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심을 깨치는 글 >
미국에서 꽃피는 대승 불교 - 우리들의 수행 이야기
탐진치, 삼독 貪瞋痴 三毒 Three poisons |
글 | 현안賢安 (XianAn)
불교의 목적은 우리가 삼독 Three poisons을 제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삼독이란 탐 Greed, 진 Anger, 치 Stupidity를 의미합니다. 삼독을 제거하는 순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삼독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불교에서는 계율 Precepts을 공부해서 탐욕을 없앱니다. 예법과 도덕을 이해하면 탐욕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청정을 이해한다면 더는 탐욕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수년 전 참선을 통해 많은 변화를 경험했지만, 좀 더 많이 진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영화 스님의 [불유교경 강설]을 읽게 되었는데, 계율을 받으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생각이 줄어들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오계를 받을 땐 우선 ① 살생하지 말라[不殺生]. ② 도둑질하지 말라[不偸盜]. ③ 거짓말을 하지 말라[不妄語]의 세 가지 계율만 받았습니다. 계율을 받은 후 상황에 따라서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라고 고민하면서 생겼던 많은 생각과 그로 인한 괴로움이 뚝 떨어져 나가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사실대로 말하면 상대방이 불편할 것 같으니 좀 다르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속에서 일어나던 수많은 생각이 날 괴롭혔는데, 불망어 계율을 받은 후 그렇게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깨끗하게 정리되었습니다. 내 마음이 편하고 싶었던 탐심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진瞋 Anger 즉 분노는 선정 Samadhi을 통해 없앨 수 있습니다. 선정이 높아질수록 덜 화나게 됩니다. 이것이 선정의 고유성격입니다. 선정과 분노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명상하면서 좀 더 이해가 생기면, 분노가 삼매에 들어가는 것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사마디 즉 선정은 분노를 줄이는 수행법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명상 수행자라면 극도로 화가 났을 때, 결가부좌로 앉아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보십시오. 마음을 가라앉히고 삼매에 들어갈 수 있는지 도전해보세요.
마지막으로 우치 愚痴 stupidity은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요? 우치는 지혜로 대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있다면 멍청한 자를 어떻게 대할까요? 멍청한 사람을 만나면 그냥 무시가 되던가요? 현명한 사람이 어떻게 멍청한 사람을 무시할 수 있나요?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절에 처음 와서 돕는다면서 물을 낭비합니다. 또는 절에 방문한 사람이 음식을 많이 덜어놓고 먹다가 남겨서 버립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사람한테 가서 절에서 지켜야 할 법도를 알려주나요? 아니면 그냥 무시합니까? 그런 사람을 그냥 무시하는 게 현명한 걸까요? 아니면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게 현명한가요?
저는 어쩌다 한 번씩 모르는 사람한테 이메일이나 문자를 받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출가를 했으니, 제 성불을 돕겠다면서 부처님 말씀을 보내줍니다. 지금 제가 하고 수행하면서 거치고 있는 단계나 마음의 경계를 알지 못하면서, 자신에 대한 소개도 제대로 안 하고 다짜고짜 이런 걸 보내줍니다. 그게 정말 제 수행에 도움이 될까요? 여러분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거나 말을 많이 할 때 속이 시끄럽지 않나요? 얼마나 짜증 나는 일입니까? 누군가를 도우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파악되어야 합니다. 성불은커녕 자기 자신의 혼란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다른 이의 성불을 도와줄 수 있을까요? 본인이 뭘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성급히 돕고자 하면 다른 이의 마음을 더 번뇌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안 그런가요? 게다가 만약 진정한 지혜가 있다면 왜 다른 이를 도와야 합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서 돕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면 혹시 그 밑에 내가 더 잘 안다는 교만은 없을까요? 만일 여러분 마음속에 교만한 마음이 있다면, 거기엔 지혜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지혜가 있다면 현명한 사람과는 어떻게 하나요? 생각해보세요. 현명한 사람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뭘 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지혜가 있다면 현명한 자와 만났을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보통 남들이 “이분이 큰 스님이야”라고 말하면, 더 공경하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사람은 큰 스님과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라면서 으쓱해 하기도 하고, 큰 스님이니 그분께 공양물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현자를 만났을 때와 멍청한 사람을 만났을 때 다르게 대해야 할까요? 진정으로 현명한 자라면 왜 여러분의 친절과 자비가 필요하겠습니까? 멍청한 자에게 그런 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불교에선 우리에게 지혜가 있을 때, 현명한 자와 멍청한 자를 분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전혀 분별하지 않습니다. 더는 그런 구분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멍청하다고 생각하나요? 어떤 이유를 갖고 그런 판단을 내립니까? 마음속으로 현명한 자와 멍청한 자를 분별하고 있다면, 그건 바로 지혜가 부족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현명하다면 바보와 마주쳐도 현명한 자와 마주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어째서 멍청한 자를 만났을 때 뭔가를 해야 합니까? 왜 현명한 자를 만나면 뭔가를 하고 싶을까요?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이 특별 대우를 원할까요? 어떤 이가 지혜를 얻은 큰 스님이라고 말하면 다들 찾아가서, “스님! 아버지가 아픕니다. 도와주세요!”, “명상해서 황홀함을 경험했는데, 이제 안 돼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승진하고 싶어요. 기도해주세요.” 이렇게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지혜가 있다면 이렇게 멍청한 자와 현명한 자를 구별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똑같이 대하십시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거부하지도 말고, 무시하지도 마세요. 어떤 것도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내 지식이 다른 이의 “저렇게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라는 것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옳고, 다른 이가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번뇌로운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지혜가 있다면 다른 이의 오류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에 온 사람이 실수하고 있더라도, 묻지 않았다면,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건 그 사람의 업입니다.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마세요. 논쟁하지 마세요. 다른 이들을 번뇌롭게 하지 마세요.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우선입니다.
법당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가 있다면 그냥 두십시오. 누군가 법문 시간에 침을 흘리며 코를 골며 자고 있어도 그냥 두세요. 대신 염불하세요. 못마땅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거부하고 미워하는 대신 차라리 염불하세요. 무시하지도 마세요. 받아들이세요. 멍청한 말로 계속 떠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말하도록 두세요. 그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마세요. 그냥 사람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판단하거나 거부하지 마세요.
현안賢安
27살에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 10년도 되지 않아서 꽤 성공적인 기업을 일궜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영화 선사永化禪師(Master YongHua)를 만나 참선을 처음 접한 후 수행 정진해왔으며, 2015년부터는 종교, 인종, 나이 등에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하고 배울 수 있는 ‘공원에서의 참선(Chan Meditation in the Park)’이라는 모임을 영화 선사의 지도하에 캘리포니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이끌었다. 그와 동시에 미국 전역과 캐나다, 콜롬비아, 쿠바 등 전 세계를 다니며 많은 이에게 참선 수행법을 소개해왔다. 영화선사의 한국 방문 시 동행하면서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고 불법을 더 깊게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미국 위산사潙山寺(Wei Mountain Temple)에서 영화 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현재는 스승의 뜻에 따라 한국의 보산사寶山寺(Jeweled Mountain Temple)에서 참선(챤 메디테이션)을 지도하며 수행 정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