사 1577년 명 만력(萬曆) 5년
④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1권, 선조 10(1577)년 11월 28일 경진 6번째 기사 1577년 명 만력(萬曆) 5년
⑤ 조선왕조실록 「宣祖實錄 ; 11년 선조 무인(1578, 만력6) 1월 15일(정묘)
⑥ 조선왕조실록「선조수정실록」 12권, 선조 11년 2월 1일 임오 1번째 기사 1578년 명 만력(萬曆) 6년
⑦ 율곡 이이 찬 「석담(경연)일기」石潭日記卷之下 만력 6년(1578)年 戊寅
조선 명종(明宗)~선조(宣祖) 연간의 17년간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경연(經筵)에서 강론한 내용을 적은 책.《석담일기(石潭日記)》라고도 한다.
6) 영천역사문화박물관 소장본 필사조보 5종을 조사해 보면 1812년 36.3×560.6cm, 19세기 중반 35.6×590.0cm, 18세기 후반 35.8×560.6cm, 1876년 36.8×570.4cm, 1856년 34.3×264.4cm, 1841년 36.8×890.4cm,
기자; 스님을 모시게되어 참 기쁨니다.
1577년에 발간된 세계 최초 민간인쇄조보를 발견하셨다고요?
지봉스님; 예. 그 동안 조선왕조실록과 율곡 이이선생의 석담일기 등 문헌에서만 존재하던 지금으로부터 444년 전에 조선(朝鮮)에서 간행한 세계최초의 활자조판방식의 상업용 일간신문을 찾아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조보(朝報)」가 신문의 기원이라는 사실은 유길준이 1895년 간행한 서유견문(西遊見聞) 제17편 394∼395쪽에 있는 신문 항목에서 처음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1)
일제강점기 언론학자 안재홍도 우리나라 신문의 시초로 「조보」와 「인행조보」에 대해 언급했습니다.2)
육당(六堂) 최남선의 고사천자(古事千字)(1935∼1936) 춘추관(春秋館)편에 따르면 국사를 기록하는 춘추관을 설명하면서 사초(史草)의 중요한 재료인 조보의 제작방법, 조보의 내용, 조보와 기별의 관계, 기별의 일종인 분발에 대해 관련 사료를 근거로 설명했다(최남선, 1935/1973, 79∼129쪽). 또한 조보의 유래, 선조대 인행조보의 역사적 의미 및 세계 신문의 기원에 대해 고찰했습니다. 3)
청오(靑吾) 차상찬(車相瓚, 1887~1946)은 「조선신문발간사(朝鮮新聞發達史)」에서 그때 그 (인행)조보의 내용이 어떠하였던 것은 지금에 족징(足徵)할 문헌(文獻)이 없으나 역시 관보(官報)의 일종(一種), 다시 말하면 신문(新聞)의 일종이였던 것은 사실이다. 4)라 하였습니다.
유길준 · 안재홍 · 최남선 · 차상찬의 기록에서 확인되는바와 같이 근대 신문이 시작되는 과정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필사조보」와 「민간인쇄조보」의 중요성이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에 등장한 근대 신문사들이 <민간인쇄조보>를 찾기만 하면 우리나라의 세계 최조의 일간신문을 간행한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25대 427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적은 사서인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1권, 선조 10(1577)년 11월 28(경진)일 3번째 6번째 기사에 “민간인쇄조보의 인출하기 위한 글짜를 몰수하고, 발행한 사람 30인은 의금부에서 잡아 문초하였다.”는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선조실록에 의하며 당시의 <민간인쇄조보>는 조선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던 의정부에 허가를 받았는데 현재에 행정부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또한 법률적인 자문을 하는 사헌부에도 허가를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로 보면 검찰이나 법무부에 허가를 받은 신문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어머니이자 한국의 5만원 화폐에 등장하는 얼굴인 신사임당의 아들인 율곡 이이가 선조와의 경연을 적은 「경연일기」속에도 <민간인쇄조보>에 이야기가 기록되어진 세계최초의 활자조판방식을 이용한 상업용 일간신문을 440년 만에 찾아낸 것입니다. 5)
기자; 세계최초 신문인 <민간인쇄조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 하셨나요?
지봉스님; 현존하는 조보(朝報)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작은 붓으로 먹물을 찍어 손으로 아주 빠르게 흘려 쓴 전통적인 조선시대의 관보로 볼 수 있는 필사조보(朝報)가 있습니다. 형태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세로가 35 ~ 36㎝ 내외로 일정한 경향을 지니고 있으나 길이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6)
이번에 발굴한 것은 1900~1970년대 사이 근대의 인쇄소와 유사한 형태로 444(1577)년 전 선조10년에 네모난 목도장에 글짜를 수 천개를 새겨서 목활자를 만들어 필요한 글짜를 뽑아 네모난 조판에 문장을 만들어 신문을 인쇄해서 간행한 민간인들이 인쇄한 조보입니다.
정보전달의 속도의 빠르기로 이해하자면 도스시대에서 윈도우 시대로 변화를 의미합니다. 신문의 대량생산화가 이루어져 많은 소비자들의 집까지 정보가 배달되는 시대를 만든 것입니다, 지식층과 정보 소비층이 가장 좋아하는 매체 정보의 혁명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모든 정보를 전달방식이 소규모에서 대규모로 변화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특정 계층에서만 받아볼 수 있는 조보를 글을 읽을 수 있는 일반 계층에서도 볼 수 있는 대중 매체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민간인쇄신문의 기사 내용 속에 눈에 띄는 것이 조선 12대 임금인 인종대왕의 비인 인성왕후 공의전에 병세에 관한 기사 내용입니다. 인종대왕이 태어날 때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태를 항아리에 담아 명당에 모신 곳이 제가 사는 영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라는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부주지와 여러 소임을 산 터라 인종의 비가 공의왕대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제가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도갑사 관음 32응신도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이 불화의 발원자가 인종의 비인 공의왕대비라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 이 발견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도갑사 관음 32응신도는 관음의 서른 두 가지로 나타낸 모습을 한 폭의 캔버스에 조성한 채색 불화로 1550년 인종(仁宗)의 비(妃)였던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돌아가신 인종의 극락정토 왕생을 발원하며 전라남도 영암군 도갑사(道岬寺)의 금당(金堂)에 봉안한 불화인데 임진왜란 때 일본 지온인(知恩院)이라는 사찰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민간인쇄조보가 간행된 때인 선조임금의 어머니 뻘이 되는 공의왕대비의 병세가 지극히 위중하다는 소식과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을 비교해본 결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신문이 진품이라는 판단에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또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경연일기)를 통해서 확증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치우기라는 별자리 변화, ‘거듭해서 일어나는 미지의 조짐(응험)’ 자연재해인 재이(災異)에 관한 것, 공의왕대비의 당시의 상황에 대한 여러 자료의 일치를 통해 확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기자; 위대한 역사의 발견을 직관력으로 아셨다고요?
지봉스님;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에서 부터 인쇄문화가 잘 발달된 곳입니다. 통일신라시대 다보탑에서 발견된 세계최초의 목판본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더불어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한 고려시대 직지심경을 간행한 나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쇄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 공부를 좀 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오래 동안 혼자서 발품을 팔아가면서 서지학(書誌學)학을 연구하고 배웁니다. 그래서 저도 고서의 종이가 갖는 지질 상태나 오래 된 목판이나 활자조판방식에서 인출한 인쇄물에서 보이는 년대별이나 시기적 특징을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인쇄조보는 시기적으로는 1577(선조10)년이라 절대기년이 있습니다. 그 시기의 활자를 조판해서 만드는 그 당시의 활자본의 특징을 지녀야 합니다. 이러한 시기적인 방법으로 고서를 조영해 보는 형태 서지학적 측면에서 활자조판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판심부의 구성이나 어미에서 당시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도장 형태의 활자본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잘 고정되지 않은 부분에서 보이는 글짜가 삐뚤어지는 모습과 글자판을 묶어두는 사각 틀인 광곽이라고 불리우는 틀에서 보이는 간격과 글자의 세로 행을 표시하는 계선(행간을 나타내는 세로 선)과 광곽(사각형 둘레)의 간격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활자조판에 의한 인쇄물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시간을 공부 한 결과가 직관력이 되어 민간인쇄조보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자; 스님의 발견으로 영천시민신문과 sbs뉴스 등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스님; 이 <민간인쇄조보> 언론, 미디어 관련 학자들에게는 정말 대단한 문화재의 발견으로 보여집니다. 기록에서만 존재하는 보물을 찾은 것이니까요. 그래서 관련 전문가에게 가장 먼저 연락을 한 분이 김영주 경남대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입니다. 최근에 관련 논문을 썼고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곳에 언론 학자여서 자문을 구하고자 전화를 드렸습니다. 모든 언론학자들이 기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조 민간인쇄 조보와 관련된 여러 논문을 발표한 김영주 경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재미있는 이야기나 인사사항 그런 내용은 신문의 성격을 갖고 있다.”면서 “만약 진위가 확인이 된다면 세계최초 민간이 발행한 상업일간신문이다. 이는 국보급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분들께서 실물을 보러 오시는 날 지역신문사에서 진품인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보도가 되었습니다.
기자; 조보에 왕의 동정이나 날씨 그리고 가축의 전염병 등에 대해서도 쓰였다고요?
스님; 조보의 많은 내용이 왕의 동정이나 임금의 명령 전달과 상소문의 정리를 담당한 승정원이 중심입니다. 여러 기록에는 ‘승정원일기’ 등을 기본으로 하여 편집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7) 현재 <민간인쇄조보>의 내용으로 보면 주요 내용은 왕의 명령 중 널리 알려져야 하는 윤음과 같은 내용이나 백성들이 알아야 하는 왕의 명령, 동정, 국가행사 등이었습니다. 8)
그리고 관리의 임명과 면직 등의 인사동정은 지방으로 내려간 관리에게 가장 궁금한 사항으로 관료들의 승진이나 자리의 이동은 필사조보 구성에 중요한 한 부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음은 비답(批答)으로 신하들에 대한 상소나 경연에서 논의된 여러 사항과 각 관청에서 올린 문서에 대한 답변이 주종을 이루었다. 9) 보고서, 건의 등과 자연재해, 역병 등 기문기사가 수록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① 국왕의 모든 명령과 지시를 포함하는 전교 ② 당면정책 및 중요 문제들에 대한 유생과 관료들의 건의인 소장(疏狀) ③ 이에 대한 국왕의 비답(批答:상소에 대한 임금의 하답) ④ 국왕이 관민들에게 보내는 회유문인 윤음(綸音) ⑤ 조정에 의한 관리의 인사 ⑥ 자연계 및 사회에서 발생한 특이한 현상들인 기문기사(奇聞奇事) ⑦ 중앙 및 지방의 각 관서로부터 국왕에게 올리는 각종 보고서와 복명서 등에 관한 기사 등이 주된 필사조보의 내용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민간인쇄조보에 적혀있는 내용이 배치된 부분을 구성적인 면으로 살펴보면 매일 다른 것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날에는 인사행정인 정사政事가 먼저 기록되어 있고, 어떤 날은 비답(批答), 즉 상소에 대하여 임금이 생각하는 바를 적어 가부(可否)의 결정이 내려지는 기사를 적은 것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민간인쇄조보에서도 근현대의 신문처럼 정해진 편집의 규칙이 보이고 있다. 이 부분이 조선 1577(선조10)년에 간행된 「민간인쇄조보」의 중요한 점이다. 현재 발견된 조선시대 민간인쇄조보 9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의 규칙성을 보이고 있어, 근대 신문의 편집형태와 유사성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손으로 쓴 필사조보가 각 지역으로 보내질 때 같은 구성과 순서를 유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남아있는 조보의 내용 속에서 동일성을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의 소식을 배달하던 임무를 맡은 경주인들인 경우에는 자신이 소속된 지방과 관련된 소식을 우선 기록하고, 부차적으로 다른 지방의 소식을 적었을 것입니다.
현존하는 필사조보인 경우, 조보소 내지 기별청에서 붙여진 1차 필사조보와 다시 2차로 기별서리가 등서한 필사조보나 지방으로 내려가는 필사조보와의 차이가 생기게 되는데 이 부분에 대한 연구도 필요합니다. 규칙성보다 필요성에 의한 기록이 될 가능성이 높아 신문으로써 편집기능이 필사자의 개인적인 의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손으로 쓴 필사본 조보와 규칙성을 가진 민간인쇄조보와의 차이점이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정보가 전달된 것으로는 ‘분발(分撥)’이 있다. 좀 더 신속하게 전달을 요하는 문건이어서 별도의 작은 종이에 써서 각 기관에 보내어졌습니다.
7) 김경수(1999), 「‘朝報’의 발행과 그 성격」, 史學硏究, pp. 747-749.
8) 권농 · 척사 · 포충 · 구휼 · 양로 · 독역 등 무척 다양했다. 대상도 관료부터 서민에 이르는 모든 백성이나 일정한 지역의 관찰사 또는 수령, 일정한 지역의 대소민인(사대부·민) 등 필요에 따라 수시로 달랐다. 왕이 발행하는 대부분의 문서가 원문서 1통만 작성하여 발급한 데 비해 많은 부수를 간행해 널리 배포했으나 문서로서의 요건은 모두 갖추었다.
9) 민간인쇄조보 내용을 분석해 보면 부분적이지만 비답이 내용이 차지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10)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411232065929761
기자; 지금까지 알려진 세계최초신문인 독일의 라이프찌거보다 83년이 앞섰는데 우리의 어떤 힘이 조보를 만들어 냈을까요?
스님; 조선은 활자의 나라입니다. 그것은 정보의 전달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어 국가가 소유했습니다. 출판을 통한 정보소유의 독점적 지위을 누리며 왕권과 성리학적 사회구조를 강화시키는 출판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활자를 민간화 시키려는 시도로 볼 수 있는 사례는 중종 17년(1522) 때부터 있어왔는데. 사헌부 장령 어득강은 “중국에는 서사(書肆- 지금의 서점)가 많이 있으니, 명색이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도 서사를 설치하면 사대부들이 편리하게 여길 것.”이라면서 서사 설치를 주장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서사는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어득강은 사간원 대사간으로 있던 중종 24년 5월 다시 서점 설치를 주장했습니다. 어득강은 “세가(世家)나 대족(大族)들 중에는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서책도 혹 있고 하사(下賜)받은 서책도 있지만 거꾸로 쓸모없는 책도 많이 있을 것.”이라면서 “서점을 세운다면 팔고 싶은 사람은 팔고, 사고 싶은 사람은 살 것이므로, 유생들이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책을 팔아 다른 책을 사서 읽을 수 있게 됩니다.”(중종실록 24년 5월 26일)라고 주장했습니다. 어득강은 조선 사람들은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책을 파는 것을 그르게 여겨서 팔지 않으려 한다면서, “그러나 높이 쌓아놓기만 하고 읽지 않아서 좀만 먹는다면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중종 역시 “학문에 뜻을 두고도 책이 없어서 독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많이 있을 것.”이라면서 “내 생각에는 서점을 설립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라고 찬성했습니다. 임금까지 서점 설치를 찬성했지만 이때도 설립은 실패했습니다. 어득강의 건의 당일,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좌의정 심정(沈貞), 우의정 이행(李荇)이 모두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조선 풍속에 없었던 일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약 30여 년 후인 명종 6년(1551) 5월 26일 사헌부에서 “우리나라에는 백가지 물건을 다 시전(市廛ㆍ시내 가게)에서 매매하는데 유독 서적 파는 곳만 없다.”면서 서점 설치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음날 사헌부는 스스로 ‘서사(書肆)의 법’, 즉 서점설치법은 자신들이 처음으로 만들어 아뢴 것이 아니라 중종 때 만들었다가 시행하지 않았다면서 번거롭게 다시 논의할 것은 없다고 스스로 철회했습니다. 송사(宋史) ‘여조겸(呂祖謙) 열전’에 이미 서점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중국에는 일찍부터 서점이 있었는데, 조선의 사대부들이 서점 설치를 반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10)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1576년 선조 임금 때 ‘고사촬요’의 마지막 페이지에 방각본의 간행기록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11)고사촬요는 명종 9년(1554) 어숙권(魚叔權)이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인데, 불과 20여년 후에 방각본이 나타난 것입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수표교 아래 북 쪽 두 번째 동리문 안에 있는 하한수가에서 판에 새긴 것이다. 사고 싶은 사람은 찾아오시오.'
광고와 함께 ‘만력 4년(1576) 7월’이란 연대와 함께 적혀 있다고 한다. 이 책의 출현과 더불어 1여 년 뒤에 나타난 민간인쇄조보는 어떠한 관계일까요?
고사촬요는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지만 정보의 민간화를 시도한 것으로 사회적으로나 국가에서 용인된 일반적인 행위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만약 허락이 되었다면 여러 곳에서 방각본의 흔적과 함께 출판의 흔적이 보여야 할 것이지만 현재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나마 보여주고 있는 사례로 1577년 11월28일 선조실록 기사에,
(선조 임금)이 전교하기를,
“대소(大小)의 서책을 인출(印出)할 때에는 모두 계달하여 취품(取稟)한 뒤에 시행하도록 하라.12) 만일 마음대로 함부로 인출할 경우에는 통렬히 죄를 다스리겠다.”
민간인쇄조보 사건의 결과는 민간이 서책을 인출하지 못한다는 금지령의 발표인 것이다. ‘만력 4년(1576) 7월’ 하한수의 고사촬요와 1577년의 민간인쇄조보는 정보 소유계층의 변화를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남아있는 기록으로 살펴본다면 선조10(1577)년 민간출판업자들의 손으로 구독자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전달해준 조선 최초의 민간언론, 민간인쇄조보(조선인쇄신문)가 사라진 것이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의 세계최초의 목판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와 세계최초의 현존하는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을 만든 인쇄문화의 강국이다. 또한 고려 팔만대장경과 더불어 최고의 인쇄술을 소유한 국가이다.
조선 1577년에 이르러 독일보다 83년 중국보다 62년 앞서 새로운 조선을 꿈꾸게한 세계최초의 활자조판방식 상업용 일간신문을 간행해 국왕과 조선을 비판하고 정보의 힘을 민간이 가지고 글짜를 아는 사람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관심 기사를 만들어 변화를 시도하고자 하였습니다.
기자; 직관력은 주로 수행의 힘에서 나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스님; 어려서, 9살 쯤 절에 들어갔습니다. 50년이 지났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절에 살았고 지금은 환갑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긴 세월을 절에 살았으니 밥값은 조금해야겠지요.
다른 스님들은 포교를 열심히 50년을 했으면 훌륭한 가람을 만들고 신도를 잘 공부시켜 많은 인재 불사도 하고 했을텐데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선방에 50년 정도 수행한 스님에게서는 선방의 깊은 향기가 우러나오고 할텐데 저는 냄새도 못피우고 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이라면 우리나라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매진하여 30년 동안 4만여 점 모아 국내 최초로 사립박물관으로는 유일한 지역사 연구하는 1종 전문박물관 등록하는 결실을 맺었으며, 스님이 하는 지역사 박물관으로 처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은 건물과 인재를 키우는 불사가 아니라 불교의 가치와 경쟁력 키우는 불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수행은 중생들을 위한 일이어야 합니다. 지역에 있어서도 불교의 사회적 가치가 명확해 질 때 불교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도 좋아질 것입니다.
직관력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저의 수행입니다. 앞으로 마지막 공부라는 마음으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찾고 전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고 경북 영천에서 회향한다는 마음으로 매진하겠습니다.
기자;오래된 글쓰인 종이가 무엇인지 꿰뚤어 아신 스님은 누구입니까?
스님; 저는 작은 스님입니다. 묵묵히 저의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 소박하게 살아가는 스님입니다. 1988년 통도사에서 이산 현문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88년 사미계를, 1996년 구족계를 수지했습니다.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통도사 자비원 노인요양시설장, 자비원 법인사무처장, 통도사 포교국장, 은해사 기획국장, 은해사 성보박물관 부관장, 동아대 석당학술원 연구원, 연세대 지역인문학 연구원, 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 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영천 용화사 주지, 영천역사박물관장 등을 맡고 있습니다.
코로나 문제로 이메일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