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
돈황의 불보살을 만난
서용 교수님
글 / 전현자 (취재기자)
기자: 교수님, 인터뷰 매우 고맙습니다.
화가로서의 돈황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용교수: 화가인 저에게 돈황이 무엇인가라고 정의하기 위해서는 제가 돈황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에 대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1992년 8월에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하자마자 북경으로 유학을 갔는데요. 벽화를 공부하면서 1994년도에 북경의 중앙미술대학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했고, 96년도에 중국 최고의 미술관이라고 하는 북경 중국미술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했어요, 두 번의 전시회가 상당히 반응이 좋았고 중국 미술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줬었어요. 그런데 첫 번째 전시는 치열하게 그리고 비교적 만족스럽게 잘 치뤘는데, 중국미술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고서 그림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 당시에는 설치미술 같은 소위 서방의 현대미술이라고 하는 것들이 유행하고 있었어요. 저도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제 작품에도 그런 흔적들이 많이 보이는 작업을 했었지요. 그런데 전시를 열어놓고 보니까 이게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분명히 동양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이런 것들의 가치가 있을텐데, 그런 것을 외면하고 너무 서방의 것을 맹목적으로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게 아닌가하는 회의가 오더라고요. 잘못된 건 알겠는데 답은 모르겠더라고요. 전시 끝내고 졸업도 했고 귀국하기 전에 착잡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중국 서북쪽의 실크로드, 즉 석굴 사원 답사여행길에 올랐어요. 그때 돈황을 만난 거예요. 사실 돈황을 만난 게 처음은 아니고 두 번째 여행길이었거든요. 처음 갔을 때는 사진으로 볼 때 보다는 좋다는 정도의 감흥밖에 없었는데 두 번째 중국미술관 개인전을 끝내고 돈황을 만났을 때 진정한 가치가 보이고 살아있는 예술을 보았습니다.
돈황 막고굴의 약 500개에 달하는 석굴사원 벽을 빈틈없이 가득 채워서 벽화를 그려놨는데 그 그림을 그렸던 고대의 화공들에 대한 경외감, 존경심, 그리고 또 화가의 자세. 이런 부분들이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내린 결론이 내가 벽화를 공부하기 위해서 중국에 왔는데 돈황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 벽화공부를 했다고 말할 수가 있겠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 길로 돈황에 남은 거죠. 원래 계획은 3개월에서 6개월 정도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남았는데,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1년. 2년 지나고 7.8년을 돈황에서 벽화를 그리면서 돈황 벽화를 연구하며 머물게 된 거죠. 그러다 마침 돈황학 박사과정이 최초로 개설 되어서 내친김에 박사과정에 들어가 돈황학 박사1기로 졸업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돈황이 어떤 의미인가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화가로서는 화가의 자세라든가, 가치관이라든가, 이런 부분의 지향점을 보여주는 스승이었고 인간적인 의미에서는 저의 청춘과 같이한 곳이기 때문에 제2의 고향인 것이며 인생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준 곳입니다.
돈황의 벽화는 비록 불교미술, 종교적인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현대 미술이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함이 있습니다. 돈황 벽화는 천 여 년의 풍상을 지내 오면서 자연이 개입하기 시작했어요. 더러는 변색되고, 더러는 해지고, 더러는 떨어지게 해서 사람이 그린 인공적인 그림을 자연의 의지대로 다시 바꿔놨어요. 자연의 의지로 재창조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감상하는 돈황의 벽화는 자연이 창조한 완벽한 예술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올라온 풀 한포기 보고 ‘이거 부자연스럽네.’ 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자연 그 자체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그것인대로 완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놓은 것들에는 부자연스러움이 있을 수 있어요. 어색함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자연이 만들어놓은 것에는 어색함이 있을 수 없거든요. 돈황 벽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공적인 것을 자연이 개입해서 바꿔놓은 순간에, 인공적인 그림인데도 완벽한 자연의 일부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이 서방의 현대 미술과 견줄수 없는 진정한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고 여기서 공부를 새롭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그날로 돈황에 남은 것입니다.
기자: 교수님께서 7,8년을 있게 되신 것은 ‘불보살님의 부르심이 아닐까!’라고 생각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서용교수: 처음에 제가 돈황을 들어갈 때는 제 의지로 들어갔어요. 시간이 흘러서 7,8년을 있다가 귀국전이 잡혀서 돈황에서 그렸던 모든 그림들을 다 가지고 한국에 나왔어요. 나와서 돌이켜 보니까 ‘아! 이것은 내가 들어간 게 아니었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돈황의 수많은 불보살들이 나를 꼭 집어서 불러들인 것이고, 귀국해서 외부에 돈황과 실크로드 관련 특강을 많이 다녔는데, 그 때 느낀 것이 ‘너 와서 이거 공부하고 돈황을 한국에 알리라는 계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왜냐면 그때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돈황이란 존재에 대해서 사실 한국 사람들이 잘 몰랐어요. 특강을 해 보면 실크로드는 많이 아는데 정작 돈황을 아는 분이 많지 않았어요.
그나마 일본 NHK에서 했던 실크로드라는 다큐멘터리를 한국의 KBS에서 방영하면서 실크로드와 돈황에 대해 조금의 정보가 생긴 것이고 후에 제가 귀국하면서 돈황을 테마로 굵직굵직한 전시를 많이 했고 강의를 통해서 돈황의 문화를 알렸고, 또 거기에서 관심을 갖는 분들이 돈황으로 여행도 많이 가셨고. 그래서 한국에서 ‘서용’하면 ‘돈황’, ‘돈황’하면 ‘서용’ 이렇게 인정이 된 것 같습니다.
기자: 교수님께 불보살님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서용교수: 저는 불교가 모태신앙인데, 저희 모든 가족들이 불교예요. 그것도 독실한 신자입니다. 저희 장모님도 하안거 때는 꼭 절에 들어가서 스님들 공양하면서 수행하시고. 저희 집사람도 예불을 매일 드리고, 명상을 하고, 저희 어머니도 독실한 불교 신자입니다. 더불어 제 주위에는 불교 신자들이 상당히 많아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불보살님은 하늘에 계신다거나, 아니면 범천등 신들이 계신 곳에 머무는 존재들이 아니고, 고매하고 종교적인 의미로써만이 아니고 항상 제 주위에 같이 호흡하고 계신 분이라는 생각을 해요. 종교가 일반 중생과 떨어지는 순간에 거기에 괴리가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잘못 판단하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가 버리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보살님께서 높은 곳에서 군림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 중생의 곁에서 항상 같이 호흡하고 계시는 분으로 존재 할 때 불교의 미래가 있는 것이지요. 늘 중생과 함께 하시면서 중생의 버거운 짐을 덜어 내주며,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해주는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아주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예술이란 내면적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교수님의 내면, 즉 깨달음의 세계는 어떤 것이라고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서용교수: ‘예술가가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참 좋은 말이거든요. 그런데 매우 상투적인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내면이라는 단어보다는 교감이라고 말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 작품의 타이틀이 ‘천상언어’인데, 예술가들이 신과 교감을 해서 신이 예술가들에게 어떤 계시를 주는데 그 계시를 예술가가 받아서 그걸 예술로 풀어내는 것이지요. 예술가들이 영감을 받았다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예술가들이 영감을 받아서 작곡을 하고, 영감을 받아서 시를 쓰고, 저는 그 영감이란 말을 쓰는 것이 바로 신의 계시를 받은 것이다 라는 해석을 해요. 그래서 예술가들은 신의 언어를 일반인들에게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리는 그림들은 다양한 영감을 받아서 창작을 하고 제가 그림으로 풀어놓았을 때, 사람들이 그 그림을 보면서 감명을 받는다는 것은 신이 하고자 하는 얘기를 저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달을 하는 것이라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춤도 마찬가지예요. 영감을 받아서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감명을 받는다는 건 간접적으로 신의 얘기가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며, 느끼셔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가 감동을 받았을 때는 신의 언어를 우리가 체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저는 작가로서, 예술가로서 내면의 세계라고 정의하는 것들이 결국에는 신의 얘기를 듣고, 그 신의 얘기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풀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전시회장에 명상실을 함께 마련하셔서 전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의도는 무엇이었는지요?
교수님: 경주 솔거미술관에서 기획한 전시였는데요. 제 작품들의 타이틀이 방금 말씀드렸던 ‘천상언어’인데. 제가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왜 그림의 조명은 위에서 비춰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그림은 그냥 일반적인 현대인이 그린 단순한 그림이 아니고 신의 언어를 전달하는 그림인데 신의 언어를 좀 더 깊게 접근하게 들려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나는 내 그림을 밑에서 조명을 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밑에서 조명을 올려보니까 그림이 위에서 조명을 쏠 때하고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더라고요. 사람을 아주 안정되고 고요하게 만들어줘요.
사실 전시장, 미술장을 다니면서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긴 하지만 육체적으로는 아주 피곤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 전시장으로 들어왔을 때는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가운데 앉아서 편안한 상태로 조용히 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전시실에 명상 공간을 만들었어요. 음악도 명상 음악을 들려드리고요. 저는 제가 해석한 신의 얘기를 사람들이 온전하게, 그저 스쳐지나가며 듣는 게 아니고, 온전하게 적극적으로 들어보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전시를 연출한 것입니다.
기자: 매우 열려있는 교수님의 설명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교수께서는 그림의 현대화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림의 현대화란 무엇이고, 왜 중요합니까?
서용교수: 돈황 벽화는 천 여 년 전 그림이에요. 아주 훌륭한 그림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천 여년 전의 정서예요. 그 시대 정서에 맞는 그림을 그렸던 것이고, 21세기 정서는 완전히 다른 얘기거든요.
그런데 화가가 옛날 천 여년 전의 그림을 가지고 현대의 정서를 얘기하면 안되지요. 21세기 사람에게는 21세기의 언어를 가지고 전달을 해야 해요. 왜냐하면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 천상의 언어를 전달하는데 천 년전의 언어로 얘기해서는 이미 정서가 달라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전혀 받아들이질 않아요. 해석을 안 하고자 한단 얘기죠. 21세기의 신이 내게 전달해주는 것은 21세기에 맞는 언어를 가지고 대중에게 전달해야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대화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불교미술이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현재의 한국 불교는 지금 타종교에 비해서 상당히 쇠락했어요. 그도 그럴 게, 우리가 불교 방송을 보면 할머니, 아주머니가 대다수입니다. 젊은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결국엔 고사할 거예요. 그냥 옛날 종교로 끝나버릴 겁니다.
불교가 21세기 정서로 거듭나지를 못해서 그래요. 21세기 정서에 맞는 언어를 만들어서 그 언어를 가지고 21세기 사람들에게 전달을 해야 하는데 불교는 아직도 옛날의 언어를 가지고 현대인에게 전달하다보니까 나이 드신 분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그게 어떤 정서인지 알아도 젊은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러니까 불교가 멀어지는 거예요. 심각합니다.
한국의 동양화가 그래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동양화가 급변하는 현대 정서에 맞도록 자기 발전을 했어야 되는데 한국의 동양화가들은 7,80년대에 창작적인 에너지 없이 편하게 그려서 밥 벌어 먹기 바빴거든요. 주변 분들이 새로 집을 사서 집들이에 초대해서 가보면 저를 골방으로 데리고 가서 그 전 집에 걸려있던 동양화 그림들을 잔뜩 꺼내놔요. 그리곤 묻습니다. “이거 가치가 있는 그림일까요?” 그럴 땐 참 난감합니다. 결국 그 그림들이 골방에 처박힌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도저히 못 걸겠는 겁니다. 왜? 정서가 안 맞아요.
그 동양화 그림들이 불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21세기에 맞는 언어를 불교가 만들어내야 합니다. 저와 코드를 같이 하는 가까이 지내는 스님들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많은 스님들은 그것에서 무감각 하신 듯하여 안타깝지요.
현대의 불교가 제대로 대중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문화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문화가 앞으로 나가줘야 되요. 그래서 문화로 하여금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리고 교리라든가 모든 것들이 따라 와줘야 하거든요.
그런데 한국의 불교미술을 하는 분들이 과연 현대의 발전된 정서를 아우를 수 있느냐하는 부분에는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한국에 불교미술학과가 있지만 불화전문가를 양성하지만 작가를 양성하지는 못한다는 거죠. 즉 최고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불교계의 유력한 스님들께 드린 말씀이 불교 미술의 개념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옛날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가 불화를 그렸지요 그래서 고려 불화가 세계적으로 최고의 미술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저는 대한민국최고의 순수미술계 작가에게 불화를 맡겨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우환’이라는 작가가 있어요. 세계적인 작가인데. 그 분은 화면에 점 몇 개 찍어놔요. 전 그분의 작품이 지극히 선(禪)적이라고 평가하는데 불교 미술이 그런 분들과 콜라보를 이룰 수 있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많은 스님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불교 인구의 고령화도 문제이지만 더욱 큰 문제는 스님들이 현저하게 줄고 있다는 겁니다. 김포에 가면 중앙승가대학이 있어요. 그 곳의 도서관 설계를 제가 했거든요. 거기 로비에 벽화가 큰 게 있습니다. 그것도 제가 그렸습니다. 그런데 거기 스님들과 얘기를 나누면 점점 학인 스님들이 줄어드는 거예요. 예전에는 출가 가능연령이 사십세였는데 지금은 50세, 60세 출가할 수 있어요. 스님이 부족하니까요. 한국에 크고 작은 사찰들이 아주 많잖아요. 그런데 큰 절이야 유지 된다고 하지만 작은 암자나 작은 개인 사찰같은 경우 스님 돌아가시면 그 사찰은 어떻게 됩니까? 조계종에 편입되겠죠. 그럼 편입된 그 많은 재산들 다 어떻게 합니까? 이부분은 재산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찰이 줄어들면서 비워지는 절들을 어찌 할것이냐 하는 것이죠 인적이 끊긴 시골의 폐가처럼 돼서는 않되는 것 아닙니까? 문제가 있다는 거죠. 이미 시작됐는데, 왜 이런 부분에 대해서 한국불교계는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거죠.
기자: 미술화가로서의 현대화가 왜 중요한가를 말씀하시다, 불교미술 내지 불교의 현주소. 스님들과 절의 운영, 신앙까지 현대화가 필요하다고 뼈있는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이렇게 말씀해주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서용교수: 저는 지극히 평범한 화가입니다. 그런데 남들과 다른 건 있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내가 상상하면 현실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게 예술가의 말이거든요. 화가는 처음에는 백지잖아요. 캔버스는 하얀색 백지예요. 화가는 빈 캔버스를 바라보고 완성된 그림을 상상을 합니다. 그리고 그걸 현실화시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신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어요. 창조하는 영역이잖아요. 그래서 일반분들이 예술가를 상당히 높게 생각하고 경외롭게 생각하고 존경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을 교육할 때도 그런 얘기를 강조합니다. 여러분들은 창조를 하는 사람들이다. 신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다. 자부심을 갖고 작업을 해라.
다시 말씀드려서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여쭤보시면, 저는 매우 평범한 사람인데, 한 가지 덜 평범한 부분은 스스로가 뭘 상상을 하든 그걸 현실화시킬 수 있는 에너지는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돈황에 불보살이 저를 불러들인 이유는 그런 에너지때문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많은 화가들이 돈황에 갔는데 아직도 외국인이 거기에 가서 7,8년을 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저는 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입니다. 왜? 그것이 신의 얘기니까. ‘이거 하면 좋을까, 저거 하면 좋을까?’ ‘될까, 말까?’ 고려 안 해요. 나는 ‘하겠다’하면 그냥 해버립니다. 왜? 신이 시키는 거니까. 저는 화가입니다. 그리고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꿈을 꾸는 화가고.
물론 교수라는 직책을 갖고 있지만. 저의 첫째 직업이 화가입니다. 저는 작업복을 입고 작업하면서 화가의 모습으로 있을 때가 스스로가 나다워 보입니다. 제가 작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나를 돈황으로 보내신 불보살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날짜; 2021년 10월 18일
장소; 경복궁 경회루 뜰