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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2021년 9,10월호] 두려움은 사랑의 부재 - 심연에 감춰진 두려움을 만나다 / 스텔라 박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1.10.06|조회수104 목록 댓글 0

 

< 스텔라의 마음공부 >

 

 

 

 

두려움은 사랑의 부재
심연에 감춰진 두려움을 만나다

 


글 | 스텔라 박

 

“매일 매일 약간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삶
의 비밀을 배우지 못한 것과 같다.”
- 랄프 왈도 에머슨


"나는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임을 깨달았다.
용감한 인간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이다."
-넬슨 만델라

 

 

 

序詩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심보선, 류근, 허연… 붓을 꺾고 싶게 만드는 시인이 너무 많다. 그런 면에서 윤동주는 과대평가되었다는 판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서시’는 나의 고백이자, 너의 고백이요, 우리 모두의 고백이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당당하기를….그리하여 죽어서도 염라대왕으로부터 “참 잘 사셨네요. 흠 잡을 데 없이. 고결하고 깨끗한 삶이었습니다. 자, 도솔촌 입장권이 여기 있습니다. 아, 혹시 안 태어나기를 원하시나요? 그렇게 해드리죠” 라는 말을 듣고 싶었나보다. 

우습게도 나는 내가 상당히 깨끗하게 살아온 것으로 알았다. 물론 때로 거짓말도 했지만 모두 이유가 있는 하얀 거짓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수행이 깊어감에 따라 내 모습, 아니 내 꼬라지를 있는 그대로 여실히 보기 시작하자 어디 쥐구멍이라고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는 표현이 있는데 밥 먹는 정도로만 거짓말을 한다면 이건 성인의 경지란다. 하루에 세 번밖에 안 한다는 얘기이니까. 

그냥 스쳐지나가던, 알아차림 없이 흘러간 무명(Ignorance)의 기억들에 밝은 빛을 쪼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나의 거짓말에 기가 막혀왔다. 내 의식 내에 감지된 거짓말을 알아차리고, 다음 번부터 그렇지 않도록 깨어 있다가도 또 더욱 미묘한, 세밀한, 거짓말 아닌 것 같은 거짓말도 있음을 날이 갈수록 깨닫게 됐다. 그리고 이러한 알아차림의 확대는 이 수행자를 잠깐씩 좌절시켰다.  

인류 기원의 경에 보면 인류 타락의 역사가 쓰여 있다. 선법계에 살던 인간이 가장 먼저 타락한 것은 저장이 용이해진 이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었고, 그후 살생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시작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보면,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야훼가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묻자 카인이 “나는 모릅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거짓 대답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만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다. 축생은 존재 자체가 거짓이다. 비록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몸 자체, 행위 자체가 온통 거짓말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과 똑같은 보호색을 띄는 것도 일종의 위장, 즉 거짓이다. 유튜브에 보면  강아지 고양이가 주인의 고기와 생선을 훔쳐 먹고 안 먹은 척 하는 동영상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축생들은 단지 생존하기 위해 온 몸으로 거짓을 행한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인간은 언어를 이용해서 거짓말을 하기도 하지만 싫으면서도 좋은 척, 화가 났는데도 안 난 척, 표정으로도 거짓말을 한다. 뚱뚱한데 날씬해 보이도록 옷을 입는 것, 늙고도 젊어보이게 화장하는 것 역시 속이는 것이다. 속으로는 아까워죽겠으면서도 욕 먹을까봐 밥을 사고,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기부금을 내는 것도 거짓이다. 그렇고 보니 정말 인간계는 거짓 투성이이다. 한 스님은 우리가 축생 때 하던 카르마가 몸에 배어 이렇게도 거짓 투성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루 종일 자신이 하는 말을 모두 녹음해서 들어보면 기가 찰 것이다. 숨김, 과장, 포장… 거짓말을 하나도 섞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통계에 따르면 정직하다는 사람들도 5퍼센트 정도는 알아차리지도 못하면서 거짓말을 한다니까. 

인간은 왜 거짓말을 할까. 물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아, 나는 남들을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하얀 거짓말을 했는데…” 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대단히 미안한데, 그것 역시 내가 남들의 감정까지 조정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다. 또 인간은 남들 사이를 이간하기 위해서도 거짓말을 한다. 이처럼 거짓말을 하고서도 자신이 한 거짓말은 금방 잊어버리고 남의 거짓말은 오래 기억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인간의 거짓말 가운데 가장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이 “나는 돈 욕심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속은 우리들은 이 거짓말을 하면서도 거짓말인지를 모른다. 이 돈이 아까워서, 이 돈을 두고 어떻게 천상계에 갈 수 있단 말인가. 
 
욕계천상계의 천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궁핍함이 없고 모든 것이 풍요로워 축적할 이유가 없어서이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끊임 없이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을 진실처럼 포장하기 위해 논리와 감정에도 호소하면서 거짓말을 한다.  

하루 있었던 주요한 일들을 패스트포워드 시켜가며 다시 돌아보던 나는 나의 거짓말과 거짓 마음을 만났다. 내 눈 속에 대들보가 있으니 그것부터 해결해야지, 남의 눈의 작은 티끌을 탓해서 무엇할까. 거짓말의 밑바탕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결국 내가 원하는 바대로 조종하려는 욕심이 출발점이었다. 

그렇다면 왜 나는 조정하려 하는가. 해체해 들어가던 나는 결국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두려움을 만난다.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주변 사람들이 나를 떠나갈 것이라는 두려움, 가진 게 뭐가 있다고 가진 것을 모두 잃으리라는 두려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리라는 두려움…. 이 모든 두려움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결국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럴 때, 나는 다시금 사성제와 팔정도의 회로를 돌린다. 모든 것이 변한다. 변하는 것은 고통이다. 그러니 내 것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알라. 내 것 아닌 것을 내가 바꾸려 할 필요가 있는가? 없다. 그러니 그냥 내려놓으라. 오직 꿈일 뿐이다. 

나는 나의 두려움을 만난다. 나는 나의 두려움을 그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고, 나의 가장 상처받기 쉬운 지점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있는 그대로 고요히 그 상처라고 믿었던 것을 관찰한다. 그것은 참인가? 실재하는가? 아니다. 오직 마음 속에 잠깐 형성된 것이다. 형성된 모든 것은 소멸한다. 오직 인연 따라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공하다. 공한 것을 붙들고 괴로워하는 것이 합당한가? 아니다. 


‘나’라는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또한 나라고 믿는 대상에게 주었던 크레딧, 핸디를 거둬들이고 무명 4, 또는 행인 3의 아이덴티티를 주고 객관적으로 관찰해본다. 그러는 과정에 “아, 내게 그런 두려움이 있었구나.” 라고 좀더 떨어져서 보게 된다. 내 두려움이라 여기면 버거워 그것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지만, 행인 3의 두려움이니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니고 행인 3이기에 어쩌면 더욱 연민이 간다. 평소 해왔던 메따(자애) 수행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운전하며 지나가는 길에, 무거운 마켓 봉지를 들고 지나가는 히스패닉 여인네를 볼 때 “당신이 행복하기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당신의 삶이 편안하기를…”이라고 바래줬던 것처럼. 무거운 이삿짐을 용을 쓰며 들던 노동자를 보며, 앞으로의 그의 삶이 조금 편안해지기를 기도했던 것처럼, 행인 3(결국 나)에게도 “당신이 행복하기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당신의 삶이 편안하기를…”이라고 기도해준다. 


두려움을 직면하는 자가 전사(Warrior)

그리고 큰 마음을 낸다. “괜찮아….” 지금 현재의 나, 헛점 투성이의 나를 낱낱히 알고 있으면서, 그 아픔과 상처, 그 두려움을 속속들이 알면서도 판단하지 않는 자가 나였다. 두려움에 가득찬 행인 3으로 인해 잠자고 있던 거인이, 전사(Warrior)가, 큰 사랑이, 예수의 마음이, 보살의 마음이 깨어난 것이다.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퍼진다. 희열은 몸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 또한 무상한 감각일 뿐이다. 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띠한다. 

결국 두려움 많은 나를 연하여, 그 헛점 투성이의 존재를 껴안는 큰 내가 깨어난다. 이 둘은 다른가. 아니다. 아, 나의 고통이, 나의 두려움이 클수록 그로 인하여 그 고통을 모두 껴안는 무언가가 깨어나는구나. 고통은, 두려움은, 연약함은, 유난스러움은, 잘못 태어난 존재라고 여기는 마음(Feeling of misfit)은 결국  나를 만나기 위한 장치였구나. 

두려움이란 단지 사랑의 부재일 뿐이다. 피하지 않고 바라보면 두려움이라는 허상은 사라진다.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조정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나는 인간계에 발 담그고 있으면서도 천상계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됐다. 

 

두려움에 질린 소녀 - Photo Credit, D Sharon Pruitt

 


모두가 사랑, 모든 것에 감사 

그러니 그 두려움을 사랑하라. 그 결핍을 사랑하라. 그것 없인 못산다고 입 쪽쪽 맞추고 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진정 사랑이란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며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하지 않고, 언제까지라도 봐주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진정한 사랑을 연습했더니 더 이상 행복을 언급하지 않게 됐다. 행복을 언급하지 않는 상태가 진정한 행복이다. 이 상태가 영원히 계속 되어도 좋다. 

이 삶을 사랑한다. 이 삶을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고 가만히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삶에 나타난 모든 이들은 나로 하여금 지금 현재의 삶이 곧 열반임을 깨닫게 도와준 보살의 현현이다. 그러니 늘 감사한다. 존중한다. 그리고 축복한다. 

지금 이 상황 역시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드라의 망이다. 우주가 이렇게 움직여주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 꽃이 피어남을 감사하고 꽃이 떨어져 지는 것을 감사한다.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
                                                   디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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