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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2021년 7,8월호] [나의 금강경 공부 17] 보시와 해탈 / 조성내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1.07.25|조회수94 목록 댓글 0

 

< 부루나 칼럼 >

 

 

 

 

[나의 금강경 공부 17]


보시와 해탈

 

 


글 | 조성내
(법사, 컬럼비아 의대 임상조교수)

 

 

 

 

 

제11분;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선녀가 저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금은보화를 가지고 널리 보시하였다면 그가 얻은 복이 얼마나 많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선녀가 이 경전 가운데서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하여 설명하여 준다면 이 일의 복덕은 앞의 복덕보다 훨씬 뛰어나리라.”(제13분, 제24분)

복을 얻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얻기 힘든 것도 아니다. 5계를 지키면서 십선을 행하고, 자주 보시바라밀을 행하면, 많은 복을 얻는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다음은 부처님의 게송이다.
 
복은 저 불도 태우지 못하고
복은 바람도 날리지 못한다
큰물이 땅덩이를 무너뜨려도
그 복은 떠내려 보내지 못한다.

나쁜 임금과 또 도적이
사람의 물을 억지로 빼앗아도
혹은 남자나 여자의 
그 지은 복 빼앗기지 않는다
<잡아함경. 3권, 동국역경원 발간, 430쪽)

“네 글귀”란 무엇인가?

󰊉 무릇 있는바 모든 현상은 다 이것이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현상이 진실상이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보느니라.(제5분)
②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맞부딪침과 어떤 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니라. (제10분)
③ 만일 모양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 하며, 이 이는 곧 삿된 도를 행하는 자라, 여래를 길이 볼 수 없으리라.(제26분)
④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이여 환이며 물거품이며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어다.(제32분)

내 아들이 “왜 ‘네 글귀’가 삼천대천세계에 금은보화로 보시한 것 보다 더 뛰어난다 고 하느냐?”고 묻는다. 보시는 복덕을 쌓는 것이지만, ‘네 글귀’는 도를 깨치도록 인도해주고, 생사윤회에서 해탈토록 해주기에, 더 뛰어난다고 설명해주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해탈이다.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복덕을 지으면 좋은 업을 만든다. 좋은 업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에 인간이나 혹은 천상에 태어난다. 천상이나 극락에 태어난다고 해도, 해탈하기 전에는, 생사의 고통을 받는다. 태어남은 노병사(老病死)가 있기에 고통이다. 죽고 나면, 다시 태어나야만 하기에 죽어 있는 것도 또한 고통이다. 살아 있어도 고통, 죽어 있어도 고통이다. 해탈하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기에, 그래서 해탈로 이끌어주는 ‘네 글귀’가 훨씬 뛰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해탈이라는 말은 도(道) 깨침을 말한다. 도 깨침이란, 팔정도, 특히 참선을 통해서 스스로가 도를 깨쳐야 한다. 도(道)깨침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얻는 것이지, 주거니 받거니 하고 남으로부터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무릇 있는바 모든 현상은---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相)은 다 인연에 의해 생긴 것이다. 사람들은 나(我)라고 하는 영구불변한 실체가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런 실체는 없다. ‘나’라고 하는 것도 다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인연이 다하면 또한 없어지고 만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라고 하는 변치 않는 실체가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죽어도 ‘나’는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죽으면 천당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나’라고 하는 변치 않는 실체는 없는데, 실체가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 허망이다.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려면, 먼저 아상·인상부터 없애야 한다. 아상을 갖고 있는 한 우리는 형상에 머문다. 소리· 냄새· 촉(觸)· 법에 머물게 된다. 어떤 것에라도 우리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아상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아상·인상을 없앨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낼 수가 있는가? 이것은 참선을 꾸준히 해가면서 스스로 수행을 해야만 한다.

달마대사와 양무제:

다음은 <벽암록>(원오극근 저)에 나온 양무제와 달마대사의 대화이다.

양나라 무제는 도교를 물리치고, 천하에 칙령을 내려 사찰을 일으키고 그리고 승려에게 도첩을 내려주었다. 불법을 몸소 실천하도록 하였기에, 사람들은 양무제를 ‘불심 있는 임금’(佛心天子)이라고 불렀다.
쉽게 말하면 양무제는 불교발전을 위해서 공헌을 많이 하신 분이다
양무제가 처음 달마를 만나자 물었다.
“짐은 사찰을 일으키고 스님들에게 도첩은 내렸는데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달마; “공덕이 없습니다.”
(없다니! 기가 찰 노릇이지. “내가 붙인 말”)
양무제; “무엇이 가장 성스럽고 으뜸가는 진리입니까?”
달마; “텅 비어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
성스럽고 으뜸가는 진리는 아녹다라삼먁삼보리인 데, 아녹다라삼먁삼보리는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진리도 아니고, 진리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진리를 깨친 분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장이 없다. 있으면 이는 곧 보살이 아니다.”

양무제; 나와 마주한 그대는 누구십니까?
달마; 모르겠습니다.

<벽암록>에, 양무제는 인견(人見)·아견(我見)에 사로잡혀 다시 “나와 마주한 그대는 누구십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달마는 자비심이 너무 많으셔서 또다시 그에게 “모르겠다.”고 말해주었다. 나중에, 달마가 죽은 후, 달마를 추모하여 스스로 비문을 지었다.

아! 눈으로 보고서도 알아보질 못하였고
만나고서도 알아 모시지를 못했구나.
마주치고도 보지 못했으니
에나 제나 원망스럽고 한스럽다.

<벽암록>의 저자, 원오극근이 다시 찬탄을 하였다.

마음이 있으면 영겁토록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심해야 찰나에 묘각(妙覺)의 경지에 오르리라.

벽암록에 “달마스님이 본디 이 나라에 온 까닭은 사람들의 집착과 속박을 풀어 제거해주며, 속박하는 못과 말뚝을 뽑아주며, 가시덤불을 없애주려 함이었는데···” 금강경도 원래 사람들의 집착과 속박을 풀어 제거해 주기 위해서 씌어 진 것이다.

6조혜능 대사:

<선림보전>(禪林寶典, 돈황본단경 편역;103쪽)에 달마대사에 대한 이야기가 써져 있기에 여기에 적어본다;

위산군이 예배하고 6조 혜능대사에게 물었다
“제자가 듣자오니, 달마대사께서 양무제를 교화하실 때, 양무제가 달마대사께 묻기를, 
‘짐이 한평생 동안 절을 짓고 보시를 하며 공양을 올렸는데 공덕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달마대사께서 ‘전혀 공덕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시니, 무제는 불쾌하게 여겨 마침내 달마를 나라 밖으로 내보내었다고 하는데, 이 말을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큰스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육조; “실로 공덕이 없으니, 사군은 달마대사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 양무제가 삿된 길에 집착하여 바른 법을 모른 것이다.”

위산군이 물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육조: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만 복을 닦는 것이다. 복을 공덕이라고 하지는 말라. 공덕은 법신에 있고 복 밭에 있지 않으니라. 
자기의 법성(法性)에 공덕이 있나니, 견성이 곧 공(功)이요, 평등하고 곧음이 곧 덕이니라. 안으로 불성을 보고 밖으로 공경하라. 만약 모든 사람을 경멸하고 아상을 끊지 못하면 곧 스스로 공덕이 없고 자성을 허망하여 법신에 공덕이 없느니라.
생각마다 덕을 행하고 마음이 평등하여 곧으면 공덕이 곧 가볍지 않으니라. 그러므로 항상 공경하고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곧 공(功)이요,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이 곧 덕이니라. 공덕(功德)은 자기의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이같이) 복과 공덕이 다르거늘 양무제가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요, 달마대사께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니라.
 위에서 혜능대사는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만 복을 닦는 것이다. 복을 공덕이라고 하지는 말라."고 말씀하셨다.

달마와 부처의 다른 점: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어떤 사람은 친절하게 가르쳐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전연 가르쳐주기를 귀찮게 여겨 가르쳐주지 않거나, 혹은 가르쳐주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부처님은 가르쳐주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시다. 부처에게 질문을 하면, 부처님은 친절하게, 예를 들어가면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해주신다. 그런데 달마대사는 부처하고 성격이 다르다.
양무제가 처음 달마를 만나자 물었다.
“짐은 사찰을 일으키고 스님들에게 도첩은 내렸는데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달마대사는 “공덕이 없습니다.”라고 무뚝뚝하게 쭉 잘라 대답했다. 부처님 같으면 이에 대해 양무제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설명해주셨을 것이다. 양무제는 다시 물었다. “무엇이 가장 성스럽고 으뜸가는 진리입니까?” 역시 마찬가지로 달마의 대답은 간결했다. “텅 비어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
부처 같았으면, 부처님은 양무제에게, “제가 중국에 온 이유는, 참선을 통해서 도를 깨치는 방법을 가르치러 왔습니다. 재물보시나 법 보시를 아무리 많이 하여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덕을 짓는 것으로 끝납니다. 복덕을 아무리 많이 진다고 해도, 해탈하지 못합니다. 꼭 참선을 해서 수행 정진하셔야 합니다.”라고 자세히 설명해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달마대사는 말이 적고, 좀 어딘가 무뚝뚝한 성격이 있는 것 같다. 
부처님의 설법을, 예로 들어, 여기에 적어보겠다. 대중에게 6바라밀을 닦는 마음에 대해 설법이다.

사리푸트라야, 모든 법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나는 것도 아니요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바라밀’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베풀어도 베푼다는 생각이 없이 보시 바라밀을 행하라. 참다운 보시에는 베푼 사람도 없고, 베푼 물건도 없고, 베품을 받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계율로서 마음을 억제할 때에도 계를 지킨다, 마음을 억제한다는 생각이 없이 지계바라밀을 행하라. 실제(實際)에 있어서는 허물을 범한다,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다른 사람의 괴롭힘을 참으면서, 다른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는 생각이 없이 인욕바라밀을 행하라. 괴롭힘에 의해서 마음이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힘을 써도 힘쓴다는 생각이 없이 정진바라밀을 행하라. 힘쓰고 게으르다는 것은 본래 그것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도 생각한다는 생각이 없이 선정바라밀을 행하라. 선정을 닦고 안 닦는다는 것은 구별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또 물건에 집착한다는 생각이 없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라. 모든 법의 체(體)나 상(相)은 다 잡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리푸트라야. 일체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다고도 저렇다고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반야바라밀을 행하라. 모든 것은 필경은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사리푸트라야, 빨리 일체의 지혜를 얻어, 모든 번뇌를 떠나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 지위에 이르려고 하거든, 반야바라밀을 닦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사견(邪見)을 가진 사람의 인과(因果)를 믿지 않고, 또 그 사람의 가르침도 듣지 않고, 마음의 번거로움을 돌려, 불·법·승을 믿어 기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부모나 형제와 같이 화목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말 팔만대장경; 반야경을 말씀하심; 655쪽)

두 가지 시주

풍제천(?-1153)거사가 장경(藏經)보시를 하면서 발원문을 지었다;
“제가 장경을 시주한 것은 한 가지로 두 가지 시주를 한 것입니다. 장경에다가 돈을 낸 것은 제물보시가 됩니다. 그 경으로 법을 전하는 것은 법보시가 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살펴보건대, 재물보시로는 다음 생에 하늘이나 인간  세상에 태어날 복된 과보를 받습니다. 법보시로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말솜씨가 좋은 사람이 되는 과보를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과보가 모두 윤회의 씨앗이며 괴로운 과보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인천보감>(人天寶鑑, 담수스님, 188쪽)

그런데 풍제천 거사는, 양무제처럼, ‘복된 과보’를 바라보고서 보시를 한 것이다. 많은 거사들이 절이나 스님에게 보시하는 것이, 다 양무제처럼, 무언가 복덕을 바라면서, 극락에 가기 위해서, 혹은 다음 생에 좋은 복을 갖고 태어나게 해 달라고 비는, 보통 보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보시는 많은 복은 받지만, 보시바라밀이 아니기에, 공덕이 없는 것이고, 또 해탈을 향한 보시는 아닌 것이다.


 머문바 없이 보시하다:

제4분;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어떤 법에도 머문 바 없이 보시를 행할 것이나, 이른바 형상에 머물지 말고 보시할 것이며, 소리, 냄새, 맛, 닿는 것(觸)과 온갖 법(法)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만일 보살이 현상(相)에 머물지 않고 보시마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다음은 <대품반야경>(무생품 제26)에 써진 보시다.
“무엇을 세간 밖의 보시바라밀이라고 하는가? 소위 세 가지 보시에 필요한 요소의 청정함(三分淸淨)입니다.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는가 하면, 보살마하살은 보시를 할 때에 󰊉자기를 붙잡지 않고, ②받는 이를 붙잡지 않고 베푸는 물건을 붙잡지 않으며, 또한 ③과보를 바라지도 않으니, 이것을 세 가지 보시에 필요한 요소가 청정한 보시바라밀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보시를 할 때에 일체중생에게 베풀어 주지만, 중생을 붙잡지도 않고, 이 보시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지만 미세한 법의 모양까지도 보지 않습니다. 이것을 세간 밖의 보시라라밀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시할 때는 보시한다는 생각도, 보시했다는 자부심도, 그리고 그 과보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보시하면 이게 보시바라밀이다. 준다는 생각조차 없이 주는 보시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이다.
무언가 주면서 과보를 바란다면, 다시 말하지만, 보시·헌금을 많이 하면서, 무언가를 바란다면, 이것은 사업의 일종이다. 주었다고 뻐긴다면, 이것은 자기의 허영심을 위한 보시이기에 복을 받지 못한다.

 

 


사람들이여, 부지런히 돈을 벌라

때는 2월14일, 파바 성 밖에 있는, 춘다의 소유지 동산에서,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부처는 그들에게 말하셨다. 

“지혜 있는 자로서 집에 있을 때에는, 생업에 종사하여 부지런히 벌고, 검박하고 절제 있는 생활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첫째는 부모 봉양과 처자 부양에 쓰고, 둘째는 손님 접대와 부리는 종과 같은 사환 급식에 쓰고, 셋째는 친척 보조와 친구 접대에 쓰고, 넷째는 나라에 세금을 잘 바치고 사마나(사문)의 공양에 써서 기쁨을 얻는 것이 좋다. 이렇게 몸을 보존하고 집을 편안하게 하면, 현세에는 힘과 빛과 부(富)와 이름을 얻고, 죽어서는 복을 언어 천상과 같은 좋은 곳에 날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이 설법을 듣고 기뻐하면서 헤어졌다. (우리말 한글 팔만대장경; 법화·열반부, 816쪽)

사람들은 “불교!” 하면, “무소유”(無所有)하고 생각한다. 물론 스님은 ‘무소유’하여야 한다. 무소유하여야  마음이 어딘가에 머문바 없이 참선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리고 도를 깨칠 수 있게 된다.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해탈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반신도는 스님이 아니다. 일반신도는 집에서 살면서 돈을 벌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법적으로 나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는 안 된다. 5계를 지켜가면서, 부지런히 일해서 돈을 벌라고 부처님은 말씀해주고 있다. 돈을 벌어서 가족도 먹여 살리고, 세금도 내고, 그리고 스님이나 절에도 보시하라고 말씀하셨다. 
 
보시하는 현재의 과보

1 여러 사람에게 사랑을 받게 되고,
2 착한 사람들이 보시하는 사람을 찾아서 섬긴다.
3 보시하는 사람은 명예가 높이 드날린다.
4 고관대작들하고 만나더라도 겁날 것 없고 대담하게 들어   
   갈 수 있다. 
5 보시하는 공덕으로 죽은 뒤에는 천상에 나게 된다.
(우리말 팔만대장경; 아함경법문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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