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루나 칼럼 >
사무침의 시 . 설 렘의 노래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남한이 경제적으로 북한을 따라잡은 것은 70년대 초였다. 6·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 그만큼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척 난장판이었다. 1960년에 4·19 혁명이 터지고 그 이듬해에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어진 세월, 그 어지러움과 어려움 속에서도 이 나라의 시인들은 희망과 절망, 관조와 격정을 노래하며 방방곡곡에서 움터 올랐다. 그러고는 아픈 상처와 갖가지 사연의 셀 수 없는 말꽃을 흐드러지게 피우다 이윽고 하나하나 낙엽으로 물들이며 아름답게, 그리고 애글피 흩어져 갔거나 아직은 여느 위대한 인생처럼 바람 부는 가지 끝에서도 화려한 가을을 장엄하고 있다. 이에 이제 우리는 대략 40년대에서 50년대에 태어나 60년대 후반 내지 70년대에 걸쳐 문단에 나온 이들의 작품 가운데 주로 불교적인 정서와도 통하는 시들을 훑어보고자 한다. 물론 이것들 모두가 불자의 써냄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내 나름의 즐김과, 어쩌다 눈길에 띈 우연으로 여기에 추려졌음을 일러둔다.
먼저 ‘백제의 시인’ 문효치(1943~)가 있다.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학과를 나왔다. 대대로 만석꾼 집안이었으나 일제와 6·25를 겪으며 가세가 기운데다 아버지가 월북하는 바람에 중년이 될 때까지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괴롭고 외롭게 살아났다. 대학생 때 ‘신라의 시인’이라는 미당 서정주를 만나 시를 배우며 자신은 잊힌 나라 ‘백제’의 시인이 되기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1966년 신춘문예 두 군데에 동시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들꽃
문효치
누가 보거나 말거나
피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지네
한마디 말도 없이
피네 지네
때 되면 피고 때 되면 지는 것, 이것이 도(道)이고 법(法)이며 진리인가 보다. 이렇게 들꽃처럼 ‘자연스럽게 살자’는 문효치에 비해 아무 데나 불쑥 잘 나타나는 ‘도깨비 시인’ 박제천(1944~)은 서울에서 태어나 성동고를 나왔다. 열한 명 남매의 막내인데 여덟 명이 살아남았다. 동국대 국문과에 들어갔으나 군대를 마치고 복학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서울과 앓아 누운 아버지, 그리고 살려고 누이와 미제 물건 장사를 하는 어머니로 인해 감수성에 상처를 입었다. 그 아버지를 국민학생 때 여의면서 남겨진 많지 않은 유산이 형제들에게 묶이었지만 그래도 그가 주로 문학책만 사다가 읽을 수는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학생 때부터 습작을 하여 30여 년 동안 거의 1,000 편의 시를 쓴다.
월명(月明)
박제천
한 그루 나무의 수백가지에 매달린 수만의 나뭇잎들이 모두 나무를 떠나간다
수만의 나뭇잎들이 떠나가는 그 길을 나도 한 줄기 바람으로 따라나선다
때에 절은 말의 무게 허욕에 부풀은 마음의 무게로 뒤처져서 허둥거린다
앞장서서 나뭇잎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쩌다 웅덩이에 처박힌 나뭇잎 하나 달을 싣고 있다
에라 어차피 놓친 길 잡초더미도 기웃거리고 슬그머니 웅덩이도 흔들어 놀밖에
죽음 또한 별것인가 서로 가는 길을 모를 밖에
생태 환경시의 대가 이건청(李健淸1942 ~)은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한양대 국문과를 나왔다. 김소월·정지용·박목월로 이어지는 한국 서정시의 줄기를 이으면서 서정의 너비와 깊이를 보탰다. 그리고 80년대 한국 생태환경시 운동에 참여, 생태환경의 문제를 잇달아 꺼내 놓았다. 또한 세계적 주요 문화유산인 울산 대곡천 암각화의 값어치와 보존 필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조직된 민간단체인 반구대 포럼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였다.
산
이건청
산이 나를 막아선다
맨몸으로 오라고
짐승 되어 오라고
밀어내고 넘어뜨린다
기어서 기어서
벼랑에 다가서도
짐승이 아닌 나를 한사코
벼랑에서 밀어낸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윤후명(尹厚明, 尹尙奎1946 ~)은 강원도 강릉생으로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가 당선되었고1979년에는 신춘문예에 소설 <산역(山役)〉이 당선되었다. 1980년에 전업 작가로 나서며 소설을 썼는데 그의 작품성은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과는 다른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현실의 무게에 곧바로 짓눌리지 않고 시적인 문체와 독특한 서술방식을 구사하여 환상과 주술의 세계를 자유롭게 날아오름으로써 80년대의 시대적 짐스러움에서 그런 대로 홀가분한 문학적 발걸음을 보였다.
고향
윤후명
언젠가는 가려고 했던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서 떠돌다가
젊어서도 늙어 있었고
늙어서도 젊어 있었습니다
무지개가 사라진 곳에 있다고도,
사랑이 다한 곳에 있다고도,
슬픔이 묻힌 곳에 있다고도,
짐짓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인지 그곳은 끝끝내 멀고 아득하여
세상 길 어디론가 헤매어갑니다
꽃 한 송이 필 때마다 그곳인가 하여
영원히 머물면서 말입니다
전남 순천에서 가난한 마부의 아들로 태어난 서정춘(1941~ )은 어릴 때부터 신문 배달, 군청 급사, 서점 점원, 신문 수금사원 등을 하며 고향의 매산고등학교 야간부를 졸업했다. 신문 배달을 하다가 우연히 집어든 영랑과 소월의 시집을 밤새 베껴 쓰며 독학으로 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시가 그렇게 좋은 것인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시를 읽으면 현실의 고통이 말끔히 사라졌다’고 한다. 중3 때, 아버지의 친구들이었던 빨치산 ‘외팔이 장씨’의 서가에서 80년대 후반에야 해금된 정지용·백석·이용악·오장환의 시를 미리 다 읽었고, 동경 제대 출신 조율사 ‘삐아노 최씨’에게서 정식 시인으로 인정받고 막걸리 상을 마주한 것이 고등학생 때였다. 이같이 독학을 하다 보니 시를 너무 높은 경지에 올려놓았는지 시에 대한 결벽증이 생겼다. 1968년에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는데 일평생 과작으로 등단한 지 스물여덟 해가 지난 1996년에야 35편을 모아 첫 시집 <죽편>이 나왔다. 그의 시는 선불교의 언어처럼 짧으며 말을 엄청 아낀다.
30년전-1959년 겨울
서정춘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이성선(李聖善 1941 ~ 2001)은 강원도 고성의 부농 집안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1·4 후퇴 때 아버지가 월북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속초에서 초·중·고를 마치고 고려대 농대 졸업 후 수원 농촌진흥청 작물시험반에 들어가 콩을 연구하며 지냈다. 문학동인 ‘설악문우회’를 결성해 활동하다가1970년 ≪문화비평≫에 <시인의 병풍>외 4편으로 등단했다. 오랜 시작 기간 동안 비교적 고르고 일관되게 우주와 자연을 노래하였다.
고요하다
이성선
나뭇잎을 갉아먹던
벌레가
가지에 걸린 달도
잎으로 잘못 알고
물었다
세상이 고요하다
달 속의 벌레만 고개를 돌린다
김영석(何人 1945 ~)은 전북 부안 태생이다. 전주북중과 전주고를 졸업한 뒤 경희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고2 때 휴학을 결행하고 변산반도 마포 앞바다에 있는 하도(荷島)라는 작은 섬에 들어가서 문학서적과 인문과학서적을 본격적으로 접하면서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1970년 신춘문예에 시 <방화>로 등단하였다. 출판사와 중·고등학교 교사를 전전하며 다른 사업에 손을 대다가 사는 집까지 다 날리고 거덜난 뒤에 교단이 자신의 길임을 깨닫고 경희대에서 시간강사가 되었다. 그 후 배재대 국문과 조교수가 되었으며 차츰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평론가의 반열에 오른다. 그의 시는 정확한 조사와 강인한 시정신으로 읽는 자를 압도한다는 평이다. 사물을 보이는 모습이 아닌 관념과 철학의 본질로 해석하는 ‘관상시(觀象詩)’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으며 서양적 시각이 아닌 한국적 정서, 아시아적 시각에서 시를 써야 한다는 문학이론을 확립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썩지 않는 슬픔
김영석
멍들거나
피흘리는 아픔은
이내 삭은 거름이 되어
단단한 삶의 옹이를 만들지만
슬픔은 결코 썩지 않는다
옛 고향집 뒤란
살구나무 밑에
썩지 않고 묻혀 있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흰 고무신처럼
그것은
어두운 마음 어느 구석에
초승달로 걸려
오래 오래 흐린 빛을 뿌린다
‘못[釘]의 시인’ 김종철(金鐘鐵 1947 ~ 2014)은 부산 출신으로, 중·고등학생 때부터 지역 백일장을 휩쓴 ‘학생 문사’로 이름을 떨쳤다. 1968년 서라벌예술대 문창과 재학 중이던 스물한 살 때 신춘문예에 시 <재봉>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경희대 겸임 교수를 역임했다. 천주교인이다. 도시문명 속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에 눈길을 주며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아름다운 시어로 다듬어 감동을 주었다.
오도송
김종철
세상과 더불어 사는 것이
사람뿐인 줄 알았더니
오십줄에, 줄에 걸려 넘어지면서
나는 깨달았네
사람 눈에 사람 마음만 보고
사람 생각과 행동이
더욱 사람 되길 바랐더니
죽어서도 사람인 양
사람의 저승길만 찾을 게 뻔해
오십줄에 줄줄이 길을 묻게끔
오늘도 오도송 한 줄로 빗금질 치네
조정권(趙鼎權, 1949 ~ 2017)은 서울에서 태어나 양정고와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나왔으며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 문예창작과 교수를 지냈다. 1970년 《현대문학》지에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그의 시는 정신주의적 맑음과 깨끗함이 있으며 대표작으로 <산정묘지>와 <신성한 숲> 이 있다.
시냇달
조정권
밤 시냇물에서 만졌다
동치미 같은
겨울 달
양평해장국집에서
주인은 카드 대신
달만 받는다
정희성(鄭喜成 1945 ~ )은 경남 창원 태생으로 용산고와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숭문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했다. 1970년 신춘문예에 시 〈변신〉으로 등단한 이후 40여 년 동안 시집을 다섯 권 밖에 내지 않은 과작 시인이다. 시대의 모순과 그 속에서 핍박받는 사람들의 슬픔에 관해 시를 써 왔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 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일생을 살다 간 ‘창동 허새비[허수아비]’ 이선관(李善寬 1942-2005)은 생후 얼마 안 돼 백일해 치료약을 잘못 먹고 뇌성마비가 되었다. 1960년 창신고 3학년 때 마산 3·15의거 시위에 참여했으며 1971년, 《씨알의 소리》에 박정희 독재를 비판하는 시 <애국자>와 <헌법 제1조>를 발표했다. 1975년, 마산 수출자유지역과 창원공단 개발로 인한 마산 앞바다의 오염을 고발한 <독수대>는 한국 최초의 환경시로 꼽히며 이로 인해 ‘조국근대화를 저해하는 인물’로 찍혀 중앙정보부에 시집을 회수당하고 잡혀가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 밖에 <체르노빌>연작시 등 시대를 앞서간 문제작들을 써냈다.
독수대(毒水帶) 1
이선관
바다에서
둔탁한 소리가 난다
이따이 이따이
설익은 과일은
우박처럼 떨어져 내린다
이따이 이따이
새벽잠을 설친 시민들의
눈꺼풀은 아직 열리지 않는다
이따이 이따이
비에 젖은 현수막은
바람을 마시며 춤춘다
이따이 이따이
아아
바다의 유언
이따이 이따이
‘풀꽃 시인’ 나태주(羅泰株 1945 ~)는 충남 서천 출생이다. 서천중, 공주사범을 졸업하여 초등학교 교사로 지냈으며 2007년,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하였다. 1971년, 시〈대숲 아래서〉로 등단하였다. 그의 시는 쉽고 간결한 게 특징이다. 한눈에 들어오면서도 뜻을 곱씹어 보게 만든다.
풀꽃 1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경남 거창생으로 부산 남성여고와 숙대 국문과를 나온 신달자(慎達子 1943 ~)는 1972년에 등단했다.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무식해서 이름자도 쓰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아랫동서는 대구 경북여고를 나온 재원이었다. 동서의 거울 옆에는 세일러복을 입은 여고생의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사진 보기를 괴로워했다. 그러나 딸들에게 작은집 심부름을 시킬 때는 갈망을 가지라고 꼭 그 사진을 보고 오라고 했다. 어머니의 성공 모델은 이 작은 동서였다. 학력, 인물, 인품…. 그리고 큰며느리였던 어머니는 딸 여섯에 아들 하나인데 그 쪽은 아들 여섯에 딸 하나, 이것마저 천양지차였다. 게다가 시동생은 국회의원까지 했으니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높이라, 그래서 어머니는 자신의 딸 중에 동서보다 높은 딸을 만들기로 일생일대의 목표를 세웠다.
어머니는 전쟁의 상흔이 다 가시기도 전에 셋째 딸을 산골 마을에서 마산여고로 보냈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지만 다시 넷째 딸을 마산여고로 보냈는데 그 딸들은 졸업하고 모두 시집만 가 버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포기 않고 마산은 터가 나쁘다면서 다섯째 딸을 부산으로 보냈다. 부산으로 가는 차부에서 어머니는 당부했다.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돈도 벌어라. 여자로서 행복해라.’
그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서울에 올라와 대학 조교가 되고 일찍이 촉망받는 시인이 되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후의 일생은 가정사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고난의 연속이었다. 후년에 천주교를 믿으며 비로소 정신적 안정을 찾긴 했지만. 그가 서른다섯 살 때 교수였던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그 충격으로 친정어머니는 몇 달 후 눈을 감았다. 한 달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남편은 반신불수가 되었고 수발은 24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가정의 수입은 남편의 약값이나 세 아이의 과자 값도 안 되어 양복 기지를 파는 보따리장수에 나섰다. 그럭저럭 정신을 차릴 즈음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쓰러져 꼬박 9년을 앉은뱅이로 살다 나이 아흔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곤 자신에게 찾아온 유방암을 이겨내야 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온 가족 집단자살’을 생각하고 남편의 심장을 쏘기 위해 무성 권총까지 구하려고 했으며 또한 시어머니를 너무 미워한 죄로 여름에 우레가 치면 벼락맞을까봐 밖에를 못 나갔단다.
홀로 남아 시를 쓰는 그는 이제는 다 흘러간 옛 이야기가 되었고 세상에 진 빚도 없단다. 가끔은 그 남자 때문에 콱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다시금 그의 아내이고 싶단다. 이거 남의 가정사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왠지 우리네 이웃이나 집안에서 드물쟎게 들었던 이야기 같기도 해서 늘어놓았다.
헛신발
신달자
여자 혼자 사는 한옥 섬돌 위에
남자 신발 하나 투박하게 놓여 있다
혼자 사는 게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남자 운동화에서 구두에서
좀 무섭게 보이려고 오늘은 큰 군용 신발 하나
동네에서 얻어
섬돌 중간에 놓아두었다
몸은 없고 구두만 있는 그는 누구인가
형체없는 괴귀(怪鬼)
다른 사람들은 의심도 없고 공포도 없는데
아침 문 열다가 내가 더 놀라
누구지?
더 오싹 외로움이 밀려오는
헛신발 하나
조창환(1945 ~)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3년 《현대시학》지를 통해 문단에 나왔으며 아주대 교수를 지냈다. 그의 시는 생명에 대한 외경과 연대의식을 보여주며 이러한 인식은 작은 ‘홑 나’를 확장하여 ‘큰 나’로 거듭나는 불교적 세계관과 통한다. 그리고 기억 속에 남는 잔상의 미학과 고요와 견딤 속에 이룩된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런 고요
조창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오래 바라본다
이승과 저승 사이
시들지 않는 건들거림
모과 냄새 묻은 적멸
이런 고요는 모란꽃 같다
수련 잎 얼비치는 잠 속에서
나비가 날개를 말리고 있다
동화작가요 시인인 정채봉(丁埰琫 1946 ~ 2001)은 전남 순천 태생이다. 동국대 국문과를 나와 월간 샘터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불교 환경에서 자랐지만 광주민중항쟁이 전두환 독재정권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된 이후 정신적인 방황에 시달리면서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어 그의 작품에는 불교와 천주교의 그림자가 어리게 되었다. 한국의 성인동화 장르를 크게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엄마
정채봉
꽃은 피었다
말없이 지는데
솔바람은 불었다가
간간이 끊어지는데
맨발로 살며시
운주사 산등성이에 누워 계시는
와불님의 팔을 베고
겨드랑이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엄마…
'슬픔의 시인' 이라 불리는 정호승(鄭浩承 1950 ~ )은 경남 하동 태생인데 국민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이사하여 자랐다. 계성중 1학년 때 은행에 다니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도시 변두리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대륜고에 다닐 때 전국고교문예 현상모집에서 <고교문예의 성찰>이라는 평론으로 당선된 덕분에 문예장학금을 지급하는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1973년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되었고 1982년에는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소설가로도 등단하였다. 그의 시는 민중적 서정성을 특징으로 꼽는데1976년에는 김명인 · 김승희 · 김창완 등과 함께 반시(反詩) 동인을 결성해 쉬운 시 쓰기에 힘썼다. 개인적 서정을 쉽고 간명한 시어와 인상적인 이미지에 담아냈다는 평으로 90년대 이후 가장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받은 시인으로 꼽혔다. 천주교인이다. 그의 몇몇 시는 양희은이나 안치환 등 가수들에 의해 노래로 창작되어 음반으로 출시되었다. 〈부치지 않은 편지〉는 가수 김광석의 유작 앨범에 수록되었고 <이별노래〉는 이동원이 불러 널리 알려졌다.
걸인
정호승
나는 그대의 불전함
지하철 바닥을 기어가는 배고픈 불전함
동전 한 닢 떨어지는 소리가
천년이 걸린다
내가 손을 내밀지 않아도
내 손이 먼저 무량수전 마룻바닥을 기어가듯
천년을 기어가
그대에게 적선의 손을 내미나니
뿌리치지 마시라 부디
무량수전이 어디 부석사에만 있었던가
우리가 흔들리며 타고 가는 지하철
여기가 바로 무량수전 아니던가
나는 그대의 불전함
다 닳은 타이어 조각을 대고
꿈틀꿈틀 무릎도 없이
지하철 바닥을 기어가는 가난한 불전함
동전 한 닢 떨어지는 소리가
또 천년이 걸린다
겨레 고유의 정서를 친근한 가락에 실어 노래한 전통 서정시의 시인 송수권(宋秀權 1940 ~ 2016)은 전남 고흥 출신이다. 순천사범과 서라벌 예대 문창과를 나와 1975년 《문학사상》지에 <산문에 기대어>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의 시 세계를 ‘판소리의 맺고 풀림과 같이 한을 승화시키는 상승의 미학’으로 보기도 한다. 서정시인으로 불리지만 역사와 현실에 관한 관심도 잃지 않아서 지리산 빨치산들을 다룬 연작시집 <빨치산>과 제주 4·3의 아픔을 노래한 서사시집 <신화를 삼킨 섬 흑룡만리>도 펴냈다.
혼자 먹는 밥
송수권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다
숟가락 하나
놋젓가락 둘
그 불빛 속
딸그락거리는 소리
그릇 씻어 엎다 보니
무덤과 밥그릇이 닮아 있다
우리 생에서 몇 번이나 이 빈 그릇
엎었다
뒤집을 수 있을까
창문으로 얼비쳐 드는 저 그믐달
방금 깨진 접시 하나
승려 시인 이청화(靑和1944 ~) 스님은 1962년에 출가하여 순천 선암사와 경주 불국사 강원 등에서 수학하였으며 중앙승가대학 불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5년 동안 종교교화위원으로 재소자 교화에 몸담았고 수원에 있는 ‘행복한 우리절 보현선원’ 원장을 맡았다. 1977년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미소>, 197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채석강 풍경>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자아성찰과 구도 정신이 배어 있는 시편들을 비롯하여 자연 교감과 직관적 사유를 내비치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불심(佛心)
이청화
햇빛도 가을에는
아마 무얼 아는지 몰라
열어 놓은 빈 법당
지나치지 아니하고
청평사 부처님 전에
한참씩 앉았다 가네
최승호(崔勝鎬 1954 ~)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라다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가출하는 바람에 소년가장 역할을 해야만 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가정교사를 했고 동생들을 건사하려고 동기들과는 달리 지방의 교대에 진학했다. 춘천중·고, 강원교대를 졸업하고 강원도 영서 지방의 국민학교 교사가 되어 간간히 시를 썼다. 나중에 숭실대 문창과 교수가 됐다. 춘천교대 재학 중에 친해진 소설가 이외수가 그의 시를 보고는 감탄했고 1977년 <비발디>로 《현대시학》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했다. 고교 선배인 최열을 도와 환경운동에도 참여했다.
정선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시를 쓰기에 부담스러워 사북으로 자원해 갔다. 거기는 모든 것이 흑백으로만 보일 정도로 까만 광산과 광부, 까만 절망이 가득해서 곳곳이 시의 소재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문제교사’로 찍혀 더 깊은 오지인 ‘영곡’으로 발령이 났지만 절망을 견디지 못해 관사를 부수고 뛰쳐나와 상경했다. 영곡에서 썼던 <대설주의보>에 ‘오늘의 작가상’이 주어지고 각광받는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서울살이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힐 무렵 함께 살던 여인이 책들을 쌓아 놓고 스스로 불을 놓아 다비장을 치르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떠돌며 방황하기를 3년, 그를 위로해준 건 풀과 나무와 동물들의 이름이었다.
2009년 화제가 된 ‘시인도 본인 시 문제 다 틀렸다’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교과서나 참고서 등에 많이 수록됐고 <북어>, <대설주의보>, <아마존 수족관> 등이 모의평가에 나왔는데 시인 자신이 제가 지은 시의 출제 문제를 모두 틀려 버렸으니, 대입 위주 교육의 폐해 중 하나로 여겨지는 해프닝이었다.
회전문 속에 떨어진 가방
최승호
회전문 속에서 가방을 놓치고
회전문 밖으로 밀려나와 가방을 본다
이것은 죽음의 한 경험인가
회전문 밖으로 밀려나온 여기가 후생이라면
가방 든 시절이 전생의 이승이었단 말인가
회전문 밖에서 떨어진 가방을 들여다본다
내용물은 별것도 아니지만
나 없으면 육신의 껍질이나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지금 잃는다면 아쉬움도 꽤 따를 것이다
장례식에는
산 자들이 억누르는 슬픔의 총체보다 더 큰
죽은 자의 고요한 슬픔이 뒤따른다
독실한 불자 시인 최동호(1948 ~)는 경기도 수원생이다. 고려대 국문과를 나와 그 과의 교수를 지냈다. 1979년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었고 시집과 시론집이 있다. 막 스무 살을 넘어서려던 무렵 알 수 없는 절망에 빠져 방황하였고 실연으로 심한 자기 상실감에 빠져들었으며 문학의 길 또한 막막하고 아득해 보였다. 카프카나 니체를 읽어도 해결되지 않는 생에 대한 상실감에 휩싸였는데 싸늘한 바람이 부는 1968년 초겨울, 우연히 들렀던 책방에서 《법구경》을 구해 그날 밤이 새도록 읽고는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때 시인의 가슴을 세차게 치고 간 것은 그 경전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어라
피곤한 사람에게 길은 멀어라
바른 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아아 생사의 밤길은 길고 멀어라
그 후 1975년에는 <만해 한용운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는 등 시와 불교가 하나가 되는 구도의 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의 시는 이러한 불교적 바탕 위에 자연에 대한 통찰과 묘사, 자아 찾기 등 동양 정신주의 미학이 짙게 배어 있다.
해골바가지 두드리면 세상이 화창하다
최동호
아침 딱따구리 계곡의 나무를 둥치 큰 나무를 흔드는데
졸면서 마당 쓰는 동자승 바라보고
빙그레 미소 짓는 부처님 살풋한 눈빛
법당의 큰스님 자기 해골 두드리는 소리
산과 계곡으로 퍼져나가
세상의 햇살이 아기 걸음마처럼 화창하다
고형렬(高炯烈 1954 ~)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고향인 전남 해남에서 국민학교를 다녔고 십대 후반에는 방황하여 대구, 제주, 진도, 구례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1974년에 군사분계선이 지나가는 고성군 현내면에서 지방행정공무원 생활을 하며 설악문우회 <갈뫼> 동인활동을 하며 습작을 했고 1979년 《현대문학》지에 <장자(莊子)> 등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0년에 계간 《시평(詩評) SIPYUNG》을 창간하여 2013년까지 일본, 중국, 베트남, 몽골 등과 동남아시아, 러시아, 아랍 등의 340여 명 시인의 작품을 한국에 소개하는 등 아시아 시운동에 앞장섰다. 명지전문대 문창과 겸임교수를 지냈다.
그의 시에는 윤회론적인 사유가 엿보이는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무너진 생명의 세계를 노래하기도 하고 이 생과 다른 생의 구분조차 모호한 경지를 선보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가족적 행복에 대해 일체의 시적 기교 없이 때 묻지 않은 기쁨을 뿜어내기도 하는 등 다양하다.
그윽한 회포
고형렬
십년 동안 아내하고 아이들을 만들어서
같이 둘러앉아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하려고
우리는 애지중지해서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쳤다
그때, 아내를 설득해서 결혼하기를 잘 했지
안 그랬으면 아이들이 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아내하고 이견없이 아이들을 만들어서
십년 동안 눈 귀 코 입을 바로 키워가지고
지금은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있지 않은가!
황지우(1952 ~)는 본명이 황재우인데 전남 해남 출생이다. 광주제일고를 나와 재수하여 1972년에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유신정권에 반대하다 감옥에 갔다 왔고 1980년 봄에는 5·18 민주화운동 가담으로 구속되는 바람에 당시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서울대 대학원에서 제적당했다. 경찰에서 고문 끝에 풀려나서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후에 한신대 문창과 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교수를 역임했다. 1980년 신춘문예에 <연혁>이 입선하였다. 형이 승려이며 동생은 철학자이자 노동 운동가이다.
그는 한국 해체시를 시작한 시인으로 도표나 특수 문자, 그림들을 도입한 혁신적인 시작법으로 유명하다. 후기로 갈수록 연극적인 요소들이 강해지는 편이며 불교적인 색채도 있다. 군부독재 시절의 암울함을 풍자하거나 거스르는 내용들이 많으나 서정시도 나름으로 잘 써서 대중에게 알려졌고 친구 이성복과 더불어 1990년대 젊은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이성복(李晟馥 1952 ~)은 경북 상주생으로 서울중학과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불문과를 나왔다. 1977년 《문학과 지성》지에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계명대 불문과와 문창과 교수를 지냈다. 1980년에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가 나와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80년대에 나온 시집 중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과 함께 한국 현대시의 방향을 결정지은 시집으로 꼽힌다. 과작으로 시집이 많지 않다.
강
이성복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미지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해체시 이야기가 나왔으니 잠깐만 들여다본다면 1930년대의 이상(李箱, 金海卿 1910~1937)이 과격한 모더니즘의 혁신적인 실험시를 발표한 이래로 1980년대에 와서 젊은 시인들에 의해 이른바 해체시의 광풍(?)이 불었다. 황지우, 장정일(蔣正一 1962 ~), 이성복, 그리고 어릴 적 나의 고향 친구인 박남철 등이 주도했다. 한 마디로 시를 쓸 때 기존의 장르, 소재, 표현 매체, 규범, 시적 주체, 이념 등 모든 금기를 무시하여 풀어 버리고 제멋대로 실험적인 시를 쓰는 것이다.
박남철(朴南喆 1953 ~ 2014)은 나와 함께 경북 영일군 흥해국민학교를 같이 다닌 동급생이었는데다 특활 문예반에도 나란히 같이 앉아 글짓기를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나는 시골 중학교에 남고 그는 헤어져 포항 동지중·상고를 갔는데 나중에 보니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갔더라. 그때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는 여러 해 전에 유명을 달리 했다는 소식만 접했다. 괴퍅한 행동에 문단의 말썽꾼이었다는 평가가 있더라만 내 기억 속에는 총명하고 인정스러운 아이였던 그의 명복을 빈다. 그는 <독자놈 길들이기>라는 시에서 보듯 시인과 독자와의 관계마저 해체해 버리고 갔다. 여기 올리기엔 너무 거칠고 야해서 그나마 괜찮은 다른 시를 하나 골랐다. 그는 불교문예작품상도 받았다.
겨울강
박남철
겨울강에 나가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돌 하나를 던져본다
쩡 쩡 쩡 쩡 쩡
강물은
쩡, 쩡, 쩡,
돌을 튀기며, 쩡,
지가 무슨 바닥이나 된다는 듯이
쩡, 쩡, 쩡, 쩡, 쩡,
강물은, 쩡,
언젠가는 녹아 흐를 것들이, 쩡
봄이 오면 녹아 흐를 것들이, 쩡, 쩡
아예 되기도 전에 다 녹아 흘러버릴 것들이
쩡, 쩡, 쩡, 쩡, 쩡,
겨울 강가에 나가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얼어붙은 눈물을 핥으며
수도 없이 돌들을 던져본다
이 추운 계절 다 지나서야 비로소 제
바닥에 닿을 돌들을.
쩡 쩡 쩡 쩡 쩡 쩡 쩡
분노와 원한이 쩡 쩡 울리는 듯하다. 이제 명부의 그대나 우리나 그만 내려놓으시고 훤한 달빛을 받으며 차분히 스님의 시 한 수로 오늘은 마감을 하자. 그리고 고요히 찾아올 누군가의 당신을 맞이하자.
만월
윤지원
행여 이 산중에
당신이
올까 해서
석등에 불 밝히어
어둠을
쓸어내고
막 돋은
보름달 하나
솔가지에 걸어 뒀소
윤지원(1943 ~) 스님은 1980년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되었으며 불교신문사 상임논설위원을 지냈다. 1964년 서울 백담사에 입산하였으며 범어사 불교 강원을 졸업하였고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을 나왔다. 당연히 불교스런 소재를 많이 다루고 있으나 승려로서의 종교적인 눈뜸이라기보다는 시인의 섬세한 감수성이 서정화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오래도록 더 많은 좋은 시를 중생들에게 베풀어 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