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텔라의 마음공부 >
내가 묻고 내가 답하다
(자문자답)
글/ 스텔라 박
“ 포기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먼저 소유해야 한다.
가진 것 없이는 아무 것도 포기할 수 없다.”
- 스캇 M 펙 <아직도 가야할 길> 중
“정체성을 포기하기 전에 자신을 위해
먼저 그것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자아를 잊기 전에 당신의 자아를 발달시켜 놓아야 한다.”
- 스캇 M 펙 <아직도 가야할 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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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헛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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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으로부터 “어디 가서 마음공부 한다는 말 하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러니 ‘스텔라의 마음공부’에 쓴 글 모두 다 뻘이란 얘기다.
아니…. 그렇게 자학하지 말자. 한 존재의 어리석음에 기반한 판단 한 마디를 퉁쳐서 인류 모두가 나, (아니 나도 아니다. 태어나고 죽는, 경험하는 어리석음 덩어리)에게 한 평가인 양, 그러지 말자.
그 내용 또한 ‘어디 가서 마음공부 한다는 말 하지 말라.” 였지, 내가 썼던 글이 모두 가짜라고까지는 하지 않았다. 확대해석이다. 지난 세월 동안 충분히 그렇게 오지랖 넓게, 남들 마음에 들고자 애쓰며 살았었다. 이제 정말 입 댓발 나온 사춘기 중학교 2학년 같은 생각과 행동은 그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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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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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나 마하리쉬는 <난 야르>에서 “우리는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 육체는 결국 사라져가므로 나는 육체도 아니다. 두뇌 또한 썩어 없어질 것이므로 정신 또한 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인격도 감정도 아니다. 죽음이 그것들을 사라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실한 나는 누구인가?” 라며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물러섬 없는 탐구야말로 삶과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마하리쉬는 설한다. 또한 그는 집착을 떠나는 길이 바로 신과 모든 생명에 대한 헌신이라고 가르친다.
때때로 현재 내 마음을 글로 적으면서,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놀이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유익함이 있다.
“형성된 나는 어지간히 남들의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 하는 형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딸을 사랑하려 나름 노력하셨지만….”
이렇게 썼다가 ‘이게 진실이야?’ 라는 의문이 든다. 아, 맞다. 이건 사실이 아니라 내가 지어낸 이야기, 내 내러티브이다.
“내 부모님은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셨으니 그게 사랑이다. 무조건 머리 박고 절하고 순종하고 효도해야 한다.”
라고 썼다가 다시 갈등한다. 이게 진실이다. 아니 진실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하지만 그 진실이 너에게도 진실로 느껴졌었니?”
나는 또다시 자문한다.
“때로…아니, 많은 순간, 난 내 부모님들이 어린 시절, 나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자체를 받아들여준다고 느끼지를 못했어. 그건 온전한 사랑이 아니었다고 느꼈어…”
내 안의 나는 또 중2 여학생이 되려 한다. 참 오랜 마음의 습이다. 하지만 알아차리고 가슴을 도닥인다.
‘아… 그래서… 그렇게 나는 늘 더 큰 사랑을 바랬던 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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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결핍이 나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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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에 대한 결핍감은 자라면서 나로 하여금 더 큰 사랑을 소망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소망하면 얻게 된다. 이 말은 진실인가? 음… 결국엔 그렇다.
하지만 처음부터 소망만 하면 얻게 되는 건 아니다. 소망한다는 것은 지금 내게 그것이 없음을 우주에 선언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결국 내 명령대로 되는 무의식은 내 소망의 반대되는 상황을 내게 선물로 가져온다.
이런 상황이 펼쳐질 때에는 무척 고통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이로 인해 결국 고통의 끝까지 가는 경험을 하게 되니, 이 또한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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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형성한 것은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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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없는 것을 잃을 수 없다. 우리가 얻는 것은 잃기 위해서이다.
내 인생 도서 가운데 한 권인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스캇 M 펙은 “ 포기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먼저 소유해야 한다. 가진 것 없이는 아무 것도 포기할 수 없다. 정체성을 포기하기 전에 자신을 위해 먼저 그것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자아를 잊기 전에 당신의 자아를 발달시켜 놓아야 한다.” 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밑줄 치고 하이라이트를 하며 나는 무릎을 내려쳤다.
공이요, 무한가능성인 우리들은 철 들면서 조건화 되어 ‘나(Ego)’라는 것을 단단하게 만들어간다. ‘무엇이 나를 좋아하고 싫어하게 만드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우리들을 단단한 껍질 속에 파묻는다. 이 질문은 출세간식으로 바꾸자면 “경험자로서의 나는 삶의 어느 부분에서 아직 탐진치를 일으키는가?”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이야말로 형성된 나의 경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부모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었다는 믿음을 붙들고 있다 보니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무척 커졌다.
그렇게 큰 인정 욕구로 본디 없는 나를 단단히 형성했다가 나를 잃어버리면…. 아니 본래 없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 사마디이다. 적멸, 공, 무한가능성, 우주심… 모든 것이자 아무 것도 아닌… 단 한 번일지라도 적멸의 체험은 유효하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현존하며 아무 것도 원하지 않을 때, 본래 그랬듯 적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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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렸다고 할 만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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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본래의 진면목으로 존재하며 깨닫는다. 없어진 에고란 없구나, 내가 사라진 줄 알았는데, 사라진 게 없구나. 본래 없었던 것을 있다고 착각했던 것 뿐이로구나.
경험자도 없고, 경험한 내용도 없다. 사랑받지 못했던 ‘나’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로 인해 인정 욕구가 비정상적으로 커진 나 또한 없다. 그러니 더 이상 그 누구에게이던지 증명받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나 스스로에게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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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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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만 한다.”는 당위를 붙잡지 않으면 몸과 마음의 긴장이 모두 사라진다. 이와 함께 가슴은 끝없이 팽창된다. 품지 못할 것이 없을 만큼 커진다. 경험자인 나도 그 안에 있고, 내가 경험하는 세계도 그 안에 있다. 우주가 모두 그 안에 있다.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다. 색이면서 공이요, 공이면서 색이다. 눈에 보이는, 육근으로 느껴져 내 안에 구축한 모든 것의 실상은 공이다.
그러니 내가 행복하겠다고 결정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 이제 비로소 우리들은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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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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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불교와 명상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 지인은 자신이 매 순간 ‘천국’을 구현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밝은 표정을 보면서 나는 그녀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매순간 하나님의 무한가능성으로 탄력회복을 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몸과 연결되어 몸을 가장 편안한 상태로 두는 가운데 적멸의 세계를 구현하듯이.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이 순간 천국을 살고 있는가?” 라고. 이 물음으로 나는 너무 진짜 같은 삶의 경험으로부터 잠시 떨어지며 다시금 내가 지금 천국에 살고 있음을 기억한다.
눈 감고 명상할 때만 천국이라면 진짜 수행 뻘로 한 것… 고백한다. 아직 쉽지 않다. 그래서 알아차림의 모멘텀이 필요하다. 그리고 알아차리며 나는 다시 회복한다. 매순간… 이것이 나의 참회이자 회개요, 신과 역행보살의 은총이다. 이것이 나의 천국이요, 열반이다.
우리는 천국도 지옥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만 있다면. 그러니 다 내게 달렸다. 어떤 우주를 살 것인지…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
디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