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법문 >
무 아
글/ 원공스님
한 사람이 부처님께서는 ‘무아’를 말씀하셨는데 ‘주인공을 믿으라.’는 한마음 선원의 가르침은 힌두교의 아트만과 같은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했다. ‘주인공’이라는 이름과 힌두교의 ‘아트만’ 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가 같다는 것이다. ‘아트만’은 ‘진아(참나)’로 번역한다.그러나 선불교에서도 여러가지 명칭과 함께 ‘주인공’을 사용한다. 다른 점은 대행스님께서는 ‘빌 공(空)’자를 썼다는 것이다.’공’은 고정됨이 없고 비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선불교에서는 ‘주인공(主人公)’에 사람을 존칭하는 ‘공’자를 쓰지만 본뜻은 비었다는 ‘공’ 이다.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는 수행법과 사용한 용어를 바르게 알려면 그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마음 선원의 ‘주인공’을 관하는 수행방편은 ‘믿음’과’놓아버림’그리고’나툼(활용)’이 핵심이다. 이것은 유식의 가르침과 비교하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깨닫지 못한 중생은 오온(몸과 정신작용)을 ‘나’로 아는7식(나라는생각)이 주인이 되어서 6식과 전5식(안 이 비 설 신 의)을 굴리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행위는 업식이되어 8식에 저장되고 그 업식이 중생의 삶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모든 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온의 거짓 나’가 주인이되는 삶에서 ‘부처로서의 나’가 주인이 되는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은 ‘부처로서의 나’로 살아갈 수 있지만 분별심으로 살아가는 중생은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방편으로 ‘부처로서의 그것’에 ‘주인공’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8식 너머의 ‘열반 묘심’이라 할 수 있는 근본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 이름을 방편으로 붙들고 수행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을 믿느다는 것은 아상을 놓아버린다는 것이다. ‘오온의 나’는 대상을 분별하고 집착하지만, 주인공을 믿는 것은 모든 분별과 집착을 놓아버리는 것을 의미 한다. 놓아버리면 업식이 녹는다. 아상이 사라진다. 그리고 반야의 지혜가 나타난다. 반야의 공덕이 나투어진다. 그것은 관세음보살이 32응신을 나투고,부처님이 천백억 화신을 나투는 것과 같은 원리이며,다만 그 지혜와 자재함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 한다.
수행은 모든 분별과 집착을 놓아버리는 것이 요체이다. 비워지는 만큼 반야의 지혜는 밝아지고 나툼의 역량은 커지는 것이다. 자성(열반묘심)은 모습이 없고 움직이지 않으며 온갖 공덕을 갖추고 있으나, 중생의 삶은 무명 업식에의해 나투어진다. 그래서 본래 갖추어져있는 공덕을 현상세계에 나투는 지혜를 밝혀가는 것이 우리의 수행이다. 그러므로 법신불은 허공같은 초월적 본체이며, 아미타불은 모든 공덕을 밝힌 보신불이고, 석가모니불은 보신의 공덕을 갖추고 몸을 받아 태어난 화신불이다. 우리는 공덕을 밝혀가는 과정에 있는 미완의 화신불이라 할 수 있다. 공덕을 키워가는 것은 분별하는 생각을 쉬고 업식을 녹이며 반야를 구하는 것이다. 반야를 구하는 것은 생각에 빠지지 않는 지금 여기 찰라의 삶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분별하는 생각을 쉬는 것과 찰라의 삶을 사는 것은 ‘나라는 생각’이 사라질 때에 이루어진다.
‘무아’가 불법의 중요한 가르침이지만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는 것과 거리가 먼 이론은 오히려 아상을 키우는 소재가 될 수 있다. 대행스님께서는 “미리 알면 오히려 더디다. 중학생이 대학원 공부를 미리 알 필요는 없다. 중학생 공부를 착실하게 하다 보면 고등학교에서 배울 것이 스스로 알아지게 되어있다.” 하셨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습니까? 질문하는 제자에게 “잘할려고 하지도 말고 뒤로 물러서지도 말고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진실하게 하면된다.”고 스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지금 여기에서 진실한 삶을 살아가면 진리가 삶을 통해서 수행자를 인도한다고 한다.
‘무아’에 대해서는 깊은 교리 보다는 수행의 실천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무아’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하니 이런 저런 다양한 가르침들이 눈에 들어온다. ‘무아’에 대한 가장 존중받는 가르침은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실제 수행 과정에 중요한 것은 ‘놓아버림’의 실천을 통해서 ‘아상’을 죽이는 것이다. 현묘한 가르침이라도 분별심을 일으키면 집착하면 수행에 장애가 된다.
‘무아’ 는 삼법인에서 존재의 세 가지 성격으로 설해진다.무상 무아 고(열반) 이다. 모든 존재는 항상 변하고,고정된 실체가 없고,이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고이다. 그리고 고에서 벗어난 존재 본연의 상태를 열반이라 한다. “금강경은 ‘공’의 지혜로 체를 삼고 ‘일체법 무아’의 이치를 설한다.”고 한다. 금강경은 ‘무아’의 바른 가르침이다.
금강경 제17 구경 무아분에 “일체 중생을 멸도하게 하되 한 중생도 멸도를 얻은자가 없다.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하였고,”무아법을 통달한자는 여래가 이름을 참으로 보살이라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무아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는 것이다.즉, 중생을 제도하되 내가 제도한다는 생각이 없어야 하고, 중생이 멸도를 얻었다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실상인 무상 ( 인연에 의해서 생멸하는 현상-공)을 보지 못하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법상 비법상의 모든 생각을 일으켜 집착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오온이 공함을 비춰 보고 모든 괴로움을 건넌다는 뜻이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이니 몸과 정신 작용 이다. 몸은 지수화풍의 인연이 모여서 이루어졌고 끊임없이 변하는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비었다 하는 것이다. 비었다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실체가 없는 것을 ‘무아’라 한다. 정신작용인 수상행식도 그와 같다. 모든 존재가 본래 그대로 무아이다. 그런데 7식의 작용으로 몸과 정신작용을 ‘나’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면 존재의 실상을 보지 못한다.그러므로 무아는 ‘아상’이 없는 것이다.
‘무아’의 가르침은 ‘아상’을 놓아버리는 수행을 통해서 ‘나의 실체(열반묘심)’를 깨닫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불성은 아트만(참나)이어서 지금의 불법이 길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심오한 말이 오히려 분별의 미로에 빠지게 하는것 같다. 한 인도 성자는 수행의 방법으로 ‘나’라는 생각을 붙들라고 했다. 그러면 ‘나’라는 생각이 사라진 전지전능한 순수의식 (아마도 8식을 말하는 듯함)의 상태가 된다. 대부분의 깨달은 사람들의 경지가 이 것이다. 이 경지에는 수행할 ‘나’가 없어서 수행을 한다는 것이 사라진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다.그리고 스스로 열반에 들게 된다고 깨달음의 과정을 설명했다. 대행스님께서는 하나를 붙들고 가다보면 무심이되고 무심마저 넘어가 깨닫게 된다 하셨다. 또,깨달음에도 나의 성품을 깨닫는 것이 있고, 전체와 둘이 아니게 깨닫는 것이 있고, 전체와 둘이 아니게 나투는 것이 있다. 또,나에서 벗어나야 하고, 지구에서 벗어나야하고, 삼천대천세계에서 벗어나 모두가 나 아님이 없어야 온 우주 법계에 둘이 아니게 자재로이 나툴 수 있다고 하셨다. 깨달음의 길은 끝이 없는 길이라 한다. 우리가 처음부터 궁극의 진리를 알 수는 없다. 자기 앞의 방편의 길을 걸으면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무아’의 생활 속의 실천으로 대행스님께서는 “ 모든 것을 내탓으로 보라. 나와 남을 평등하게 보라.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나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온우주와 함께하는 한마음이다. 나 하나를 버리면 모든 것이 쉬게 된다.”같은 가르침을 주셨다.
무아와 아트만의 비교를 위해 불교와 한 인도 성자의 가르침을 살펴본다. 불교에서 마음의 본체는 모습없고 움직이지 않는다. 대행 스님께서는 ‘수레 바퀴의 축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힘만 배출한다’고 표현하셨다. 8식은 생사가 없는 전체의식이며 우주 만물만생이 하나이다. 근본 무명이다(성철스님). 업식이 저장된다. 7식은 생사가 있고 둘로 나누고 업식을 일으키는 ‘나라는 생각‘이다. 6식은 분별하여 생각한다. 전5식은 대상을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이다. 업식과 7식에 의해서 5식 6식은 오염되어 왜곡된다. 그래서 수행은 ‘아상’을 버리는 것이고 업식을 비우는 것이다. 그러면 존재의 진리는 스스로 드러난다. 8식은 대원경지, 7식은 평등성지, 6식은 묘관찰지, 전5식은 성소작지가 된다고 한다. 모든 것이 한마음의 나툼이고 진리 아닌 것이 없지만 무명에서 일어나는 ‘나라는 생각’이 분리의 환상을 일으키고 모든 분별 망상을 일으켜서 ‘무아’의 진리에서 멀어지게 한다. 수행의 근본이 ‘놓아버림’인 것이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20세기 인도의 한 성자는 진아( the Self)를 이렇게 말했다.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인식이 사라질 때 진아를 깨달을 수 있다. 마음이 사라지면 현상계도 사라진다.”현상계는 반야심경의 오온이다. 오온이 공할 때 무아를 깨달아 고를 건넌다. 그러므로 진아(Self)는 무아이다. 여기서 마음은 ‘나라는 생각’과 분별하는 생각 이라고 한다. 아상과 업식의 작용이다. 나라는 마음이 사라질 때에 현상계가 사라지고 참나를 깨닫는다는 이 가르침은, 7식이 쉴 때에 8식이 대원경지로 되는 불교의 깨달음에 비교 된다.
근본 무명의 관점에서 이 성자의 가르침을 유식과 비교해 본다. ”하나의 지고의 존재는 마음을 매체로 하여 다양한 세계로 나타난다. 하나는 어둠(근본 무지)를 통과 한다. 그 빛을 반사된 빛이라 한다. 첫번째 빛은 순수한 마음,이스와라-전지전능한 창조주-이다. 두번째 반사된 빛은 에고이다. 세 번째 빛은 몸,세계로 나타난다.” 다시 정리하면 초월적 하나, 창조의식(첫 번째 반사된 빛), 에고의식, 몸의 기관과 세계로 나타나는 의식이며, 불교 유식의 불성, 8식 (근본 무명), 7식, 6식,5식과 대비가 된다.
성자는 진아(the Self)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아트만’은 ‘브라만’의 진아적 표현이라 한다. 즉, 전체적 진리의 개별적 측면을 가리키는 말이다.법성게의 ‘일즉다 다즉일’과 상응하는 가르침이다. 초월적 절대 세계(법신불.브라만)가 현상세계로 나투어질 때는 중간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가르침들이 있다. 아트만은 그 중간자이며, 개체적 존재의 깨달은 마음이다. ’불성’도 ‘참나’ 의 관점으로 보면 중간자이다. 그래서 불성은 무아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이론이 있다. 그러나 중간자는 본체와 현상이 ‘둘이 아닌’ ‘공’으로, 불교의 보신불(공덕신)이 대비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가르침에서 그리스도 의식을 중간자로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의GOD Father는 초월적인 모습없는 실체이며, 아버지가 세상을 나툴 때는 아들을 통해서 나툰다. 아들은 아버지와 현상세계의 중간자 역할을 하는 전지전능한 창조의식이며, 모든 존재의 근본이 되는 의식으로 그리스도 의식이라 한다. 대행선사께서는 주인공이라는 이름을 교차로라고 설명하셨다. 모습없는 한마음이 현상세계로 나투어지는 교차로이다. 나의 뿌리이면서 동시에 전체의 한마음이다. 초월적 실체와 현상 세계를 둘이 아니게 거머쥔 깨달은 마음이 주인공이다.
그리고 관념적 이해를 위해서 나누는 것이지, 실재는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어서 모습없는 근본과 현상세계가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 것을 주인공이라 하셨다. 스님께서는 주인공을 이렇게도 표현하셨다.” 형상을 보고 방황치 말고 체 없는 마음에 소공과 대공, 부처 마음 내 마음 한데 합친 심주 주인공한테서 각자 소원 이루는 것은 내 마음씀에 달려 있노라.” 실제 수행에서 본다면,나라는 생각과 분별하는 생각이 쉬어진 고요하고 맑은 자각의 상태, 곧 성성적적의 무심이 중간자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방에서의 정진은 좌선을 통한 무아의 길로, 하루종일 수행방편 하나에 일념이 되려는 노력이다. 망상이 들면 화두를 챙기고 졸음이 오면 정신을 차려서 다시 화두를 잡고 정진한다. 다르게 말하면 나라는 생각과 분별심 그리고 잠에 빠지지 않는 싸움이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수행하는 것도 근본 원리는 같다. 그런데 생활에 매이고 업식에 빠지기 때문에 한결같이 실천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생활 속 무아의 길은 바른 삶에 대한 경전의 가르침에 비추어 우리의 행위를 반성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마음에 수행하는 나가 있고 바르고 그른 분별이 있어도 그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독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무아라는 말에 집착하여 선지식의 자비 방편의 가르침을 비난하며 다른 종교의 가르침을 섯부르게 비판하는 것은 오히려 무아에서 멀어지는 일이라 생각한다.
결론으로, 모든 존재는 그대로 무아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무명 때문이고, 무명에의해서 일체의 고가 일어난다. 무명은 아상으로 나타나고 아상이 사라지면 무아의 실상을 본다. 아상은 분별심의 뿌리이니 분별하는 공부 보다는 아상을 죽이는 수행과 생활 속의 실천으로 돌아가야 한다.이를테면, 모든 존재의 아픔을 나의 아픔과 같이 생각하고 상대의 처지에서 이해하고 사랑하기를 작은 것 부터 실천하고 반성하면서 지혜와 자비를 닦아가는 것이다.
원공스님은 1990년 미국에 입국한 이후 뉴욕 한마음선원에서 수행과 포교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