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루나 칼럼 >
사무침의 시 . 설 렘의 노래 (3)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나라가 이민족의 압박에서 해방되자 이 땅의 선비, 문사들에게도 비로소 문자의 옥문이 활짝 열렸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일제말에 사상범으로 여러 번 감옥을 들락거리던 시조시인 김상옥(金相沃 艸丁 1920 ~ 2004)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 고장의 명성답게 갓일로 이름이 났었다. 김상옥은 1938년 <문장> 지에 <봉선화>가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는데 해방후에는 경남여고와 부산여고 등 삼천포 ‧ 부산 ‧ 마산을 돌아다니며 교편을 잡는 한편 아름답고 뛰어난 수많은 시조와 시를 지었으며 그림과 서예에도 능했다.
그의 강직한 성품은 해방후의 혼탁한 사회를 거치면서도 한결같았으나 다른 한편 섬세하고 지극한 감성이 그의 시조에도 나타난다. 종생토록 사진을 머리맡에 모셔 두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였으며 60년을 해로한 아내가 죽었음을 알게 되자 곡기를 끊고 아내를 따라 엿새 만에 세상을 떴다. 불교적인 작품도 적지 않은데 <은선암 즉흥>과〈은선암 소견>은 그가 말년에 남긴 작품으로 은선암은 직지사의 오랜 암자다.
봉선화
김상옥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 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 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한국 난해시의 원조 김구용(金丘庸 永卓 1922 ~ 2001)은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집에 있으면 명이 짧다 하여 네 살 때 금강산 마하연에 들어간 이래 해방전에는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유 ‧ 불 ‧ 선의 전적들을 두루 탐독하였다. 해방후에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를 나왔다. 아무튼 우선 아래 시를 읽어 보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이 오는가?
풍미
김구용
나는 판단 이전에 앉는다
이리하여 돌(石)은 노래한다
생기기 이전에서 시작하는 잎사귀는
끝난 곳에서 시작하는 엽서였다
대답은 반문하고
물음은 공간이니
말씀은 썩지 않는다
낮과 밤의 대면은
거울로 들어간다.
너는 내게로 들어온다
희생자인 향불
분명치 못한 정확과
정확한 막연을 아는가
녹(綠)빛 도피는 아름답다
그대여 외롭거든
각기 인자하시라
판단 이전에 앉는다니, 첫줄부터 막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큰 바위를 깨려고 하듯 찬찬히 듵어 보면 파고들 틈새는 있다. 우리가 뭐 늘 판단을 하고 나서 숨쉬고, 침을 삼키고, 팔을 흔들고 그러고 사나? 기분이 좋을 때는 새소리도 물소리도 노랫소리로 들린다. 돌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이런 식으로 해 나가면 해석 못 할 것도 없을 것 같고 늘어난 시의 지평과 깊이에 어울리는 다른 차원의 감동이 있을 수 있겠다. 시라는 것이 꼭 유행가 가사같이 쉽고 헤퍼야만 좋은 게 아닐 터이니 말이다.
이렇게 곰곰이 생각해 가면서 읽는 시가 아니라 귀로 듣는 시 낭송의 대가로 평생 불교시를 쓴 ‘시의 보살’ 박희진(朴喜璡 水然 1931 ~ 2015)이 있다. 경기도 연천 출생으로 보성중학, 고려대 영문과를 나왔고 북한산 자락에서 평생 수도승처럼 살았다.
학과 소나무
박희진
학이 소나무에 끌리는 것은
두 날개 활짝 펴며
아득한 천공에서
홀연 날아와 안기려 하는 것은
학 안에도 소나무가 있기 때문
학이 소나무에 사뿐히 내려앉는 것은
학 안의 소나무와 밖의 소나무가
만나서 하나 되길 원하기 때문
학은 날아다니는 공중의 소나무요
소나무는 땅에 뿌리내린 학이라오
좋다가 말았다는 말이 있다. 한국이 이제는 유엔에서도 인정하는 선진국이라는데, 그래서 뭘 어쨌다는 게 아니지만 여태 노벨상 하나 못 받은 선진국도 있다던가! 그럼 그렇지, 한국이 단군 이래로 평화상은 하나 받았네요. 하지만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다고, 무슨 희귀한 백성들인지 제 나라 사람이 처음으로 받는 훌륭한 상에도 시새우고 해코지하는 사촌이나 형제자매가 많았지라.
그래서 누구라도 입도 벙긋 못할 상 하나 타 보자고 이제나 저제나, 아쉬운 대로 1순위로 몇 해 째 기대를 한껏 모았던 승려 출신의 시인이자 일종의 파락호가 있었는데 이름이 고은(高銀, 銀泰, 波翁, 一超 1933 ~)이라. 평소에 이런 저런 쉰 소리가 들리기에 저명인사들에 으례껏 따르는 뒷소문인가 하였더니 해전에 터진 미투 운동으로 산통 다 깨지고 날이 새 버렸다. 보도된 대로라면 그야말로 올라갈 때는 못 보았는데 내려갈 때 보니 영 딴 사람인 것도 같다.
그 꽃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그런데 그의 시세계로 조금 들어가 보면 이건 영 얼결에 값 매겨 넘길 장내기가 아녀 보인다. 엄청난 작품량에다 네 번씩이나 자살을 시도한 굴곡진 생애와 추문, 하지만 그 들쑤시고 다니는 경계가 넓고도 호방하고 또한 야릇하여 소심하고 반듯한 척하는 소인배에겐 갈피를 잡기 어려운 오리무중이라 누가 속이고 누가 속는지 헷갈릴 만하다.
고은은 전북 옥구군에서 태어나 군산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한국전쟁 중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참선과 방랑을 거듭하다 1962년에 환속하여 본격적으로 시를 짓기 비롯하였다. 초기에는 순수시인으로, 나중에는 저항시인으로 변모하였는데 그러면서 제탓 남탓으로 안팎의 여러 적을 길렀다.
최근의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듯 고은은 찬사와 욕설을 범벅으로 얻어먹고도 어쨌든 장수하고 있는데 반하여 한 해에 태어난 이형기(李炯基 1933 ~ 2005)는 한국 현대시의 역사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창을 남기고는 한참 앞서 이 세상을 떴다.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동국대 불교학과를 나왔으며 같은 대학의 교수를 지냈는데 그의 시에는 공(空)과 적멸의 미학이 담겨 있다.
낙화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고은과 친하면서도 추문 없는 민중시인으로 널리 사랑받는 신경림(申庚林 1936 ~)이 있다. 충북 충주에서 면서기의 아들로 태어나 충주고와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55년에 등단했으나 살기 어려워서였는지 한 십년 시를 쓰지 않았다. 그러다 절친한 동료 시인인 김관식(金冠植 1934 ~ 1970)의 손에 이끌려 서울로 이사하여 영어 강사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면서 다시 시를 쓴 것이 속된 말로 대박이 났다. 대표작으로 <목계 장터>, <농무>, <가난한 사랑 노래>가 있다.
뗏목
신경림
뗏목은 강을 건널 때나 필요하지
강을 다 건너고도
뗏목을 떠메고 가는 미친놈이 어데 있느냐고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빌려
명진 스님이 하던 말이다
저녁 내내 장작불을 지펴 펄펄 끓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절방
문을 열어 는개로 뽀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곰곰 생각해 본다
혹 나 지금 뗏목으로 버려지지 않겠다고
밤낮으로 바둥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 나 지금 뗏목으로 버려야 할 것들을 떠메고
뻘뻘 땀 흘리며 있는 것은 아닐까
신경림과 더불어 선 굵은 민중시인으로 전남 화순 태생의 문병란(文炳蘭 瑞隱 1935 ~ 2015)이 있다. 얼핏 여자 이름 같지만 군부 독재정권에 맞서 민중과 통일을 노래하는 참여시를 꾸준히 발표해 온 굳세고 끈질긴 남자 교사다. 고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민주화운동으로 해직된 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수배를 당하기도 했다. 평범하고 친숙하며 민중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건강한 언어로 ‘쉬운 시 쓰기’를 꾀했다. 조선대 문학과를 나와 같은 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다.
새벽의 차이코프스키
문병란
새벽에 깨어나 혼자서 듣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가늘은 현악기의 현 끝에
아리게 떨리는 알레그로
내 고독한 혼도 따라 울고 있다
이 새벽 밖에서는
새록새록 싸락눈이 내리고
어디선가 외로운 목숨이
쓸쓸한 기침 소리로 돌아누울 때
노래는 2악장으로 바뀌고 있다
세상은 얼마나 차갑고 쓸쓸한가
세상은 얼마나 무섭고 고독한가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도 없이
눈 내리는 이 새벽
혼자서 듣는 차이코프스키
나도 한 마리 작은 귀또리처럼 운다
산다는 것은 음악보다
얼마나 아프고 쓰린 울음인가
어디선가 외로운 가슴이 모로 누워간다
오 기침 소리여
기침 소리여
문병란의 대표작으로는 교과서에도 실린 <직녀에게>가 있다. 민중이 염원하는 통일의 노래로 당시에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불교의 핵심 교리가 인연 연기설이다. 이 인연의 고리를 따르자면 남북이 한 마음(一心)으로 돌아가 갈등의 고리를 풀어야 하고 그러자면 먼저 조건 없이 만나야 함을 노래한다.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는 남자 시인만 훑어 내려왔네. 여성 시인은 없는가? 물론 있다. 나혜석이나 김일엽의 시대는 이제 한참이나 지나지 않았는가! 먼저 경남 함양 출생으로 경기여고와 숙명여대 국문과를 나온 허영자((許英子 1938 ~)가 떠오른다. 1962년 <현대문학>지를 통해 등단하였고 성신여대 교수를 지냈다. 그의 시는 겨레의 정한이 밴 모국어를 운율감 있게 잘 살려냈다는 평이다.
이순(耳順)을 넘어
허영자
검은 새떼들
멀리 날아가 버린
빈 하늘은
몇만 리
그리움도 안타까움도
아득히 사라져 버린
마음속 빈 하늘은
또 몇만 리
한 폭의 수묵화 같지 않은가! 그리고 그 빈 하늘의 여백에는 향냄새와 목탁 소리가 은은히 퍼져 나오는 둣하다.
그런데 다음은 다시 남자 시인, 경기도 안성 출생으로 안성농고와 고려대 국문과를 나온 정진규(鄭鎭圭 長山 1939 ~ 2017)의 차례다. 196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을 주도한 <현대시> 동인으로 출발하여 유려한 산문시의 경지를 개척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대학생 때 조지훈(趙芝薰 1920 ~ 1968)에게 배웠고 스승의 스승인 만해(韓龍雲 卍海1879 ~ 1944)의 전집간행위원으로 활동하며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별2
정진규
어제는 안성 칠장사엘 갔다 잘생긴 늙은 소나무 한 그루 나한전(羅漢殿) 뒤뜰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마다 골고루 잘 벋어나간 가지들이 허공을 낮게 높게 어루만지고는 있었지만, 모두 채우지는 않고 비어 있는 자리를 비어 있는 자리로 또한 채우고 있었지만, 제 몸이 허공이 되지는 않고 허공 속으로 사라지지는 않고 허공과 제 몸의 경계를 제 몸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허공이 있고 늙은 소나무가 거기 있었다 서러워 말자
대광고를 나와 연세대 철학과에 들어가 실존철학에 꽂혀 시를 쓰기 시작한 정현종(鄭玄宗 1939 ~)의 국민 애송시에는 <섬>, <방문객>이 있다. 종교는 천주교이지만 삼세의 인연이 겹쳐지는 불교적 세계관이 엿보인다. 연세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다.
섬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전남 장흥 출생의 한승원(韓勝源 海山1939 ~)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연꽃바다> 등 불교소설을 쓴 소설가요 시인이다. 장흥고에 다닐 때 문학과 인연을 맺었고 가정 형편상 졸업후 몇 해 쉬다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다. 김동리(金東里 1913 ~ 1995) 교수에 사사하며 장래에 소설가가 된 여러 벗들과 사귀었지만 중퇴하고 낙향하여 입대했다. 제대후 가난한 시절에 신혼부부 단 둘이서 법당 부처님 앞에서 혼인식을 올린 독실한 불자다. 1966년 신춘문예에 단편소설로 등단하였지만 시집도 여러 권 내었다.
도라지꽃
한승원
뙤약볕 여름 기울어지고 귀뚜라미 울면
나 산으로 들어갈 거야
머리 옥빛 나게 깎고 송낙 깊이 눌러쓰고
송이송이 살구꽃 눈바람에 날리던 날
나 버리고 훌쩍 떠난 그대 마을로
탁발가게
나무 관세음보살
사랑 시주하십시오
한국 문단에 품격 높은 시를 쓰면서도 은근한 재미를 주는 시인이 있으니 숲을 거닌다는 임보(林步 姜洪基 1940 ~)다. 그 재미의 보기로 문정희(文貞姬 1947 ~) 시인의 <치마>라는 시에 <팬티>라는 시로 화답한 것이 있는데 지면상 여기에 소개는 못 하겠으니 내키면 손수 찾아보시기 바란다. 1962년 <현대문학>지를 통해 등단한 서울대 국문과 출신으로 충북대 교수를 지냈다.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으며 불교를 소재로 쓴 격조 높은 시들이 많다.
물의 칼
임보
대장간의 화덕에서 벼려진 굳은 쇠붙이만이
예리한 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로 가슴을 베인 적이 없는가?
해협을 향해 몰아치는
거대한 파도의 모서리가 아니라
몇 방울의 물
두 안구를 적시며 흐르는
눈물방울도
사람의 가슴을 베는 칼이 된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아껴 두려던 문정희 시인을 불러내자. 고등학생 때부터 각종 백일장을 휩쓸고 첫 시집을 냈다.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진명여고를 거쳐 동국대 국문학과를 나와 대학교수를 지냈다. 남성 중심의 문단에서 이를 악물고 내공을 쌓아 온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 시인이다. 불교와 인연이 깊지만 대놓고 불교 용어를 부리지 않고도 깨달음과 삶의 깊은 뜻을 읊어 내는 시의 고수다.
가시
문정희
어머니
나는 가시였어요
당신의 생애를 찌르던 가시
당신 떠난 후
그 가시가 나를 찔러요
내가 나를 찔러요
어머니
경북 안동 출신으로 또 하나의 여류 거장이 있다.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자 소설가, 수필가인 유안진(柳岸津 1941 ~)으로 박목월(朴木月 1916 ~ 1978)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다. 호수돈 여고와 서울대 교육학과를 나와 고교 교사와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단아한 내적 아름다움의 시인이라 기림 받지만 이는 힘겨운 인생살이의 정제된 결과인 것 같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고장의 넉넉지 않은 양반가에서 맏딸로 태어나 열네 살 때 대전으로 홀로 이사를 가야 했는데 어린 남동생 셋이 차례로 죽자 딸을 외지로 보내 액땜을 해야 한다는 집안의 압력 때문이었다. 종교는 천주교이지만 이 시인의 폭은 그이 시 <시간>에서 보듯 한 세속적인 종교의 이름만으로 가름하기에는 넓고도 깊어 보인다. (이를 보아도 어느 종교든 근본주의자들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는가!)
구절초
유안진
들꽃처럼 나는
욕심없이 살지만
그리움이 많아서
한이 깊은 여자
서리 걷힌 아침나절
풀밭에 서면
가사장삼 입은
비구니의 행렬
그 틈에 끼어든
나는
구절초
다사로운 오늘 볕은
성자의 미소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문순태(文淳太 1941 ~)는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작품세계의 특징이 한풀이와 고향 찾기다. 광주고를 나와 조선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순천대 교수와 전남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아래의 시 <인연>은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담하게 읊고 있다. 연등불께 일곱 송이 꽃을 바치면서 부부 인연을 맹세한 부처님의 전생담을 떠올린다. 이런 마음이고 정성이라면 처복이 없을 리 없다.
인연
문순태
무엇이 우리를 맺어주고 있나요
전생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
우리 단 한 번이라도
스쳐 지나간 적 있나요
윤회의 뜨락 서성이다가
눈빛이라도 마주친 적 있나요
이슬과 햇살이 만나 꽃을 피우고
하늘과 땅 사이
두 줄기 강물 되어
흐르다가 멈추었나요
유성처럼 끝도 없이 떠돌다가
구름 딛고 떠내려왔나요
피안의 깊은 골짜기
억겁을 돌고 돌아
먹구름으로 맴돌다가
비바람 되어 내려왔나요
어느새 날이 저물었는데
이제 우리 어떻게 할까요
그대와 내가 꽃과 구름으로 만났다면
그대 아침에 이슬로 맺힐 수 있겠지요
이 세상 떠나는 마지막 그날
나란히 손잡고 두려움없이
이승의 강 건널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유유히 굽이치는 강물과 같은 문순태의 글자취와는 달리 시대의 격랑으로 터져 넘치다 벼랑 끝에 밀려 떨어지고 부서진 김지하(金芝河 英一 1941 ~)의 글자욱은 얼마나 극적이며 또한 비극적인가! 그는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는데 조상이 동학농민운동 참가자였다. 아버지를 따라 이사하여 강원도 원주중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중동고를 나온 후 서울대 미학과에 들어갔다.
김지하는 대학 다닐 때부터 학생운동에 앞장서 감옥에도 갔다오고 했는데 졸업후에도 박정희 정권과 거칠게 맞서 싸웠다. 1969년에 <황톳길>을 발표하여 정식으로 등단하였고 1970년에 오적(五賊) 필화를 겪으며 유명해졌으며 1973년에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하였다. 1974년에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잡혀 들어가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즈음은 사형선고 열여덟 시간 만에 모조리 처형해 버린 인혁당 사건에서 보듯이 정권이 국민을 위협하려고 마구 사형집행을 해 버리던 시대였다. 김지하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초조하게 죽음을 기다리며 감옥의 창 너머 인왕산에 영롱하게 불붙은 초파일 연등을 바라보며 시를 지었다.
초파일 밤
김지하
꽃 같네요
꽃밭 같네요
물기 어린 눈에는 이승 같질 않네요
갈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저기 저 꽃밭
살아 못 간다면 살아 못 간다면
황천길에만은 꽃구경할 수 있을까요
삼도천을 건너면 저기에 이를까요
벽돌담 너머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오색영롱한 꽃밭을 두고
돌아섭니다
쇠창살 등에 지고
침침한 감방 향해 돌아섭니다
굳은 시멘트벽 속에
저벅거리는 교도관의 발자욱 울림 속에
캄캄한 내 가슴의 옥죄임 속에도
부처님은 오실까요
연등은 켜질까요
고개 가로저어
더 깊숙이 감방 속으로 발을 옮기며
두 눈 질끈 감으면
더욱더 영롱히 떠오르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아아 참말 꽃 같네요
참말 꽃밭 같네요
국제적인 도움과 압박에 힘입어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억울한 인혁당 사형수와의 참담한 통방 내용을 터뜨려 곧바로 다시 잡혀 들어가는 등 1980년이 다 돼서야 김지하는 감옥 출입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 누구의 기대나 예상과도 달리 뭔가 좀 야릇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민주화 세력에게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좀 뜨악하게시리 ‘생명사상’이라는 것을 들고 나오더니 1991년에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글을 실어 경악과 충격을 줬다. 아무튼 좀더 세월이 흐르면서 이 저항과 혁명의 아이콘은 완연히 변절하였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늙고 외로워지고 돈이 있으면, 아니지, 돈이 짜칠수록 사람은 저절로 보수화, 수구화 되는 걸까? 여전히 살기에 폭폭하고 날을 세워야 하는 옛 동료들이 조그마한 서로간의 차이를 못 참고 차갑게 맞이한 때문일까? 능란하고 악랄했던 하수인들의 고문이 우리 상상 이상이었나? 아니면 본래 사람의 틀이 그 정도였을까? 세상사 공부 쉬운 것 하나 없다.
김지하와 동년배인 오규원(吳圭原 圭沃 1941 ~ 2007)은 경남 밀양 삼랑진이 출생지다. 말과 이미지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여 이를 바탕으로 시 쓰기 방식 자체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실험하였다. 관념을 마다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직관적 인식이 불교적이다. 부산중학을 나와 부산사범을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 지를 통해 등단하였고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지냈다.
빈자리가 필요하다
오규원
빈자리도 빈자리가 드나들
빈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자리가 어디 한구석 필요하다
시인으로는 드물게 서울대 국문학과 출신인 오세영(吳世榮 1942 ~)은 전남 영광 출생이다. 평생 같은 과의 교수로 봉직했다. 전염병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심장병을 앓던 어머니도 쉰한 살에, 그가 장가도 가기 전인 서른 살 때 세상을 떴다. 전주 신흥중고를 거쳐 서울대에 갔는데 입학금 오천 원의 반은 중학교 은사님이 대었고 나머지는 아버지의 유산인 화개 장롱을 팔아 메꾸었다. 그는 자신의 시에 동양철학, 특히 불교철학을 접목시키려 애썼으며 오묘한 기법을 써서 시가 마치 한편의 그림이나 영화처럼 영상미를 맛보게 하는 것들이 있다.
은산철벽
오세영
까치 한 마리
미류나무 높은 가지 끝에 앉아
새파랗게 얼어붙은 겨울 하늘을
엿보고 있다
은산철벽(銀山鐵壁)
어떻게 깨트리고 오를 것인가
문 열어라, 하늘아
바위도 벼락 맞아 깨진 틈새에서만
난초 꽃 대궁을 밀어올린다
문 열어라, 하늘아
부산 사상에서 부유한 지주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천양희(千良姬 1942 ~)는 경남여중 ‧ 고를 거쳐 이화여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대학 3년생 때인 1965년, 박두진(朴斗鎭 1916 ~ 1998)의 추천으로 <현대문학> 지를 통해 등단했다. 그리고 정현종 시인과 연애하고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서울신문사에 다니는 남편의 박봉으로는 형편이 어려워 문학을 버리고 이대 앞에 작은 의상실을 연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김지하의 오적 필화사건에 얽혀들어 끌려가 곤욕을 치르고 열흘 만에 풀려나온다. 그리고 1973년 남편과 불의의 일로 헤어진다. 그 후 남편이 몇 차례 재결합을 시도했으나 결국 갈라서서 홀로 사는데 이는 인간(남편)에 대한 환멸과 절망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해 겨울 강원도 어느 암자를 찾아 거덜난 목숨을 끝내려고 자살을 시도하다 미끄러진 길바닥에서 소복한 눈 사이에 돋아나오는 나무의 싹을 보고는 모진 생명성에 감동하여 아들을 위해서라도 살아야겠다고 깨닫고는 죽음의 유혹에서 벗어난다. 어린 시절부터 최근의 시작활동에 이르기까지 불교와 인연이 깊으며 제26회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못
천양희
벽에다 못 하나 박았다. 벽이 울렸다
박힌 것은 못인데 벽이 다 울렸다
그 소리 벽을 들어올렸다
못 하나 받으려고 벽은 버텼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종일 못을 박았다
벽에서 못 하나 뽑았다. 벽이 울렸다
뽑힌 것은 못인데 벽이 다 울렸다
그 소리 마음을 들어올렸다
못 하나 보내려고 벽은 버텼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종일 못을 뽑았다
춘천의 의사 집안에 태어난 이승훈(李昇薰 怡江1942 ~ 2018)은 의과대학 입학시험에 낙방하고 한양공대에 들어가서 1963년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하면서 국문학과로 옮겼다. 의사인 아버지가 공의여서 전근이 잦아 이승훈도 자주 전학을 하면서 일평생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그래선지 한국 시단의 주류가 서정적인 전통을 잇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시세계를 끝없이 안으로 곱씹으면서 한편으론 자유로운 문학 표현을 강조했다. 한양대와 춘천교대 국문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2008년 퇴임한 후에는 더욱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시작과 함께 시론도 깊이 파고들었는데 우리 현대시사에서 가장 독특하고 실험적이며 아방가르드(avant-garde 前衛派)스러운 양상을 보여준다. 특히 그는 일상의 세계나 자연의 세계가 아니라 내면세계를 집요하게 씹어 맛본다. 이는 대상이 없다는 뜻이며 이런 시론은 불교 정신과도 통한다.
풀잎 끝에 이슬
이승훈
풀잎 끝에 이슬 풀잎 끝에 바람
풀잎 끝에 햇살 오오 풀잎 끝에
나 풀잎 끝에 당신 우린 모두
풀잎 끝에 있네 잠시 반짝이네
잠시 속에 해가 나고 바람 불고
이슬 사라지고 그러나 풀잎 끝
에 풀잎 끝에 한 세상이 빛나네
어느 세월에나 알리요?
마음경 연작의 시인 홍신선(洪申善 1944 ~)은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성동고를 나와 동국대 국문학과에 들어갔는데 1965년 <시문학> 지를 통해 등단했다. 서울예술대와 안동대, 수원대를 거쳐 동국대에서 문예창작과 교수를 지냈다. 초기에는 환멸의 자의식을 역동적 이미지로 그려내었으나 점차 겉모습과 안모습을 나란히 두고 빗대는 수법으로 삶에 대한 긍정과 깨달음 찾기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마음 經·55
홍신선
첩첩이 모여 놀던 저녁구름들 뿔뿔이 흩어져 제 집 돌아간다
성근 빗 낱에 씻긴
먼 산 뒤통수
환한 쪽빛 속에 둥글둥글 돌출했구나
마음 밖인가 마음 안인가
내 가고 난 뒤 여느 때 역시 저와 같으리
독실한 천주교인인 김형영(金炯榮1945 ~ 2021)은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나왔으며 1966 <문학춘추> 지를 통해 등단했다. 월간 <샘터>에서 수십년 일했다. 골수이식을 한 경험으로 그의 시는 죽음을 등에 짊어지고 사는 사람처럼 인생에 대한 관조와 성찰이 깃들어 있다.
나
김형영
나 같은 것
나 같은 것
밤새 원망을 해도
나를 아는 사람 나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나를 온전히 안다면 이미 부처다. 온전히 안다는 것은 단박에 통째로 아는 것이리라. 그런데 중생은 학위가 주르르하게 공부를 많이 하나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까막눈이나 매한가지다. 온갖 내면과 외면 세계를 주무르고 갖고 노는 시인이거나 철학자나 사상가, 과학자건 정치가건 재력가건 큰 상관없이, 자신이 본래부터 부처인 줄을 모르고 급하면 그저 무턱대고 구원만 받으려 빌고 또 빌거나 욕심, 성냄, 어리석음에 끄달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언제까지나 뱅뱅 맴돈다고 한다.
이런 중생들의 어둠을 깨치는 데는 일반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스님의 한 마디가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아래 게송과 같은 시는 부산의 어느 지하철역 벽에 걸려 있다는 범일(梵日1957 ~) 스님의 말씀이다. 부산 운수사 주지이며 수필집 두 권이 있단다. 학교는 다니셨는지, 속명과 고향은 어찌 되시는지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부질없는 일인 것 같다.
모난돌
범일 스님
모난 돌이 바다로 가려면
모난 곳이 다 닳아서
둥글어져야 한답니다.
누군가의 흉허물이 보이십니까?
아직 바다는 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