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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2022년 1월호] 왜냐고 묻지 말기 / 스텔라 박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2.02.27|조회수17 목록 댓글 0

 

< 스텔라의 마음공부 >

 

 

 

왜냐고 묻지 말기

 

 

글/ 스텔라 박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고린도후서 5:17-21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 우리의 자아 인식을 향
상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무엇’이라는 질문이 훨씬 더 나은 방법이다.”


- 타샤 유리치 박사(Dr. Tasha Eurich)의 <통찰(Insight)>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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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경험을 아날로그 스토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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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달은 내 삶에서 가장 막장 드라마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던 기간이다. 과연 이 표현은 맞는 건가? 진짜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본다. 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삶의 경험들은 순간 순간 변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디지털 입자로서의 경험을 기억할 때 아날로그로 변환을 한다. 그 수없는 점 형태의 경험들을 효과적으로 기억하기 위해 이야기, 즉 내러티브를 창조하는 것이다.

부모님이 이혼했다.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이렇게 하나 하나 따로따로 디지털 정보였던 것을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의존적 성격의 어머니 사이에서 시작부터 불행하게 태어난 나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던 편모 슬하에서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컸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나의 집안 사정을 털어놓은 친구에 의해 왕따를 당했고 그 아픔은 지금까지도 내게 큰 상처로 남아 있다. 그래서 난 아직도 사람을 믿지 못한다.” 뭐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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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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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나는 친구를 사귀면 친구 집이나 우리 집에서 밤새도록 얘기를 하며 자신이 살아온 일대기를 털어놓는 시간을 갖거나, 그게 아니라면 여행을 떠나 자동차를 타고 오가는 시간, 호텔 방에서 밤늦게까지, 때로는 밤을 꼴딱 새면서 개인의 역사를 털어놓아야 비로소 가까운 사이라 여겼던 적이 있었다. 그냥 친구에서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 또는 편견, 고정관념이 바뀐 것은 안거에 대한 경험과 기억 때문이다. 일주일 이상 묵언 안거(Silent Retreat)를 하고 난 후에 참가자들 사이에서 느끼는 합일감(Oneness)은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묵언 안거에 참가하면 들어가는 순간부터 전화기, 태블릿 등 현대인들의 시간을 조금도 고요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기부터 반납한다. 그리고 애초에 일면식도 없는 안거 참가자들끼리지만 눈인사도 나누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주문받는다.) 눈빛을 나누며 인사하는 것 역시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들과 어떤 형태로든 소통을 할 때, 내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여행은 방해받을 수밖에 없기에,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의 안거 수칙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리트릿 참가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가장 깊은 차원에서 소통한다. 침묵 가운데 앉아 있다는 것은 내게 덧씌워진 이야기를 모두 내려놓고, 진정으로 현존(Presence)한다는 이야기다.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는 불가능 투성이의 내가 아니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기에 모든 것이 가능한 무한가능성으로 만난다는 얘기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상태로 만난다는 말이다. 그렇게 진정한 나로 존재할 때, 나는 우리가 되고, 우리는 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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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나의 내러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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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당신의 내러티브, 즉 당신이 지어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무상하게 펼쳐지는, 아니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점점의 디지털 사건들을 당신의 역사로, 당신의 아픔으로, 당신의 상처로 만든 것은 바로 당신이다.

그래서 당신이 내게 당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마음을 다해 듣지만 그 이야기로 당신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 내러티브로 당신을 규정하지 않는다. 단지 그때 그때 처음 접하는 당신을 만날 뿐이다. 

실제 나는 한 친구와 삶의 세세한 부분들까지 모두 나눴던 적이 있다. 정말 드러내기 쉽지 않은 수치스러운 기억들, 창피한 사건들을 남김없이 끄집어 내놓았었다. 그녀도 그랬다. 우리는 마음 다해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공감을 표현했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녀의 이야기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 물론 어렴풋한 기억은 있다. 그렇다고 내가 일부러 잊으려 했던 건 아니다. 그녀에게 이런 얘기를 털어놓았더니 그녀 역시 내 이야기의 대부분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인류 공통의 아픔, 상처를 도닥이며 느꼈던 따뜻함, 위로받음, 평화로움, 합일감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자주 만나지 못해도 그녀와 나는 서로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합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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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Why)냐고 묻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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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로 생각이 많아졌다. 무슨 일인가가 중요한 건 결코 아니니, 구체적인 설명은 않겠다.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여러 사건들이 이렇게 줄줄이 일어난 건 도대체 왜이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내게 무슨 가르침을, 교훈을 주기 위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나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그렇게 머리 터지게 고민하다가 뻥 뚫리는 경험을 했다. “왜(Why?)” 라고 스스로에게 물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내가 만들어낸 내러티브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 순간 “무엇(What?)” 이냐고 물었다. 즉, “왜 이런 일이 내 삶에서 줄줄이 일어나는 거야?” 가 아니라 “지금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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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What)이냐고 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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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Why?)”를 “무엇(What?)”으로 바꾸었을 뿐인데, 나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후회하지 않게 되었고,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이다. 그저 무상한 현재의 경험이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다. 그러니 그 무상한 현재의 경험이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게 허용하면 된다. 

혹자는 그렇게 얘기할 것이다. “연기법을 믿는다면 현재 일어난 일에는 분명 원인이 있을 터이니 무엇(What)이 아니라, 왜(Why) 라고 물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당신이 팔정도의 첫번째인 정견을 구족한 사람이고,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똑같이 행인 3 정도로, 떨어뜨려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래도 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아직 우리의 견해는 바르지 못하고, 나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지나치게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도대체 내가 왜 그랬다지?” 라고 계속해서 생각했다, 치자. 이는 애초에 “~~은 ~~해야 한다.”는 상(相)이 있다는 얘기다. 즉 한계(Limitation) 속에, 상(相) 속에, 현존을 가두는 행위인 것이다. 무소부재하고 영원불변하는, 늘 항상한 현존을 작은 박스 안에 가두고, 재단하고서 그 이유를 묻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삶의 경험에 대해 무엇(What)이라고 묻는 것은 상(相)을 여의는 것이고, 점점의 디지털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것이고, 내 내러티브, 즉 내 어리석음을 포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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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내러티브라 소중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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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부분은 나의 내러티브를 내러티브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려놓지도 못한다. 나 또한 그랬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무엇(What)”인지를 묻는 과정을 통해 “그것은 나의 내러티브였을 뿐”임을 깨달을 수 있다.

내러티브는 내러티브일 뿐이다. 그것은 참이 아니다. 이제껏 내 것이라 소중해서 붙들고 있었지만 그 실체를 알게 되면 버릴 수 있다. 밝히 보지 못해서 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매순간 탄력회복성으로 최초의 나, 본래의 나, 무한가능성으로서의 나, 인식의 바탕으로서의 나, 무소부재한 나, 공성으로서의 나로 되돌아간다. 거기에 내러티브는 발을 붙이지 못한다. 굳이 내려놓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 그냥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사라지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사람들에게 이 깨달음을 편지로 썼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란 무한가능성으로서의 나, 진정한 나이다. 그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매 순간 지나간다. 우리는 매 순간 공이 된다, 새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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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What)이라는 질문으로 성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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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Insight)>이라는 책에서 타샤 유리치 박사는 자아 인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각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자아에 대한 자각은 매우 드문 특성이다. 나는 연구 대상들 가운데 단지 10–15%만이 실제 자아 인식의 기준에 해당된다고 추정한다.”

그녀는 효과적인 자아 성찰의 방법으로 “왜”라고 질문하기 보다 ”무엇”이라고 질문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 “왜” 라는 질문으로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자신의 부족한 점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또한 우리들이 “나는 뭔가 잘못된 사람이야” 라는 식의 내적 편견,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 라는 등의 계속되는 무의식적 피해의식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왜”으로부터 빠져나와 “무엇”으로 질문하는 자기 성찰은 여러모로 우리들을 진정으로 사유하게 만들고,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물을 때 우리들은 스스로를 더욱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덜 내면화하며, 행동할 수 있는 자신감까지 갖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이 되는 상황과 행동은 무엇인지, 이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지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왜”가 아니라 “무엇”이다. “왜”가 아니라 “무엇”이 바로 현존에 대한 질문이다.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
                                                        디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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